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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콱!!! 박은 사람
조회수 | 2,384
작성일 | 07.08.24
하늘 가는 길에 스스로 쉬지 않고 힘쓰는(自强不息) 사람을 일컬어
군자(君子)라, 성인(聖人)이라 했습니다.
깨달은 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성인이란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로운"(히브 4,12) 하느님의 말씀을
눈[目]과 귀[耳]와 입[口]에 콱!!! 박은 사람입니다.

눈으로는 하느님의 말씀을 읽습니다.
성경을 통해서만 읽는 것이 아니라, 대자연 안에 숨어 있는 하느님의 말씀도 봅니다.
시대의 징표를 바라보며 하느님의 메시지를 읽습니다.
사람들의 착한 마음씨를 볼 때,
그리고 크고 작은 삶의 이야기를 들을 때, 하느님의 메시지를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은 깨어난 이입니다.

말씀을 아무리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이가 성인입니다.
말씀으로 늘 포덕(飽德)하려 하는 사람입니다.
육신을 배불리기 위해, 배가 터질 정도로 포식(飽食)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검은 혀를 즐겁게 하기 위해,
먹는 즐거움만 찾아다니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받아 먹기 위해,
살아있는 빨간 혀를 간직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글월(말씀)을 읽을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눈과 귀를 가진 사람입니다.

거룩하다는 뜻을 가진 성(聖)자를 펼쳐보면,
왕(王)의 눈[目]과 귀[耳]와 입[口]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보입니다.
왕의 눈, 귀, 입을 가진 사람이 성인(聖人)입니다.
우리에게 왕은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눈과 귀와 입을 가진 사람이 깨어난 사람입니다.
어질고 의로운(仁義) 눈과 귀와 입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사랑을 베풀고[포덕(布德)] 하느님의 의(義)를 구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씨"(1요한 3,9)를 잘 키운 사람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입니다.
말씀으로 속알을 키워낸 사람입니다.
겨자씨보다 작은 씨알을
예수님처럼 큰 나무로 키워낸 사람입니다.
신덕(信德)과 망덕(望德)과 애덕(愛德)으로 배를 불린 사람입니다.
나서야 할 때와 물러서야 할 때를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하늘 가는 길임(身退天道)을 깨달은 이가 성인(聖人)입니다.
"좁은 문"(루카 13,24)으로 들어간 사람입니다.
땅위에선 꼴찌지만, 하늘에선 첫째가 되는 사람입니다(루카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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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김기성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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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에 이르는 좁은문 : 평범한 삶의 진리를 살자!

우리 민족의 특징을 극단성에서 찾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의 문화를 극단적으로 발달시키는 경향입니다. 중국보다 더 극단적인 주자학, 로마보다 더 로마적인 가톨릭 문화가 그러한 예입니다. 최근 웰빙이란 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현상도 그렇고, 개구리가 좋다하면 개구리가 씨가 마르고, 반신욕이 좋다하면 반신욕과 관련된 용품과 방법이 봇물처럼 터지는 현상도 그렇습니다. 사실 이러한 것들은 일상적인 건강한 삶에 더해질 때 유용한 것으로 독립적으로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닌데도 우리는 그것이 전부인양 한동안 얽매입니다.

이러한 극단을 추구하는 현상은 우리 국민만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일상적인 것보다는 특별하고 이상적인 것을 추구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심과 관련이 있지 않나 여겨집니다.
인기 드라마를 보면 대부분의 내용이 일상적인 가치나 평범한 이야기를 주제로 삼지 않습니다. 탈선이 아니면 꿈속에서나 이루어질 것 같은 이야기들입니다. 그런데도 이러한 드라마들이 「다모 폐인」이나 「파리의 연인 폐인」과 같은 현상을 낳게 되는 것은 이러한 이야기들이 인간의 욕심에 호소하기 때문입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순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더 이상적이고 그럴싸하게 만들고자 합니다. 이단의 특징 중 하나가 예수님보다 더 이상적인 사랑과 진리를 추구하고, 예수님이 가르치지 않은 특별한 비법과 신비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인간의 욕심을 자극하는 것이 바로 이단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기본적이고 평범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극단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심은 특별한 무엇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열쇠인양 거기에 매달림으로써 기본적인 가치를 소홀히 여기게 되고, 특별함만을 쫓다 정말 중요한 일상을 잃어버리는 부작용을 가져옵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오늘 복음은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기본적인 삶의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확인시켜 줍니다.

예수님은 먼저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있는 힘을 다하라』고 이야기 합니다.

여기서 좁은 문은 성서학자들에 의하면 회개를 뜻한다 합니다. 그러기에 이 말씀은 먼저 구원이란 인간의 의향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점을 보여 주면서 그 의향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의향에 맞갖은 의지적인 노력이 있을 때 가능한데 그 노력이 좁은 문, 즉 회개임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삶에 적용되는 기본진리입니다. 요즈음 올림픽이 뉴스의 중심입니다만 모두가 가지고 있는 승리라는 선수들의 바람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피땀이 함께하는 연습과 노력이 있을 때 꿈은 현실이 됩니다.

그리고 『문을 닫아 버린 뒤에는 두르려도 소용이 없다』란 말씀은 구원을 위해 노력할 수 있는 시간은 제한되어 있다는 것, 즉, 때가 있다는 것이지요. 오늘은 세상의 일을 하고 내일은 구원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인간의 탐욕과 어리석음에 대한 경고요, 모든 것을 위해서는 물론 서두를 필요는 없을지 모르지만 내일로 미루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26절에서 28절의 말씀. 같이 식사를 했거나 가르침을 받은 것과 같은 개인적인 친분이나, 또는 아브라함과의 육적인 관계 등 그러한 자격은 구원에 있어서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7절의 악을 일삼는 자들(불의를 행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는 정의의 실천 여부가 심판의 관건임을 보여줍니다. 물론 이 말씀은 당시 예수님을 반대하던 유다인들을 향한 말씀입니다만 예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전이 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된다. 여기서 첫째와 꼴찌는 구체적으로 유다인과 이방인을 상징하는 말씀으로, 유다인들에게 지금 너희가 하느님의 선택을 받고 있다고 까불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생각해야 할 바는 인생에 있어서는 지금의 상태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불행이 행복으로, 행복이 불행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 인생이요, 구원도 마찬가지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지금 여기에 안주할 수만은 없고, 내일의 나를 위해 오늘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자기완성(구원)을 위한 회개의 삶이 바로 오늘의 삶이요, 그러한 삶이 첫째가 첫째로 남아 있고, 꼴찌도 첫째가 되는 길입니다.

『구원의 길에 왕도와 특별한 비법은 없다』 『평범한 삶의 진리를 살라!』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원주교구 홍금표 신부
  |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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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많은 불안함을 갖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 불안함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죽음 이후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갖는 불안함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 것입니다.

'과연 내가 올바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나는 신앙인이 지켜야 할 많은 것들을 지키고 살아가니까 내가 죽은 후에 하느님은 나를 모른 체 하시지는 않겠지?' '비록 내가 약간의 죄를 짓는다 해도 그보다 더 많은 선행을 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니, 이 정도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오늘 복음을 보면 바로 이런 의혹과 불안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에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불안한 마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 구원받을 사람은 얼마 안 되겠지요?"

한 편으로는 자기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일들을 도와주니까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자기들만은 구원받을 수 있겠지 하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의 이런 자부심을 가차 없이 깨트리십니다. 구원의 문은 좁으니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시고, 문을 닫은 후에는 아무리 문을 두드리고 사정해도 열어주지 않을 것이란 말씀을 하신 후에는, 사방에서 많은 사람이 몰려와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사람들이에, 자기들만이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고, 율법서에 적힌 대로만 행동하면 틀림없이 구원받을 것이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기다리던 메시아가 나타나지 않아 항상 불안에 떨며 생활하였습니다. 제자들 역시 예수님이 구세주이시라는 것을 확신하지 못했을 때였고, 예수님을 따라다니기는 하지만 어딘가 불안 했던가 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구원에 대한 확답을 받고자 예수님께 질문을 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구원에 대한 약속을 하시지는 않고 구원에 이르는 문을 좁은 문으로 설명하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면 많은 유혹과 고통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좁은 문을 향하여 가려 해도 갈등과 고통이 따르니 아무렇게나 하고 싶은 대로 사는 넓은 문이 우리를 유혹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힘들다 하여 내가 살고 싶은 대로 넓은 문을 통과해서 살다가 내가 가고 싶다고 해서 좁은 문을 쉽게 통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한 발짝 한 발짝 그리스도가 제시한 사랑의 길을 걸어가야 좁은 문을 통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럽다 해도 말입니다. 또한 그 좁은 문은 선택된 사람들만이 통과 할 수 있는 문이 아닙니다. 그 어느 누구라도 노력만 한다면 통과할 수 있는 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이스라엘 사람들같이 우리가 세례를 받았으니 선택받은 사람들이라는 자부심만을 갖고 있다든지, 약간의 선행과 의무를 지닌 신앙생활로 만족하여 머물러 있다면 구원의 좁은 문은 영원히 통과할 수 없는 문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은 만족함이 없이, 그리고 멈춤이 없이 넓은 문으로 가고 싶은 유혹을 매 순간 이겨내는 싸움입니다. 그 어떤 고통이라도 견디면서 말입니다.

원주교구 김기성 신부
  |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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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에 이르는 문은 좁다 / 좁은 문과 넓은 문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루카 13,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4)

그러면 좁은 문의 특징이 뭘까요? 어렵고 힘듭니다. 자신보다 남을 더 생각합니다. 자기를 희생합니다. 의미 있게 삽니다. 구원을 희망합니다. 작은 것에 감사합니다. 탓을 남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참고 인내합니다. 겸손하며 용서할 줄 압니다. 아낌없이 베풀고 모든 영광을 하느님께 돌립니다. 옳은 일을 위해 목숨까지 바칩니다. 우리는 이렇게 사신 분들을 성인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구원에 이르고, 좁은 문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면 넓은 문의 특징은 뭘까요? 쉽고 편합니다. 남을 배려하지 않습니다. 자기만을 위합니다. 돈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합니다. 요행을 바랍니다. 많은 것을 얻고도 만족하지 않습니다. 모든 게 남의 탓이라고 합니다. 쉽게 화를 내고 분노합니다. 교만하고 칭찬 받기를 좋아합니다. 끊임없이 모으고 모든 영광을 자기에게 돌립니다. 우리는 이렇게 사는 사람들을 속인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멸망에 이르고, 넓은 문으로 들어갑니다.

현대인에게는 세 가지 고질병이 있습니다. 첫째는 안일주의요, 둘째는 상대주의요, 셋째는 실리주의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편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편한 것을 충족시키는 것이 물질문명입니다. 요즘은 물질이 풍부합니다. 그리고 돈만 있으면 뭐든지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편리한 것에 길들여지면 힘들고 어려운 일을 기피하고 점점 더 안일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다음은 상대주의입니다. 요즘은 절대가치가 없습니다. 내가 사는 방식, 내 생각, 내 감정, 내 기분만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상대방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이런 상대주의가 판을 치니까,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합니다. 그래서 뭐가 옳고 그른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피땀 흘려 애쓸 필요도 없고, 목숨 바쳐 의로울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힘들게 살아서 존경받을 이유도 없고, 세상이 썩고 부패해도 나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실리주의입니다. 이것은 결과주의와도 비슷합니다. 방법과 과정은 전혀 문제시하지 않고 오직 결과만을 가지고 평가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많이 벌고, 권력을 차지한 사람이 이 사회에서 승리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고질병이 신앙생활에도 스며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기복신앙이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고난의 길은 거부하고, 오직 자신의 이익과 축복만을 갈구합니다. 이런 신앙이 모든 사람들이 가는 편한 길이요, 넓은 문입니다.

엘리위젤이 쓴 「흑야」를 보면, 죽음의 수용소에서 앙상한 뼈만 남은 무리들이 일터로 끌려갈 때, 사정없이 내리치는 간수들의 채찍을 피해 대열의 가운데에서 걷고자 사투합니다. 일단 대열의 중앙을 확보하면 무서운 채찍은 모면할 수 있습니다. 채찍은 항상 바깥쪽의 친구들만 위협하고, 중앙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무사안일주의적인 평범한 중앙대열에서 이탈하시어 사랑을 실천하시다가 결국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천국의 문은 대열의 중앙에 있기만 하면 저절로 밀려들어갈 수 있는 넓은 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책망을 받아도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좁은 문입니다.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될 날은 반드시 옵니다.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이지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맺을 날은 반드시 옵니다. 오늘의 희생과 봉사는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기쁨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이제 어느 문으로 들어가겠습니까? 넓은 문입니까? 좁은 문입니까? 지옥의 문은 넓고 편하지만 멸망으로 이끕니다. 천국의 문은 좁고 험하지만 생명으로 이끕니다. 집주인이 천국 문을 닫은 후에 문을 두드리지 맙시다.

손용환 신부
  |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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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전 (反轉)

가난하다고 생각되는 그 사람에게서 행복을 보았습니다.
슬퍼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그 사람에게서 잔잔한 미소를 보았습니다.
고통받고 있다고 여겼던 그 사람에게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가기 힘든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되는 그 사람에게서 아주 가벼운 발걸음을 보았습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듯 살아가는 그 사람에게서
하느님을 향한 간절한 기도를 보았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을 주지 않을 것 같았던 그 사람에게서
따스하게 손을 벌려 다른 사람의 손을 붙잡아 주던 그 손을 보았습니다.
자신만의 생각으로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듯한 그 사람에서
하루의 시작에 두 손 모아 감사하는 그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아니라고,
그런 삶의 모습은 아니라고 스스로 판단하던 그 순간에

스스로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깨닫습니다.
어느 누구도 하느님의 구원 방법을 판단하지 말아야 함을,
이것이 옳다고 스스로 결정짓지 말아야 함을
그리고, 그 방법만이 옳다고 이야기하지 말아야 함을
조금이나마 깨닫습니다.
스스로 ‘좁은 문’을 선택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문이라고 생각하며
오늘을 만족하고 자신의 발걸음을 계속 했습니다.
그리고, 나와 같은 길을 가지 않는 사람들은

하느님과 멀리 있다고 생각하며 그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구원이 나의 생각의 틀에 갇혀 있지 않다고
그렇게 이야기하면서도 스스로 생각을 틀을 가둬버렸습니다.
하느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좁은 문’을 선택하라고 이야기하십니다.
내가 생각하여 걷는 길이 아닌,
당신이 보여주신 그 길을 걸으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우리의 판단마저도 모두 하느님께 맡겨 드리고 발걸음을 옮기라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어리석은 길이라 할 수 있지만.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선택하라 이야기하십니다.
우리의 ‘좁은 문’은 당신과 함께 하는 그 길입니다.
당신과 함께하기에 결코 ‘좁지 않은 문’입니다.

전덕중 안드레아 신부
  |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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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자주 경험하는 사실입니다. 군대에서는 논리도 합리도 없습니다. 한번은 동쪽으로 뛰고, 다시서쪽으로 뜁니다. 동쪽으로 뛰다가 서쪽으로 뛰려면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됩니다. 역전은 운동 경기에서만이 아니라, 삶의 현실에서도 자주 일어납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듣던 이스라엘 백성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후손이고,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인데 우리를 제쳐두고 다른 민족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니 얼마나 원통한 일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혹시 그러지 않을까요?하느님이 우리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인데, 우리를 제쳐두고 비그리스도인들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차지한다면 기가 막힐 일이 아닐 수 없네요. 더더욱 하느님 때문에 시집가는 일, 장가가는 일을 포기하고 성직자, 수도자가 되었는데, 하느님 나라 잔칫상에 들어갈 수 없다면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특권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며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세례라는 특혜가 우리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답게 살아가는 일, 하느님 자녀답게 살아가는 일이 구원의 길을 열어줍니다. 그래서 ‘답게 살자’는 운동이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선택된 것은 아브라함만이 아니라 이스라엘백성의 구원을 위한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이 선택된 것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민족의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사제, 수도자로 불림을 받은 것은 자신의 구원 때문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들, 교회 공동체의 구원을 위한 것이며, 교회의 구성원으로 선택된 것은 세상의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이를 두고 예수님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좁은 문’을 말씀하십니다. 대학 입학을 준비하는 고등학생들과 취직하기 어려운 젊은이들,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해 본 사람들은 ‘좁은 문’의 뜻을 압니다. 장애와 질병을 가진 자녀를 돌보는 부모님들도 ‘좁은 문’을 잘 압니다. 함께 살고, 함께 구원받는 일이 얼마나 값진 것이며 그것을 위한 희생이 얼마나 ‘좁은 문’인지 선의를 가지고 활동하는 사람들은 압니다.

주님, 오늘은 테이야르 신부님과 함께 기도합니다. 저에게 주신 사람들 하나하나,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다른 사람을 위해 고통을 겪는 사람, 실수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의 진보와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믿고, 진리와 빛을 향해 열정적으로 희생하고 봉사하는 사람들,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인류전체, 이 하루 동안 더욱 작아질 모든 것들, 오늘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들, 특히 첫째가 될 꼴찌와 꼴찌가 될 첫 째들, 이런 사람들을 기억하고 기도합니다. 주님의 자비를 빕니다.

▮ 원주교구장 조규만 바실리오 주교 2016년 8월 21일
  |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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