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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돈 - 최고의 유혹, 멸망에 이르는 넓은 길
조회수 | 2,375
작성일 | 07.08.24
자본주의 사회에서 최고의 가치는 돈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일단 돈부터 벌고 보자는 생각이 팽배합니다. 다른 가치들은 돈 다음 자리를 차지할 뿐입니다. 돈은 종교적 가치나 민주주의의 가치, 한국의 전통적 가치 위에 존재합니다. 자유와 평화, 효(孝)와 예(禮)보다도 돈이 먼저입니다. 돈 때문에 다른 이들의 자유를 침해합니다. 돈이면 평화도 살수 있다고 합니다. 돈 때문에 부모를 버립니다. 부모가 돈이 있을 때라야 자식도 효도한다고 합니다. 심지어 일부 종교 지도자들은 돈에 따라서 구원의 등급도 나눕니다. 예를 들어 100만원을 봉헌하면 100만원만큼의 구원을 얻고, 10만원을 내면 10만원만큼의 구원을 얻는다고 합니다. 종교의 가치인 구원도 돈이 좌우하는 세상입니다. 이만하면 현대 자본주의에서 돈이 얼마나 위대한지 알 수 있습니다. 돈은 곧 구원이요, 자유요, 평화이고, 효도입니다.

돈은 정말 우리 시대에 최고의 가치인가요. 현대를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인가요. 2007년 현재 우리나라에 불고 있는 주식 투자 열풍, 한풀 꺾이긴 했지만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는 부동산 투기 열풍을 보면 많은 사람들은 돈을 최고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 돈 때문에 생겨나는 수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돈 때문에 살인이 일어나고, 가정이 파괴되고, 사회계층간 갈등이 수없이 생겨납니다. 불과 몇 개월 전에 일어난 이랜드, 뉴코아 사태도 사용자의 탐욕(돈)이 불러일으킨 우리사회의 치부입니다.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고 있는 KTX 여승무원 대량해고와 이에 맞서 500일이 넘어서고 있는 장기 시위도 돈이 불러일으킨 문제입니다. 돈 때문에 사람이 사람을 배신하고 매장하고 있습니다. 돈 때문에 인신매매가 일어나고 성이 상품화되고 있습니다.

돈은 결국 동전의 양면입니다. 밝고 좋은 면이 있는 반면에 어둡고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돈이 문제가 아니라 그 돈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사람들의 마음과 시각에 따라서 돈은 우리사회를 밝게도 하고 어둡게도 할 수 있습니다. 부자 되어야겠다는 생각, 혼자서 잘 먹고 잘 살아야겠다는 탐욕의 눈으로 돈을 본다면 돈은 우리에게 구원의 통로가 아니라 파멸에 이르는 지름길인 것입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루카 13장 23절)라는 물음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장 24절)라고 대답하십니다. 탐욕에 눈이 멀어 나만 잘살겠다는 생각에 머문다면 우리가 추구하는 돈은 우리를 구원에 이르는 좁은 문이 아니라 멸망에 이르는 넓은 문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마태 25장 35~36절) 언제 저희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대했습니까? 라고 묻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장 40절) 자신을 위한 사용이 아니라 가장 작은 이들, 보잘 것 없는 이들을 위한 사용이 바로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나눔의 삶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가장 소중하고 중요하다고 해도, 돈이 우리 인생을 바꾸어 준다고 하더라도, 그 돈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사용한다면, 돈을 사용함에 있어서 보잘것없는 이웃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면, 돈은 우리에게 가장 경계해야할 유혹입니다. 우리를 구원에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멸망에로 이끌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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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구 배인호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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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있는 힘을 다하여라

어릴 적 저희 집은 문이 무척 작았습니다. 특히 가게를 통해서 난 안방 문은 너무도 작아서 초등학생이었던 저도 몇 번 머리를 부딪힌 적이 있습니다. 그 작은 문은 사람들이 드나들기에는 조금은 힘이 들었고 그래서 손님이 오시면 일단먼저 "머리 조심하세요"부터 외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본당 신부님이 가정 방문을 오셨을 때(류강하 신부님- 이미 그때에도 머리 숱이 없으셨습니다) 머리를 부딪힌 적이 있습니다. '아이고 이를 어쩌남 신부님 머리숱도 없으셔서 더 아프시겠네'라고 생각했던 기억들도 떠오릅니다. 그래서 저는 저희 집 방문을 볼 때마다 부끄럽게 생각했었습니다. 친구들 집에 가면 양옥집에 근사한 방문들을 볼 수가 있는데 그에 비하면 우리 집 방문은 너무나 초라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그 방문이 사라지고 없지만 그러나 저의 가슴속에는 이층 양옥집의 화려한 대문보다도 더 아름다움이 스며 있습니다. 손수 만들고 그곳을 통해서 가족도 돌보며 가게를 꾸려나가신 아버지의 땀방울과 그리고 그 작은 볼품없는 문 때문에 체면 차릴 필요 없이 누구나 저희 집에 쉽게 올 수 있었던 정겨움들이 남아 있습니다.

가끔은 걸어서 영양 읍내를 다닙니다. 걸어다니면 시간도 걸리고 다리도 아프지만 걸으면서 사람들 얼굴도 보고 사는 모습들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차를 타고 가면 그냥 지나쳐버리기 쉽지만 걸어다니면 이것저것 다 볼 수 있습니다. 채소 파는 아주머니와 얘기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렵게 살림을 꾸리시는 그분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 드릴 수 있는 행복도 맛볼 수 있습니다.

얼마 전 밭이 비탈져서 기계로 갈 수 없어서 아들이 쟁기를 매고 아버지가 뒤에서 쟁기를 잡고 밭을 갈았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휴 정신 나간 사람들 차라리 밭을 갈지 말지' 이렇게 얘기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그 밭가는 부자(父子)의 모습을 상상해보면서 그 누구보다도 아름답게 사는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들은 땀을 흘려가며 밭을 갈면서 그 동안 아버지께서 힘들게 농사 지으며 사신 것에 감사할 것이며 아버지는 아들의 듬직한 등판을 보면서 참으로 든든함을 느끼게 되었을 것입니다. 부자(父子)간에 나눈 이러한 정은 그렇게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분들이 나눈 정은 바로 쉽게 일을 하고 쉽게 살고자하는 마음이 아니라 어렵고 힘들더라도 삶을 가꾸고자하는 노력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쁨은 우리가 편하고 쉬운 것을 찾는 순간 점점 멀어지는지 모릅니다. 자동차가 생겨서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만나는 일이 쉬워 졌을 지는 몰라도 부모님을 진심으로 섬기는 사람들이 줄어가고 있고 세탁기가 생겨서 세제를 넣고 휙 돌려서 빨래를 하면 시간도 벌고 어깨도 덜 아플지 모르지만 때가 뭍은 옷들을 비비며 느꼈던 가족들에 대한 생각들은 이제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편하고 쉽게 사는 만큼 자연이라는 큰 선물들을 우리는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쉽게 농사 지으려고 뿌린 제초제들 덕분에 이제는 시냇가에서 물고기도 찾기가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물고기만 찾기 어려워 진 것만이 아니라 개울가에서 물장난을 치며 함께 어울려 지냈던 그러한 친근한 어울림들도 사라져 버리고 있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편리함과 편안함이 우리에게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게 하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자꾸만 쉽고 편한 것을 찾고 땀을 흘리며 사는 것을 자꾸 피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이러한 유혹들로부터 이겨내야 합니다. 소중하고 귀중한 것이 무엇인지 안다면 끝까지 좁은 문으로 다니는 것을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안동교구 정도영 베드로 신부
  |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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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루카 13,24)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좁은 문에 맞춰 몸을 최대한 작게 만들어 끼워 맞춰야 하겠지요. 내가 작아져야 하고 변화되어야 합니다. 때로는 많은 노력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좁은 문은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 거쳐야할 관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애주애인(愛主愛人: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의 정신을 조화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열려있는 구원의 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나의 잘못된 습관과 신앙관을 애주애인의 정신에 따라 깊이 있게 성찰해 봐야 합니다.

그런데 가끔씩 어떤 사람들은 나의 잘못된 습관과 신앙관으로 문을 만들어 놓고서는 그것을 마치 구원으로 나아가기 위한 좁은 문인 것처럼 착각하며, 그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헛된 노력을 하며 살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고는 그 헛된 노력이 하늘의 보물로 쌓이고 있다고 믿으며 살아갑니다. 이처럼 불행한 일이 또 있겠습니까? 나의 잘못된 믿음으로 인해 나는 구원의 문에서 점점 더 멀어져 가고 있는데, 그것을 구원의 업적으로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으니 말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미사에 참례하면서 몸가짐도 마음가짐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미사를 드리고 있는데, 나 자신은 그것도 모르고 ‘주일을 거룩하게 지켰다.’고 믿으며 살고 있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간다면?

여기서 말하는 몸가짐과 마음가짐은 하느님을 말씀과 성체로 모시면서 갖추어야 할 자세겠지요. 내가 갖출 수 있는 가장 거룩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주님 대전을 찾고, 미사를 드리기 전에 좀 더 일찍 성전에 들어와 그날 복음 말씀은 무엇인지 미리 읽어보고 묵상하며 준비하는 몸과 마음가짐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체를 영하며 예수님의 삶을 기억하고 따르려고 다짐하는 것을 말합니다.

가장 가까운 부모와 가족들에게는 사랑과 존경으로 충실하지 못하면서 정치나 사회, 환경이나 신심단체 등과 관련된 곳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며 ‘이웃을 사랑한다.’라고 믿으며 살고 있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간다면?

이웃사랑의 본질은 부모를 공경하고 온 마음으로 모시며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첫째요, 가정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둘째입니다. 이웃사랑의 시작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가족을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이웃과 사회를 참되게 사랑하고 이끌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데 장애가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자 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단호히 잘라 버리십시오. 반복되는 유혹과 죄, 나태함과 이기심, 교만과 욕심을 끊어 버리십시오. 그러한 결단과 노력이 여러분의 영혼을 거룩하고 겸손하게 하여, 먼 훗날 좁은 문 앞에 다다랐을 때 여러분을 구원의 길로 이끌 것입니다.

남상우 토마스모어 신부
  |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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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여러 고을과 마을을 방문하여 구원의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루카 13,23)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4)라고 말씀하십니다. 좁은 문은 사람들이 들어가기가 쉽지 않은 문입니다. 그래서 모두들 넓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모두들 고생스럽고 힘든 길을 걸어가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걸어 들어가신 길이 곧 좁은 문이라면, 그분을 따르고자 하는 우리 모두는 싫더라도, 힘들더라도 또한 그 문을 택하여 걸어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 문이 곧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의로움으로 향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의로움을 선택하여 가지 않는 이는 모두들 “불의(不義)”와 타협하여 그것을 따라 그리로 들어가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의를 따라 넓은 길로 가는 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루카 13,27)라고 하십니다. 불의를 일삼는 자들은 예수님께서 마련해주시는 참 평화를 알지 못합니다. 참 평화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합니다. 요즈음의 우리 사회를 보면, 꼭 의로움과 불의를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의로움이 나타났습니다. 이는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느님의 의로움은 믿는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로마 3,21-22)라고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길을 제시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게 될 것’(로마 5,1)입니다. 의로운 삶을 사는 이는 예수님께서 마련해 주신 참 평화를 누리게 되고, 참 평화를 누릴 줄 아는 이는 좁은 문을 향하여 거침없이 들어갈 줄 알게 될 것입니다.

사실 불의를 일삼는 자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거짓 평화가 참 평화인줄로만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라고 당부하십니다.

지금 세상에는 불의가 만연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의롭지 못한 것이 의로운 것처럼 보이고, 의로운 것이 마치 불의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잘 부르는 성가 가운데는 하느님을 따르는 우리가 어떤 문을 택해서 살아가야 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 나옵니다. “불의가 세상을 덮쳐도/ 불신이 만연해도 /우리는 주님만을 믿고서 살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들 가는가/ 어둠에 싸인 세상을 천주여 비추소서/ 가난과 주림에 떨면서/ 원망에 지친 자와 괴로워 우는 자를/ 불쌍히 여기소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불행히 사는가/ 어둠에 싸인 세상을/ 천주여 비추소서”(가톨릭성가 28장)

결국 예수님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은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자신의 탐욕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마음으로 갈아입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은 사랑의 마음입니다. 사랑의 특징은 “흘러넘침”입니다. 탐욕은 가두는 것이고, 사랑은 흘러넘칩니다. 즉 모든 사람이 자기 이기심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닮은 마음으로 돌아서서 이 세상이 좀 더 나은 세상, 사람 살맛나는 세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이런 회개가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탐욕은 하느님을 닮은 구석이 없기 때문에 불의이며, 이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그것이 의롭게 보일지라도 그것에 현혹되지 않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사랑이 흘러넘치는 세상, 나눔과 섬김의 삶이 가득한 세상으로 만들라는 가르침이 오늘의 말씀입니다.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루카 13,30)

<안동교구 박윤정 바오로 신부>
  |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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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오늘 복음 말씀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루카 13,23)하고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아마도 이런 얘기가 유다인들 사이에서 많이 돌았던 것 같습니다. 유다 묵시문학에서는 종말에 구원받을 사람이 적을 것이라는 얘기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궁금해서 이런 질문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을 보면 조금 엉뚱한 것 같은 대답을 하십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4)

구원받을 사람의 수효에 대해서 묻는데 예수님은 좁은 문에 대해서 답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은 구원받을 사람의 수효에 대해 관심을 갖지 말고, 좁고 험한 문에 대해 관심을 가지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좁은 문이 있다면 넓고 좋은 문이 있다는 뜻인데 예수님이 뜻하시는 넓은 문이란, 본능의 욕망에 따라 사는 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많은 이들이 그렇게 산다는 뜻이지요. 그냥 본능이 요구하는 대로 사는 것이지요. 이렇게 되면 마치 동물의 세계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동물들이 본능에 따라 살지요. 남이야 어떻게 되든 자신만 잘 먹고 잘살면 된다는 극도의 이기주의가 판을 치겠지요.

그러나 오늘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좁은 문은 본능의 힘을 이기고 이타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말하자면 이제는 욕심 그만부리고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복음 말씀의 핵심은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모든 문은 닫힌 문이 될 것이고, 회개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서 쫓겨나 바깥 어두운 곳에서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마 이런 얘기를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친구가 그 얘기를 듣고 놀리는 투로 “그래, 예수께서 어디서 났으며, 기적은 몇 번을 하셨고, 무슨 말씀을 했는지 나에게 얘기를 해보게”하고 질문을 했습니다. 세례 받은 친구가 황당했지요. 사실 그런 것을 잘 알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세례 받은 친구가 이런 대답을 했다지요. “그래 난 그런 것은 아직 잘 모르네. 하지만 난 이제 술을 끊었고, 아내와 아이들은 내가 퇴근하기를 기다리는 가족이 되었네. 난 요즘 들어 무척 기쁜 삶을 살고 있네. 이 모든 것들이 예수님 때문에 된 것일세”

교형 자매 여러분, 예수님에 대해 잘 몰라도 됩니다. 다만, 내가 예수님 때문에 얼마나 변화된 삶을 살게 되었는지가 중요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내가 세례를 받은 사람으로서 또 내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매 미사 때 마다 받아 모시는 사람으로서 얼마나 내가 예수님 때문에 변화된 사람이 되었는지? 세례 받을 때의 그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고 사람을 섬기면서 살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 보는 오늘이 되셨으면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을 얼마나 닮은 삶을 살았는지를 가지고 우리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아멘.

▮ 안동교구 박윤정 바오로 신부 2016년 8월 21일
  |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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