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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그리스도 신앙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조회수 | 2,577
작성일 | 07.08.24
“많은 사람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있는 힘을 다 하여라.” (루가 13,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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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집주인이 문울 닫아버리면 열어달라고 애원해도 소용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집주인이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것은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을 열어 달라는 사람들은 주인을 안다고 주장합니다. 주인과 함께 먹고 마셨고 자기들의 동네에서 가르치는 것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래도 주인은 그 사람들을 모른다고 말합니다. 주인이 사람을 알아보는 기준은 그 사람이 자기를 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주인은 사람의 삶의 빛깔을 보고 그 사람을 알아봅니다. 보지는 못하였어도 삶의 빛깔이 같은 사람들은 “사방에서 모여들 것”이라고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인류역사가 있으면서 사람들은 신(神)에 대해 줄곧 상상하였습니다. 유능한 인간이 행세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신을 모든 일에 유능한 분, 그래서 전능한 존재라고 상상하였습니다. 높은 사람이 군림하는 것을 보고 신을 높은 분, 곧 지고(至高)한 존재라고 상상하였습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자가 법을 주고 그 법에 따라 심판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신이 법을 주고 법대로 심판하고 벌 줄 것이라 상상하였습니다. 높고 강한 사람에게 사람들이 공물(供物)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를 바치는 것을 보고 신에게도 제물을 봉헌해야 한다고 상상하였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그런 신을 가르치면서 그 그늘에서 신의 이름으로 법을 주기도 하고 제물을 요구하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은 인간 상상이 만들어낸 그런 신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해 새로운 지식을 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이 사랑하고 자비로우신 분이라 그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여 하느님의 질서가 살아 있는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실현되도록 하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2세기 어느 신앙인 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의 실천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습니다. “이웃을 탄압하며 약한 자를 짓밟고 재산을 축적하며, 아랫사람들에게 폭력을 사용하는 행위 등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지도 않고, 하느님을 본받는 행위도 아닙니다. 이웃의 짐을 대신 지는 자, 이웃에게 베푸는 자, 자기가 받은 것을 이웃이 필요로 할 때 기꺼이 내어주는 자, 이런 사람은 그 혜택을 받는 사람 앞에서 하느님의 역할을 하는 것이고, 진실로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입니다”(「디오그네토스에게」,10,6). 그런 본받음이 있는 곳에 하느님의 질서가 실천되는 하느님 나라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시듯이 우리도 이웃에게 베풀어서, 하느님이 사랑하시듯이 우리도 사랑해서, 하느님의 일이 우리의 삶 안에 살아있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 주인이 사람을 알아보는 기준도 바로 이 본받음이 보이는 삶의 빛깔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인류가 상상하는 신을 믿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높고 지엄하신 하느님이 계시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계셔서 그 아들을 통해서 빌면 하느님으로부터 더 많은 은혜를 얻어 낼 수 있다는 신앙이 아닙니다. 각자가 하느님으로부터 재주껏 혜택을 받아내어 자기 한 사람 잘 되겠다는 신앙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의 나라에 매료된 사람입니다. 그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실현되도록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대로 사랑과 자비가 우리의 삶 안에 살아 있게 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는 본받음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무엇을 얻어내는 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재물을 얻고, 지위를 얻고, 건강을 얻는 것이 구원이라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는 실(失)이 아니라 득(得)이 구원으로 보입니다. 오늘 복음은 많은 사람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려 한다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이 실이 아니라 득을 주는 구원을 찾아 나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노력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소수의 사람이 그 의미를 알아듣고 찾을 수 있는 하느님의 나라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좁은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재물과 지위를 잃을 수 있는 것은 아무나 알아듣고 행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많은 사람이 들어가는 넓은 문이 아니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입니다. 사랑과 자비는 자기 스스로를 잃으면서 실천 가능합니다. 소수의 사람이 들어가는 좁은 문입니다.  

우리는 재물과 지위를 하느님과 혼동합니다. 그런 것을 하느님이 주시는 특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잃었을 때 하느님이 거두어가셨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는 좁은 문은 재물과 지위와 혼동되지 않은 하느님에게로 통하는 문입니다. 그런 것과 혼동되지 않는 하느님을 택한 사람들이 들어가는 문입니다. 사랑하고 자비하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문입니다. 이 문은, 우리가 쉽게 탐내는, 재물과 기적으로 통하는 문이 아닙니다. 보잘 것 없는 이, 그러나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 이들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면서 들어가는 문입니다.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신앙인이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웃을 위해 스스로 희생하면서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운동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도 사랑하고 자비를 때때로 실천합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를 배워 실천합니다. 오늘 복음은 그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라 말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교회 제도 안에 몸담는 일도 아니고 기적을 얻어내는 일도 아닙니다. 하느님께 빌어서, 좀 더 잘 살아보겠다는 길도 아닙니다. 사랑과 자비는 자기 스스로를 잃게 합니다. 득이 아니라 실을 갖다 주는 길입니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의미와 보람을 깨닫는, 좁은 문이 열어주는 길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특혜를 받아내는 길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를 위해 자기 스스로를 잃을 줄 아는 사람들의 길입니다. 득을 찾지 않고 실을 두려워하지 않는 좁은 문이 열어주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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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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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있는 힘을 다하여라

오늘 복음 이야기는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구원받을 사람은 얼마나 될 것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그 사람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더 이상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 사람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 내용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는 아마도 '선민사상에 깊숙이 물들어 있는 이스라엘 사람이었으리라'는 짐작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선민사상이란,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많은 민족들 중에서도 특별히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시어 그들의 하느님이 되어 주시기로 계약을 맺어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스라엘은 하느님께로부터 선택을 받은 민족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러한 선민사상을 가지게 된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선민사상의 본 뜻을 왜곡하여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은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뭇 민족들의 모범이 되어라는 뜻이었습니다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스스로를 위대한 민족으로 자처하면서 거만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다른 민족들(이방인들)을 멸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그 사람의 질문도 이처럼 왜곡된 선민사상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 사람들 외에는 아무도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구원받을 사람이 얼마 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을 제기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주장에 대한 답변으로 집주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는데,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왜곡된 선민사상을 지적하시는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에 대해서 먼저 알게 되었고, 좀 더 많이 알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자동적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하나의 "입장권"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으로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가장 좋은 조건을 가진 "첫째"였지만, 이방인들을 무시하고 자만심 빠져버려 결국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자신을 하느님 나라로 인도해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을 알아뵙지 못하고 자신의 손으로 하느님을 십자가에 매닮으로써 꼴찌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 말씀에 비추어 우리 모습을 한 번 살펴 봅시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은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의 가치를 측정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우리 신자들 사이에서 간혹 이런 이야기가 오고 가는 것을 듣습니다. "영세 받은 지 얼마 되었냐?", "영세 받은 지도 얼마 안 된 게 너무 설치는 것이 아니냐?", "너는 교리도 제대로 모르면서 무슨 활동을 한다는 말이냐? 집에 가서 교리 공부나 더 해라"… 만약 이처럼 세례를 누가 더 빨리 받고, 신앙생활을 누가 더 오래 했는가? 하는 점을 들어 신앙의 우열을 가리고자 한다면, 오늘 예수님의 질책을 면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세례를 일찍부터 받아 더욱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다면, 그만큼 예수님을 닮아 있는 자신의 모습을,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가 있는 모습을 말 만으로가 아닌 행동으로도 잘 보여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니만큼 예수님 말씀처럼 "있는 힘을 다하여"야 하겠습니다.

부산교구 이강영 이사야 신부
  |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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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저는 구원받겠습니까?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던진 질문이지만 사실 구원 문제는 모든 인간의 문제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되었다는 사상으로 인해 자기네만 구원받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힘쓰는 사람이면 유다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없이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신다. 즉 구원의 보편성을 가르치신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구원 문제일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께 ‘저는 구원받겠습니까?’라고 질문해야 할 것이다. 주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다면 ‘이미’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구원은 죽어야 판결이 나고 완성되므로 ‘아직’ 구원받은 것은 아니다. 구원 받는 조건은 주님을 믿고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승과 저승은 연결되어 있다. 이승에서 잘 살아야 저승에서도 잘 산다.

어떤 이는 자기 조상이 순교 성인이고 자기 집안이 순교자 가문이라고 자랑한다. 또 어떤 이는 자기 집안에 성직자, 수도자들이 있다고 자랑한다. 그러나 구원은 순교자, 성직자, 수도자의 손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이 잘 살아야 구원을 받는다. 신자 아내를 둔 어떤 비신자가 ‘자기는 하느님의 사위’라고 자랑하였다. 자기 아내가 하느님을 늘 아버지라고 부르니 자기는 저절로 하느님의 사위가 되었단다. 아무리 하느님의 사위라 할지라도 하느님을 믿지 않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면 구원은커녕 장인 되시는 하느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자녀일수록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 이 세상에서 불의를 일삼은 사람에게는 천국 문이 열리지 않는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고 항의해 봐도 소용이 없다. 같은 내용이 담긴 마태 7,21-23을 보면 성령의 은사를 사용하면서도 성령의 열매인 사랑을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다고 하였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므로 사랑하는 사람만 알아보시고 불의를 행하는 사람은 모른다고 배척하신다. 사랑이 있는 곳이 천국이고 행복이다. 사랑하면 이미 이 세상에서 구원 받았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비결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사랑을 실천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주님, 저는 구원 받겠습니까?’

부산교구 최경용 신부
  |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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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힘겹습니다, 신자로서 살아간다는 건!

가정 경제를 꾸려나가기 위해 날마다 분투하면서 주일미사에도 빠지지 않아야 하고, 수입은 정해져 있고 돈 들어갈 일은 많은데 매달 교무금도 바쳐야 하고, 매주 헌금도 해야 하고, 각종 후원금도 내야하고, 신축이나 개축 헌금도 내야하고, 본당에 행사가 있으면 기부금도 내야하지요. 간간이 기원할 일이 있으면 미사 예물도 필요합니다.

아이들의 교육, 취직, 결혼, 온갖 뒷바라지와 집안의 대소사를 챙기기도 버거운데 본당 행사를 위해 밥을 짓거나 행사 준비에 분주해야 하고, 반 소공동체 모임에도 참석해야 하고, 레지오 단원이라면 주회에도 참석해야 하고, 신심단체에 속해 있다면 매달 모임에도 참석해야 하고, 각기 맡은 직분에 최선을 다해도 성과가 미미할 때는 속도 상해야 하지요.

그래도 그럴 수 있는 형편이면 낫습니다. 살면서 떠 안아야 할 고민은 또 왜 그리 많습니까? 모진 것이 목숨이라고 매일 밥을 우겨 넣기는 하지만 병들고 늙어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고, 보장되지 않은 미래는 막막한데 뾰족한 수가 없다고 생각되면 ‘즐겁게 잘 사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마음만 허물어질 일입니다. 남들은 안 그런 것 같은데 왜 나만 힘든 것인지…

내라는 것 내고 하라는 것 하고, 형편이 되는 대로 지킬 것 지켜가면서 기도도 열심히 하고 남에게 해 끼치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마음 다독여가면서 큰 욕심 내지 않고 살려 합니다. 그러면 된 것 아닙니까? ‘예수 믿고 구원받’아야 되는 것 아닙니까? ‘구원받을 사람이 적다니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를 모르신다니요?' ‘맥 풀린 손과 힘 빠진 무릎’으로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을 망연히 보아야 하다니요?

구원 받을 사람들의 숫자에 관심이 많았던 유다인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대꾸도 않으십니다. 그저 ‘불의를 일삼지 말고 때늦은 후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 저자의 말을 빌리면 심지 곧게 ‘바른길을 달려가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면 됩니다. 그리고 구원은 장담할 일이 아니라 희망할 일입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이성균 예로니모 신부
  |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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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좁은 문

예수님을 두고, 사고 치지 않고 반듯하게 잘 살아가는 길을 조목조목 가르쳐 주는 윤리선생이나 주일학교 교사 정도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분의 신원과 활동에 대해 치명적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그분의 질문과 대답은 늘, 하루하루 먹고살기 바빠 하느님을 포함해서 나 아닌 타자에게는 관심을 둘 여지도 없는 우리에게는, 어쩌면 지나치다 느껴질 만큼 근원적이다. 오늘 복음 말씀만 봐도, 그분은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근원적인 물음에 근원적인 답을 들려주신다. 타자에 대한 배려는 없어도 그저 열심히, 죄짓지 않고 제 앞가림만 잘하고 살면 하느님이 축복하신다고 생각하고 싶은 우리의 생각에 근원적으로 도전하신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두 가지 비밀을 알려준다.

첫째, 하늘나라의 문이 ‘좁은 문’이라는 것이다. 현실에 얽매여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현실 너머의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주님이 가르쳐 주는 삶의 길 - 서로 배려하고 약자를 보살피며 가난한 이의 고통에 책임감을 느끼며 동행하는 이 길은, 프란치스코 교황님 표현대로 무한경쟁으로 말미암아 ‘무관심의 세계화’가 이루어진 세상에서(람페두사 난민촌 강론 중) 멀고 아득하고 이해되지 않는다. 마치 ‘장자’에 나오는 ‘대붕’ 이야기에서처럼, 제 이해가 좁음은 알지 못하고 턱없이 큼(혹은 근원적임)을 비웃는 매미와 비둘기에게 대붕의 길은 좁고 험하고 무엇보다 쓸모없을 따름이다.

둘째, “지금은 꼴찌이지만 첫째가 되는 이가 있고, 지금은 첫째이지만 꼴찌가 되는 이가 있다”는 말씀 역시 매미와 비둘기에게는 마치 ‘네모난 원’이란 말처럼 모순되게만 들린다. 예수님 말씀은 삶의 체험 가장 깊은 곳에서 솟는 역설이고, 불편한 진리이다. 그분께서 온통 비유로만 말씀하시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말은 철학적, 신학적, 윤리적 견지에서만 이해되지 않는다. 성당에 열심히 나오면 복 받고 성공한다는 식의 신앙으로는 아득한 이야기일 따름이다. 그렇다고 ‘대붕’처럼 도를 터야만 된다는 것도 아니다. 그저, 성경이 말하는 ‘가난한 사람’의 상태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줄곧 가난한 이들, ‘꼴찌’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과 함께 아파할 줄 아는 일에 대해 그토록 강조하시는 이유를 주목해야 한다. 교회 안에 가난한 형제들이 설 자리가 없는 순간이 교회의 심각한 위기라는 말씀이다. 지금 우리 성당 옆자리를 둘러보자. 우리 본당에 가난한 형제들이 많다면, 그만큼 우리 본당에는 하느님의 축복이 많다는 징표다.

<부산교구 이윤벽 프란치스코 신부>
  |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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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좁은 문을 지나려면…

대학에서 원하는 학생은 다섯 명인데, 스물다섯 명이 지원했습니다.
경쟁률이 어떻게 됩니까? 5:1.
일자리는 하나인데, 지원자는 열 명입니다. 경쟁률 10:1.
허락된 자리는 적은데, 그 자리를 얻고자 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경쟁률은 치솟기 마련입니다. 입학, 취직, 내 집 마련. 이 모든 것을‘좁은 문’이라고 했을 때, 우리는 이를 통과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합니다.

그렇다면 구원이라는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요?

주일 미사 안 빠지고, 묵주기도 열심히 하고, 봉사 한두 가지 하면 가뿐하게 좁은 문을 통과할 수 있겠습니까? 전 세계 가톨릭 신자 11억 중에 구원의 자리는 몇이고, 내가 과연 그 자리의 주인공이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중 어느 누구도 구원을 남과 경쟁해서 얻어야 하는 합격증이나 자격증처럼 생각하지 않습니다.

구원을 나의 고통과 악습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하는 어떤 것으로 생각하면, 이는 당연히 남보다 내가 우선이어야 합니다. 같은 성당에 다니면서 활동하고 기도하지만, 구원이 아픔을 낫게 하고, 죄책감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라면 다른 형제, 자매에게는 대단히 미안하지만, 우선 내가 그 혜택을 누려야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간절하게 청하는 구원은‘~으로부터 벗어남’을 넘어서‘~과 함께 함’입니다. 즉 고통과 악습으로부터 벗어남을 넘어서 하느님과 함께 하는 것이 진정한 구원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이 꼭 나이어야만 할 이유가 하등 없습니다. 하느님은 나만의 하느님일 수 없고, 믿는 이들의 하느님이시고, 심지어는 믿지 않는 이들과도 함께 하시는 하느님이시기에 그렇습니다.

이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다가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하기 위해서는 더 부단히 자신을 살피고 주변을 둘러보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는 말씀에서 힌트를 얻어, ‘자신의 생각과 몸은 낮추고, 이웃에 대한 마음과 사랑은 넓히고.’입니다.

▮ 부산교구 김남수 신부 2016년 8월 21일
  |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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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사랑하는 이들을 훈육하는 하느님

이스라엘 백성은 바빌론 유배생활을 거치며 많은 것을 깨닫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유배가 하느님께서 백성들에게 내리시는 단순한 벌이 아니라 백성을 가르치는 채찍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숭배를 함으로써 당신과의 약속을 깨트리자 하느님께서 유배로 그들을 벌하시는데, 이는 그들을 멸망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다시금 당신의 백성으로 되돌리시기 위한 과정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오늘 2독서에서 봉독한 히브리서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히브 12,6).

이스라엘 백성이 유배를 통해 깨달은 또 다른 사실 한 가지는 유배를 통해 하느님 백성의 범주가 넓혀졌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은 유배를 통해 세상 곳곳에 퍼져 살게 되는데, 이는 하느님이 세상 곳곳에 전해지는 계기가 됩니다. 이스라엘은 유배를 통해 하느님께서 당신 이름을 온 세상에 알림으로써 세상 모든 이들을 당신께로 불러 모으고자 하셨음을 깨닫습니다.

이는 오늘 1독서로 봉독한 제3 이사야서가 잘 알려 주고 있습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에 표징을 세우고, 그들 가운데 살아남은 자들을… 뭇 민족들에게 보내고, 나에 대하여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내 영광을 본 적도 없는 먼 섬들에 보내리니, 그들은 민족들에게 나의 영광을 알리리라”(이사 66,19).

오늘 루카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유다인들의 자리를 온 세상 사람들이 대신 차지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이사야 예언서와 연관 지어보면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거절한 것은 이사야의 예언, 곧 유다인들의 실패와 좌절을 통해 모든 민족이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함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보니 실패와 좌절을 상징하는 유배 사건이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매우 의미 있는 사건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벌로 인해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유배를 통해 하느님의 계획을 더욱 깊이 있게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일까요? 히브리어로 “유배를 끌고 가다”(힉걸라)는 말을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감추어져 있는 것이) 드러나게 만들다”입니다. 유배라는 단어가 계시와 같은 어근을 공유한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삶 안에서 스스로의 잘못이나 타인의 잘못, 세상의 악 등으로 인해 고통스러운 유배생활에 빠지곤 합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은 우리가 빠져 있는 다양한 유배 사건들이 단순한 하느님의 벌이 아니라, 나를 타이르고 훈육하기 위한 하느님의 사랑스러운 손길이기도 하다는 점을 일깨워 줍니다.

물론, 하느님의 사랑스러운 손길을 느껴보자고 억지로 유배상황에 빠지자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누구의 탓으로 빠진 유배이든, 하느님께서 유배를 통해 무엇을 이루고자 하시는지 묵상한다면 하느님의 계획에 대해 평소에 알지 못하던 것들을 더 깊이 배우고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 부산교구 이염철호 신부 2016년 8월 21일
  |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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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7   [대전] 착한 교우들에게 예수님의 측은지심을  [1] 2620
766   [전주] 종말 전의 재난  [2] 55
765   [청주]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1] 62
764   (녹) 연중 제33주일 독서와 복음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1] 2118
763   [수도회]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5] 1494
762   [수원] 그리스도의 몸으로 사는 삶  [2] 2355
761   [서울] 부활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3] 2302
760   [마산] 영세한 미신자(未信者)가 많다.  [1] 2280
759   [대구] 부활의 삶, 지금 여기서 시작되고 있다.  500
758   [인천]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4] 2836
757   [부산] 알 수 없는, 그래도 좋은 하느님 나라  [2] 2584
756   [안동] 부활을 믿는다면 부활을 살아가십시오  [1] 2574
755   [대전]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은 모두 살아있는 것입니다”  [1] 2900
754   [청주] 부활 신앙  [2] 85
753   [광주] 학벌(學閥)과 사두가이파  2577
752   [전주] 부활 에 대한 확신과 희망  60
751   [춘천] 영원히 하나인 하느님 가족  [2] 2399
750   [원주] 부활 이후의 새로운 삶  56
749   [군종] 두 여자  2133
748   [의정부]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64
747   (녹) 연중 제32주일 독서와 복음 (하느님께서는 산 이들의 하느님)  [3] 1933
746   [수도회] 용서와 자비  [2] 2074
745   [전주] 자캐오, 아! 행복한 사람  [1] 1719
744   [인천] 자캐오! 나무에서 (빨리)내려와!  [3] 2166
743   [서울] 회개의 증거는 착한 행실  [3] 1741
742   [안동] 자캐오 이야기  [1] 2315
741   [부산] 세리 자캐오와 예수님의 만남  [2] 12011
740   [수원] “저 사람이 죄인의 집에 들어 가 묵는구나!”  [3] 2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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