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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좁은 문을 통과하는 입장권’
조회수 | 2,547
작성일 | 07.08.26
어떤 신자가 죽어서 연옥에 갔는데 사방을 둘러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 곳에 본당 신부님이 계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뜻밖의 장소에서 신부님을 뵙게 되자 어찌나 반가웠든지 큰소리로 인사를 하였습니다. "아이고 신부님, 저는 신부님께서 계시던 본당의 신자였답니다. 그런데 이런 곳에 신부님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혹시 잘 아는 신자 방문이라고 오셨습니까?" 그러자 신부님이 황급히 신자의 말을 막으며 속삭이는 것이었습니다. "쉿! 조용히 하세요. 옆에 주교님께서 쉬고 계십니다." 이 이야기는 웃자고 만든 것이지만 그 안에 중요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직위보다는 복음적인 삶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요즘 개신교가 국민들로부터 심하게 욕을 얻어먹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개독교, 목사를 먹사라고 거침없이 말합니다. 탈레반 인질 때문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어느 목사님은 개신교의 잘못에 대하여 이렇게 통탄하셨습니다. "교회는 성직자들이 장사하는 집이 아니다. 시장 바닥의 상도덕에도 미치지 못하는 신도 쟁탈전, 치부의 수단으로 전락한 십일조의 강요, 그것도 모자라 헌금자 명단까지 주보에 올리는 파렴치한 행위가 공공연히 벌어진다. 또한 한국교회는 죄인을 양산하는 위선과 기만의 장소이다. 교회는 신도들에게 죄의식만을 심어주고 있다. 그 원죄론은 결국 교인들의 돈을 뜯어내는 목회자의 협박 무기로 전락했다. 개인 기업을 상속시키듯 교회의 목회직을 자기의 왕국처럼 혈통으로 세습시키는 자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라 사탄의 자식이라 지탄받아 마땅하다." 고 하셨습니다. 이는 분명 복음적인 삶이 아닙니다. 이처럼 복음적인 삶을 살지 않을 때 오늘 복음의 예수님 진노의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루카 13,27).

우리 신앙의 목적은 구원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처럼 구원을 위해 통과해야 할 문은 좁은 문입니다. 복음적인 삶이 바로 좁은 문을 들어가는 요건입니다. 단지 주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아는 것은 쉽지만, 실천은 어렵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결심을 접거나 다른 곳에서 핑계거리를 찾습니다. 복음의 실천! 그것만이 좁은 문을 통과하는 입장권입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대전교구 방윤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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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루카 13,24)

신앙인들은 언젠가 다가올 하느님의 나라를 기다리며 열심히 기도한다.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자비의 근원이시며 저버림이 없으시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주실 구원의 은총과 영원한 생명을 바라나이다.”(망덕송) 연중 제21주일의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구원의 근본 문제를 가르쳐 준다.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또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가를 일깨워 주는 것이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루카 13,24) 라고가르치신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수가 적다는 가르침이 아니라, 단지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을 많이 기울여야 한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이어서 사람들이‘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에서 가르치셨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간청해도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구원의 문에 들어가는 것은 어떤 외적인 특권이나 지위와 관계 등이 아니라 오로지 참다운 회개의 실천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그 의미는 성전에서 기도하는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에서처럼(루카 18,9-14 참조) 그 순서가 바뀔 수 있다고 하는 다음 구절에서도 잘 드러난다.“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루카 13,30)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자기들만의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의 보편성에 관한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 “나는 모든 민족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을 모으러 오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보리라.”(이사66,18) 이사야 예언자는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은 주님의 말씀도 전한다. “나는 그들 가운데서 더러는 사제로, 더러는 레위인으로 삼으리라.”(이사 66,21)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히브 12,6) 라고 가르치며 모든 훈육이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 준다고 일깨워 준다.

우리는 흔히 구원의 문제를 먼 훗날의 일로 미루거나 바쁜 일상생활 안에서 잊고 살아간다. 우리는 오늘 이러한 성경 말씀들을 되새기며 구원의“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하느님께 더욱 열심히 기도하며 노력해야 하겠다.

조규식 베드로 신부
  |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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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자신의 죽음 후에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을 늘 지니고 사는 것이 우리 인간들이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구원받을 사람은 얼마 안되겠지요? 하고 구원될 사람들의 숫자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것은 그 당시 유다인 사회 안에서 주요한 관심사였다. 이 질문에 예수님은 직접적인 대답을 피하시고 심판의 기준과 구원의 가능성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인생의문이 닫히고 혹여 그 문틈을 통해 인간적인 관계를 가지고 호소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실제 예수님과 함께 식사한 것이 아니라 그저 예수님 앞에서 먹었을 뿐이고, 예수님이 그의 동네에서 가르쳤으나 예수님의 가르침에 응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다인들은 누구보다도 많은 가르침을 듣고 자란다. 늘 예수님 곁에 계신 제자들만큼이나 가르침을 받으려 쫓아다녔을 것이다. 어쩌면 오늘날 신자들도 누구보다도 많은 가르침을 받는다. 더욱이 여러 방송에서 명사 강연을 수시로 접하고 들으려고 찾아다닌다. 성직자, 수도자들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예수님과 스치는 인연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와 예수님은 모르지 않는 사이가 되지만 아는 사이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과 아는 관계가 된다는 것은 진지하게 생각하고 결단을 통해 세례성사를 받았으며, 이 세상의 수많은 문을 마다하고 비좁은 성당 문으로 들어왔고,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 분의 가르침에 따라 실천하시는 수난과 고통을 통해서 자신의 구원의 길을 함께 들어설 각오를 했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보다 좁은 문과 길을 잘 알고 있으며 어떻게 그 문에 들어가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시해 주신 좁은 문을 통해서 우리 삶 안에서 벌어지는 여러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으며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알고자 하는 것이다. 고통과 시련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땀 흘려 수고하지 않고 시련을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의 종말은, 가장 사랑하는 내 가족이나 친척들에게 많은 고통을 안겨 주며 이기적인 삶으로 많은 폐를 끼치면서 살아가고 있음을 안다. 한 사람을 평가하기위해서는 그 사람의 삶의 시작이 아니라 종말을 봐야하는 것이다.

오늘날 이 세상 사람들은 웰빙이라는 모습에 전력투구를 한다. 웰 다잉은 바로 오늘의 삶을 웰빙하게 만든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런 삶이야말로 주님! 주님! 문 좀 열어 주세요!!! 하고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 대전교구 이봉효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8월 21일
  |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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