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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예수님을 따라갈 때 내려놓아야 할 것들
조회수 | 2,712
작성일 | 07.09.07
누군가를 처음 만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처음 접하는 세계에 들어갈 때는 자신이 과거에 지녔던 것을 모두 내려놓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옛날 방식으로 행동하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부가 결혼에서 자주 다투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자신이 친정 가정에서 배운 태도나 규칙들을 상대방에게 강요하거나 주입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방해가 되는 옛것들은 죽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만 올바로 만나 따라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루카 14,25-33)은 예수님을 따라갈 때 우리의 태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미워하다’라는 표현은 ‘덜 사랑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추종할 때는 예수님을 가장 앞자리에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들에게 소중한 것을 내려놓을 때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 인생의 앞자리에 모실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부르셨을 때 그들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또 제베대오의 아들 야보고와 그의 동생 요한을 부르셨을 때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와 삯꾼들을 놔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마르 1,16-20). 게다가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레위라는 세관원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고 하자 그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루카 5,27-28).

그러나 내려놓지 못해서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가 자주 있으며 마음을 힘들게 만듭니다. 특히 지나치게 집착하게 되면 눈에 보이지도 않고 귀에 들리지도 않습니다. 다른 것은 보이지 않고 마음이 가는 것만 보이고, 마음이 가는 쪽의 소리만 듣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됩니다. 제대로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마음에 다른 것이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에 가득 찬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돈, 명예, 사회적 지위, 학력, 더 나아가 교만함, 질투심, 욕심 등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따라가는 데 있어 자신에게 방해나 걸림돌이 되는 것은 모두 걷어 내어 홀가분하게 예수님을 따라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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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순 토마스 데 아퀴노 수사 신부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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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 말씀은 익숙하지만 미워하라는 오늘 복음은 낯설기만 합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의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
 
도대체 이 말씀의 의도가 무엇일까요?
 
유다인에게 있어서 '미워한다'는 말은 우리말의 의미와는 달리 일부러 둘째 자리에 두어서 소홀하게 생각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은 부모나 형제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도 둘째 자리에 놓고 첫째 자리에는 하느님을 놓으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만을 따르겠다고 고백하며 세례를 받았지만 여전히 예수님과 세상 사이에서 갈등하는 신자들을 많이 봅니다. 세례 받은 사람들의 첫째 자리에는 자식이나 재물, 때로는 관심사인 음악이나 미술이 놓여 있어도 안 되며 심지어 자기 목숨보다도 오직 예수님만이 중심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백 살이 되던 해에 하느님 은총으로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들을 얻었으나 어느 날 하느님께로부터 그 아들을 번제물로 바칠 것을 요구받습니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그곳,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창세 22,2).
 
아브라함은 삶의 첫째 자리에 하느님을 모시며 일생을 살아왔기에 애지중지하던 외아들을 넘어서 하느님 말씀에 순명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바다의 모래알보다도 더 많은 후손을 축복으로 약속해 주셨습니다. 반면에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선 이스카리옷 사람 유다는 재물과 예수님 사이에서 갈등을 하다가 결국 재물을 첫 자리에 두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영원히 구원에서 제외되고 말았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삶의 첫 자리에 놓아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의 두번째 메시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 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7).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사회적 상황으로 가장이 갑자기 실업자가 될 수도 있고, 건강하게 잘 살다가 사고를 당해서 장애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또 자녀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입는 경우도 있고 부부간에 말 못할 고민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없으면 좋겠지만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인 것이지요. 이것을 원망하고 비관하며 끝내 이런 아픔의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부활의 기쁨에 동참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전에 알게 된 한 가정을 소개합니다. 청춘 남녀가 꿈에 부풀어 결혼을 해서 아기를 낳았는데 불행히도 뇌성마비에 걸린 아기였습니다. 그 때부터 이 가정은 지옥이 되었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원망하고 아내는 남편을 원망했으며 아무도 집에 찾아오지 못하게 했을 뿐 아니라 나가지도 않았습니다. 삶의 희망이 다 사라졌지요. 그리고 몇 년이 흘러 예비군 훈련에 참여했던 남편이 무슨 결심을 했는지 정관수술을 받고 왔습니다. 이제 다시는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결심을 한 것이지요. 그리고 다시 6~7년 세월이 흘러 예기치 않게 부인이 임신을 하게 됐습니다. 수술한 자리가 풀려서 둘째 아기를 갖게 된 것입니다.
 
많은 고민 끝에 새 생명을 낳으면서 이 부부는 장애아인 첫째 아이를 부끄럽게 여기지 말자고 결심을 했습니다. 부모마저 부끄럽게 여긴다면 아이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겠는가에 생각이 미치면서 아이를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시작한 것입니다. 어려웠지만 한 번 마음을 열기 시작하자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미사를 나가면서 오직 주님께 의탁하는 믿음의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성당에서 레지오 단원을 포함한 사람들이 수시로 방문을 해 기도를 해 주고 태어난 둘째 아이도 형을 그렇게 좋아하고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십여 년을 지옥같이 지냈던 가정에 새롭게 온기가 피어나고 희망이 차오르기 시작했지요.
 
누구에게나 다 어려움은 있습니다. 이 어려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부하면 할수록 혼란과 고통은 가중 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에 앞서서 주님을 첫 자리에 모실 수 있는 사람은 어떠한 난관도 받아들일 수 있고 승화시킬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만을 삶의 첫 자리에 모셔야 한다는 예수님 가르침은 억압이 아닌 자유에로의 초대임을 깨닫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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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성무일도서의 끝기도를 바치면서, 주님을 따른다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되새길 수 있었다. 끝기도를 마칠 때 이렇게 기도한다. "전능하신 천주여, 이 밤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 아멘."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해 달라는 기도를 바치면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곧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확인한 것이다.

육체적으로도 우리는 죽어간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 보다 더 적어 보인다. 그러길래 사람들이 가끔 아기가 태어날 때는 세상을 다 거머잡으려고 손바닥을 꼭 쥐고 태어나지만, 죽을 때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내버려둔 체 심지어는 욕심마저도 접은 체 손바닥을 피고 간다고 하지 않던가.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곧 죽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적으로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하지 않고 주님이 원하시고 바라시는 대로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자기 개인적으로 뿐만 아니라 교회 공동체 안에서 주님의 제자로서는 자신을 버리고 주님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길이다. 첫 번째가 자기의 생각과 자기의 방식, 자기의 의도를 버리는 것이다.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26) 그리고 두 번째가 주님의 십자가를 짊어지어야 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27) 그리고 이 두 번째의 길은 반드시 첫 번째를 이루어야만 걸을 수 있는 길이다.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33)

어떻게 주님을 따르는 길이 죽음의 길인가? 주님을 따르는 길이 생명의 길이요. 기쁨의 길이라고 하지 않던가? 어떻게 주님을 따르는 길이 죽음의 길이 될 수 있단 말인가?

현세의 죽음이 미래의 탄생이다. 비단 마지막날 지상에서의 죽음이 천국에서의 탄생일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가 사는 이곳에서 세속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이 신앙 안에서 그리고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하는 삶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요한 5, 24) 그리고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6, 35)라고 하셨고, 또 "나를 믿는 사람은 성서의 말씀대로 그 속에서 샘솟는 물이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7, 39) 그리고 주님께서는 죽은 라자로를 살리시면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11, 25-26)하시고는 "너는 이것을 믿느냐?"(26)하고 물으셨다. 그리고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 6)라고 하신다.

우리는 인간이 되어 오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에게서 죽음 곧 자기 버림을 본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필립 2, 6-7)

왜 그분은 당신이 누리는 모든 권능을 다 버리고 인간이 되어 오셨는가?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를 믿고 사랑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인간이 되어 오실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에서 그 희망을 발견한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여버리면 끝날 것으로 여겨서 십자가에 못박았지만, 그래서 예수님은 실패한 것처럼 죽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죽음을 죽음으로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예수님을 다시 살려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죽음마저도 쳐 이기시고 부활의 새 생명으로 오셨다.

어떻게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 있는 권능을 가지신 예수님이 사람들이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다고 거기 매달려 사람들이 죽이는 대로 그렇게 죽으실 수 있었는가?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를 믿고 사랑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람들을 위해 생명을 던지실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례성사의 영성이며 우리 신앙인의 결단이다. 자신과 자신의 죄에서 죽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 태어나는 세례성사.

이제 우리에게 결단만이 남아있다. 세속을 따르지 않고 죽음으로써 하늘나라의 영생을 얻을 것인가, 아니면 세속을 따라 삶으로써 그냥 세속에서만 살고 부활의 희망 없이 죽음으로 그쳐버릴 것인가?

우리 각자가 선택할 길이다. 믿는 만큼, 사랑하는 만큼!

오늘 사도 바오로는 버림의 방법론에 대해 말한다. 사도 바오로는 노예를 부리는 필레몬이라는 주인에게 노예인 오네시모를 지금 당장 해방시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노예해방을 외치기 보다, 노예를 형제로 받아들이라고 권고한다. 노예 해방 제도가 생겨나기 전이라 하더라도 노예를 노예로 부리지 말고 형제처럼 지내라고 말함으로써 실질적인 노예해방을 말한다. 세속 안에 육을 지닌 인간으로 살아가면서도 세속의 방법론대로 살지 않고 하느님을 믿는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이제부터 그는 종으로서가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하는 형제로서 그대와 같이 있게 될 것입니다."(필레 16) 그리고 "그대가 나를 동지로 여긴다면 나를 맞는 것처럼 그를 맞아 주시오."(17)

그러면서도 그는 필레몬의 자유 선택을 존중하고 그의 변화를 기다린다. "그를 내 곁에 두어 그대를 대신해서 내 시중을 들게 하려고도 나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대의 승낙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대가 선을 행하는 것이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자진해서 하는 것이 되어야 하겠기 때문입니다."(13-14)

우리 각자 자신의 처지에서 주님을 선택하고,
서로 평가하거나 비교하지 말고,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에게 감사하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겸허하게
주님의 뒤를 따라 걸어갑시다.

심흥보 신부
  |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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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오로가 에페소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혔다. 그 때 골로사이에서 오네시모라는 사람이 바오로에게 시중을 들려고 왔다. 바오로는 골로사이에서 오네시모에게 세례를 베풀었기 때문에 반갑게 맞았지만, 그를 포기하게 된다. 오네시모의 봉사는 좋은 의도였지만, 그가 자유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시 오네시모는 필레몬이라는 사람의 종이었다. 오네시모는 자유롭게 자신의 의사를 결정하고 행동할 수 없는 이른바 다른 사람에게 속한 부자유인이다. 그래서 바오로는 오네시모를 그 주인 필레몬에게 되돌려 보낸다.

바오로가 그 시점에서 노예해방을 주장하고 오네시모를 취했다면, 사람들은 바오로가 자기 이익 때문에 그랬다고 바오로를 오히려 비난했을 것이다. 그래서 바오로는 오네시모를 그 주인에게 되돌려 보내면서, "이제부터 그는 종으로서가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하는 형제로서 그대와 같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대가 나를 동지로 여긴다면 나를 맞는 것처럼 그를 맞아 주시오."(필레 16.17)라는 편지를 쓴다. 바오로는 도망쳤던 종을 벌하지 말고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로 받아달라는 청을 하는 것이다. 결국 바오로가 노예해방을 주장한 것은 아니지만, 종을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로 받아들이라는 말을 통해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동등한 자유인끼리의 관계인 형제 관계로 변화시키라는 요구를 함으로써 노예해방을 권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당시 그리스도교 전파이후 많은 곳에서 노예해방이 늘어났다.

스승이며 사제인 바오로가 자신이 세례를 주었던 신자 필레몬에게 좋은 것을 제시해 주면서도, 그 신자가 스스로 좋은 것을 깨닫고 판단하여 좋은 행동을 하도록 그의 자유를 인정하고 인권을 존중해 준다. 바오로는 오네시모에게 자신을 계속 돌봐달라고 하고 싶지만, "그대의 승낙이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대가 선을 행하는 것이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자진해서 하는 것이 되어야 하겠기 때문입니다."(14절)라고 필레몬에게 말해서, 필레몬이 직접 그를 자유인으로 풀어서 자기에게 파견해 주도록 청한다.

주님은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27)고 하신다. 어려운 사정에 처했다 하더라도, 신앙 공동체를 자기 개인의 이익을 위해 이용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나서 그리스도교 교리가 가르치는 올바른 길을 걸어야 한다.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33)

심흥보 신부
  |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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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진성사 면담에서 "지금까지는 신앙이 나를 위한 것인 줄 알았고, 또 나와 내 가족을 위해서 살려고 노력했는데 이제는 미약하나마 이웃에게 봉사하면서 살고 싶습니다."라는 다짐을 들었습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가 14,26)

신앙은 나를 하느님께서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시기를 바라고 시작하지만, 실제로는 하느님의 뜻이 나를 통해 이루어지도록 나를 도구로 써 달라고 주 하느님께 봉헌하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을 바치는 데까지는 많은 고민과 갈등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갈등은 주님께 대한 체험과 확신이 들어야 지워집니다.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살려주셨다는 확신과 체험이 내 삶 속에 자리잡을 때 비로소 우리는 나 자신을 주님께 바칠 수 있고, 주님께 보답하는 마음으로 형제들에게 나를 던져 봉사할 수 있게 됩니다. 나를 위해 죽으신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나도 부활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세상의 복음화에 투신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받음으로써 '평신도 사도직'을 수여 받습니다. 사제가 교회 공동체 내에서 교우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성사를 집전하며 공동체를 복음화하는 사명을 받는 것처럼, 평신도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살고 있는 가정과 직장, 사회 안에서 복음을 전하고,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실천하며, 자신과 세상에 닥쳐오는 상황과 조건들을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변화시킬 사명을 받았습니다. 세례성사를 통해 주님의 자녀가 된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견진성사를 받음으로써 주님의 사도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좋은 일을 하려고 해도 마음먹은 대로 잘 안될 때가 있습니다. 자기는 주님의 좋은 일을 하고 싶지만 자신의 미성숙한 인격과 부적절한 태도, 원만하지 않은 성격, 조급함 그리고 더 현실적이고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꾀 등으로 일을 망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이 나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경우에 따라서는 좋은 의도마저 포기하게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이러한 것들을 자신이 짊어지고 갈 십자가로 삼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전에 "아버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루가 22,37) 라고 아버지께 청했듯이 우리도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도록 청합시다. 주님의 제자가 되어 주님의 일을 기꺼이 이룰 수 있도록.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가 14,27)

심흥보 신부
  |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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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서이야기

제1독서 지혜 9,13-18은 지혜를 구하는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지혜만이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길이요 인간을 구원하는 능력이기 때문에 지혜를 구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제2독서 필레몬서 8-17은 사도 바울로가 골로사이 교회의 지도자인 필레몬에게 보낸 사적인 편지로서 오네시모에 대한 선처를 당부하는 말씀입니다. 오네시모가 전에는 쓸모없는 사람이었지만 이제 입교하여 사랑스런 교우가 되어 돌아가니 자기를 맞이하듯 맞아달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루가 14,25-33은 가족보다 예수 당신을 더 사랑하라는 말씀(26절), 예수를 따르기 위해서는 제 십자가를 짊어져야 한다는 말씀(27절), 그리고 망대를 세우려는 사람과 전쟁을 준비하는 임금의 비유(28-32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26절에 결코 가족을 미워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가족관계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더 소중히 여겨야 예수님의 마땅한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27절 역시 자기 자신을 부인하거나 학대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 장애가 되는 이기적인 요소들을 끊어버리라는 말씀입니다. 28-32절의 비유는 오직 루가 복음서에만 나옵니다. 망대를 세우려면 자금이 있는지 미리 계산하고 전쟁을 치르려면 적들과 싸워 이길 수 있는지 미리 따지듯이, 예수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그분을 따를 수 있는지 먼저 깊이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 갖추어야 할 자세는 ‘무소유’입니다(33절).

2. 우리의 이해

예수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 장애가 되는 이기적인 요소들이 있다면 과감히 끊어버려라, 그리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지 먼저 깊이 생각해 보아라,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음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이와같은 정신으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란 쉽지 않습니다. 이기적인 목적으로 예수님을 믿다가 중도에 포기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주위에는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고귀하고 값진 것인가를 나날이 실감하면서 살아가는 이들만이 자신들의 모든 것을 투신하면서 예수님을 끝까지 따를 수 있을 것입니다. 보물과 진주의 비유(마태 13,44-46)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고귀한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들은 그분을 얻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습니다. 때로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어리석다고 놀림을 당하기도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모든 것을 바쳐 결국 그 가치를 손에 넣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도 아름답고 가치있는 그 무엇을 만나면 너무 기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는데, 하물며 예수님의 가치를 발견한 사람들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들은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을 멀리하고 삶 전체를 그분께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께 모든 것을 내어놓으면서 살아가는 이들이 참다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자를 총체적으로 요구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이 사랑에 자신을 던지고자 하는 사람은 그가 어떤 것에 몸을 던지는 지를 신중히 살피고 투신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신중히 살피고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야 할 최고의 가치는 예수님입니다.

서울대교구 사무처 홍보실
2009년 9월 9일
  |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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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레몬에게 오네시모는 누구인가?

오늘의 독서인 필레몬서는 바오로 서간 중에서는 가장 짧은 서간입니다. 바오로 서간은 일반적으로 어느 특정 지역의 공동체를 그 수신인으로 하고 있는데, 이 서간만큼은 필레몬이라고 하는 개인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그 편지의 중심 내용은 필레몬에게 오네시모(“쓸모있는 자”)라고 하는 노예를 잘 대해주기를 바란다는 부탁입니다.

아마도 오네시모는 본래 필레몬의 노예였다가 어떤 연유로 도주하여 바오로에게 왔을 것입니다. 이제 바오로는 이 서간과 함께 그를 필레몬에게 돌려보냅니다. 개인적 친서인 필레몬서는 다른 바오로 서간보다 사도 바오로의 부드러운 인품을 보여줍니다. 필레몬에 대한 신뢰 가득한 바오로의 편지는 마지막까지 그의 신뢰가 말에 그치는 포장이 아님을 견지합니다. 바오로는 어떤 구체적 지시를 내리기보다 오네시모에 대한 결정을 필레몬에게 맡깁니다. 이렇게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존중하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바오로의 한 문장 한 문장은 오늘날 교회의 리더쉽이 지녀야 할 모습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역사 이래 가장 어려운 문제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문제입니다. 힘센 인간과 약한 인간, 가진 인간과 없는 인간, 배운 인간과 못 배운 인간… 그 갈등은 인류 역사에서 언제나 밑바닥을 흐르는 기저의 긴장감이었고, 인류는 그 갈등 앞에서 노예제도와 같은 손쉬운 선택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약이 쓰이기 전부터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인간평등에 대한 생각을 펼쳐왔습니다. 그들은 인간이 인간을 노예로 부리는 것이 옳지 않음을 이미 비판적으로 지적해 왔습니다. 반면에 신약에서는 노예제도에 대한 구체적 저항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종종 그리스도교를 비난하는 근거가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읽는 필레몬서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종도 자유인도” 없다는 갈라 3,28의 말씀은 사회제도와 직접적으로 충돌하지 않으면서 그 내적인 변화를 통한 실제적 변화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본질적인 문제는 제도와 틀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그 사회를 이루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갖고 있는 의식의 문제라는 것을 오늘날 여러 전문가들 역시 지적합니다. 바오로는 필레몬이 새로운 복음의 의식으로 오네시모를 만날 것을 권고합니다.

인간이 인간을 만나게 될 때, 그리고 인간이 인간을 인간으로서 만나려 할 때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짐을 사도 바오로는 필레몬에게 가르칩니다. 오네시모는 그 어떤 (인간이하의) “종”이 아니라 “사랑스러운 형제”라는 것을 바오로는 선언합니다.

몇 년 전 상영된 어떤 영화의 마지막 대사는 “우리는 폭도가 아니다”였음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여기 사람이 있다”라는 책의 제목 역시 필레몬서가 던지는 인간에 대한 질문을 상기시킵니다.

“종”이나 “폭도” 또는 “철거민”이라는 이름 아래 그들이 인간임이부정된다면 그것은 결코 복음의 시선이 아님을 사도 바오로는 천명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좌빨”이나 “수구꼴통”은 존재하지 않음을,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모든 이들은 비록 서로 세상을 보고 이해하는 방법은 다를 지라도 모두 “사랑스러운 형제”임을 필레몬서는 확신합니다.

최승정 베네딕토 신부
  |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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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올바른 기도생활

그리스도교인에게 있어서 기도생활은 가장 기본이고 기도생활을 잘 실천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순간이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특히 하느님께 청원기도를 드렸는데, 그 응답이 없다고 느껴질 때면 더더욱 기도생활에 회의를 느끼게 됩니다. 혹시 기도에 대한 응답이 내가 생각하는 시점에, 내가 생각하는 장소에서, 내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도착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은 아닌지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생각하시는 시점에, 당신께서 생각하시는 장소에서, 당신께서 생각하시는 방식으로 이미 기도에 대한 응답을 보내셨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자신들이 하느님께 선택된 민족이라고 해도 하느님을 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초세기 유다인 철학자 필론은 하느님이야말로 알 수 없는 분이시라는 ‘불가지성’(不可知性)을 주장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지혜서의 저자는 “어떠한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지혜 9,13)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 스스로 당신 자신을 계시해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개입을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 선택되었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는 바오로 사도는, 오늘 제2독서에서 필레몬의 집을 도망친 하인 오네시모를 다시 필레몬에게 돌려보내며 당부를 전합니다. “그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명령할 수도 있지만, 사랑 때문에 오히려 부탁을 하려고 합니다.”(필레 8-9) 여기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 당시 만연했던 노예제도에 대해서 비판을 하지도 않았고, 사도의 권위로 필레몬에게 교인이 된 오네시모를 선처하라고 강권하지도 않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을 그 누구보다도 잘 이해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생각하고 풀어가는 일반적인 방식이 아니라, 애덕(愛德) 실천에 호소하였던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모든 문제를 예수님의 시각으로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b수 없다.”(루카 14,27)라고 말씀하십니다. 앞서 루카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 일화를 전하고 있습니다(루카 11,1-4 참조). 혹시 여러분은 입술로는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하면서 마음으로는 “나의 뜻이 땅에서와 같이 하늘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성찰해 보십시오. 나의 뜻과는 사뭇 다른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 받아들이고자 노력하는 것이 어쩌면 오늘날 우리들이 지고가야 할 십자가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서울대교구 전영준 바오로 신부>
  |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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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루카 14,27)

우리 교회는 매년 9월을 순교자 성월로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가장 소중한 신앙을 전해 준 선조들, 특히 순교자들을 기억하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시기를 보냅니다. 지난 5월, 병인(1866년) 순교 150주년을 기념하여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에서 주관하는 순교 형장을 중심으로 하는 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순교의 그 순간을 맞이하는 심정은 어떠했을까? 옥에서 고문을 견디며 죽음을 기다리는 그 시간들은 또 어떠했을까?’ 스스로 물음을 던져 보았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분명 피하고 싶은 고통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은 기쁨과 행복으로 그 시간을 맞이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요?‘영원한 삶’에 대한 믿음과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쁨 가운데 행복하게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 순례지 중에서 복자 황일광 시몬이 처형 당한 홍주에서는, 필레몬에게 그의 종 오네시모스를 다시 돌려보내며 사랑으로 받아들일 것을 부탁하는 사도 바오로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필레몬에게 오네시모스를 이제 종이 아니라 신앙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로 대하고, 사도 자신을 맞아들이듯이 오네시모스를 맞아들여 달라고 당부합니다.

복자 황일광 시몬은 사람대접을 받을 수 없는 백정이었습니다. 그런 그를 양반 신앙인들이 사람으로 대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너무나 점잖게 대해 주니,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하다”고 증언하였습니다. 오네시모스를 부탁한 사도 바오로도, 백정을 사람으로 대한 우리 신앙 선조들도, 이 세상의 가치와는 대조적인 삶을 보여 주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세상의 가치 기준과는 다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삶이야말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따른다는 것은 우리 삶의 기준을 하느님의 가치로 채워 넣음을 의미합니다. 지혜서는 하느님께서 지혜를 주시고, 당신의 거룩한 영을 보내시어 당신의 뜻을 깨닫게 하신다고 일깨워 줍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손길로 채워 주고 이끌어 주시기에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의 뒤를 따라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제자로서 충실히 살다가 하느님께로 돌아간 마더 데레사 수녀의 시성을 기뻐합니다. 하느님의 도구로서 가난한 이들과 함께했던 데레사 수녀의 삶은 하느님의 가치를 선택하는 십자가의 길을 일러 줍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길을 따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삶을 믿기에, 주님께서 이끌어 주실 것을 알기에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뎌 보아야겠습니다. 성인들이 살아가신 길에 우리 모두 초대받고 있습니다. ‘자비의 희년’을 지내면서 각자 삶의 자리에서 이루는 작은 실천을 통해 성인의 길, 예수님 제자로서의 길을 더욱 충실히 걸어가야겠습니다.

▮ 서울대교구 조성풍 아우구스티노 신부 2016년 9월 4일
  |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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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제자 되려면 가족을 미워하라고요?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예수님의 말씀.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복음서에 나오는 말씀 가운데 곧잘 알아들을 수 없는 내용이 있어도 어지간하면 넘어갑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으려면 가족을 미워해야 한다는 말씀 말입니다. 평상시에 그렇게 강조하는 ‘사랑하라’는 계명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겠습니다. 가족들을 미워하라니요?

여기서 미워하라고 표현한 이유는, 구약성경의 히브리말에는 ‘더 사랑하다. 덜 사랑하다’와 같은 비교급이 없답니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 10장 37절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 예수님을 가장 사랑한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리스도 신자는 예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실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해온 신자들 가운데도 간혹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말이 낯선 분들이 계십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그저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도덕적으로 더 완벽한 생활을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예수님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얼마나 하느님을 보고 싶어 하고,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듣고 싶어 합니까! 예수님을 보면 하느님을 보고 있는 것이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하느님의 말씀을 직접 듣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보듯이 인간을 죽도록 사랑하시는 그 하느님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니, 우리도 그분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느님과의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사실로 인간은 이 세상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위대한 존재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권리 주장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을 사랑할 수 있는 것도 하느님의 선물이요 은총 덕분입니다.

▪ 예수님의 부르심

세상에서 가장 좋고 값진 것입니까? 인간이 감히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꿈이라도 꿀 수 있을까요? 인간 스스로 하느님께 다가가고 그분과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해주셨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시고 죽기까지 하시면서 인간과 하나가 되시어 이제는 그분의 부활에 우리를 동참시키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서 그분을 따라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조건 없이 즉시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모든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단호한 태도로 이 부르심에 응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길 외에는 인간의 구원과 해방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우선 예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인생에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풍성한 가치를 가진 제자 됨의 삶을 살기 위해서 결단을 내리고 철저하게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많은 신자가 그 모범을 보여 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삶을 생생하게 살아가려고 합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은 하느님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인간이 서로 화목하고 정의롭게 살아가길 간절히 바라십니다. 죄는 인간을 소유욕에 사로잡히게 하고, 죄는 인간을 철저하게 파괴하고 비참하게 만듭니다.

이제 새롭게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고 살기 시작한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자세는 단호함입니다.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서 우리와 기꺼이 나누시려고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다른 사람들과 공동선을 추구하면서 함께 나누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새 하늘과 새 땅을 살기 시작한 우리는 우리 자신과 사회생활에 대해서 하나하나 심사숙고하면서 잘 식별해야 합니다.

▮ 서울대교구 주수욱 신부 2016년 9월 4일
  |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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