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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제자들의 선택
조회수 | 2,324
작성일 | 07.09.08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과 함께 길을 가시다가 불현듯 군중에게 돌아서서, 당신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떠해야 되는지를 일깨워주십니 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 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당신과 함께 길을 걷는다고 적당히 ‘묻어가서’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가신 결단의 길에 함께 해야 할 것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군중의 요란한 마음속을 꿰뚫어보십니다.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마음은 세상일에 휩싸여 있거나, 자신의 목숨과 안위를 걱정하는 이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진리를 선택했기 때문에, 자기 자신 안에서 진리를 따르는 데 있어 방해되는 요인들을 미워하라”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미움의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진리에서 멀어지도록 자신을 끊임없이 기울어지게 하는 ‘욕망’이라는 함정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름은 제자 됨의 삶이고, 그것은 어정쩡한 절룩거림이 아니라 분명하고 확고한 선택의 삶입니다. 좋은 선택을 한다는 것은 더 아름다운 가치를 위해 반드시 포기하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생의 결정적 순간에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 완성하기 위해, 자신의 뜻을 버리고 자신의 뜻을 아버지와 일치시키십니다. 그렇게 십자가는 사랑과 용서, 가난과 겸손의 결정적 선택의 상징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한 기로 위에 서 있습니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 십자가를 짊어지고 따르는 응답, 그 선택이 그분 제자로서의 가장 아름다운 인간적 행위가 될 것입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소유를 전부 포기하는‘버림’의 길이기에 결코 쉬운 길이 아님을 바라보고 또 헤아리게 됩니다. 소유는 집착의 산물이기에 소유함으로 소유 당하게 됩니다. 자신의 계획과 욕심과 뜻으로만 가득차서 무겁게 된 사람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보다 스스로 ‘스 승’이 되어버릴 수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내 마음을 전부 비워 드리는 ‘가난’으로 스승의 자리를 넓혀드려야 합니다. 또, 내 소유를 전부 버림으로 인해 충만한 것이 스승이신 그리스도의 사랑과 말씀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도 바오로 사도와 같이 ‘주님께서 우리 생의 전부’임을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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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한만삼(하느님의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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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지혜

오늘 전례의 주제는 “참된 지혜”이다. 이 지혜는 지성과도 슬기와도 다른 것이다. 이 지혜는 인간의 역사 전체를 하느님의 빛에 비추어 평가할 수 있는 ‘은총의 선물’이다. 이것은 오직 하늘로부터 오는 것이고 인간의 혼자의 힘으로는 성취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지혜는 지성과 통찰력의 선물일 뿐 아니라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모든 것을 실현시켜 나갈 수 있게 하는 ‘능력’이기도 하다. ‘지혜’의 완전한 표현을 그러기에 그리스도에게서 찾는 것이다. 그분은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지혜’(1고린 1,24)이시다. 왜냐하면 신비스러운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그리스도를 통해 실현되고 또 드러난다.

복음: 루카 14,25-33: 그리스도의 제자의 자기 포기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지혜’가 인간들의 지혜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데 필요한 조건을 표현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는 그 어떤 것도 대적할 수 없는 절대자시라는 사실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마음이 헛된 감상에 젖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26절).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의 ‘항구한’ 생활태도를 가리키는 말씀이다. 즉 당신을 따른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항구하고도’ 철저하게 당신을 선택할 것을 요구하시는 것으로 여겨진다. 즉 다른 사람들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 ‘다음 자리’에 두는 것을 뜻한다. 즉 그분은 언제나 가치서열에 있어서도 우리 마음을 봉헌함에 있어서 항상 ‘첫 자리’에 모셔야 한다는 것이다. 나 자신이 그렇게 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자신이 주님께 얼마를 할애하고 있는지 보면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요구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 어려운 요구를 하신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27절). 정말 그리스도를 닮고 따르려할 때에는 항상 십자가의 그림자가 그 생활을 뒤덮게 된다. 즉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은 비천하게 태어나 십자가 위에서 고통스러운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그분의 삶의 모든 순간들이 구원의 의미로 충만하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용기를 잃는 것 같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면서 실망하지 않으려면 계산을 정확하게 하여야 한다고 하시면서 두 비유를 말씀하신다(28-33절). 그러면서 이 비유를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할 때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리라’고 하는 태도에 연결하고 계시다.

즉 우리로 하여금 가지고자 하는 열망, 소유하고자 하는 열망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라는 것이다. 루가 복음에서는 하늘나라에 들어가는데 가장 장애가 되는 요소로 재물에 대한 집착을 들고 있다. “재물이 많은 사람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루가 18,24; 12,13-34; 16,1-13 참조). 사실 재물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사람의 마음을 메마르게 하고 보다 고귀한 감정 예를 들면, 부모와 형제자매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까지도 막아버린다. 그러기 때문에 두 비유가 주님을 따르는 본 의미를 담고 있지만, 당신의 제자가 되기 위한 가장 중대한 장애요소로서 재물에 대한 집착을 지적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기 전에 잘 계산하라고 하는 것은 아무 거리낌 없이 그분을 따르기를 거부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분을 ‘따르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분을 따른다는 것은 다른 생활, 다른 요구, 다른 유혹 등을 철저히 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포기하는 것이 그 자체가 악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께 속하는 것이고(골로 1,18), ‘만물보다 앞서 계신 분’(골로 1,15)이라는 것을 긍정하기 위해서이다. 무엇보다 그분을 사랑하고 모든 것을 포기할 자세를 갖춘다는 것은 모든 사물의 가치를 올바르게 평가하여 ‘우상화’로부터 해방시킨다는 의미가 있다. 우상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마음에서 하느님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되어 거기에 집착하는 것을 우상이라고 한다. 즉 하느님이 제일 첫 자리에 모셔져야 하는데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이 첫 자리를 차지하게 될 때 우리는 그것을 우상에 빠졌다고 하는 것이다.

수도자는 속세를 떠난다. 그것은 세상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더 큰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이고, 세상을 사랑하지만 그것을 궁극적 가치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에 살면서도 그 가치관에 있어 우상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자유로우며, 하느님을 잘 따를 수 있는 것이다.

주님을 따르기로 결심을 하고 사는 우리는 항상 주님을 따르는데 잘 계산하고 따라야 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 외에 다른 것에 집착하여 자기 자신까지도 버리지 못하면 주님을 따를 수 없음을 기억하면서,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모심으로써 우상에 매이지 않고 주님을 올바로 모시며 살아가는 우리 되도록 주님의 은총을 구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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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의 삶

얼마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분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장례 미사를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의 죽음 소식을 들은 이후, 내내 마음이 슬펐습니다. 그의 삶을 생각하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아픔이 밀려왔습니다.

그의 삶을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그는 아주 어렸을 때(10살 이하) 부모를 여의고 고만 고만한 형제들과 함께 고아가 되었습니다. 갈 때가 없어서 친척집에 얹혀 살다가 구두닦이부터 안 해본 것이 없을 정도로 이것저것 하면서 부모 없는 슬픔과 설움을 겪었습니다. 그 괴로움은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조금 성장해서는 친척의 도움으로 좀 큰 회사의 노동자로 취직을 했습니다. 일을 하면 많지는 않지만 봉급이 주어졌기에 그런 대로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IMF 을 맞아 명퇴를 당했고 실업자가 되었습니다. 실업자가 되었어도 그냥 놀 수는 없는 처지였기에 공공근로 취업에 나가 일을 하곤 했지만 실업의 고통이 너무 커서인지 그만 중풍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중풍에 걸려 4년 동안 병원 신세를 지다가 임종 3개월 전에 병수발에 지친 부인이 그만 집을 나가는 고통도 받게 되었습니다. 죽기 전에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만 연약한 어린 아들만이 그의 곁에 있었을 뿐입니다. 저는 그의 죽음을 보면서 '이런 삶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그리고 그와 비슷한 삶과 죽음을 겪는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서 고민에 빠졌습니다. 참으로 아픈 고민을 하다가 그의 삶에서 아주 깊은 의미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힘들었어도 삶을 놓아버리거나 그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고 꿋꿋하게 자리를 지켰다는 것입니다. 많이 타락하고 싶었을 것이고 도망하고 싶었을 터인데도 말입니다. 그가 자리를 지켰기에, 자기의 십자가를 버리지 않았기에 그의 자녀들은 잘 살아있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삶에서 발견한 큰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라 합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십자가. 그것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입니다. 때로는 방황할 수 있어도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 그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 입니다. 그것이 이 시대의 순교의 삶입니다. 죽은 그 형제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수원교구 권혁환(베드로) 신부
  |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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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나라로 이르는 길”

지금으로부터 불과 10여 년 전에는 먼 길을 떠날 때면 여행책자나 지도를 챙겨가곤 했습니다. 그리고 목적지를 확실히 알아두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자세하게 길을 알려주는 내비게이션(차량자동항법장치)이 대부분 차에 장착되어 있습니다. 길을 몰라도 내비게이션만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주 개선(upgrade)해 놓지 않는다면, 원하는 곳을 찾아가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있어 최종 목적지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라는 목적지로 나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올바른 길을 찾아가야 합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내비게이션이 되어 우리에게 길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7)”고 하시며,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법으로 십자가의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특히 9월 순교자 성월을 맞이하여, 주님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가신 순교 성인들의 삶도 우리들에게 모범이 됩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목숨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것은 인간 세상에서 당연한 이치이며 누구도 반문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가기 위해 우리는 너무나 소중한 것을 버려야 하기에, 십자가의 길을 나서는 결단을 선뜻 내리지 못하곤 합니다. 그러나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방황하는 우리에게 하느님께서는 지금도 당신 사랑의 계획들을 이해하도록 도와주시고 계십니다. 그 내용은 오늘 제1독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우리가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영”을 보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보내주신 거룩한 영, 즉 ‘성령’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언제나 개선(upgrade)해 줍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도 성령께서는 바오로에게 복음을 설교할 빛과 그 때문에 겪는 어려움을 참아낼 믿기 어려운 힘을 주셨습니다. 또한 한국의 순교 성인들과 세상의 모든 순교자들도 이 성령의 이끄심을 통해,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길을 걸을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 나라가 우리의 최종 목적지임을 확실히 알 때에,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길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오늘 복음에서 말한 ‘탑을 쌓기 전이나 전쟁을 하기 전에 헤아려 보는 것’과 같이, 나 자신을 성찰하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의 길을 성령을 통해 우리가 혼자 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심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남승용(십자가 요한) 신부
  |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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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사랑하려면, 먼저 미워하라.

정신과 의사 이무석씨 책 ‘30년 만의 휴식’(101-7쪽)에, 캐나다 멕길대학 정신과 교수인 다반루 박사가 한 우울증 환자를 치료한 사례를 소개합니다.

환자는 30대 회사원이라고 합니다. 그는 자신이 매우 초라하고 못나보여서 견딜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매우 소심하고 복종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의사와 이야기 할 때도 머리를 항상 내리깔고 바닥만 보며 이야기 하였습니다. 목소리도 떨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의 사회생활은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엉망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반루 박사는 이렇게 묻습니다.
“왜 나를 쳐다보지 못하십니까? 무엇을 두려워하십니까?”
그는 몹시 당황하다가 자기 마음속에 떠오르는 상상을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 선생님을 마주 쳐다보는 것은 건방진 행동이에요. 선생님은 화가 나서 저를 ‘버릇없는 놈’이라고 소리 지르실 거예요.”
“그리고요? 그때 당신은 어떻게 하십니까?”
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다 잠시 뒤 울음을 터뜨리며 큰 소리로 자신이 하고 있는 상상을 말합니다.
“저도 화가 나요. 의자로 선생님을 후려쳐 버려요. 선생님의 머리는 박살이 나고 골이 흘러 나와요. 선생님의 눈도 튀어나왔어요.”
그 때 박사가 다시 묻습니다.
“눈은 무슨 색이지요?”
“초록색이요. ... 아! 그런데 선생님의 눈은 초록색이 아니군요. ...”
그는 비로소 초록색에 대한 기억을 떠올립니다. 초록색은 아버지와 관련이 있는 색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너무나 엄한 분이셔서 동생과 싸우면 항상 자신만 야단쳤고 몸이 약한 어머니를 무시하고 자주 때렸다고 합니다. 나중에 힘이 생기면 아버지를 반드시 죽이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자신을 서재에 불러놓고 한 시간씩 설교를 하곤 했는데, 아버지의 서재에 걸려있던 그림이 초록색이었던 것입니다. 즉 이 환자는 자신이 증오하지만 죄책감으로 자신 속에 묻어 둔 아버지의 모습을 이 의사에게 투영시켜 그의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경우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해결되지 않으면 그것이 어떻게든 다른 이들에게 전이되어 누구와도 편한 관계를 맺지 못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미 눈에 증오와 죄책감과 두려움 등의 비늘이 씌워져 모든 것들을 비뚤어진 시각으로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자신의 탓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그 화살을 돌리게 된 것과 같습니다.

어쨌든 이 환자는 비로소 자신의 문제를 인식하게 되었고 아버지를 이해하려 노력했으며 상태가 하루가 다르게 호전되었습니다. 다반루 박사가 환자를 5년 뒤에 다시 만났는데 그는 사람들 앞에서 당당했고 뛰어난 유머감각이 있었으며 성공적으로 직장생활을 잘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환자가 자신의 문제를 누군가에게 털어놓으려 하지 않았다면 자신을 볼 수 없었을 것이고 그러면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와의 관계를 위해 반드시 또 누군가와의 관계를 통해 나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본래 완전하지 않고 완전으로 가는 도정에 있기 때문입니다.

‘은밀하게 위대하게’란 영화가 있습니다. 특수 훈련을 받고 남한에 파견돼 바보역할을 하며 임무를 기다리는 김수현이 주인공입니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당장이라도 내어 놓아야 하는 훈련을 받았지만 2년 동안 슈퍼에서 일을 도와주며 살아가는 동안 동네 사람들에게 정이 들어갑니다. 특히 무뚝뚝하고 짠순이인 슈퍼 주인아주머니는 자신을 위해 일해 주는 바보 동구(김수현)를 친 아들처럼 여기며 몰래 장가갈 밑천까지 조금씩 저금을 해 놓습니다.

‘바보’, 그 역할은 세상 사람들과 온전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 과거를 지닌 우리 자신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희생을 먹고 조금씩 변화되게 되는 것이고, 온전한 관계를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북한에서 더 이상 이 간첩들이 필요하게 되지 않자 스스로 자결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지만 동네 사람들의 정에 끌려버린 김수현과 동료들은 죽기를 거부합니다. 과거가 죽으니 살고 싶어 진 것입니다. 결국 조국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야 한다고만 쇠뇌 당해왔던 공작원 마음 안에 새로운 무언가가 자라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써서 먹을 수 없는 죽은 물을 살아있는 샘물로 만드는 이야기가 구약성경에 여러 번 나옵니다. 특히 써서 마실 수 없는 물에 모세가 나뭇가지를 넣어 달게 만들었다는 마라의 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나뭇가지는 바로 십자가를 상징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희생만이 죽어가는 우리를 살아있는 생명수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예언자 엘리사는 죽은 물에 소금을 넣어 생명의 샘으로 변화시킵니다. 소금 또한 누군가가 물에 녹아 사라지는 희생이 있어야만 그 본성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마찬가지로 영화에서의 남파공작원들을 변화시킬 수 있었던 힘은 바로 북어 두고 온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김수현에게 그 어머니의 사랑을 느끼게 해 주었던 슈퍼 주인아주머니의 사랑과 희생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미워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먼저 떠나야합니다. 떠나서 나를 받아주고 사랑해 주는 그 사랑의 원천에서 내가 과거를 털고 새로운 인간으로 탄생해야만 온전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수준의 인간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것입니다. 먼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으면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뜻은, 당신처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과거의 모든 것들을 떠나고 버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손과 발이 없지만 희망의 전도사로 활약 중인 닉부이치치의 결혼 이야기는 참 재미있습니다. 그의 불구는 누구도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는 자멸감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는 그렇게 태어난 것도 주님의 섭리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변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처지로서는 어림도 없는 미녀를 좋아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사귀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부이치치는 밀어붙입니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지금부터 1년 동안 우리 서로 연락을 하지 맙시다. 이메일도 전화도 문자도 하지 맙시다. 그리고 1년이 지난 뒤에도 우리 사랑이 줄어들지 않는다면 하느님이 뜻으로 알고 함께 합시다.”

1년이 지나도 그들의 사랑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혼까지 이르게 되었고 아이까지 갖게 되었습니다.

부이치치는 먼저 하느님께 다가갈 줄 알았고, 또 모든 인연을 하느님께 맡길 줄 알았습니다. 먼저 떠날 줄 알 때야만, 먼저 하느님께 향하기 위해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려놓을 줄 알 때야만, 참다운 관계, 영원한 사랑이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수원교구 전삼용 신부>
  |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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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자격 조건 갖추기

현대 사회는 자신을 얼마나 포장하느냐에 따라 그 운명이 달린 것 같습니다.포장이라는 말은 다른 말로,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능력 있는 존재라고 믿게 만들 수 있는 요소들을 얼마나 많이 갖고 있느냐를 말합니다.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 개인이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포장 요소는 학력입니다. 우선은 학력이 높아야 합니다. 여기서 학력이 높다는 말은 학문적으로 우수하고 지식이 많아야 한다는 측면보다는, 좋은 대학, 소위 한국에서 일류대학이라고 하는 지금은 서울 소재 대학을 들어가야 하는 그런 의미에서의 학력입니다. 그래서 우리 청소년들은 지금 이 학력이라는 포장을 얻기 위해 밤낮으로 공부와 씨름하며, 특히 서울에 있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그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쓰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좁은 문을 통과하는 학생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어떤 일을 하는 데 있어서 그 사람이 가진 인격과 재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대학이름이 중요하다는 이러한 생각은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는 주요한 요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것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어떤 것보다도 이 자격 조건을 갖추는 것이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청소년들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실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누구도 이러한 현실을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바라만 볼 뿐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당신을 따르는데 있어서 필요한 자격 조건을 제시하십니다.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33).”라고 하시며, 우리가 무엇인가를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버려야 합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버려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가진 물질적 소유물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얼마를 버려야 할까요?

여기서 예수님께서 ‘자기 소유를 버리라’는 말씀은 아마도 우리에게 세상 것을 포기하라는 말씀이기보다는, 세상 것에 대한 집착을 어느 정도는 포기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을 이야기하시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 것보다는 하느님을 더 사랑하고, 세상일에 신경 쓰는 것보다는 주님의 뜻을 더 헤아리기 위해 노력하는, 한 마디로 우선 순위가 세상 것이 아닌 ‘하느님이 먼저인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며, 이것이당신의 제자가 되는 자격 조건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관심을 어디에 쏟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의 목표와 방법이 달라집니다. 세상 것에 관심이 더 많으면 당연히 우리의 시선은 세상에 머물면서 그 세상이 원하는 자격 조건을 갖추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세상 것이 아닌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에 관심을 더 기울인다면, 우리는 늘 하느님께 시선을 두고 하느님이 좋아하시는 일에 마음을 두고, 하느님이 원하시는 자격 조건을 갖추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헤아리는 지혜가 너무도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에귀 기울이지 못하고, 세상일에만 신경 쓴다면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될 아무런 자격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을 따르기 위한 자격 조건으로 일류 대학 이상의 학력이 요구된다면, 저를 포함한 우리 중에 몇 명이나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을까요?

▮ 수원교구 이석재 안드레아 신부 2016년 9월 4일
  |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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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6   [대구] 희망찬 항구한 기도  [2] 2434
755   [원주] "조급함 버리고 항구히 기도하자"  2595
754   [군종] 옳은 길로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  11
753   (녹) 연중 제29주일 독서와 복음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2] 2398
752   [수도회]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4] 3075
751   [마산] 항상 감사하는 마음  [3] 2662
750   [대구] 모든 일에 감사드릴 줄 아는 신앙인이기를...  [3] 2910
749   [부산] 만남의 길이냐 스침의 길이냐?  [4] 2461
748   [안동]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3] 2221
747   [서울]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기  [4] 2358
746   [수원]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3] 491
745   [인천] 감사할 줄 알기에 행복한 삶  [5] 2587
744   [원주] 있지만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  [4] 2685
743   [춘천] “감사하는 마음으로 ‘탓’은 나에게”  [2] 63
742   [전주] 영혼이 병든 사람들  [1] 2500
741   [광주] 감사는 믿음의 축복  [1] 45
740   [의정부] “네 닭을 잊었느냐?”  [2] 2363
739   [군종] 감사의 기도  [1] 35
738   [대전] 나머지 아홉은 뭐야?  [2] 2632
737   [청주] 화장실 갈 때의 마음!  [1] 56
736   (녹) 연중 제28주일 독서와 복음 (나병 환자 열 사람)  [2] 2188
735   [마산]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신앙  [1] 2296
734   [대구] 내 믿음의 정도는  [1] 2358
733   [부산]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4] 2345
732   [안동]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과 종의 모습  [2] 2998
731   [춘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2] 2686
730   [수도회] 겨자씨  [10] 2637
729   [서울]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5] 2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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