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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려면
조회수 | 2,473
작성일 | 07.09.08
얼마 전 대학 졸업에 대한 논란이 사회적인 이슈가 되었을 때 신문에 실린 글이 하나 있습니다. 세계적인 불교학자였던 유명 대학 교수에게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박사님은 모르는게 없을 텐데 왜 먼 길을 와서 스님들의 법문을 듣습니까?” 이 교수는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나는 그 스님의 ‘소리’를 들으러 갑니다.”

이 ‘소리’의 의미는 본질, 깨달음, 진리 등과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머리로는 많은 것을 알고 있어도 그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서 들을 수 있는 체험의 소리, 신앙의 깨달음과 진리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예수님의 말씀에 목마른 이유 또한 같을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 머릿속 이야기와 신앙의 깨달음 사이에 아주 큰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를 따라라”하고 말씀하시지만 그 말씀조차 우리에게 십자가가 되곤 합니다. 십자가가 무엇이기에 우리가 짊어져야 할까요? 십자가가 단순히 우리 삶의 장애물이요 사형대이고 죽음에 이르는 길만은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부활 사건이 참으로 신비인 것은 십자가라는 죽음이 있어야만 참 부활이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뵙는 순간을 위해 준비해야 할 것이 오직 예수님 닮은 십자가 뿐이라는 사실은 우리 신앙이 단순히 머리로만 생각하는 것, 이 세상에 속한 것만이 아님을 알려줍니다.

그 신비에 다가가기엔 부족하겠지만 생활 속에서 십자가 길을 잘 따라 가고 계신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들을 나눠 보고자 합니다. 어느 한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부부 사이에 5살 난  딸이 있는데 이 딸이 아빠를 너무 좋아한다고 합니다. 너무 좋아한 나머지 자기가 생각할 수 있는 제일 큰 사랑을 아빠에게 주기 시작합니다. 엄마 대신 음식을 차려 주고, 엄마 대신 옆 자리를 차지하고, 결국에는 그 ‘아내’의 자리를 얻기 위해 엄마를 ‘아줌마’라고 불렀다가 호되게 야단을 맞았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은 야단을 치면서도 그 딸이 결코 미울 수 없습니다. 잘못이 아니라 사랑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실수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용서하고, 사랑이 넘쳐서 미워할 수조차 없는 바로 그 모습이 우리 가족의 모습이고 십자가에 이르게 하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얼마나 사랑스러우셨는지 이해할 수 있다면 왜 십자가를 기꺼이 지셨는지도 알게 됩니다. 십자가를 짊어진다는 것은 사랑할 줄 아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닌 환경이라는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이유 때문에 힘들고, 살기 어렵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많이 있지만 오히려 더 큰 고난과 시련에도 환히 웃고 살아가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분들은 고난과 시련 때문에 새 삶을 찾았다고 고백합니다. 사업 실패와 가정불화가 찾아왔지만 그것을 딛고 일어서기 위해서 시작한 신앙생활, 봉사 활동은 새로운 삶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편안함에 안주했던 삶에서 찾지 못했던 삶의 참된 기쁨과 행복까지 얻게 해 주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마련해 주신 십자가는 결코 우리 힘에 넘치지 않는 것임을 기억하면서 우리 삶의 십자가를 찾아 작은 봉헌과 감사를 드릴 수 있는 한 주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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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황성진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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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한여름의 무더위도, 올림픽의 열기도 가라앉는 걸 보면 ‘참으로 영원한 것은 무엇인가’하고 생각하게 된다. 영원한 것을 찾고 살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사람은 항시 겪어 보고 나서야 무엇인가를 깨닫는 습성이 있는가 보다.

오늘의 복음은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던 군중에게 돌아서서 당신의 제자가 되는 방법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계신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첫째 가족이나 자신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 둘째,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 셋째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 이 세 가지 사항이 예수님을 따르는데, 제자가 되는데 필요한 사항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참으로 난처하다. 특히 현대인에게는 더더욱 난감한 말씀이시다. 요즘 세상이 어떠한 세상인데 이처럼 실현 불가능한 말씀만 골라서 하실까?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 되는 현대에서 예수님의 이 말씀은 참으로 따르기 어려운 말씀이다. 현대인들은 자신을 위한 투자라면 아무런 망설임 없이 큰 댓가를 치루는 세대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무엇이 어디에 좋다더라 하면 시간과 돈은 둘째고 일단 차지하고 먹고 바르고 하는 세대이기에….

주위를 둘러보면 온갖 쾌락과 유흥과 놀이에 푹 빠지게 되어있는 세상구조에서 십자가를 지라니…. 십자가가 무엇인가? 바로 고통의 대명사요, 희생의 다른 이름이며 죽음에 이르는 길 아닌가. 그 십자가를 지라니. 또 먹을 것 덜 먹고, 쓸 것 조금 덜 써서 모은 재산을 모두 버리라니. 이 세상에서 돈 없으면 누가 나를 알아주고 대접해주고 하겠는가. 아무래도 예수님의 요구는 무리인 듯 싶다. 자신을 미워하고 십자가를 지고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하지만 이제 결단을 내려야 할 때이다. 주저하며 더 이상 미룰 일이 아니다. 망설임없이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한 용기를 내야할 때이다. 예수님의 이런 말씀은 세상의 모든 가치에 우선하는 가치가 있음을 알리는 말씀이요,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말씀이시다. 예수님을 따르는데 있어서 장애가 되는 이기적인 요소들을 끊어야 된다는 말씀이시다.

세상의 것들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결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없고 참다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세상이 추구하는 것을 버리고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달아오르고 그분께 완전히 귀속되도록 애써야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라고 부르신다. 그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요, 당신의 제자로 살아가는 길이다.)

인천교구 김현수(토마스) 신부
  |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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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겨울 밤, 양치기 소년이 산 속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소년은 바로 다음날, 기적처럼 살아서 가족들에게 돌아왔어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 돌아올 수 있었느냐고 물었지요. 그러자 소년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세상애 온통 캄캄해졌을 때, 저쪽 산에서 다른 양치기의 불빛이 반짝였어요. 저는 그 불빛에서 눈을 떼지 않고 계속 집에 돌아갈 생각만 했지요.”

누구에게나 어두운 밤이 있으며, 추위와 싸워야 하는 절망이 있습니다. 이 순간 희망을 잃지 않게 해주는 건너편 산의 불빛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불빛은 우리 자신이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불빛을 찾고 있으며, 다른 꿈을 꾸고 있으며, 다른 희망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불빛을 주님께서는 이미 주셨습니다. 그 불빛은 바로 세례 때, 주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면서 받은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들은 아마 이런 결심을 했을 것입니다.

“저는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열심히 살겠습니다.”

“이웃사랑을 실천하면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주님이 아닌,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는 마태복음 6장 21절의 말씀처럼 점점 이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에 마음을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 제자들도 처음에는 아무런 조건 없이 주님을 따랐습니다. 자신들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불러주시는 예수님께 그저 고마웠으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그 어떤 것도 필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러한 순수한 마음이 바뀝니다. 자기 자신이 남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소원을 만들어 가는 것은 물론, 가족이나 친지에 대한 소원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 과정 안에서 그들은 처음에 가졌던 단순한 마음이 차츰 퇴색해가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런 제자들의 모습을 보고 있었던 주님께서는 다시금 핵심을 찍어서 말씀해주십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주님 외에는 모든 것이 부차적인 것이라는 것, 이것이 바로 핵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내 모습은 어떤가요? 그 핵심만을 쫓아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나요? 혹시 세속적인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움켜쥐고 있는 것을 놓을 줄 모릅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곳에서는 원숭이를 잡을 때, 항아리 안에다 사과, 바나나 같은 과일을 집어넣고 기다린답니다. 그런데 그 항아리는 간신이 손이 들어가지만 그 항아리 안에서 물건을 잡았을 때는 손을 빼지 못하는 작은 입구를 가지고 있죠. 항아리 덧을 설치하고 조금 있으면 원숭이들이 그 항아리에 있는 과일을 먹으려고 손을 집어넣게 되고, 그 때 사냥꾼들이 들이쳐도 원숭이는 자기가 잡은 과일을 놓지 않으려고 손을 빼지 않아 결국 사냥꾼에게 잡히고 맙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포기하고 놓아야만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재물에 눈이 어두우면 하느님이 보이지 않고, 대신 세상의 헛된 것들만 보일 뿐입니다. 헛된 쪽으로만 시선을 맞추다보니 하느님이 나를 불러도, 하느님이 내 옆에 계셔도 우리들은 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악마는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도록 계속 방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금 기억했으면 합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주님을 처음 알게 되면서 가졌던 첫 마음을 다시금 떠올렸으면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살겠다는 다짐들, 이웃을 사랑하겠다는 마음들... 그 마음들의 실천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입니다.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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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참된 힘은 자신의 미약함에"

주님은 당신을 따라오는 많은 군중을 돌아보시며 당신의 제자가 되기 위한 3가지 조건을 제안하십니다.
 
첫째,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
 
둘째,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7).
 
마지막으로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33).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목숨과 자신의 가족보다 우리에게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행복과 소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누구나 자신과 가족의 행복을 위해 '좀 더' 모으고 벌어야지 하며 살아간다고 단정해도 과언이 아닌 듯싶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것마저도 버려야 하고 더구나 십자가까지 짊어져야 한다고 제안하십니다. 그러니 제자의 여정, 아니 신앙의 여정이란 그리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비유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 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루카 14,28-30).
 
이 비유에 나오는 탑이란 세상 사람들이 그 안에 계속 쌓아두고 지키고 싶어하는 부와 행복을 나타냅니다. 인간 역사란 하늘에 까지 닿는 가장 높은 탑의 건설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 탑에 자신의 소유 뿐 아니라 하느님도 가둬버립니다.
 
오늘날 교회 공동체도 세상 권력과 소유의 도구들을 얻기 위한 탑을 쌓으려 세상과 경합을 벌이는 유혹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 뿌리에는 항상 좋은 의미의 선한 사용과 효율적인 복음 선교라는 명분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의 정체성과 유일한 힘이 십자가에서 흘러나온다는 사실을 때로는 잊어버리고 헛된 가치들을 얻으려고 총력을 기울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은 세상에 주님 십자가를 증거하려고 부르심을 받은 것이지, 세속적 능력과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물론 주님의 제자들도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지만 그것을 쌓는 가치 기준이 다릅니다. 교회 공동체는 주님께서 광야에서 거절하셨던 그 유혹들(루카 4,1-13)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 가치들을 이용할 때 그 방향이 옳은 것인지 항상 깊이 식별하고 성찰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시작한 신앙의 여정은 이해타산을 헤아려 그만 둘 수는 없는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파도바의 안토니오 성인께서 소유에 대한 이런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성인은 소유욕이 강한 어느 수도자에게 수도생활을 올바르게 하기를 간절히 바라면, 윗옷을 벗고 맨 몸에 생고기를 매단 채 마을을 한 바퀴 돌아오라고 충고했답니다. 수도자는 성인이 시킨대로 하고 마을을 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수도자 등 뒤에 매달린 생고기 냄새에 마을의 온 개떼들이 수도자를 쫓아오기 시작했습니다. 한참 후에 돌아 온 수도자는 온 몸이 상처투성이로 찢겨져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안토니오 성인께서 이렇게 가르쳐주셨답니다.
 
"누구든지 세상의 부를 버리지 않고 모든 것을 소유하려 한다면, 사탄이 그것으로 분열과 시기의 전쟁을 일으켜 영적인 마음을 이렇게 모두 갈기갈기 찢어 놓을 것입니다."
 
두 번째 비유에 나오는 두 임금이란 서로 대립하는 하느님과 사탄을 상징합니다. 여기서 평화협정은 "당신이 내 앞에 경배하면 모두 당신 차지가 될 것이오"(루카 4,7)하는 말을 기억하게 합니다. 강력한 임금처럼 보이는 사탄은 사람들이 탑 안에 축적하고 싶어하는 세상의 모든 것을 줄 수 있다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반면에 사람을 섬기는 임금인 주님의 종과 같은 삶은 너무나도 미약해 보입니다. 그러나 미약해 보이는 약한 삶에서 주님의 놀라운 힘이 완전히 드러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2코린 12,9-10).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거룩한 영을(지혜 9,17) 받지 않고는 하느님의 뜻, 아니 이 세상일조차도 잘 알 수 없는 미약하고 작은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의 참된 힘은 자신의 미약함에 있습니다. 자신이 약하다고 믿기에 주님을 믿고 의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은총입니다.

홍승모 신부
  |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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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정체성! 생각해 보셨나요?

한국인에게 스타벅스가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지 의문이다. 이 커피전문점으로 인해 생긴 된장녀라는 신조어가 우리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자극하는 씁쓸한 인상을 남기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년 전 스타벅스의 회장인 슐츠가 회사 간부들에게 보낸 짧은 글은 교우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스타벅스 체인점이 확대되면서 자동 에스프레소 기계가 갈수록 널리 쓰이고 있다. 이것이 효율적일지는 모르지만 스타벅스 직원의 손맛과 커피내리는 낭만적인 모습과 분위기를 앗아갔다. 이 때문에 일부 고객의 입에서 벌써 ‘예전의 스타벅스가 아니다’라는 불평이 나오기 시작했음을 명심해야 한다.”

슐츠가 이러한 글을 간부들에게 전한 이유는 스타벅스가 정체성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슐츠가 생각하는 스타벅스는 친근한 바리스타가 손님들의 취향에 맞는 좋은 품질의 커피콩을 직접 볶아 최상의 커피를 손수 만들어서 내놓고,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친밀한 관계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또한 고풍스런 공간 안에서 고급스런 취향의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나 낭만을 즐기고 문화를 얘기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느껴지는 곳이다. 스타벅스가 단순히 커피를 판매하는 곳이 아니라 문화를 파는 공간이 되게 하는 것, 이것이 스타벅스의 정체성이다. 정체성의 위기를 최고경영자가 설파하고 있음에도 일부 스타벅스 커피전문점에서는 편의를 추구하고 있다. 정체성에서 멀어질 때 스타벅스는 일반 패스트푸드점과 구별이 되지 않는다. 이는 곧 스타벅스의 자멸로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슐츠는 그 위기감을 느낀 것이다.

정체성의 위기는 우리 신앙인에게도 묵상거리가 된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정체성은 무엇일까?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는 군중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가 내게로 오면서, 제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제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는다면 내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아마도 이 구절을 읽는 많은 교우들은 혼란스러워 할 것이다. 혼란의 원인은 어법의 차이에 있다. 예수님의 모국어인 히브리어와 아람어에는 비교급이 없기 때문에 ‘덜 사랑하다’를 ‘미워하다’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이 구절도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혈연관계보다도 하느님의 뜻을 더 소중히 여겨야 예수님의 제자로 적합하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정체성은 이들이 어떠한 처지에 놓이더라도 예수님의 뜻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것에서 드러난다. 신앙인이 정체성을 잃어버리면 사이비(似而非)가 된다. 즉 ‘겉으로는 제법 비슷하지만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우리네 인생의 길고 긴 여정에서 뭔가 보람을 느끼고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면 자신의 확실한 정체성에 바탕을 둔 선명한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예수님의 제자라는 정체성이 내 인생의 길잡이가 될 때 구원이 나와 발맞춰 걸어가게 될 것이다.

박병석 요셉 신부
  |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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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나를 미워해 보자

“인생은 위험한 줄 알면서 뛰어드는 모험이다. 위험한 모험에 뛰어들어보지 않았다면, 당신은 아직 살고 있는 게 아니다. 모험으로 가득한 인생… 그건 샴페인 맛이다.”

이집트 카이로 빈민가에서 넝마주의와 함께 생을 보낸 엠마뉘엘 수녀님의 글이다. 참 멋진 인생을 살다가 떠난 수녀님의 인생을 읽어 내려가면서 어떤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하게 해주었고, 내 삶을 뒤돌아보게 해주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 26)라고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신다. 그렇다! 예수님께 다가가는 삶은 ‘인생은 위험할 줄 알면서 뛰어드는 모험’이리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미워하는 삶은 위험할 줄 알면서 뛰어드는 모험이다.

우리는 편안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지도 모른다. 어느 정도의 자산을 가지고 있으면서,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여유롭게 여행도 하면서, 남들에게 여유가 되면 자선을 베풀고 살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편, 내가 변화하려고 할 때 나의 주변의 흔들리는 모습을 보면 나 역시 흔들리는 것이 사실이다. 부모가 “어쩌라고, 가족을 버리느냐?”라고 말하고, 남편과 아내, 그리고 자식이 “우리에게 책임이 있지 않느냐”고 말한다면 우린 쉽게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그래서인지 오늘 복음은 그저 회피하고 싶다. 나에게 맞는 복음만 찾아내어 살 수만 있다면 행복할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삶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 더 냉혹하게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 33)라고 말씀하신다.

오늘 복음 말씀대로 살려고 한다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해야 한다. 철저하게 자기의 합리화에 부정하여야 한다. 우리 스스로 자신을 합리화하기 때문에 자꾸 예수님의 말씀을 자기 환경에 맞추어 합리화하면서 살았다고 본다. 자기 자신을 미워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의 소유를 다 버리지 않으면 예수님께 갈 수 없다. 위험한 모험이다. 자신에게 위험한 모험을 감행해야 한다.

마하트마 간디는 “우리가 세상에서 보고 싶어 하는 변화, 우리 자신이 바로 그 변화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세상이 변화하기 위해선 바로 내 자신이 변화해야 한다. 그 변화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한 삶이라면 바로 내 자신의 변화가 있어야 하며, 자기 소유를 내놓지 않는다면 그러한 변화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나를 미워하지 않으면 변화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인천교구 박요환 요한 세례자 신부>
  |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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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일정표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서 여러 곳에 저의 일정을 남겨둡니다. 스마트폰은 기본이고, 컴퓨터에도 똑같은 일정이 저장되어 있습니다. 또한 들고 다니는 수첩에도 그리고 사무실 칠판에도 일정표가 적혀 있습니다. 무려 4군데에다가 똑같은 일정을 적고 있는 것이지요. 이는 예전에 어떤 본당에서 강의를 하기로 했다가 일정을 적지 않아 펑크를 냈던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머릿속으로만 기억하고 있다가 큰 실수를 한 것입니다. 그 뒤에는 혹시라도 약속을 펑크 내지 않을까 싶어서 여러 곳에 일정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이렇게 일정표를 이용하다보니 일을 훨씬 계획성 있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계획 없이 그냥 시간 가는대로 일을 한다면 어떨까요?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실수가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많아질 것입니다.

세상의 일을 잘 하기 위해서는 계획성 있게 해야 하고, 또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계획을 세워서 철저히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일에 대해서는 계획을 세우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냥 시간이 나면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냥 막연하게 언젠가는 하느님의 일을 할 것이라고 말만 할 뿐입니다. 더 중요한 하느님의 일을 이렇게 계획 없이 제대로 할 수 있을까요?

얼마 전에 이런 분을 만났습니다.

“신부님, 요즘 너무 바빠서 성당에 못 나갔어요. 그런데 이제 좀 한가해지니까 열심히 성당에 다니겠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이 단순히 자신의 컨디션에 따라서,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의 양에 따라 결정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신중한 작전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시지요. 그래서 탑의 비유, 적과 맞서고 있는 임금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용의주도한 계획이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이러한 준비보다는 앞선 형제님처럼 순간적인 기분만을 쫓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순간적인 기분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막연하게 하느님의 일을 할 것이라는 예상만으로 들어갈 수 있는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철저한 계획과 노력을 통해서만 간신히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계획의 첫 번째에는 하느님을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중요한 분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시지요.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하느님 아버지를 가장 윗자리에 모셔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시기 위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우리들의 준비와 노력들을 다시금 점검해야 할 때입니다.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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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삶 속의 작은 순교”

미사가 끝나고 신자들과 인사를 나눌 때면 많은 분들이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합니다. 제가 무엇을 잘해서 감사의 인사를 받는 것이 아니라, 사제가 “교회와 세상 앞에서 늘 새롭고 항구한 구원의 원천이신 그리스도를 가시적이고 성사적으로 연장하는 표지”(현대의 사제양성, 16항)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도구가 되는 사제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시는 것이겠죠. 세상의 가치에 얽매이지 않으며 성사를 집전하고, 정결을 지키는 사제의 삶이 사람들에게 이 세상의 가치를 뛰어넘는 고귀한 가치가 있고, 하느님 나라라는 참 행복의 나라에 들어갈 희망이 있음을 드러내 보여주기 때문에 사제의 삶은 그 자체로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제라는 존재 자체가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을 이미 군 시절에 체험한 적이 있습니다. 천주교 신부가 되려고 한다고 이야기를 하면, 선임들로부터 수많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결혼은 하는지, 여자 친구는 사귀어도 되는지, 돈은 얼마나 버는지 하나하나 물어보고 나서 선임들이 보이는 반응은 한결같았습니다. ‘이상한 애가 들어왔다.’ 그러던 어느 날, 선임 중의 한 명이 전역 전날 제게 말했습니다. “아직도 너를 이해할 수 없지만 내가 지금껏 추구하던 것과는 다른 뭔가가 있다는 생각은 하게 되었다”고.

자신의 삶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일, 이 세상을 넘어서는 참된 가치가 있음을 알리는 일은 사제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지혜를 받은 우리 모두의 사명입니다. 그 방법은 어떤 특별한 시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제가 사제의 삶으로서 하느님 나라를 향한 희망을 보여주듯이, 우리 모두가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찾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가정이나 직장이나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내가 짊어지고 있는 일이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인이 종을 형제로 여기듯이, 세상의 틀을 넘어서야 합니다. 사업을 하면서 경제적 이익보다는 양심에 따라 바른 선택을 해야 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분노하고 좌절하기보다는 주님을 향한 희망을 가지고 평화를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사람들이 우리의 모습을 보고, ‘저 사람들은 뭔가 다르구나. 내가 알지 못하는 중요한 무엇인가가 있구나.’ 하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은 순교자 성월의 첫 주일입니다. 오늘날 피의 순교를 할 수는 없지만, 내게 맡겨진 일상적인 일들 속에서 기꺼이 십자가를 지면서, 언제나 그리스도께 대한 희망으로 웃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작은 순교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시대의 순교자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 인천교구 구본영 제랄드 신부 2016년 9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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