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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내 삶의 첫째가 무엇인가?
조회수 | 2,361
작성일 | 07.09.08
예수님을 메시아로 생각하던 제자들과 군중들은 공생활의 마지막이 다가오자 예수님이 세속적인 왕이 되실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기대하고는 다르게 자신이 겪을 수난을 앞두고 예수님은 제자들과 군중들에게 가끔 비관적인 말씀과 과격한 말씀을 하곤 해서 그들을 실망시키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자신을 따르는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단호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게로 오면서, 제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내와 자식들과 형제들과 자매들과 제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는다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복음에 나오는 ‘미워하라(Hate)’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제자들이나 우리들이 실천하기 어려운 요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용은 전형적인 히브리어와 아람어의 표현입니다. 이들 말에는 비교급이 없기 때문에 ‘덜 사랑하다’를 ‘미워하다’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따라서 미워한다는 말은 어떤 것을 덜 좋아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부모나 자식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해야 자신을 따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무슨 일을 하던지 그리스도가 내 삶의 첫째가 되어야 합니다. 취미 생활과 세속적인 쾌락, 재물과 권력, 교만과 야망 등이 우리 생활의 첫째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의 십계명이 우리 생활의 첫째가 되고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예수님은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는 확고한 결심과 희생이 요구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자세를 가지고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두 가지 예를 들었습니다. 하나는 탑을 세울 때 자금이 제대로 있는지 생각해 보는 것이고, 다음은 임금이 전쟁을 치르기 전에 승산이 있는지 심사숙고해 보고 결정을 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가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하루에 잠깐이라도 하늘에 계신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고 있는지? 평소에 수계생활을 잘 하고 있는지?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리스도가 첫째가 되고 나의 삶의 중심이 되는지? 만약 이러한 질문에 ‘그렇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산교구 염봉덕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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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결국 버리고 떠나야 할 것에 애착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은 당신에게 오려는 사람은 부모, 처자, 형제자매,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라야 한다고도 말씀하십니다. 부모, 처자, 형제자매, 그리고 자기 자신은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이고 또 당연히 사랑해야 하는 대상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미워한다는 단어는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애착하는 것이고, 미워하는 것은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부모, 처자, 형제자매라는 가족적 유대에 집착하지 말아야 하고, 자기 자신에게도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의 방식이고 초기 신앙인들의 실천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한 초기 한국 교회의 순교자들이 목숨을 잃으면서까지 실천한 바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가족이나 자신에게 집착하셨으면, 십자가는 없었을 것입니다. 초기 교회 신앙인들이 가족이나 자기 자신에게 집착하였으면, 목숨을 잃으면서까지 신앙을 증언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말씀과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신앙인이 되는 것은 큰 희생을 각오하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이어서 망대를 짓는 사람이 성공하려면 계획성 있게 행동한다는 말과, 전쟁터에 나가는 임금은 치밀한 계산과 준비를 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신앙인이 되는 것은 일시적 기분이나 체면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신중하게 계획하고 어려움을 무릅쓴 헌신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신앙은 자기 자신과 자기가 애착하였던 인연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열리는 새로운 삶을 사는 길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지만 또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실천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말씀 따라 살던 사람들이 그들의 실천을 기록하여 남긴 문서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가족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가족에게만 집착하는 사람은 큰일을 이루지 못합니다. 부모에게만 집착하는 아동은 학교에 가도 적응하지 못합니다. 청년이 되어서도 직업인으로 적응하지 못할 것입니다. 가족에게만 집착하는 사람은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들지 못합니다. 창세기는 결혼에 대해 말하면서 “사람은 자기 부모를 떠나 자기 배우자와 결합하여 한 몸이 된다.”(창세 2,24 참조)고 선언합니다. 부모를 떠나지 못하는 자녀, 자녀를 떠나보내지 못하는 부모는 모두 불행합니다. 태아가 성숙하고도 모태를 떠나지 않으면, 살지 못합니다. 모태를 떠나 자기가 살 세상을 만나고 거기서 새로운 인연들을 만들면서 생명은 자라고 성숙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자기중심적 삶을 버리고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인연들을 만들며 살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루가 10,29-37)를 우리는 잘 압니다. 길에서 강도를 만나 죽게 된 사람을 보고 사제도 그냥 지나가고 레위도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현재 사제로서 또 레위로서 누리고 있는 인연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 자신이 이미 가진 인연들을 잊고 자기가 새롭게 만난 사람, 곧 강도 맞은 사람과의 인연을 소중히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 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자기 자신과 자기가 이미 가진 인연에 집착하지 않고, 자기를 필요로 하는 새로운 인연에 몰두합니다. 그것은 자기가 가진 인연에만 집착하는 미숙함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자기 앞에 던져진 새로운 생명을 위해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예수님이 병든 이를 고치고, 죄인으로 낙인찍힌 이에게 용서를 선포하신 것은 하느님의 일을 하신 것이었습니다. 베짜다 못가의 병든 이를 고쳐놓고 말씀하십니다. “지금도 내 아버지께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고 있습니다.”(요한 5,17). 사람을 살리는 것이 하느님의 일입니다. 그것은 과거의 인연에만 머물지 않고, 새로운 인연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고통일 수도 있습니다. 신앙은 내 일신의 안일과 행복을 보장받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신앙은 자기의 삶 안에 하느님이 살아계시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이기심과 배타성을 넘어서, 하느님이라는 바다가 우리 안에 흘러들어 출렁이게 하는 일입니다. 바다이신 하느님은 생명을 있게 하신 분입니다. 모든 생명을 살리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의 생명을 위해 노력할 때, 하느님이신 바다는 우리 안에 출렁입니다.

가족과의 인연은 좋은 것이고, 은혜롭게 주어진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고 살아가기 위해 베풀어진 인연이고 버팀목입니다. 그러나 바다와 같은 하느님의 생명이 내 안에 출렁이면, 휩쓸려 버릴 수도 있는 버팀목들입니다. 부모님도 떠나시고, 선배들도 떠나고, 친구들도 떠나갑니다. 어느 날 나도 떠나면서 내 생존을 위해 버티어 주던 모든 것이 나와 헤어지고 맙니다.

예수님은 그 바다와 같으신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하느님의 일이 당신 안에 파도가 되어 출렁이며 일하게 하셨습니다. 십자가도 마다하지 않으며, 바다이신 하느님이 당신 안에 파도를 일으키며 일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떠나서도 하느님 안에 살아계십니다. 그것이 그분이 부활하셔다는 믿음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말씀은 우리의 생존을 위해 우리를 버티어 주었던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새로운 인연들을 소중히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앞에서 인용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예화는 우리가 소중히 생각해해야 할 인연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 줍니다.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에게 스스로를 버려서 하느님의 큰 생명을 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자기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자비롭게 행동하고, 용서하면서 하느님의 큰 생명을 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장차 버리고 떠나야 할 것에 애착하고 집착하며 삽니다. 가족과의 인연에 갇히고, 가진 것에 발목을 잡혀서 제자리걸음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사는 우물만 알지 하느님이라는 바다를 만나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이미 주어진 인연들을 넘어서 하느님이라는 바다를 영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생명이 작은 파도가 되어 우리 안에 살아 있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고 살리는 작은 파도들을 주변에 일으키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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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과 추종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장사의 논리(論理)로 살아간다. 실제로 장사를 하며 사는 사람들도 많고, 장사를 하지는 않더라도 장사의 논리에 입각하여 사는 사람들도 많다. 장사는 이윤을 남기는데 목적이 있다. 밑지는 장사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적은 투자로 몇 배, 몇 십 배의 이윤을 남기고, 가장 싸게 구입해서 가장 비싸게 파는 일은 모든 장사꾼의 바람이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장사의 논리로 산다는 말은 내가 이만큼 투자하면 얼마만큼 크게 벌 수 있는가를 생각하며, 적은 것으로 많은 것을 바란다는 말이다. 때로는 수고 없이 공짜를 바라는 수도 있다. 신자들이 하느님을 믿는 데는 어떤가? 여기도 장사의 논리가 적용될까? 그렇다. 적용된다. 하느님과 세상의 재물을 놓고 늘 갈등하는 우리들이 아닌가? 많은 신자들은 어떻게 하면 가장 싸게 하느님을 믿고, 그렇게 해서 하늘나라를 얻을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물론 늘 자신의 믿음이 부족하다고 여기며 열심히 사는 신자들도 많고, 이름만 신자인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대충 그리고 약간의 신앙생활로 세상과 하느님을 절충하는 타협형 신자들이 더 많다는 것이 현실이다. 하늘나라 행(行) 열차를 탈 수만 있다면 구석자리도 좋고, 아니면 입석(立席)이라도 괜찮다는 태평형의 신자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가 되는 조건으로 가진 것을 모두 내어놓으라고 하신다. 심지어는 목숨까지도 말이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이건데 몽땅 내어놓으라는 것인가?

예수께서 식사초대를 받으셨던 바리사이파 사람의 집에서(루가 14,1)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시금 여정에 오르셨다. 이 여정은 예루살렘을 향한 길이고, 죽음을 향한 길이다. 많은 군중이 예수를 동행하였다. 인생의 여정에 동행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다. 그런데 어디까지 동행할 수 있을 것인가? 예수를 따르는 군중은 과연 예수를 어디까지 동행할 수 있을까? 오늘은 예수께서 ‘당신과의 동행’의 의미를 밝혀주신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의 골고타에서 자기 생애의 최후를 십자가 죽음으로 맞이하실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어떤 동행자도 예수와 똑같은 방법으로 십자가 죽음을 맞이할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동행의 의미는 곧 추종의 의미로 그 정도가 다소 약화된다. 동행(同行)은 예수와 끝까지 함께 가는 것이나, 추종(追從)은 예수를 따르는 것, 즉 제자 됨의 길을 걷는 것이다. 추종 또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오늘 복음이 제시하는 예수추종의 조건은 크게 두 가지로 집약된다. 첫째는 자기부정이다.(26절) 자기부정은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것인데, 이는 부모, 처자, 형제자매, 친구까지 미워하는 것으로 비약된다. 둘째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27절) 여기서 강조되는 점은 ‘자기 십자가’이다. 다른 누구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다.

우리가 대학교육 수학능력을 평가하는 시험, 즉 수능시험을 치른다고 할 때 쳐야할 과목을 크게 일반 공통과목과 특수 선택과목으로 나누듯이, 예수추종(제자 됨)의 조건에도 공통과 선택이 있다. 공통에 해당하는 것이 첫 번째 추종조건인 자기부정이다. 선택에 해당하는 것이 두 번째 조건인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추종하려는 누구에게나 같은 방법을 요구하거나 강요하지 않으신다. 망대를 지으려는 사람이 그만한 비용이 있는가를 곰곰이 따지거나, 일 만의 군사로 이 만의 군사와 전쟁을 치르려는 임금이 승산(勝算)이 없다고 판단되면 즉각 상대방 임금에게 화평(和平)을 청하듯이(28-32절), 예수추종의 기본정신은 자기부정이지만, 추종의 방법은 다양하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요구하시지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시지는 않으실 것이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이 강조하듯이 추종의 기본정신인 자기부정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리는 것’(33절)으로 요약된다. 가진 것을 모두 버리라고 해서 버릴 것을 그저 물질적인 재물이나 재산만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내가 주님을 따르는데 무엇을 버려야 할지를 앉아서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명예와 권력, 고집과 아집, 이기심과 욕심, 위선과 착취, 취미와 재미 등, 때로는 정말 재물과 재산, 내가 가장 아끼는 소유물, 부모나 형제자매, 친구가 될 수도 있다. 무엇이든 그것이 예수추종에 걸림돌이 된다면, 사탄과 악습의 굴레에 사로잡힐 것이 된다면, 과감하게 버려야 하는 것이다. 예수를 위해 무엇이라도 버려보지 않은 사람은 예수추종의 맛을 결코 느끼지 못한다. 자기 것으로 가득 찬 그릇을 비로소 비울 때 그 빈 곳에 예수추종의 기쁨이 채워질 것이다. 그 기쁨은 다름 아닌 자신의 모든 것을 아버지께 바친 예수께서 맛보신 기쁨이며, 그분께서 주시는 기쁨이다.

부산교구 박상대 신부
  |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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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현존, 예수님의 말씀, 우리안에 이는 파도....감사합니다.
  |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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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제자가 아니오.

어떤 사람이 훌륭한 한 학자에게 한 젊은이에 관해서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당신의 제자 중 한 사람이라고 이러한 말을 하더군요.”라고 그가 말했을 때 그 학자는 냉담한 반응을 보이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가 내 강의에 출석은 했을지 모르지만 내 제자가 아니오.” 강의에 출석하는 것과 제자가 된다는 것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동행하던 군중을 향하여 참 제자 되는 지혜의 말씀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가 형제 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마태 14, 26) 어떻게 사랑하는 가족들과 자신을 미워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미워하다는 말은 심리적 미움이 아니라 예수님께 절대적인 우선권을 주는 완전한 위탁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모국어인 아람어나 히브리어에서는 비교급이 없기 때문에 덜 사랑하다란 의미를 종종 미워하다란 말로 표현합니다. 때문에 여기서 예수님을 더 사랑하기 위해 가족과 자기 자신을 덜 사랑해야 한다는 비교적 의미로 해석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마태 14. 27) 여기서 “십자가를 짊어지다”는 십자가를 소중한 보물로 알고 품에 안고 따라야 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모든 십자가가 마지막 주님 심판대 앞에서는 천국 문으로 들어가게 만드는 보물로 바뀌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마태 14.33) 아프리카의 어느 곳에서는 원숭이를 잡을 때 항아리 안에다 과일을 넣고 기다린다고 합니다. 항아리 입구는 손이 겨우 들어 갈 수 있지만 항아리 안에서 과일을 잡았을 때는 손을 빼지 못하는 작은 입구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항아리 덫을 설치하고 느긋하게 기다리면 원숭이가 과일을 먹기 위해 항아리 안에 손을 넣게 되고 사냥꾼이 와도 움켜잡은 과일을 절대 놓지 않는 성질을 이용해 원숭이 사냥을 한다고 합니다. 원숭이는 자기가 움켜잡은 과일을 포기하지 못해 자신의 생명을 사냥꾼에게 내어 주는 것처럼 우리 자신들도 물질 우상의 덫이나 명예, 교만의 덫에 걸려들 때 원숭이의 꼴이 되지 말라는 법도 없을 것입니다.

성당에서는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하며 참 예수님의 제자로 보이지만 성당 문만 나서면 무늬만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교우들이 종종 있다고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해 "미사에는 참석했을지 모르지만 내 제자가 아니오”라는 말씀을 듣지 않기를 바라며 예수님을이내 영혼의 첫 자리를 차지하게 하고 매일 지고 가는 십자가를 소중한 하느님의 선물로 여기며 이기주의적인 탐욕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서는 참 제자의 길을 나설 수 있게 주님의 은총을 청해 봅니다. 아멘.

임영민 안드레아 신부
  |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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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신앙의 열정

사람이 살면서 열정을 잃어버리고 산다면 그 사람의 인생이 행복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 말씀은 이러한 열정을 잃지 않고 살기를 바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특히 하느님을 믿고 산다는 사람들이 신앙에 대한 열정을 잃고 산다는 것은 하느님께 커다란 불충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과 공동체의 올바른 목적과 목표를 위해서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함을 지적하고, 또한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면서 주님의 십자가를 잃어버려 신앙의 생명과 함께 자신의 영혼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지적합니다.

열정이 사라졌다는 것은 우리에게 희망과 소망이 사라졌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권태감이 자리를 잡게 됩니다. 희망을 잃어버리고 자신에게 용기와 힘을 주는 원동력이 사라졌을 때 권태감은 나를 지배하게 됩니다.

나에게 권태감을 주는 모든 것을 주님께서는 미워하라고 하십니다. 열정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미워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복수를 위한 미움이 아닙니다. 나의 탐욕을 자극하는 것에 대한 미움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한 열정과 나의 삶을 행복하게 하는 힘과 용기를 되찾는 열정입니다. 지금 권태로움에서 해방되어 주님 사랑의 행복을 되찾는 것이라고 오늘 복음 말씀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교회와 교회 밖에서 많은 봉사와 희생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찾고자 합니다. 그러나 열정이 사라진 봉사와 희생은 하느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욕심이며, 자존심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한 작은 행동일 뿐입니다. 그저 일상에서 주어진 습관으로 행동하고 그것이 자신을 지탱해 주는 자산이라고 생각될 뿐입니다. 그래서 작은 것에 상처를 받고 실망하게 됩니다. 자신의 선택과 판단에 용기를 부여하기보다는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더 빛나는 봉사와 희생을 찾으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봉사와 희생은 열정을 살려주기보다는 권태감을 부채질할 뿐입니다. 자신을 버리고, 주님의 열정을 찾아 거기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 대해 오늘 복음 말씀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열정을 찾는 일은 삶의 열정을 찾는 일입니다. 신앙의 열정이 식었다면 삶의 열정 역시 식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숫자에 불과한 나이에 자신의 열정을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경제가 어렵다고 우리의 열정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이 예전 같지 않다고 나의 열정을 쉬게 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열정은 항상 살아 숨쉬는 신앙인의 생명이며 삶의 원동력입니다. 이것을 방해하는 것들을 오늘 주님께서는 미움이라는 단어로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순교자 성월인 9월은 더욱 분명하게 우리의 열정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부산교구 조동성 요셉 신부>
  |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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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더 오래갈 것들

세상엔 참 좋은 것들이 많습니다. 소중히 간직하고 싶은 것도, 곱게 물려주고 싶은 것도 참 많습니다.

사랑, 우정, 희망 같은 아름다운 어휘들과 이를 위한 약속, 계획, 실천 같은 단어들 그리고 이를 드러내는 감사, 성취, 보람 등이죠. 이 조합들이 특정 상황에서 우리를 미소 짓게도 하고 울리기도 합니다. 그 자체로 묵묵히 살아갈 힘이 되어 주기도 합니다.

비록 지금은 아닐지라도 언젠가라는 희망에서 참으로 좋은 말들을 많이도 하고, 많이도 퍼 나릅니다.“만약 사랑에도 유효기간이 있다면, 나의 사랑은 만년으로 하고 싶다.”(영화‘중경삼림’에서)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멋진 말입니다. 그러나 그만큼 오래 살 자신이 없어서.

어떤 이가 간절히 기도한 끝에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하느님,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죠.”“성가 423장에 그렇다고 하더구나.”“하느님, 그럼 천억도 주님 보시기엔 그저 1원 정도겠죠?”“그 정도겠네.”“그럼 그 1원 저에게 주시면 안 돼요?”“그래. 내일 줄게.” 이제 기쁘게 천년을 기다려야겠지요. 그래도 유통기간‘만년’보다는 짧습니다.

사실 우리는 그렇게 기다릴 자신도 능력도 없습니다.“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마태 26, 41)는 말씀이 맞습니다. 우리는 아쉽게도, 생각하는 것에 비해 많이 부족합니다. 계획은 쉽게 세우지만 그것을 실행하기는 어렵고, 특히 오랫동안 지켜가기는 너무나 허약합니다.

복음에 나오는‘탑 짓는 이들’처럼 시작은 했으나 끝을 보지 못하는 성급함이 우리 대부분의 결점입니다. 물자와 자본이 넘치는 호황기에 시작해서 정작 완성될 때는 낭패를 보게 되는‘마천루의 저주’가 예사 이야기 아닌 고민해야 할 현실이 된 상황에서 우리는 따져 보아야 합니다.

말 한마디 먼저 했다고 해서, 그 약속이 좀 더 크다고 해서, 그 범위가 더 넓다고 해서 아름답거나 특별히 더 기억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천년만년’은 아니지만 이 짧은‘백 년’을 두고, 더 오래가고 아름다울 봉헌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살아야 할지, 얼마나 충실해야 할지 주님 앞에서 셈해 보았으면 합니다.

▮ 부산교구 서진영 신부 2016년 9월 4일
  |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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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하느님 뜻에 모든 것을 맡겨라

성경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 곧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으며, 그분의 뜻을 지키는 것이 참으로 지혜로운 길이라고 가르칩니다. 세상의 창조주요 모든 사물에 이치를 마련해 놓으신 하느님의 뜻과 계획을 알고 그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참으로 지혜로운 삶이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지혜 자체이시고 하느님만이 참으로 지혜로운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1독서의 지혜서는 인간 가운데 그 누구도 스스로의 힘으로, 스스로의 노력으로 지혜를 깨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죽어야 할 인간의 생각은 언제나 보잘 것 없으며, 속마음은 변덕스럽기 그지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이치를 아무리 많이 깨치고 있는 현자라도 인간인 이상 스스로 하늘과 땅의 모든 이치를 깨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느님께서 지혜를 알려주시지 않으면,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지혜로워질 수 없습니다.

신약성경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만이 하느님의 지혜를 온전히 알고, 우리들에게 알려주실 수 있다고 선포합니다. 예수님이 하느님 지혜 자체이시라고 강조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도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지혜를 알려주십니다. 그 가르침은 바로 이것입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36)

인간적으로 볼 때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께서 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라고 말씀하시니 당혹스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이끄심으로 복음에 눈을 뜬 이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참으로 지혜로운 말씀임을 압니다. 자기 가족, 자기 목숨마저 내어놓지 않으면 결코 하느님을 온전히 섬길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루카 14,33도 아버지, 어머니, 아내, 자녀, 자기 목숨 등을 “자기 소유”라고 바꾸어 표현하며 그것을 모두 버리라고 권고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이 소유한 것을 지키려고 하며, 그것에 의지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모습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데, 하느님의 지혜를 깨치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오직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분만을 의지하는 삶을 살라고 권고하신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진정 예수님의 제자라고 불릴 것입니다.

물론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의도적으로 자기 가족을 미워하고, 자신을 미워하는 삶을 살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괜히 가족들 안에서 분란을 일으켜서도 안 됩니다. 다만, 가족이나 자신의 목숨을 자기 소유라고 생각하며 그 소유만을 위해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가족이나 목숨이나 모든 것은 하느님의 소유이니, 하느님의 뜻에 따라 모든 것을 맡기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나도 살고, 내 가족도 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당신 바라시는 대로 나를, 또 나의 가족들을 이끌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 부산교구 염철호 신부 2016년 9월 4일
  |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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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색을 아십니까? 하늘의 색을 아십니까? 예, 푸른색입니다. 바다와 하늘의 색은 같습니다. 그런데 바다와 하늘이 자신의 색을 가꾸고 지키는 방법은 정반대입니다. 바다는 자신의 색을 간직하고 드러내기 위해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반면 하늘은 자신의 고유한 색을 드러내기 위해 구름을 땅에 버려야 합니다. 같은 푸른색을 간직하기 위해 바다는 받아들이고, 하늘은 버립니다.

받아들임과 버림은 인간의 중요한 활동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죽는 순간까지 물질적인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수없이 많은 받아들임과 버림을 반복합니다. 모든 교육은 좋은 것, 올바른 것은 받아들이고, 그 반대의 것은 버려야 함을 말합니다. 올바른 지향으로 받아들임과 버림을 병행할 줄 아는 사람을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자기의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또한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려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 곧 하느님을 잘 섬기는 것이 우리 생의 목적임을 기억하면서 이 말씀을 이해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받아들임은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십자가는 인류구원을 위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예수님께서 짊어지신 고통의 상징입니다. 불만족스럽고, 고통스러운 일들은 매일 우리 앞에 놓여있습니다. 하필 내가 이 일을 해야 하는가? 왜 이런 사람을 만나 고생하는가? 이런 고민에 빠질 때 편하게 살아가는 방법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세상 구원을 위해, 나의 구원을 위해서 그러한 고통들을 기꺼이 맞아들이길 원하십니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린다함은 하느님과 우리 자신과의 올바른 관계를 위해서입니다. 사실 우리가 가진 것은 우리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가진 것을 내 것으로 생각하며 움켜쥐려고만 한다면 하느님과 나와의 순수한 만남은 어려워집니다. 가장 소중한 하느님을 놓치지 않기 위해 방해되는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주어진 상황이나 지나간 일에 대해서 넋두리하는 사람보단 역경을 견디며 자기 인생을 개척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 우리는 삶에 대한 새로운 자극을 받게 됩니다. 십자가는 고통을 위한 고통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위한 자극입니다. 올바른 받아들임과 버림이 병행되는 삶이 우리의 삶이어야 합니다. 개인적인 욕심을 버리고, 주님께서 주신 십자가를 받아들일 때 우리는 우리 안에 함께 숨쉬는 하느님을 만나게 되고, 우리의 참 모습을 되찾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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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창신 신부
  | 09.07
449 52.4%
[부산]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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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 사도는 오늘 그곳에는 예수님을 좇는 거대한 무리가 있었다고 전합니다. 그 당시에 예수님에 관한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던 덕이었을 텐데요. 그곳에 온 대부분의 사람은 예수님의 기적을 구경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소문으로 들었던 놀라운 기적을 기대하며 숨죽여 주님을 주시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마음은 콩밭에 계신 듯 보입니다. 뭔가 신기하고 멋진 일을 기대하고 몰려든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계시니까요.

그날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해야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을 듣고 많은 사람의 마음이 거북했을 겁니다. 하물며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이나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도 죄다 당신 제자의 자격이 없다는 말씀에 도대체 뭔 얘긴지…… 어안이 벙벙한 채 걸음을 돌리는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도대체 받아들이기 힘든 폭탄선언에 많은 이들이 실망했을 테니까요. 어리둥절하고 망연자실한 마음은 제자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을 듯한데요. 아연실색하여 주님을 말리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째서 이렇게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말씀으로 사람들을 실망시키시는지, 따지고 싶었을 것도 같습니다.

물론 오늘날의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의 이르심이 결코 가족을 모른 척하고 살아가는 냉혈한이 되라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주님의 말씀의 심지는 당신 제자가 갖추어야 할 마음가짐의 우선순위를 밝힌 것이라는 점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니까요. 때문에 우리는 오늘 복음말씀을 들으면서 어리둥절해 하거나 뜨악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과연 당신께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지 여쭙고 싶습니다.

주일마다 미사에 참례하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지만 그저 막연하게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며 구세주라고 생각만 할 뿐 주님을 따를 생각은 전혀 없는 ‘남’처럼 지내는 것은 아닌지 캐묻고 싶어집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스스로의 삶이 법의 테두리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 교회의 전례에 빠지지 않고 참석한다거나 교리를 열심히 공부했다는 사실만으로 마치 주님을 잘, 제대로 따라가는 줄 착각하니 말입니다. 결국 예수님에 관한 지식을 정녕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 형성의 최고봉인 양 여기는 오해가 만연하니 말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나를 믿으라’는 말씀을 네 번 하신 것으로 기록합니다. 그에 비해서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스무 번이나 하셨다고 밝힙니다. 이야말로 주님을 아는 것을 넘어서 제대로 된 구원자임에 감격할 때에만 비로소 당신을 제대로 따를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요?

사실 예수님의 공생활을 가장 힘들게 했던 사람들은 하느님에 대한 지식이 매우 풍부했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님에 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전혀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예수님의 보잘것없음에만 주목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희생을 비웃었고 하느님의 자비심을 폄하했습니다. 때문에 주님께서 내리신 이스라엘 지도자에 대한 평가는 냉정합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마태 15,8)

하느님에 관해서 아는 것과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바리사이들은 머리로는 하느님을 열심히 연구했지만 그분께 마음을 드리지는 않았습니다. 하느님에 관한 그들의 지식이 모자랐기 때문이 아니라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맺지 못했기에 주님과 어긋난 걸음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에 저와 여러분 모두가 찔림 받기 원합니다. 그분을 향한 사랑은 그분 곁에서 머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향한 믿음은 그분의 걸음을 좇아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공식은 무조건적인 따름으로만 증거되기 때문입니다. 따름이 없는 믿음은 공허한 외침이며 허울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식물들은 새잎을 계속해서 내기 위해서 오로지 빛을 향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식물도 빛을 향해 나아가는데 어째서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은 빛이신 주님을 향해 돌아서 따르는 것이 이리도 힘이 드는 것일까요? 주님께서는 눈 부신 빛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데 말입니다. 우리를 이끄시는 주님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우리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오늘 아주 분명한 믿음의 선을 봅니다. 말씀을 듣고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을 믿음으로 생각하는 잘못을 지적해 드립니다. 주님을 향한 믿음은 곧 따름이라는 사실을 강조해 드립니다.

그리스도인은 진리의 주님께서 베푸신 사랑에 감격하여 오직 그분만을 소중하게 여기는 삶을 살겠다고 약속한 사람입니다. 무엇보다 귀한 영생의 비밀을 알고 있기에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고 다짐한 사람입니다. 주님의 뜻을 알지만 자신이 가진 것이 많아서, 그 가진 것에 연연한다면 결코 주님을 향할 수도 좇을 수도 없습니다. 매 주일 미사에 참례하고 기도를 제아무리 열심히 한다 해도 주님과는 도무지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주님을 따르다가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선 사람들은 세상의 계산에 약삭빠른 이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주님을 끝까지 따르기 위해서 감수해야 하는 것들이 손해이며 피해로 계산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수긍하면서도 눈앞에 놓인 당장의 손해에 마음이 기울었을 것입니다. 결국 주님께로부터 돌아서는 것이 이익이라고 결단내렸을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은 개개인의 능력이 아닙니다. 세상으로부터 존경 받는 삶이라 해서 주님의 나라를 얻을 수는 없습니다. 마음 안에 품은 바알, 땅에서의 풍요로운 삶을 추구하는 마음을 깨부수지 못한다면 슬퍼하며 주님 곁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때로 믿음은 세상의 것을 뒤로하고 잘라내는 외로움의 결단인 이유입니다.

그날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말씀을 특정한 사람에게만 들려주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군중”에게 똑같이 이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있는 조건을 온 세상에 선포하십니다. 어느 누구도 제외되지 않도록 만천하에 공개하십니다.

이제 그분의 제자인 우리에게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우리가 외칠 차례입니다. 주님의 보편적인 공정하심을 널리 알리고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주님의 사랑을 만천하에 전해야 합니다.

이 사명 앞에서 우리는 숱한 갈림길을 만나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영원한 생명을 향한 길에서 혼란해 하지 맙시다. 망설이지 맙시다. 주님의 복음을 듣고 천국을 향한 길에 들어섰으니 돌아서지도 맙시다.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그분을 향한 사랑이 매일 매일 불어나는 축복이 있기를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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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장재봉 신부
가톨릭신문 2019년 9월 8일
  |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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