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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십자가를 보물로 여기십시오
조회수 | 2,480
작성일 | 07.09.08
인숙이 이야기

교구 사제단 피정 때에 지도를 해주신 신부님의 체험담이 떠오릅니다.

전라도 광주에 천주의 성요한 의료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장애인 복지원이 있다고 합니다. 이 복지원에 인숙이라는 아가씨가 있는데, 나이는 스물이 넘은 아가씨지만 정신 연령은 네다섯 살 정도의 어린 아이 수준이라 했습니다.

어느 날 수사님들께서 장애인 방에 간식을 넣어 주고 인숙이 방을 나오는데, 갑자기 인숙이가 죽겠다며 소리를 치더랍니다. 황급히 인숙이 방으로 수사님들께서 달려가 보았더니, 방금 나누어준 인숙이 간식을 다른 장애인들이 먹으려 하자 인숙이가 빼앗기지 않으려고 간식을 한 입에 털어 넣다가 그만 목에 걸려 숨을 못 쉬고 캑캑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수사님들께서 급히 간식을 토하게 하고 응급조치를 취하고 있는데, 너무도 이상한 것이 숨을 못 쉬는 상황에서도 인숙이는 한 손은 목을 움켜쥐고 다른 한 손은 허리춤에 무엇이 있는지 그것을 꼭 움켜쥐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해서 잠시 숨을 쉬게 하고는 팔을 강제로 벌려 옷을 젖혀 허리춤을 보았더니 며칠 전 복지원 식당에서 닭 요리를 하고 버린 닭 내장을 인숙이가 나중에 먹으려고 음식물 쓰레기통에서 몰래 건져 허리에 매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정신 연령이 낮은 인숙이 눈에는 닭 창자가 울긋불긋 한 것이 먹음직스러웠나 봅니다.

이야기를 마치신 피정 지도 신부님께서는 인숙이야 정신 연령이 낮은 장애를 가졌으니 이해 되지만 정상인이며 어른인 우리들이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허리에 매달고 있는 썩은 닭 창자가 무엇인지 만져 보자고 하셨습니다.

그 썩은 닭 창자를 잘라 버리면 자신에게도 이웃에게도 악취를 풍기지 않고 너 나 할 것 없이 개운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을 텐데 그것이 되질 않아 악취 속에서 살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잘라 버리지 않는 썩은 닭 창자는 ‘교만’ ‘이기심’ ‘자존심’ ‘썩은 냄새나는 고집’ 등이라고 하시면서 말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 33)

여기서 예수님 말씀은 자신들이 가진 재산은 물론이거니와 자신들이 진정 버리기 어려운 고집과 아집, 이기심과 자존심, 교만도 함께 말씀하시는 것으로 알아들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그것을 버리고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안고

신영복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늘로 높이 솟아오르려는 새는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하여 많은 것을 버려야 합니다. 심지어 제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하여 뼈 속을 비워야 합니다. 그 위에 다시 비상을 위한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 역시 천상 하느님 아버지 집으로의 비상은 자신을 수없이 버리고 뼈를 깎는 노력이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세상 것으로 가득 찬 뚱뚱한 상태로는 날아서 하늘나라에 오를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사도 성 바오로의 필레몬에게 보낸 편지는 감동 그 자체입니다.

필레몬의 노예였던 오네시모스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듣고 복음을 믿게 되었는데, 얼마 동안 옥중에 있는 바오로 사도의 시중을 들어줍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오네시모스를 원주인인 필레몬에게 돌려보내며 그를 용서해 주고 잘 받아줄 것을 부탁하며 편지를 씁니다.

당시 사회에서 노예는 그저 물건에 해당될 만큼 재산의 일부인 별것 아닌 존재로 비참한 대접을 받았는데, 바오로 사도는 그를 아들로, 심장과 같은 귀한 존재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필레몬에게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이제 그대는 그를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하는 형제로 돌려받게 되었습니다.”(필레 9, 16)

이것은 바오로 사도가 그만큼 자신에게 있는 자존심과 명예까지도 버리며 스스로를 낮추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럴 때 비로소 스승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 27)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십자가를 짊어지다’는 ‘십자가를 소중한 보물로 알고 품에 안고 따라야 한다’로 번역이 된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모든 십자가가 마지막 주님 심판대 앞에서는 천국 문으로 들어가게 만드는 보물로 바뀌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지상에서 만나게 되는 십자가는 이겨내고 받아들이며 안고 나아갈 때 분명 공로가 되는 것이며, 그 십자가로 인하여 영원히 갈라지는 심판대에서 천국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춘천교구 배광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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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비움

많은 경우에 있어서 사람들은 될 수 있으면 막히지 않고 목적지까지 시원하게 도달할 수 있길 바란다. 도중에 신호등 빨간불에 몇 번 연거푸 걸리기라도 하면 스멀스멀 짜증이 피어오른다. 조금이라도 머물면 뒤처지는 것으로 생각되어서일까, 너도나도 지고는 못사는 세상이다. 일등이 좋고 꼴찌는 싫다. 모두가 일등을 해야 하는 세상이니 자녀들도 피곤하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당신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당신의 제자가 되기 위한 길을 떠남에 있어서 모든 것을 버릴 그러한 결단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결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가치를 알아야 한다. 가치를 깨달을 때, 우선순위를 매기기 쉽고 그래야 버릴 때도 홀가분하고 자유롭다.

먼 길을 가려면 짐이 가벼워야 한다. 처음부터 욕심을 부려 이것저것 챙기다보면 몸만 지치고 힘들다. 지치고 힘들어봐야 하나 둘 버리고 싶어지는데 그 때가 진정으로 우선순위가 정해지고, 가치가 드러나는 순간일 것이다. 처음엔 이것저것 다 필요한 것들로 보이지만 정작 필요한 것은 그다지 많지 않다는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다.

어떤 자매님 집에 불이 났다. 정말로 무엇을 챙겨야 할지 막막했단다. 그래도 미사가방과 성모상, 십자고상은 제일 먼저 챙겨 나왔단다. 정말로 열심히 한 자매님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무엇이 소중한 것인지 진정한 가치를 깨닫는 것이 자신을 비우는 첫 걸음이라면 이제부터서라도 내 안에 자리하고 있는 것들을 하나 둘씩 끄집어 내어 무게를 달아봐야겠다. 자신을 비우고 그 빈자리에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채울 수 있는 삶이었으면 좋겠다.

하느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삶,

중심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오뚝이 같은 삶을 약속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신앙의 길이란 하느님을 닮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비워내는 삶의 여정이리라. 아무런 목적 없이 그저 텅 빈 항아리로 남아 있기 위함이 아니다. 하느님 사랑을 가득 담아 내어 자신뿐만 아니라 만나는 이들의 마른 가슴을 시원하게 축여줄 수 있기 위해 비움의 성찰이 필요하리라. 은총의 샘가에 두레박을 내려 하느님의 뜻을 가득 퍼올릴 수 있는 한 주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춘천교구 서범석(도미니코) 신부
  |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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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33)

“참 신앙인은 매일 매일의 현실에서 신앙을 증거하고 실천하는 신자입니다. 이런 분들은 작은 일들을 통해 신앙을 실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의 복음에서 누가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해 도전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가족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씀은 가족을 무조건 미워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가치의 우선 순위에 대한 질문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가족주의적 이기주의에서 초월해 모든 이웃을 형제자매로 받아들이라는 보편적 사랑, 즉 하느님 나라에의 초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족은 생각만 해도 힘이 나고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가족의 사랑 안에서 우리는 성장하고 인간관계를 배워나갑니다. 그러나 지나친 가족주의는 이기주의의 온상이 될 수 있고 때론 사회발전에 저해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가족은 더 넓은 사랑을 배우기 위한 초석이 되어야 합니다.

자, 이제는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 이유를 생각해 볼까요? 십자가는 고통이며 불편함의 상징입니다. 대입 수험생을 둔 가족들은 엄청난 비용, 정성, 불편함, 마음 고생 등등 그야말로 온가족이 십자가를 지고서 그의 대학 입학을 위하여 엄청난 희생과 대가를 치릅니다. 그에 반해 우리는 자기 자신의 구원과 참된 행복을 위해서 어떤 희생과 대가를 치르고 있습니까? 고작 주일 미사와 단체 활동에 참여하는 것만으로 하늘나라에 대한 투자가 다 끝난 것으로 오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결국 신앙생활의 발전은 예수님의 사업에 자기 자신을 얼마나 투자하고 헌신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이러한 헌신은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재미로 성당에 다닙니다. 많은 분들이 신부님이 좋으면 미사에 나가고 그분이 싫으면 안 나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상당수의 신자들은 단체 활동을 열심히 하다가도 재미가 없어지면 냉담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참된 신앙인의 길이 아닙니다.

두 번째, 무조건 열심히 다닙니다. 신부님의 눈치를 보지 않는 소신파 신자입니다. 단체 활동도 꾸준히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일종의 맹목적인 열심입니다. 결국 자기 구원 중심적인 신앙인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세 번째, 현실적인 신앙인으로 삽니다. 매일 매일의 현실에서 신앙을 증거하고 실천하는 신자입니다. 이런 분들은 작은 일들을 통해 신앙을 실천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분들이야말로 마음 안에 주님을 모시고 사는 참 신앙인입니다. 우리 모두 세번째 유형의 신자,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태원 시몬 신부
  |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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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자신을 ‘사르는’ 사랑

사람의 사전적 의미는 “두 발로 서서 다니고 언어와 도구를 사용하며, 문화를 향유하고 생각과 웃음을 가진 동물”로 정의됩니다. 하지만 사전적 정의와는 별개로 다른 기준으로 사람을 정의하기도 합니다. 우리 주변의 사람 중에는 ‘사람 냄새나는 사람’과 ‘사람 같지 않은 사람’ 이 있습니다. 무엇이 이것을 나누는 기준이 될까요? 바로 사랑입니다.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사람, 양보할 수 있는 사람, 배려가 넘치는 사람처럼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에게 우리는 사람 냄새가 난다고 이야기 합니다. 반대로 양보, 희생, 배려, 용서가 없는 사람들, 자신밖에 모르는 사랑 없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사람 같지 않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우리 말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어감이 비슷한 단어 사람, 사랑, 삶이란 단어들이 ‘살다’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국어학자들은 말합니다. 그리고 이 ‘살다’ 라는 말은 ‘불로 태워 없애다’라는 뜻에 ‘사르다’ 에서 파생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사람이란 자신을 희생하여 ‘사르는’ 존재이고, 사랑이란 역시 남을 위해서 자신을 내어 줌으로써 스스로를 없애 버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는 것입니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람은 없다” (요한 15, 13)라고 하시며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을 ‘사르는’ 사랑을 보여주신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루카 14,28)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십자가는 고통이 아니라 희망이며 기회입니다. 십자가 는 자신을 사르는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이며, 우리도 예수님처럼 참다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자연이 아름다운 이유는 수많은 아픔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자리에서 수없는 비, 바람을 견디었기에 지금의 그 모습을 갖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의 삶이 아름다운 이유 역시 갖은 아픔들, 삶의 십자가가 함께하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인간은 아픔만큼 성숙한다고 합니다. 아름다움이란 앓은 다음(아프고 난 다음)의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사랑하며, 오히려 자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춘천교구 박재우 사도 요한 신부 2016년 9월 4일
  |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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