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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제자됨의 길
조회수 | 2,428
작성일 | 07.09.08
오늘 복음(루카 14,25-33 )에서는 ‘예수의 제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예수님의 토막 말씀, 비유, 복음사가의 가필 등을 집성하여 소개합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는 조건으로는 첫째, 혈연관계보다 예수 추종을 더 소중히 여겨야 하고(루가 14,26) 둘째,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루가 14,27) 셋째,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버릴 수 있는 무소유의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루가 14,33)입니다.

특히 33절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던 루가 복음사가가, 제자 됨의 조건으로서 소유의 전적인 포기를 강조한 부분입니다. 루가는 예수께서 처음으로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에도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루가 5,11)라고 말하며 무소유를 강조한 바 있습니다. 망대 구축과 전쟁 수행의 이중 비유(루가 14,28-32절)에서도 예수를 따르려면 끝까지 따를 수 있을지 먼저 잘 살펴서 중도에 포기하는 일이 없도록 사전에 철저한 준비와 각오가 필요하다는 점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뜻에 앞서 하느님의 뜻을 찾으셨고, 하느님 나라의 도래(到來)를 고대하셨기에, 제자 됨의 길이 혈연의 사랑도 넘어서고 자기 목숨도 넘어서는 철저한 추종임을 확실하게 제시할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 추종은 필요에 따라 이리도 가고 저리도 가는 상대적인 가치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 곧 하느님의 다스림과 뜻을 추구하는 절대적인 가치를 향한 전적인 투신과 분명한 결단을 요구하는 흔들리지 않는 신념입니다.

중심이 바로 서면 나머지 일은 쉬워집니다. 요즈음 일반 사회에서 예수님을 최고 경영자로 혹은 리더십의 대가(大家)로 새롭게 조명하는 현상을 보게 됩니다. 오랜 세월 동안 예수만큼 많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추구하신 평화와 사랑이 이천 년 이상 그리스도교의 경계를 넘어 흔들리지 않는 매력으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념’은 오늘날 리더십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로 꼽히는데, 분명 예수님은 신념에 찬 리더였습니다. 리더에게 분명한 신념이 있을 때, 추종자들은 흔들림 없이 따라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신념은 하느님의 뜻을 분명히 헤아릴 수 있을 때 나옵니다. 제1독서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성령을 받지 않고서는 하느님의 의도를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지혜는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의 길을 곧게 만들어 주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을 가르쳐 주며, 사람들을 구원해 줍니다.

한편, 제2독서에서 바오로는 도망쳐 온 종 오네시모를 전 주인 필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주님 안에서 사랑스러운 형제로 받아들이기를 권유합니다. 바오로의 태도는 예수 제자 됨의 핵심을 보여 줍니다. 제자 됨은 강요가 아니라 자발적인 선택입니다. 두 발을 모두 담가 철저한 추종의 길을 걸을 때만이 예수께서 누리신 진정한 자유와 평화의 힘을 갖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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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튼 까리따스 수녀회
최혜영 엘리사벳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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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기꺼이 지면 질수록

루가 14,25-33

한 아이와 함께 '추모의 집'을 찾았습니다. 아버지 흔적 앞에 홀로 선 아이는 아무 말도 없이 굵은 눈물만 뚝뚝 떨어뜨렸습니다. 아이 처지가 너무나 딱했습니다. 이제 겨우 15살인데 엄마는 어느 하늘 아래 있는지도 모르고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고 유일한 연고자인 형은 행방이 묘연하고…. 아이가 한 평생 지고 갈 외로움과 허전함, 상처와 번민을 생각하니 얼마나 마음이 짠했는지 모릅니다.

저녁기도를 하러 성당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사무실에 낯선 사람이 앉아 있어서 '누군가'하고 들어갔더니 연미사를 신청하러 오신 할머님이셨습니다. 그냥 인사만 하고 나오려다가 분위기가 심상찮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목이 멘 할머니 말씀을 듣던 저는 너무도 가슴이 아파서 할 말을 다 잃었습니다. 오늘이 바로 따님 장례식을 치른 날이었답니다. 이제 겨우 40대 초반인 딸, 남한테 죽어도 싫은 소리 못하는 착하기만 했던 딸, 평생 가족들 뒷바라지하느라 생긴 스트레스성 병으로 세상을 먼저 떠난 딸을 생각하니 너무도 억울해서 못살겠다고 하셨습니다.

딸 장례식에 가서 작별인사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것조차 마음대로 못했노라고, 그래서 하루 종일 분을 삭이느라 여기저기 다니다가 이곳까지 오게 되었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고 가슴이 찢어지는 할머니 고통 앞에서 '힘내세요. 기도하겠습니다'는 말조차 꺼내기가 조심스러웠습니다.

할머니는 아마도 요 근래 밥 한술 제대로 뜨시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돌아가시다 쓰러지시겠다 싶어서, 아이들 식사시간인데 가셔서 밥 한술이라도 뜨고 가시라고 말씀드렸더니 마지못해 따라오셨습니다.

다행이었습니다. 시끌시끌한 아이들 틈에서 할머니는 그나마 힘겹게 밥을 몇 숟갈 뜨셨습니다. 한 마음씨 예쁜 아이가 할머니께서 뭔지 모르지만 힘들어하신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반찬을 더 가져오고 국도 좀 더 떠드리는 등 곰살맞게 시중을 들었습니다. 얼마나 기특했는지 모릅니다.

이 세상에는 깊은 슬픔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나 십자가에 속울음 우는 사람들이 또 얼마나 많은지요.

때로 이웃들이 견뎌내고 있는 극심한 고통이나 십자가 앞에서 어떤 위로의 말도 찾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오직 어깨를 조용히 감싸안아 준다든지 가만히 등을 두드리며 달래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음에 안타깝기만 합니다.

왜 십자가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다가옵니까? 왜 하필 나에게만 유독 큰 십자가입니까?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어쩌면 저렇게도 큰 십자가를 보내십니까?

안타까운 마음을 추스르지 못해 답답해하면서 지난 노트를 뒤적이다가 이런 글귀를 발견했습니다.

"하느님은 십자가 안에서 가장 뚜렷하게 당신 얼굴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고통받는 사람들 얼굴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얼굴입니다. 고통은 예수 그리스도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총의 선물 가운데 가장 큰 선물은 다름 아닌 십자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땅과 생명의 땅, 그 사이에 당신 십자가를 걸쳐놓으심으로써 우리에게 생명의 땅으로 건너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로 올라갈 수 있게 하는 사다리로 당신 십자가를 걸쳐놓으셨습니다.

십자가는 신비이자 은총입니다. 십자가는 생명의 도구입니다. 십자가는 신앙인 삶의 일부를 넘어 전부입니다. 십자가는 우리 삶의 중심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구원 없고 십자가 없이는 영원한 생명도 없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하느님 나라도 없습니다. 십자가는 결국 우리가 평생 친구처럼 여기고 끌어안고 가야할 삶의 동반자입니다. 십자가를 기꺼이 지면 질수록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이번 한 주간, 너무도 힘겨운 십자가로 인해 힘겨워하는 이웃들 삶에 우리 온기가 전해지는 날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감당하기 힘든 십자가를 홀로 지고 휘청휘청 걸어가는 이웃들 안에 현존해 계시는 예수님을 발견하는 한 주간이 되길 바랍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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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 지혜 9,13-18 독서
필레 9ㄴ-10. 12-17
복음 : 루카 14,25-33

그때에 많은 군중이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돌아서서 이르셨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 맞설 수 없겠으면, 그 임금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평화 협정을 청할 것이다.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루카 14,25-­33)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꿈이 있다는 것은 젊음의 상징이지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당신의 영을 내리시리라는 약속을 요엘 예언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내 영을 부어주리라. 그리하여 너희 아들딸들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며 젊은이들은 환시를 보리라.”(3,1) 젊은이들이 아니라 노인들이 꿈을 꾸는 세상은 예수께서 꿈꾸시는 바로 그 세상입니다.

예수님의 꿈은 ‘하느님 나라’ 건설입니다. 지금은 그 꿈의 완성을 위해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중입니다. 많은 군중이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동행’은 하지만 목적이 다릅니다. 어떤 이는 병 고치는 능력을 보고 따라갑니다. 어떤 이는 말씀의 위력에 끌려 따라갑니다. 어떤 이는 빵의 기적을 보고 따라갑니다. 어떤 이는 로마의 권력으로부터 나라를 되찾아 줄 수 있으려니 하고 따라갑니다. 어떤 이는 모두 가니까 덩달아 따라갑니다. 어떤 이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도 당당하게 맞서는 모습이 멋있어 따라갑니다. 오늘 우리도 저마다 예수님에 대한 상을 가지고 있고 저마다의 소망을 기대하며 따라가고 있습니다.

함께 길을 간다는 것은 같은 목표를 향해 가면서 서로 힘이 되어주는 ‘도반’이 된다는 것입니다. 군중은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도무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함께 가긴 하지만 예수님을 뒤따라가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것을 아셨는지 그들에게 돌아서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 예수께서 가족 간의 불화를 일으키고, 자신을 미워하여 자살을 유도하려고 하신 말씀이 아닌 것은 자명합니다. 불교에서는 집착이 고(苦)를 낳는다고 합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혈연에, 물질적인 것에, 심지어 자신의 목숨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그 어떤 것도 당신을 따르는 데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삶을 따르기로 한 수도자는 물질에 대한 소유를 포기한다는 ‘가난서원’을, 혈연과 육신의 만족을 포기하는 ‘정결서원’을, 자기 자신의 사사로운 뜻을 포기하는 ‘순명서원’을 하는 것입니다. 수도자가 아니라도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각기 자신의 처지에 맞갖은 포기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가정을 가진 사람으로서 가난·정결·순명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직접 선택하신 열두 제자들도 처음에는 예수님과 같은 꿈을 꾸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루카 9,20)는 돌발적인 물음에 무척 당황하지 않았던가요? 베드로는 예수께 자신들이 부모와 집과 아내와 토지를 버렸으니 무슨 상을 받겠느냐고 했지만 자기 목숨까지는 쉽게 버릴 수 없어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지 않았던가요? 현세의 한자리를 꿈꾸는 그들과 예수님과는 ‘동상이몽(同床異夢)’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데 특별한 계층이나 자격을 따지지 않으셨습니다. ‘누구든지!’라고 하셨습니다. 단 한 가지 조건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든지 따를 수 있지만 완전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 조건이 실현되어야 합니다. 반쯤 따르며 완전한 제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요한 카시아노 성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부들의 전통과 거룩한 책들의 권위에 따르면 포기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대는 모든 열성을 다해 이 세 가지 포기를 실천해야 합니다. 첫 번째 포기는 물질적인 것입니다. 두 번째 포기는 그대의 옛 삶의 방식, 곧 악행과 영혼과 육체의 모든 격정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포기는 미래의 삶만을 관조하고 또 보이지 않는 삶만을 갈망하기 위해서 모든 현세적이고 보이는 삶에서 그대의 정신을 단절시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포기는 모두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이 아브라함에게 명령했던 대로 말입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1) 먼저 네 고향을 떠나라는 것은 이 세상의 재산과 땅의 풍요로움을 떠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리고 네 친족을 떠나라고 하신 것은 삶의 모든 방식, 곧 과거의 습관과 악행에서 떠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리고 네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그의 눈에 들어오는 모든 현세적인 기억, 집착에서 떠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열렬한 신앙으로 첫 번째 포기를 실천했더라도 두 번째 포기를 같은 열성과 성의로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또 두 번째 포기를 실천하고 난 뒤에 세 번째 포기로 넘어감으로써 그대는 옛 아버지의 집에서 빠져 나올 것입니다. 이 아버지는 옛 인간에 따른 아버지라는 것을 그대는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토록 천상적이고 비육체적 삶에 주의력을 집중한 결과 그대는 다음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대 영혼이 연약한 육체와 특수한 장소에 더 이상 갇혀 있지 않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가다가 중지하면 아니 감만 못합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면 밭갈이가 엉망이 되고 진도도 나가지 않겠지요.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데 이렇게까지 포기해야 하는 것이라면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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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14,25-33)

<더 큰 바다로 나아가기 위해서>

수도생활, 봉헌생활도 시대의 변화와 함께 과거와는 양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과거 수도생활 하면 즉시 떠오르는 단어들이 세상과의 결별, 고행, 극기, 보속, 기도 등등이었습니다. 약간은 울적한 회색빛깔을 지닌 삶이었다고나 할까요? 그러나 현대의 봉헌생활에서 더 강조되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친교, 기쁨, 형제애, 세상에 대한 가치 부여, 세상을 위한 적극적인 헌신 등등입니다.

혈육으로 맺어진 부모형제들에 대한 생각도 이젠 많이 달라졌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도회 입회하면 이제 가족과는 끝이구나 생각들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더 이상 그렇지 않습니다. 전보다 더 굳은 영적 유대 속에 혈육으로 맺어진 부모형제에 대한 사랑도 많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시는 이 말씀,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그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부모형제를 헌신짝처럼 버리라는 극단적인 말씀, 어떻게 생각하면 예의도 뭣도 없는 사람의 말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사실 강조점은 다른데 있습니다. 보다 적극적인 해석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께 보다 많은 우선권을 두라는 강조말씀입니다.

이 시대 사방을 둘러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 한 가지는 하느님의 자리가 점점 축소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하느님께서 점점 역사 뒤로, 무대 뒤로 사라져가는 느낌입니다. 서구의 경우 가톨릭 재단에서 운영하는 많은 학교 교실에서 십자가를 떼라 마라 계속 논란중입니다. 너무나 편안히 그어오던 성호 한번 긋기가 어려워졌습니다. 더 나아가서 수도자들의 일상생활 안에서도 하느님 이야기, 신앙 이야기가 점점 사라져만 갑니다. 하루 가운데 하느님을 생각하고 만나고 대화하는 시간, 하느님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급격히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시 한 번 회복해야 할 삶의 태도가 ‘하느님께 우선권’을 두는 생활방식입니다. 물론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하느님께서 몸소 지으신 피조물들입니다. 하느님 보다 더 우위에 있어서는 안 될 대상들입니다.

하느님께 우선권을 두는 삶을 지향한다면 꼭 우리가 취해야 할 필요한 한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바로 포기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모든 것을 다 선택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두 손에 다 쥘 수가 없습니다. 더 큰 선, 더 큰 아름다움, 더 큰 가치를 선택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취해야할 태도는 기존에 우리가 지니고 있던 것들에 대한 과감한 포기입니다.

큰 바다로 나아가기 위해서라면 반드시 작은 시냇물을 포기해야 합니다. 더 크고 맛있는 사과를 쥐고 싶다면 그 전에 쥐고 있는 작은 사과를 던져버려야 합니다. 이렇게 성장하고 변화하는 삶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포기는 본질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봉헌생활, 수도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포기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상적 과제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포기는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 절대로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고 가장 아름다운 대상이며 모든 것을 다 주고 바꾸어도 아깝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그분을 따르기 위한 것이므로 정말 기쁜 일이며 행복한 일인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이기도 하지만 때로 무서울 정도로 질투하시고 우리에 대한 욕심이 끝도 없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 질투와 욕심은 바로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 영혼의 구원, 우리 삶의 아름다운 결론인 영원한 생명을 위한 질투요 욕심인 것입니다. 적당이가 아니라 모든 것을 바쳐서 당신을 추종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완전히’ ‘절대’를 요구하십니다. 이런 하느님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응답한 사람들이 바로 사제요 수도자들인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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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14,25-33)

십자가는 주님께 나아가는 우리의 방향입니다. 십자가는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때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의 행동과 실천입니다. 낡은 것을 부수어야 새 것이 나올 수 있습니다. 옛 것을 깨뜨려야 주님의 새 빛을 십자가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처럼 숨어 있어 있는 우리를 십자가는 하느님께로 나오게 만듭니다. 십자가는 주님께서 주신우리 자신을 위한 살아있는 선물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성장시키기 때문입니다.

생기 넘치는 성장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버리고 나누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십자가를 통해 매 순간 다양한 방식으로 펼쳐집니다. 지금껏 우리의 삶이거짓 자아 속에 갇혀 있었다면 이제는 빠져나와 살아있는 십자가와 함께 그리스도의 삶에 기쁘게 참여하는 평화의 여정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우리 것으로 가득 차 있는 우리 자신을 버리고 비우라고주님께서는 날마다 은총의 십자가를 주십니다. 우리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은총의 주일 되십시오.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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