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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적극적인 포기
조회수 | 2,570
작성일 | 07.09.08
포기라는 단어를   한자어로 쓰면 ‘抛棄’ 라고 쓰는데 이 한자어만 두고 보면 제대로 읽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단어자체가 어려운 것도 있지만 그만큼 포기라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닐까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요건으로 자기 소유를 버리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포기는 또다른 선택을 위한 포기입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겠다는 것은 체념일 뿐입니다. 그래서 체념과 포기는 서로 다른 말입니다. 포기는 더 나은 무언가를 위해서 선택하는 행위입니다. 망대를 세우는 것은 자신의 권위를 세우는 행위입니다.  

이만명을 만명으로 대항할 수 있다는 것은 교만에서 비롯됩니다. 이론적으로 이만명을 대항할 수가 없습니다. 대항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용기를 가장한 교만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병법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인간의 내면에 있는 교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만명을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은 바로 겸손입니다. 자신의 처지를 알고 거기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권위를 세우는 것도 교만을 내세우는 것도 이러한 모든 것은 바로 포기를 할 때 즉 권위를 세우는 것을 포기할 때 그 권위는 서는 것이고 교만을 포기할 때 우리는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부분인 소금에 대한 상징에서 포기에 대한 의미를 함축합니다. 소금이 자신의 짠맛을 체념해 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듯이, 자신에 대한 체념이 아니라 자신 이외의 것을 포기하는 삶이 필요한 것입니다.

포기는 항상 새로운 것을 선택하는 적극적인 행위입니다. 우리가 성당에 나오는 것과 취미 생활하는 것 둘 중 하나를 선택했을 때 하나를 못하는 것에 대해서 미련을 갖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고 선택한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당에 나오는 것을 선택하였다면 기쁜 마음으로 전례에 참례해야 하고 취미 생활을 선택하였다면 주일의 의무를 다 지키지 못한 책임을 다른 방법으로 이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적극적인 포기는 미련을 갖지 않습니다. 소금이 어정쩡한 맛을 낼 때 아무런 소용이 없듯이 우리의 삶 역시 어정쩡한 삶이라면 우리에게 희망을 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물질 문명의 발달은 우리에게 신앙과 현실에서 갈등하게 합니다.

우리는 어느 것을 선택할까 매 주일 아침마다 갈등하는 삶이 아니라 신앙과 현실을 조화있게 사는 삶의 지혜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주어진 현실에 대해서 핑계를 대면서 피해가는 소극적인 삶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을 신앙의 힘으로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겨나가는 지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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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남영철 요한 비안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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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것을 포기함은 큰사랑의 증거이다.

제1독서 : 지혜9,13-18
제2독서 : 필레1,8.10.12-17
복음 : 루가 14,25-33

묵상길잡이 : 수도자나 성직자들의 독신생활은 단순히 자신에게 맡겨진 일(사도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이다. 큰사랑은 많은 것을 포기할 수 있게 한다.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 나는 무엇을 희생하고 있는가?

1. 신부님은 왜 결혼을 하지 않습니까?

나는 교리반에 나오는 예비신자 부부와, 그 사람을 교리반에 안내한 신자부부와 함께 식사를 하러 식당을 찾았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에 예비신자 자매가 "신부님은 왜 결혼을 하지 않습니까?"하고 질문을 하였다. 내가 대답을 하려고 하는데, 신자 자매가 먼저 열심히 설명을 하기 시작한다. 그거야 "처자식이 있으면 자신이 맡은 신자들을 열심히 돌보며 사목활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하자, 예비신자도 이해가 간다는 듯이 "목사님들은 가족이 있으니까 신자들의 부담도 많고, 일반인들도 신부님들을 목사들과는 다르게 본다."며 맞장구를 친다. 정작 신부인 나는 그 이야기에 끼어 들 겨를도 없다. 아마 많은 이들의 생각도 이와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대답에 100%동의할 수는 없다. 수녀나 수사들이 독신을 지키는 것과 사제들이 독신생활을 하는 이유가 결코 다르지 않다. 그러면 수도자들도 자신들이 하는 일(사도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독신생활을 하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러면 독신생활의 참된 이유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때문이다. 스스로 독신으로 사셨고, 우리를 위해 당신을 온전히 내 놓으신 주님을 갈림 없는 마음으로 따르기 위한 것이다. 물론 사제가 독신으로 살기 때문에 사목활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독신생활에서 따라오는 부수적인 결과이지 목적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제들의 독신은 예수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에 그 근거를 두고 있어야 한다.

2.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은 사랑의 증거이다.

한 때 클린튼 미국 대통령의 성 추문이 화젯거리가 되었던 때가 있었다. 대부분의 미국 국민들이 클린튼의 추문을 사실로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대통령직 수행 능력에는 높은 점수를 주었음도 사실이다. 직무수행 능력과 도덕성과는 별개로 취급하는 것이다. 수도자나 사제들의 독신을 단순히 효과적인 사목활동을 위한 수단으로 취급하는 것은 효과주의나 경제마인드로 접근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목활동만 잘 한다면 독신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논리가 설득력을 지닐 것이 아닌가? 우리 주변에는 수도자나 사제가 아니라도 독신으로 사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스님들이나 수도자들처럼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더라도, 학문이나 예술을 사랑하여 거기에 전념하여 투신하다 보니 결혼할 생각도 하지 않고 사는 이들이다. 이렇게 어떤 것을 사랑하고 거기에 정열을 바치다 보면 다른 것들을 포기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어떤 것을 버리는 것은 더 큰 것에 대한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발현을 체험한 사도 바오로는 "세상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긴다."고 하셨다.(필리3,8)

3. 버리고 비운만큼 채워주신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집짓기를 시작하기 전에 그 집을 완성할 힘이 있는지를 미리 따져보고, 전쟁에 이길 가망이 없으면 먼저 화평을 청하라고 하신다. 예수님을 추종하는 길은 자신의 것을 모두 버려야 하는 어려운 십자가의 길이기에 그것을 알고 미리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하고 따라야 한다는 말씀이다. 우리 속담에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바라보지도 말라."는 말이 있다. 주님께 대한 사랑과 확신도 없이 섣불리 예수의 제자가 되겠다는 어설픈 태도를 경계하신 것이다. 예수님을 추종하는 길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내 음식이다." 하신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뜻을 최우선 순위에 두는 것이다. 여기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데 따라오는 십자가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오는 십자가이다. 임종을 앞둔 사람에겐 육체적 고통도 고통이지만, 자신이 이룩한 모든 것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별하는 고통이 큰 것이라고 한다. 세상 것에 많은 애착을 가진 그만큼 더 큰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세속적이고 시간 속에 사라져갈 세상 것들을 많이 버리면 버릴수록 하느님은 당신의 것으로 채워주시는 분이시다. 나의 일상의 생활 안에서 참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그분에 대한 사랑 때문에 버리고 희생하는 것이 얼마나 있는가? M.E주말 교육에서는 "사랑은 결심이다."는 말을 한다. 자신의 의지를 실어 누군가를 위해서 희생을 바치는 것이 참 사랑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자녀와 토지의 축복도 백 배나 받을 것이며,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마르10,29-30). 아멘.

마산교구 유영봉 신부
  |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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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념

첫째 독서에서 ‘(하느님께서 지혜를 주셨기에) 세상 사람들의 길이 올바르게 되고, 사람들이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인지 배웠으며, 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아직 지혜를 못받았나봅니다, 교육관 운영이 아직도 오리무중이고 만만찮은걸 보니까 말입니다. 많은 분들의 정성과 헌신으로 교육관이 만들어졌기에 운영에서는 더 이상 다른 도움 없이 자체적으로 운영하려 애쓰지만 녹록치가 않습니다. 지금 당장 운영하는 것은 물론이고, 지금은 새집이라 별 문제 없지만 머지않아 낡고 고장 날것을 대비하기도 해야 하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정말 하느님의 지혜가 절실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대의 선행이 강요가 아니라, 자의로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라고 말하지만, 저는 어쩔 수 없이 봉사를 강요하다시피 하고 삽니다. 지난 해 성모광장 주변에 잔디를 심고 잡초를 뽑는 일에서부터 지금까지 계속되는 교육관 청소에 이르기까지, 수시로 봉사를 해달라고 조르고 귀찮게 하니 말입니다. 그렇더라도 기분 좋게 다녀가시도록 배려하고 힘들지 않은 일만 부탁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여건이 그렇지 못하다보니 죄송할 따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탑을 세우는 사람처럼, 적을 맞아 싸우는 임금처럼, 예수를 따르려는 사람에게는 십자가가 필수라는 계산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시지만, 그래도 참 버거운게 십자가입니다. ‘예쁜 십자가’를 예상했는데 무지막지하게 무겁고 거친 십자가를, 그것도 한시적이 아니라 계속 짊어져야 한다는 걸 아는 순간, 계산 착오였음을 깨닫고는 십자가를 팽개치고 내빼고 싶어집니다. 아마 냉담하는 사람들의 심정이 그렇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한 두해만 고생하면 여유 있게 지낼 수 있으려니 생각했는데, 계산을 다시 해야 할까 봅니다.

송재훈 라파엘 신부
  |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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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정상이 바로 눈앞에 있다 하더라도 되돌아 내려올 것을 헤아려서, 발길을 되돌릴 줄 아는 사람이 프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유명 산악인의 인터뷰로 오랜 등반을 통해 얻은 지혜로운 한마디입니다. 가야 할 때, 서야 할 때를 아는 것이야말로 모든 일의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하지만 이런 기본을 지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산악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상을 밟는 것입니다.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그것을 내려놓을 줄 아는 것이 참된 지혜로움의 시작입니다. 비단 등산뿐만 아니라 세상만사가 그렇지 않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탑을 세우려는 사람과 전쟁을 준비하는 임금의 이야기를 말씀하십니다. 재력가가 자신의 재력을 뽐내기 위해 탑을 지으려 하더라도, 때에 따라서는 그 뜻을 내려놓을 줄 아는 것이 지혜로움의 시작입니다.

임금이 자신의 권력으로 전쟁에 나가 맞서 싸우고 싶더라도, 때에 따라서는 그 뜻을 내려놓을 줄 아는 것이 지혜로움의 시작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 심지어는 자기 자신마저 버리라고 요구합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실천하기 위해서 치러야 할 십자가가 아닐까요. 이 십자가가 신앙인의 지혜로움의 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이 출발점은 두 가지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의 뜻이 하느님의 그 크신 뜻보다 보잘것없음을 인정하는 겸손한 마음이요, 둘째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함을 신뢰하는 마음이 그것입니다.

모세의 응답으로 불가능할 것만 같던 이스라엘 민족의 이집트 탈출은 시작되지만 그런 기적 같은 체험에도 불구하고b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은 가나안을 차지할만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나 봅니다. 안타깝게도 40년 동안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생활을 하게 됩니다(민수 14).

오늘 우리들의 신앙의 여정에서 하느님의 뜻을 살아가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 이것만은 안됩니다.’라고 고백하게 만드는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b오늘 복음 말씀에서는 바로 그것을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것을 버리지 않고서는 주님의 뜻을 온전히 따를 수 없습니다. 물이 채워진 잔속에 포도주를 따를 수 없듯이, 하느님의 뜻을 채우기 위해서는 먼저 내 뜻을 비워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번 한 주간 비워야 할 마음의 묵은 것들이 무엇인지 깊이 성찰하고, 비워진 마음속에 주님의 뜻을 잘 새겨나가도록 함께 기도합시다.

<마산교구 이우진 요한 신부>
  |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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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내 제자가 되려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요한복음 8장 32절의 말씀은 저의 사제 서품 성구입니다. 신학생 시절 이 말씀이 참 멋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품고 있었는데, 시간이 흐르며 서품이 다가오면서 사제로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갈망이 일었습니다. 그 자유로움은 진리 그 자체이신 예수그리스도가 나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확신에서, 그러한 사제의 삶을 그리며 이 말씀을 서품 성구로 정했던 거죠. 진정 자유로운 삶을 그리며 말이죠. 하지만 그 자유로움은 예수님 곁에 붙어있을 때 나오는 자유로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곁에 오려면, 당신의 제자가 되려면 누구든지 자신의 소유, 부모와 형제자매 그리고 자기 자신까지 멀리하지 않으면 당신 가까이에 올 수 없다고 단호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리곤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 합니다. 바로 지금 내가 관계 맺고 있는 그 존재들이 우리에게 십자가라는 것이죠. 내 친구들, 부모, 형제자매들과 관계 맺으며 무엇인가를 공유하고 있는 그 존재가 말이죠. 그들 중 깊은 것을 나와 함께 공유하고 있지 못하는 사람, 그들은 어렵지 않게 쉽게 끊어질 수 있는 관계입니다. 하지만 나와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어 끊어내려 발버둥 쳐도 깊은 것을 공유하고 있어 끊을 수 없는 피붙이와 같은 가족관계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십자가를 버리고 따라오라는 것이 아니라, 짊어지고, 품고 따라오라 합니다. 끊어낼 수 없기에 말이죠.

사람은 혼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 합니다. 하지만 그 순간은 짧은 순간이고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외로움에 몸서리치죠. 그래서 다른 누군가를 찾아 나섭니다. 어쩌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누군가와 관계 맺으며 공동체를 이루며 함께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좋아서가 아니라,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말이죠. 그렇다면 우리는 나의 십자가와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자유로움을 찾아 나서야 할 것입니다. 제가 지금 관계하고 있는 대상에게 불필요하게 집착함으로 십자가만 크게 만들어가는 것은 아닌지요. 혹은 그 대상과 너무나 과하게 가까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무관심으로 너무 멀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질문을 던져봤으면 합니다. 그래서 우리 각자의 십자가를 잘 짊어지고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끔 사람들로부터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말을 듣곤 합니다. 그 자유로운 영혼이 온전히 예수님 때문에 그렇게 비춰지면 좋겠습니다.

▮ 마산교구 박진우 아우구스티노 신부 2016년 9월 4일
  |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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