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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하느님의 크신 자비
조회수 | 2,381
작성일 | 07.09.12
오늘 전례의 주제는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주신다”는 것이다. 오늘 복음의 세 개의 비유는 하느님의 ‘자비’가 드러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특히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에서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탕자의 비유’보다는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라고 하겠다.

복음: 루카 15,1-32: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

복음에서도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예수님의 구체적인 자비의 행위로부터 가르침을 이끌어내며 찬미하고 있다. 예수님의 구체적인 자비의 행위는 당시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는 걸림돌이 된 행위였다. 즉 예수께서는 죄인들이라 하는 사람들을 ‘친구’로 맞아들이시고 그들과 ‘음식을 나누시기까지’ 하신다. 이것을 두고 예수님을 비난하였을 때 예수께서는 이 아름다운 비유를 말씀하셨던 것이다. 즉 예수께서는 구원의 근거를 어떤 전례행위나 법적 실천 또는 단순한 도덕적 실천에 두지 않으시고, 당신의 실천적 행동으로써 하느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들으려’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받아들이신다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는 실질적인 태도가 중요하다. 그러므로 죄인은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일 줄 모르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지 그분을 식사에 초대하는 세리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진짜 죄인들은 바로 그들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도 구원이 제시되고 있다. 비유에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태도가 단죄되면서 동시에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들에게 베푸시는 용서와 사랑을 거절하지 말라고 호소하시는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세 개의 비유는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에서 하느님의 마음이 인간의 잘못과 배반에 비할 수 없을 만큼 크다는 것을 드러내면서 절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 비유는 사순 제4주일에 보았기 때문에 앞의 두 비유에 관심을 집중하도록 하자.

‘잃어버린 양’의 비유는 죄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를 나타내고 있다. 하느님의 자비는 ‘의로운 사람들’보다 죄인들에게 더 크게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잃어버린 양을 찾아가는 목자의 모습은 구약에서 당신의 백성에게 지극한 관심을 보이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표현한다(에제 34,1-31; 예레 23,1-6 참조). 여기서 잃어버린 양을 되찾은 ‘기쁨’의 의미가 강하다. 단지 목자의 기쁨만이 아니라 친구들과 이웃의 기쁨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커진 기쁨이 애타게 찾으려 할 때에 생긴 모든 걱정과 불안을 잊게 한다. 잃어버린 아들이 돌아왔을 때에 보면, 형이 화를 내고 우울해 하는 대신에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으니 잃었던 사람을 되찾은 셈이다. 그러니 이 기쁜 날을 어떻게 즐기지 않겠느냐?”(32절) 하신다.

즉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에 대한”(7절) 기쁨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에 대한 기쁨이 더 크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 때문에 충격을 받아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굳어지게 한 역설적인 말씀이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 그들이 알아듣기 힘들었던 하느님의 논리이다. 이 기쁨의 논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는 ‘보다 큰’ 사랑에 의해서, 그리고 멀리 있는 사람을 가까이 함에 있어서 극복해야할 ‘보다 큰’ 사랑에 의해서 성취되는 기쁨이다. 여기서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들’이란 있을 수 없으며, 이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거짓된 의(義)를 빗대어하신 말씀이다.

이 기쁨의 의미는 두 번째 비유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가난한 여자가 조금씩 돈을 모아 은전 열 닢을 마련하였다. 은전 한 닢은 농부의 하루 품팔이에 해당하는 돈이다. 때문에 그 중 하나를 잃어버렸을 때에는 마음이 아프고 그것을 되찾았을 때에는 얼마나 기쁨이 클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 한낮에 등불을 켠다는 것은 창문이 없고 출입문은 낮아서 빛이 전혀 들지 않는 가난한 집을 연상케 한다. 등불까지도 그 여자의 기쁨을 더더욱 들뜨게 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선포하신 내용(마르 1,15)을 ‘복음’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바로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소식이기 때문이다. 이 ‘복음’이라는 말은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와 관심을 한 마디로 표현하는 것이다. 복음의 내용이 이렇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 모두가 교회라고 하는 집안에 사랑과 용서를 선포함으로써만이 아니라 ‘죄를 짓고’ 문을 두드리는 모든 형제들을 기꺼이 맞아들임으로써, 그 기쁨을 널리 퍼뜨리는데 헌신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보다 멀리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할지라도 바리사이파 사람들처럼 놀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오직 기뻐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의 공간은 비록 죄를 지었지만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1절) 애를 쓰는 사람은 누구나 다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커지기 때문이다.

항상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실천하는 삶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항상 하느님께 되돌아가는 회개하는 삶이 중요하다. 이러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주님께 은총을 청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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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기쁘신 용서와 자비”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해내신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시나이 산에서 모세에게 당신 손가락으로 쓰신 돌로 된 두 증언판을 주실 때, 이스라엘 백성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먹고 마시며 놀았습니다. 이에 진노하신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목이 뻣뻣한 백성(탈출 32,9)”이라고 하시며, 이스라엘 백성을 파멸시키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간청을 듣고,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용서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용서해 줄 구실을 모세를 통해서 찾으셨던 것입니다. 이렇듯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방식으로 놀랍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비유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 아버지를 분명하게 알려주셨습니다. 특히 오늘 루카복음 15장은 “하느님의 기쁘신 용서와 자비”를 비유 말씀으로 가장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비유 말씀을 풀어보자면, 양이나 은전을 찾은 이, 그리고 아들을 맞이한 아버지는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반면에 길 잃은 양이나 잃었던 은전, 그리고 아버지를 떠나 방탕한 생활을 한 작은 아들은 모두 ‘죄를 지으며 방황하는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잃었던 양, 은전, 아들을 찾은 이들은 모두 하나같이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루카 15,6.9)”,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루카 15,32).” 이 비유 말씀처럼 용서받는 이들도 기쁘고 감사하지만, 더 기쁘신 분은 ‘하느님 아버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용서하실 때 당신의 기쁨을 죄인과 함께 나누십니다. 용서받는 기쁨, 또 용서하는 기쁨을 체험한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다는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상숭배로 주님을 배반했던 이스라엘 백성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또 교회를 박해했던 바오로 사도도 용서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용서해 주신다는 사실을 의심해서는 안됩니다. “용서받을 수 없겠지?”라는 생각은 우리를 하느님께로부터 계속 멀어지게 합니다. 끊임없이 회개하여 하느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여주셨던 것처럼 그리고 바오로 사도에게 보여주셨던 것처럼,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항상 우리를 위해 일하시고 용서와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받은 바오로 사도가 주님을 찬미했던 것처럼, 우리도 항상 주님을 찬미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영원한 임금이시며 불사불멸하시고 눈에 보이지 않으시며 한 분뿐이신 하느님께 영예와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1티모 1,17).”

남승용(십자가 요한) 신부
  |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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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자비에 질투심이 생긴다면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게 한 영화 ‘밀양’을 다 아실 것입니다. 전도연과 송강호가 함께 연기를 했는데 역시 전도연의 연기가 두드러졌습니다.

남편을 교통사고로 잃고 아들을 하나 데리고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피아노 강사 이신애가 정착하러 오면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그녀는 혼자 산다는 핸디캡을 극복하려고 그랬는지 돈이 많은 행세를 하고 여기저기 땅도 보러 다닙니다. 이 정보를 입수한 유괴범은 그녀의 아들 준을 납치해 살해하고 그녀의 남은 돈을 차지하지만 결국 경찰에 잡히고 맙니다. 남편을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외아들마저 비참하게 살해당한 것을 목격한 주인공은 장례식 때 눈물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앞집 약국을 운영하는 개신교 집사의 권고로 치유기도회에 가게 되고 그 곳에서 한 맺혔던 울음을 토하고 새 삶의 의미를 찾게 됩니다. 간증까지 하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가 된 주인공은 급기야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용서해주기 위해서 교도소를 방문합니다.

그런데 뜻밖에 그 유괴범도 신앙을 갖게 되어 하느님께 용서를 받았다고 하며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주인공은 다시 울화가 치밉니다. 자신도 용서를 했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의 유일한 아들을 죽인 살인범이 그렇게 편안하게 있는 모습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주인공은 이제 그 사람도 미울뿐더러 그 사람을 용서해 준 하느님을 더 원망하게 되고 미워하게 됩니다. 그래서 일부러 죄를 짓고 개신교 집회하는 곳에 가서 훼방을 놓습니다. 그런 것으로 화가 가시지 않자 그녀는 칼로 손목을 그어 자살을 기도하지만 간신히 목숨은 건집니다.

이는 오늘 세리와 죄인들을 쉽게 용서해주고 함께 식사를 나누는 모습을 본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의 마음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자신들은 큰 죄도 짓지 않고 열심히 살아왔는데 온갖 안 좋은 짓들을 잔뜩 하며 살아온 그들을 쉽게 용서해주고 함께 하는 모습을 보면서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위해서 탕자의 비유를 들어주십니다. 아버지는 탕자가 되었던 아들이 돌아와 기뻐하고 있는데 형은 동생도 밉고 아버지도 미워 집으로 들어오려 하지도 않습니다. 자신은 열심히 아버지를 위해서 일을 했지만 염소 한 마리도 친구들과 먹으라고 주지 않았던 아버지가 방탕한 생활만 하고 돌아온 동생을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도 아까워하지 않고 잡으라고 내어주시는 것에 화가 났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비유를 하나 더 들어주십니다. 포도원 주인은 일할 사람을 구하기 위해 아침에 나가 한 데나리온을 주겠다며 일꾼들을 데려옵니다. 아홉시에 나갔더니 여전히 일자리가 없는 사람들이 있어 데려옵니다. 점심때도, 오후에도, 일이 끝나기 한 시간 전에도 사람들을 데려옵니다.

그런데 포도원 주인은 늦게 온 사람부터 시작하여 모두에게 한 데나리온을 줍니다. 가장 처음에 와 일한 사람들은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난 너희에게도 약정한 대로 주었는데, 내가 자비로운 것이 그렇게 불만이냐?”

하느님의 자비가 불만인 이유는 본인이 그만큼 무자비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무자비한 사람들은 밀양의 주인공처럼 언젠가는 한계가 드러납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처럼 자비로운 하느님을 미워하고 떠나가게 됩니다.

이것이 밀양의 주인공이 자살을 선택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자살은 어쩌면 남들에게만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대한 마지막 반항일 수 있습니다. 마치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망치는 자녀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을 미워하는 사람들의 결말입니다.

가리옷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자살한 것은 죄책감이 들어서가 아니라 끝까지 하느님께 무릎 꿇기 싫어서 자신의 영혼을 죽여 가면서까지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똑똑하고 훌륭했다고 생각했는데 못 배운 어부들이나 가난한 사람들을 자신보다 더 뛰어나게 생각하는 예수님이 미웠고 그래서 끝까지 예수님과 또 하느님과 싸우고 미워하게 된 것입니다.

어찌 보면 아들을 살해한 그 사람을 용서하기 힘든 것이 당연한지도 모르고 그 주인공에게 연민이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왜 사람을 죽인 살인자는 구원을 받고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던 주인공은 하느님을 떠나고 자살을 기도함으로써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되느냐고 불공평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봅시다. 만약 주인공이 돈이 많은 척하고 다니지 않았다면 유괴범이 그 아들을 노렸을까요? 한 평범한 피아노학원의 아들을 노릴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들이 죽은 것에는 자신의 잘못도 적지 않게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아니었어도 다른 사람이 유괴하여 살해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한 번 골목에서 매를 맞고 있는 웅변학원 딸을 보면서도 모르는 척 차를 돌려 지나간 일이 있었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 딸은 미용사가 되어 주인공의 머리를 잘라줍니다. 과거의 일은 다 용서하였다는 듯이 선한 얼굴로 열심히 자르는데 사실 주인공은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옵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용서하지 못하는데 어린 이 아이는 자신을 용서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그것을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나도 누군가로부터 용서받고 있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지 않는다면 내가 아무리 잘 산다고 해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죄인 아닌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엔 질투를 합니까?

백 마리 양 중에 한 마리를 잃으면 목자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우리에 넣어놓고 한 마리 양을 찾아서 왔던 길을 되돌아갑니다. 그리고 그 골자기가 아무리 험해도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낸다면 그 한 마리 때문에 매우 기뻐합니다. 이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보다 이 한 마리의 양이 더 소중해서가 아닙니다. 양은 다 똑같이 소중합니다. 그러나 한 마리의 가치가 목자에겐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소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회개하는 것을 보면 하느님은 지체 없이 용서하시고 받아들이십니다. 하느님은 이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세상을 다시 창조해야 한다고 하더라도 다시 그 일을 하실 것입니다.

잃어버렸던 은화를 찾는 것 또한 잃어버린 은화가 다른 은화보다 값이 더 나가서가 아니라 잃어버렸던 것을 다시 찾는 기쁨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잃어버린 은화이고 잃어버린 양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 모으신 것입니다. 누구는 더 멀리 떨어져 있었고 그래서 데려오는데 시간이 조금 더 걸렸을 뿐이지 다 같은 신세였음을 명심해야 하고 하느님을 찾은 형제들을 보며 함께 기뻐해 주어야합니다.

가슴 아픈 것 중의 하나는 밀양의 주인공처럼 용서하지 못함으로써 자신까지 죽이게 되는 상황을 보는 것입니다. 어떤 할머니에게 할아버지를 네 자로 표현하라고 했더니 “평생 왼수”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남편이 젊었을 때 그렇게 속을 썩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용서하셨는데, 왜 할머니에게는 ‘평생’ 왼수일까요? 겉으로만 함께 살고 있다고 남편을 용서하고 받아들인 것일까요?

고정원씨가 자신의 노모와 아내, 아들까지 살해한 유영철을 용서한다고 했을 때, 주위에선 그를 미친 사람 취급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렇게 자비로운 사람들이 아니기에 남의 자비를 질투하고 견뎌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리아 고레띠 성녀는 자신을 수십 번이나 난도질한 살인자와 하느님나라에서 같이 살고 싶다고 하며 숨을 거두었습니다. 나의 원수와 함께 하늘나라에서 살고 싶어질 때, 비로소 용서가 완성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닮아가는 우리들이 됩시다.

전삼용 신부
  |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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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죄를 지었다고요? 그래서 몸과 마음이 위축된다고요??”

30일간의 피정을 마치고 돌아온 신학생들의 얼굴을 보니 예전과는 상당히 달라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영성지도 신부(노희철)가 잘해서???’라는 착각에 빠질 정도로 학생들의 얼굴은 ‘거룩한 변모의 예수님’(마르 9,2-9)처럼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물론 신학생 본인은 자신이 그렇게 변하였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겠지만, 사제인 내게는 그들의 변한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너무도 아름답고 맑은 모습을 보니 내가 오히려 더 기뻤다. 아마도 신학생들은 피정 안에서 자신의 죄를 진정 용서해주시는 하느님을 선명하게 체험하고, 그 과정을 통해 사제직에 대한 구체적인 열정과 희망을 확인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변화하는 신학생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신학교에 사는 사제들의 행복이요, 기쁨이며, 감동의 체험인지 모르겠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크신지 알려주신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느님의 자비를 설명하시게 되는 이유는 바리사이들의 불만 즉, 예수님이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로 시작되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죄인들과 함께하는 행위는 그들 역시 죄에 물든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죄’마저도 포용하고 성화시키는 ‘하느님의 자비’에 대해 설명하신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에서 목자는 잃었던 양을 찾으면 ‘양을 어깨에 메고’(6절), 친구들과 자신의 기쁨을 나눈다. 그 무거운 양을 어깨에 메는 행위는 양의 존재가 자식처럼 소중하고 가치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제1독서에서도 하느님을 배반하고 금송아지를 숭배하여 죄를 지었음에도,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드러난다. 하느님은 모세의 간청을 받아들이시어 ‘재앙을 거두신다’(탈출 32,14). 여기서 ‘거두신다’는 의미는 단순하게 재앙을 내리려던 마음을 접는다는 차원만이 아니라, ‘동정하다, 후회하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즉 하느님은 죄인들을 처벌하려는 마음을 포기하시는 것만이 아니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이사 43,4) 사랑하는 백성들을 처벌하려던 당신의 마음을 후회하신다는 의미까지 포함되어 있다. 이처럼 하느님은 우리가 마음을 바꾸고 돌아오기만을 학수고대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사실로 인해 수치스러움과 부끄러움에 사로잡히기 보다는, 오히려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음을’(1티모 1,16) 인식할 필요가 있다.

베드로 성인처럼 ‘예수님을 배반했던 것’(루카 22,54-62 참조)에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회개하고 뉘우치며, 그것을 바탕으로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바로 우리 신앙인의 삶이요, 하느님의 바람이실지 모른다.

▮ 수원교구 노희철 베드로 신부 : 2016년 9월 11일
  |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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