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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나약한 인간
조회수 | 2,342
작성일 | 07.09.12
지난 200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복자로 선포되었으며, 현재 시성을 위한 절차가 진행되고 있는 마더 데레사께서 생전에 몇몇 사제에게 보낸 편지가 공개되면서 하느님의 존재 여부에 대한 논쟁이 매스컴에 잠깐 화제가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기억에 마더 데레사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 때문에 다른 사람을 위해 일생을 바친 거룩한 수도자였습니다. 인도의 켈커타 거리에서 짐승처럼 죽어가는 사람들을 모아 극진히 간호하며 마지막 임종을 도와주는 일을 시작으로 극빈자들을 위한 봉사에 일생을 바치면서 열정적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게 해 주셨던 마더 데레사는 이 시대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보여주는 표지였습니다. 아무도 생각할 수 없었고 그 누구도 감히 시도해 볼 마음을 갖지 못했던 임종자들을 위한 희생적 봉사에 헌신하는 마더 데레사의 모습은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케 하여 신앙으로 돌아오게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공개된 편지에서 정작 자신은 하느님 체험을 느낄 수 없는 내면의 어둠으로 고통 받으며 신앙의 갈등을 겪었음을 고백하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런 충격적인 사실에 대해 교회 내부에서는 마더 데레사도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하느님 앞에서 나약한 한 인간임을 드러낸 것일 뿐이며,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갈등 속에서도 사랑의 실천에 모든 것을 바친 그의 삶은 그만큼 깊은 믿음을 보여준다고 평가합니다. 반면에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해 온 사람들은 이것을 하느님 부재를 증명하는 자료라고 주장하면서 마더 데레사를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하느님 때문에 인생을 망친 피해자라고까지 격하시키고 있습니다.

마더 데레사의 내면에 일어난 신앙의 어둠에 대해 그것을 하느님이 계시지 않다는 증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인도로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까지 나왔지만 결국 하느님 대신에 금송아지를 만드는 이스라엘 백성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하느님의 명령으로 시나이산에 머무는 동안 남아있던 백성들은 더 이상 감각적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불안한 마음을 없애려고 금송아지를 만들고 지금까지 그들을 이끈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보이는 형상으로 바꾸어버립니다. 오늘날 하느님의 부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통제할 수 없는 하느님 대신에 통제할 수 있는 다른 대상을 대체함으로써 스스로 하느님이 되고자 하는 이런 시도를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탕자의 비유도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하는 주인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강렬한 욕망과 그 욕망이 가져오는 파국을 보여줍니다. 아버지를 떠나는 탕자는 외견상 독립된 삶의 추구라는 긍정적인 측면을 가진 듯하지만, 사실상 아버지의 피와 땀이 배어있는 재산을 차가운 돈으로 모두 바꾸어버림으로써 아버지와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이며, 이런 단절이 그에게는 불행의 시작입니다. 전 재산을 돈으로 바꾸어 떠난 탕자가 찾아간 곳은 돈이 지배하는 세상이었고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돈을 잃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이었습니다. 죽음에 직면해서야 비로소 탕자는 자신이 선택한 삶이 얼마나 가혹한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세상,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실감케 하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운명은 갈라집니다. 이스라엘백성이나 탕자처럼 자신의 나약함을 부정하려할 때 불행은 시작되며, 내면의 어둠을 안고도 사랑을 실천해 나갈 때 마더 데레사처럼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안동교구 권용오 마티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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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우리 삶의 하루를 찬찬히 살펴보면, 종일토록 무엇인가를 선택해야하는 시간들로 가득차 있음을 알게 됩니다. 아침에 일어나 무엇을 먹을까? 어떤 옷을 입을까? 누구를 만날까? 무엇을 할까? 몇 시에 들판에 나갈까? 등등 언제 나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사람을 선택해야 하는 일이 생기면 정말 어렵습니다. 여러 사람들 중에 내가 만나고자 하는 사람을 정하는 것은 쉬운 듯 하면서도 어렵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을 크게 구분해 보면 두 부류가 있을 것입니다. 내가 도움을 청하는 사람과, 나에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면 나에게 이득이 돌아올 것 같은 생각이 들고, 또 어떤 사람을 만나면 오히려 귀찮은 일을 떠 맞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한정된 ‘하루’라는 시간 안에 수많은 사람들 중에 내가 선택하여 만나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인가요?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 주위에 여러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고 많은 사람들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과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만나기를 꺼려하는 세리와 죄인들이 등장합니다.

사람들이 꺼려하고 상종하기 싫어하는 세리와 죄인들은 필요한 것이 있거나 도움이 필요해도 선뜻 다가가 이야기 할 사람이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들은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살지를 못합니다.

이에 비해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세리와 죄인들을 만나려하지 않습니다. 그들과 만나거나 식사를 같이 하는 것조차 불경스러운 일이며 자신들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들을 만나는 것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나요? 예수님은 사람들이 만나기를 꺼려하는 세리와 죄인들을 만나고 그들을 친구처럼 대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거부하지 않고 음식까지 나누십니다. 음식을 서로 나눈다는 것은 생명을 나누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그런 생명의 나눔을 거부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참 기쁨에 대해 비유로 말씀해 주십니다. 가장 약한 이들, 나의 작은 관심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돕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설명해주십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항상 주변의 도움을 받으며 어렵게 살아오면서도, 삶의 조건이 달라지지 않아서 여전히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음을 생각해 봅시다. 그들 중에 우리의 무관심 때문에 우리에게 다가오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주저하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조그만 관심은 그들을 한없이 기쁘게 해 줄 것입니다. 예수님이 음식을 나누며 참 생명의 기쁨을 주셨듯이, 우리의 작은 포옹이 누군가의 생명을 밝혀준다고 생각하면 더 이상 그것을 주저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죽은 이를 살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 왔으니 잃었던 사람을 되찾은 셈이다. 그러니 이 기쁜 날을 어떻게 즐기지 않겠느냐?󰡓 (루가 16, 32)

안동교구 이재학 레오비노 신부
  |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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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살아가면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일들을 사고라고 합니다. 태풍 때문에 집을 잃거나, 불이 나서 많은 피해를 입거나, 피서지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사고들, 차량 때문에 생겨나는 사고들...... 갑작스런 사고를 당한 사람들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자신이 믿을 수 있고, 나를 도와줄 만큼 나를 사랑해준다고 생각되는 사람입니다.

평소에는 내 생각, 내 판단, 내 능력을 믿고 살아가지만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면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개인적인 어려움을 겪으면서 자기에게 소중한 것, 소중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깨닫고 새롭게 살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어려움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복음에도 어려움을 겪게 되는 작은 아들이 등장합니다. 아버지에게서 받은 재산으로 먼 고장에서 자기 마음대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아버지의 재산을 낭비합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고장에 심한 기근까지 들어 아무도 타향인인 그를 도와주지 않습니다. 배고픔에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라도 배를 채우려하지만 그것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어려움과 비참함 속에서 아들은 잊고 지내던 ‘아버지’라는 존재를 기억해냅니다. 풍요로움 속에서는 잊고 지내던 그 이름 ‘아버지’를 궁핍함 속에서 찾아냅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지냈던 시간들이 얼마나 행복한 시간이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아버지의 종들조차도 배부르게 먹는데, 아버지의 아들로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는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을 이겨내고, 아버지를 찾아갈 마음을 먹습니다.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도 없음을 시인하며 아버지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런 아들의 돌아옴(회개)을 아버지는 너무나도 기뻐하며, 손에는 반지를 발에는 신발을 신겨주며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려주십니다. 그리고 큰 잔치까지 벌입니다. 이 아버지의 모습이 바로 하느님의 모습이며, 하늘나라의 모습입니다.

하느님이 나에게 얼마나 소중하신 분이신지, 하느님 곁에서 지내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는 우리가 죄를 짓고, 그분이 주신 은총에서 멀어질 때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우리 안에 아버지의 재산이 떨어지면 우리는 궁핍해지고, 비참해집니다. 그리고 또 일어서서 아버지께 돌아갑니다. 그러면 또 용서해주시고, 또 채워주십니다. 죄에 떨어지는 일은 두려워해도, 회개하는 일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아버지는 자식을 버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안에 풍요로움이 있습니까? 그것은 아버지의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궁핍함이 있습니까? 그것도 아버지의 것입니다. 풍요로움은 아버지의 곁에 있음을 기쁘게 해주고, 궁핍함은 아버지의 곁으로 가라고 해줍니다. 풍요로움과 궁핍함이 교차되는 이 세상에서 언제나 푸근한 아버지의 품을 기억하도록 합시다.

김요한 요한 신부
  |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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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인간의 죄, 하느님의 자비

교우 여러분, 찬미 예수님!
이렇게 풍요로운 가을을 위해 지난여름은 그렇게도 무더웠나 봅니다. 추석 명절 준비에 모두들 바쁘시지요? 성묘(省墓)와 귀성(歸省)은 고향에 돌아와 살피고 돌아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조상들의 묘는 물론 고향의 뒷산과 앞들과 냇가도 잘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웃어른들과 동네 사람들 그리고 타향살이하는 가족들의 안부와 신앙생활은 어떤지도 살펴야하며 자신의 전반적인 삶도 살펴야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명절을 축제로서 잘 지내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우리에게 주님의 용서와 자비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제1독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섬겨 하느님께서 진노하자 모세가 애원하며 빌었다는 내용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당신 백성에게 내리려던 재앙을 거두십니다. 모세의 중재기도와 하느님의 자비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제2독서에서는 교회를 박해하는 일에 앞장섰던 바울로가 하느님의 자비로 복음을 선포한 일과 그로 말미암아 감사와 찬미를 드린 내용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바오로는 “나는 죄인 중에서 가장 큰 죄인입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는 이와 같은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하면서 자기 자신의 죄 많은 과거를 상기하면서 예수님이야말로 죄인을 구하러 오신 용서와 자비의 왕이심을 고백합니다.

복음에서는 세 가지 비유, 곧 ‘잃은 양을 되찾고 기뻐하는 목자의 비유’, ‘잃은 은전을 되찾고 기뻐하는 부인의 비유’, ‘잃은 아들을 되찾고 기뻐하는 아버지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 비유들을 통해서 한없이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인내심과 너그러우심을 통해서 인간에게로 향하는 하느님 아버지의 무한한 자비와 용서와 사랑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회개하는 죄인들을 반기고 그들을 각별히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도 하느님을 본받아 그렇게 처신한다는 것이지요. 특히 세 번째 비유에는 잘못을 뉘우치고 되돌아온 작은 아들을 반기는 아버지의 모습과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큰아들을 설득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대조를 이룹니다. 따라서 세 가지 비유는 용서하고 사랑하는 하느님의 모습과 그 하느님을 본받아 죄인들과 어울리는 예수님의 처신을 강조한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세관원들 및 죄인들과 자주 어울려 식사하는 데 대하여 못마땅해 하는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을 향해 이 비유들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비유들은 예수님의 자기변호라 하겠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은 율법을 제대로 알지도 지키지도 못하는 천민들을 죄인으로 취급하여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인과응보(因果應報)와 상선벌악(償善罰惡)의 논리에 따라서 율법을 지키는 자신들과 같은 의인들에게는 하느님이 복을 내리고 그렇지 못한 죄인들에게는 벌을 내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된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못마땅해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저들을 향하여 하느님은 벌하거나 진노하는 분이 아니라 비유에 나오는 목자, 부인, 아버지처럼 항상 용서를 베풀고 회개하는, 죄인을 반기는 분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구원과 자비에서 제외된 죄인이란 있을 수 없으며 하느님께서는 죄인들과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돌보는 분임을 가르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율법준수와 공로 쌓기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인간의 노력으로 대체할 수 없으며 설령 인간이 죄를 지었다 해도 그 사랑과 자비는 제한될 수 없음을 천명하십니다.

이제 교회는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모습을 전함으로써 교우들로 하여금 기쁘게 살도록 도와주고 또한 예수님을 본받아 소외된 이들에게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쏟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엄격주의자들은 자비로움을 잃기 십상입니다. 오늘날 우리 성당에 지역에서 지탄 받는 사람이 성당에 나온다면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할까요? 성당은 윤리적으로 완벽한 사람들이 다니는 곳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믿는 우리 같은 죄인들이 다니는 곳이 아니겠습니까?

신앙생활은 윤리적으로 착하고 완벽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는 삶이 아닙니다. 비록 인간적으로는 모자라고 약하고 가련하더라도 예수님이 알려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배우고 깨닫고 본받아 하느님을 신뢰하며 사는 삶, 곧 회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아 살면 하느님이 나를 다스리시기에 이미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사는 것이요, 자유와 해방의 구원을 사는 것이며, 천국의 영원한 삶을 앞당겨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안동교구 정일 가브리엘 신부>
  |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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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우리가 성당에 다니는 이유?

오늘 독서와 복음은 우리에게 주님의 용서와 자비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제1독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섬겨 하느님께서 진노하시자 모세가 잘못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용서를 구하며 빌었다는 내용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당신 백성에게 내리려던 재앙을 거두시며 용서하셨습니다. 모세의 중재기도에 하느님은 자비로 응답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제2독서에서는 교회를 박해하는 일에 앞장섰던 바울로가 하느님의 자비로 복음을 선포한 일과 그로 말미암아 감사와 찬미를 드린 내용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바오로는 “나는 그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1디모 1,15-16) 하면서 자기 자신의 죄 많은 과거를 상기하면서 예수님이야말로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용서와 자비의 왕이심을 고백합니다.

오늘 복음은 ‘잃은 양을 되찾고 기뻐하는 목자의 비유’, ‘잃은 은전을 되찾고 기뻐하는 부인의 비유’, ‘잃은 아들을 되찾고 기뻐하는 아버지의 비유’ 세 가지를 들려줍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세관원들 및 죄인들과 자주 어울려 식사하는 데 대하여 못마땅해 하는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을 향해 이 비유들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비유들은 예수님의 처신을 비난하는 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자기변호라 하겠습니다.

세 가지 비유는 용서하고 사랑하는 하느님의 모습과 그 하느님을 본받아 죄인들과 어울리는 예수님의 처신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회개하는 죄인들을 반기고 그들을 각별히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도 하느님을 본받아 그렇게 처신한다는 것입니다. 한없이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인내심과 너그러우심을 통해서 인간에게로 향하는 하느님 아버지의 무한한 자비와 용서와 사랑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은 율법을 제대로 알지도 지키지도 못하는 천민들을 죄인으로 취급하여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인과응보(因果應報)와 상선벌악(償善罰惡)의 논리에 따라서 율법을 잘 지키는 자신들과 같은 의인들에게는 하느님이 복을 내리고, 그렇지 못한 죄인들에게는 벌을 내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은 그들이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됐다고 여긴 죄인들과 어울리는 예수님의 처신을 못마땅해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 번째 비유에는 잘못을 뉘우치고 되돌아온 작은 아들을 반기는 아버지의 모습과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큰아들을 설득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저들을 향하여 하느님은 벌하거나 진노하는 분이 아니라 비유에 나오는 목자, 부인, 아버지처럼 항상 용서를 베푸시고 회개하는 죄인을 반겨주시는 분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구원과 자비에서 제외된 죄인이란 있을 수 없으며 하느님께서는 죄인들과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돌보는 분임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또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인간의 노력인 율법준수와 공로 쌓기로 대체할 수도 없음을 말씀하십니다. 설령 인간이 죄를 지었다 해도 하느님의 그 사랑과 자비는 제한될 수 없음을 천명하십니다. 그야말로 무조건적인 사랑과 자비만이 흘러넘친다는 것입니다.

이제 교회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전함으로써 교우들로 하여금 기쁘게 살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을 본받아 소외된 이들에게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쏟아야 할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엄격주의자들은 자비로움을 잃기 십상입니다. 초대교회에서도 엄격주의자들과 근본주의자들은 죄인들이 성당에 다닌다고 불평을 하였습니다.

만약에 오늘날 이 지역에서 지탄 받는 사람이 우리 성당에 나온다면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할까요? 성당 욕먹인다고 나오지 못하게 막아야 할까요? 만약에 내가 큰 죄를 지으면 당분간은 성당에 나오지 말아야 할까요? 성당은 윤리적으로 완벽한 사람들이 다니는 곳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믿는 죄인들이 다니는 곳이 아닐까요?

착하고 완벽하게만 사는 윤리적인 삶은 신앙이 없이도 가능할 것입니다. 성당에 다니는 이유는 우리가 죄인이지만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체험하고 실천하는 구원을 사는 사람이요,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 위한 신앙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이 세상에서 영원한 가치, 하늘나라의 가치를 살기를 원하는 신앙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 안동교구 정일 가브리엘 신부 : 2016년 9월 11일
  |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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