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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너무나 자비로우신 하느님
조회수 | 2,298
작성일 | 07.09.12
복음을 전하러 나가면 가끔 이렇게 응답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아이고, 저 같은 사람이 성당에 나가면 남들이 손가락질합니다. 성당이 욕을 먹는다니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죄가 많은 사람이나 남의 구설수에 오를 만한 사람들은 성당에 나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당시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세리, 창녀, 문둥병자, 죄인들은 물론 자연재해나 질병에 의해 다치거나 실명한 사람들까지도 하느님께 천벌을 받은 부정한 자들로 여기고 공동체에서 격리시켜야 하며 사소한 접촉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사회 통념의 굴레에 갇혀 고통받고 소외되었던 이들에게 예수님 소문은 새로운 인생이 열리는 그야말로 복된 말씀이었습니다. 절망 중에 신음하던 많은 사람들은 희망을 안고 예수님 주변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본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투덜거립니다.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루카 15,2).

그들은 부정한 이들을 받아들이는 예수님을 가르치려 듭니다. 군중에게 잘못된 가르침을 퍼뜨리며 예수님께도 자신들의 논리를 강요하던 이들에게 세 가지 비유를 들어 하느님 사랑을 가르치고 계시는 현장이 오늘 복음 말씀입니다.

첫 번째 비유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비유입니다. 백 마리의 양 중에서 한 마리를 잃어 버렸다면 목자는 아흔 아홉 마리 양보다도 그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온 들판을 찾아 헤맬 것이고 마침내 찾게 되면 무엇보다도 기뻐할 것이라는 비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두 번째 잃어버린 동전의 비유에서도 은전 아홉 개가 주는 기쁨도 크지만 잃어버린 한 닢을 찾게 되면 얼마나 기쁨이 크겠느냐며 "하늘나라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 할 것이다"(마태 15,7)고 거듭 죄인의 회개를 강조하시더니 세 번째로 신약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중의 하나인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풍족한 아버지의 집에서 세상 물정 모르고 행복하게 자라난 둘째 아들은 세상의 환락과 재미에 마음을 뺏겨 떼를 써서 집을 나갑니다. 제 몫으로 돌아올 재산을 달라고 아버지께 졸라서 먼 고장으로 떠나 재산을 마구 뿌리며 방탕한 생활을 하지요. 재산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닥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의 교만하고 건방진 씀씀이에 사람들도 하나 둘 떠나가고, 그는 결국 빈털터리 외톨이가 되어 냉정한 인간 세상을 경험하게 됩니다. 굶주리던 그는 돼지 밥으로라도 배를 채워보려 했지만 그것마저도 주는 사람이 없었지요.

방탕했던 아들은 더 이상 내려갈 수 없을 정도의 바닥으로 내려가는 고통을 체험하고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음을 깨닫는 순간 자기 발로 떠났던 아버지께로 돌아갈 생각을 합니다. 많은 생각으로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터덜터덜 집을 향해 걸어오는 둘째 아들을 향해 뛰어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제나 저제나 밤낮 없이 아들을 기다리던 아버지가 누구보다도 먼저 아들을 발견하고는 달려들어 아들의 목을 끌어안았던 것이지요. 아버지는 하인으로라도 써 달라는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기뻐합니다. 그리고 하인들을 불러 잔치를 벌이라고 명령합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루카 15,22-24).

아무 이유도 묻지 않고 아버지는 회개하여 돌아온 아들을 받아들이며 동네잔치를 벌일 정도로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마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떠한 죄인이라도 회개하면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새로운 인생길을 열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에게 하느님의 따뜻한 사랑을 품고 살라는 말씀이 오늘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고 들으면서도 죽어도 용서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고 그들과는 함께하고 싶지도 않다고 생각되는 이웃이 있다면 여러분은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과 다름없이 예수님을 거스르는 길을 따라 걷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씩이나 강조해 말씀하셨듯이 우리 역시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과거를 씻고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들을 받아들여야 함은 물론 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시듯이 우리도 자비로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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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는 기쁨입니다

청소년 상담학을 공부할 때 강사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처음 가출하려고 마음을 정한 청소년들은 밖에서 하루 종일 놀다가, 밤늦게 집 근처를 배회하면서 자기 집에 불이 켜 있는지 없는지를 살펴본다고 합니다. 불이 켜져 있으면 집으로 돌아오고, 꺼져 있으면 가출을 결정한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들은 켜 있는 불빛에서 자신이 집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부모, 형제자매의 마음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루카 15,1-32)에서 나오는 작은아들의 생각과 마음은 모두 바깥으로 향해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를 졸라서 자신에게 돌아올 재산을 미리 물려받아 먼 고장으로 떠납니다. 가지고 간 모든 재산을 흥청망청 모두 탕진하자 자신이 머물고 있는 고장에서 돼지 치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는 배가 고파서 돼지들이 먹는 꼬투리 열매로라도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했지만 아무도 먹을 것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제야 작은아들은 정신이 난 것입니다. 외부로 나가 있는 삶의 방향이 이제 자기 안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들여다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속을 들여다보기 시작할 때는 갈등의 한가운데 있을 때입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무언가를 성취를 하면 변하거나 자신을 살펴야 할 이유를 잘 찾지 못합니다. 또 사람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고생을 하며, 양심의 가책을 경험하고, 굴욕을 겪음으로써 변화될 수 있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그런 갈등 안에 있는 자신을 들여다보면서 일방적이었던 태도에서 반대의 입장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면서 자신의 모습 중에서 전혀 보지 못하고, 생각해 보지도 못한 면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자신을 다른 방향에서 살펴보게 되는 것입니다. 갈등이 변화를 만든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인 것입니다.

갈등을 통해서 이루어진 회개는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하게 합니다. 작은아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작은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며 좋은 옷을 입혀 줍니다. 그리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며 살진 송아지를 잡아 줍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로운 사랑을 작은아들은 느낀 것입니다.

이런 회개의 체험은 세상과 이웃 사람에 대해서 새로운 마음으로 다가가도록 이끌어 줍니다. 예리코의 자캐오는 회개한 후 단절되었던 이웃과 화해를 합니다. 그 징표로 자기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한 것입니다(루카 19,1-10). 회개를 통하여 그는 기쁨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기쁨입니다.

정원순 토마스 데 아퀴노 수사 신부·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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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님의 자리를 빼앗으려 하다니…

필자는 교리시간에 ‘가톨릭(Catholic)’이란 말을 신앙고백의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에서 ‘보편되며’가 바로 ‘가톨릭’이라고 설명합니다. 또 중국에 그리스도교가 전래될 때 라틴말 하느님(Deus)을 ‘천주’(天主, 천상천하의 주인, 하늘의 주인)’로 번역했고, 자연스럽게 그 서양 종교를 그리스도(Christus)교의 음을 따서 기독교(基督敎)라 혹은 천주교(天主敎)라 불렀다는 설명도 덧붙입니다.

어느 분야 가릴 것 없이 일부 지도자들이 그 으뜸의 자리를 이용해 무소불위(無所不爲) 힘을 휘두릅니다. 천주님의 자리를 차지한 것처럼 행세합니다. 정치는 그 사회의 공동선을 촉진하고 특히 공동체의 이름으로 약자를 보살피는 역할을, 경제와 문화는 전인으로서 인간의 품위 있는 삶을 도모하는 역할을, 교육은 인간성과 공동체성의 증진을 돕는 역할을, 종교 특히 그리스도교는 하느님 백성을 돌보고 보살피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세상 모든 분야와 조직은 본질적으로 사람과 사람의 공동체를 위한 터전이라는 성격을 지닙니다. 지도자들이 비록 현실적으로 으뜸의 자리를 차지하지만 어디까지나 각 분야의 구성원과 그 공동체에 종속된다는 한계를 지닙니다.

세상에 무소불위의 권력은 있을 수 없습니다. 무소불위의 힘은 천주님에게만 있으며, 천주님조차도 그 전능하신 힘을 당신 백성 돌보는 데에 펼치셨지 짓밟는 데 쓰지 않으셨습니다. 1독서의 탈출기는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명령한 길에서 빨리도 벗어나, 자기들을 위하여 수송아지 상을 부어 만들어 놓고서는” 이를 자기들의 신으로 삼은 이스라엘 백성을 두고 “타락”한 백성, “목이 뻣뻣한 백성”이라고 질타하십니다.

복음의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은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속을 뒤집어놓았을 것입니다. 얼핏 세리와 죄인들을 잃어버린 양 한 마리, 은전 한 닢, 그리고 둘째 아들로 비유한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을 듣는 이들이 바리사이와 율법학자임을 생각하면, ‘너희들이야말로 잃은 양 한 마리, 은전 한 닢, 그리고 아버지를 죽은 사람 취급하고 그 유산을 미리 받아 탕진한 둘째 아들이다’는 고발로 들렸을 것입니다. 그들이 천대하고 사람 취급하지 않는 세리와 죄인들 앞에서 그런 모욕적인 말을 들었으니 예수님을 죽이려고 애쓴 이유를 알 것도 같습니다.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스스로를 “첫째가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다고 고백합니다. 하느님께서 명령한 길을 벗어난 이스라엘과 스스로 의인이며 지도자 행세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하고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바오로만한 지도자도 흔치 않았으며, 그만한 의인도 흔치 않았으나, 그는 스스로를 죄인으로 고백하고 하느님의 자비에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그분만이 천주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살펴봐도 그분만이 천주님입니다. 분야를 막론하고 곳곳에서 수송아지를 놓고 구성원과 공동체를 현혹하는 이들이 자기들 멋대로 단죄한 오늘의 ‘세리와 죄인’
을 밥상에서조차 내쫓으려 하면서(주변화), 정작 스스로는 의인이며 지도자 행세를 하더라도 말입니다.

박동호 안드레아 신부
  |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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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식물원에서 한 젊은 여성이 자신의 머리를 우아하게 쓰다듬으며 푸른 나무 사이를 걸어갑니다.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비싼 헤어제품을 쓰면서 변화된 자신의 모발에 대해 더할 수 없는 만족을 느낍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격은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하면서 “나는 소중하니까”(Because I’m worth it)라고 말합니다. 이 간결한 문구는 상품광고의 차원을 넘어서 그동안 평가절하되어 온 여성의 자의식과 여성에 대한 보수적인 시각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주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에게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요? 되찾은 양, 되찾은 은전, 되찾은 아들의 비유로 매우 짜임새 있게 구성된 오늘의 복음이, 이에 대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복음의 도입부분에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세리나 죄인들과 교류하고 소통하시는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이들은 세상이나 인간의 변화에 대해 거부하면서, 세리나 죄인들은 격리된 채 그들만의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세리나 죄인들도 소중하며, 이들이 변화하고 회개하여 모든 이들이 당신 품 안에서 온전한 공동체를 이루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양 백 마리를 가진 남자가 길 잃은 양 한마리를 찾아 나섭니다. 은전 열 닢을 가진 여자가 사라진 한 닢을 찾기 위해 온 집안을 샅샅이 뒤집니다. 되찾은 은전의 비유에서는 하느님의 마음을 여성의 이야기로 풀어가는데, 남성 중심 사회였던 당시로써는 매우 파격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두 아들을 둔 아버지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지난 사순 제4주일에 이미 봉독되었기에 올해 두 번이나 듣게 되는 셈인데, 그 메시지의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비유의 공통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소중한 것을 되찾은 기쁨입니다. 남자는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기어이 찾아내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루카 15,5) 돌아와서는 친구와 이웃들과 함께 기쁨을 나눕니다. 여자는“등불을 켜고 집 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져”(루카 15,8 참조) 찾아내고는 그 기쁨을 친구와 이웃들과 나눕니다. 마지막 비유는 더욱 극적입니다. 작은아들이 아버지에게 자기 몫의 유산을 미리 달라고 했으니,이는 아버지를 죽은 사람으로 여기겠다는 행동입니다.

이랬던 아들이 거지꼴이 되어 돌아오자 먼저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고”(루카 15,20 참조) 반지와 신발을 신겨줍니다. 사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아들입니다.(루카 15,32 참조) 아버지는 이 작은아들을 위해 큰 잔치를 벌여 기쁨을 표현합니다. 길 잃은 양, 사라져버린 은전, 집 떠난 아들은 누구일까요? 아무 죄도 없으신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시고, 그것도 부족하여 수난을 겪으시고 치욕스럽게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너무 소중하니까!

십자가형에 처해진 성 안드레아는 마지막 순간에도 하느님을 희망하고 그리스도를 기억하였습니다. 그는 신앙을 고백하며 그리스도를 닮고 그리스도처럼 죽기를 희망하였습니다. 한 줄기 빛이 성안드레아를 비춥니다. 이 빛은 하느님의 구원의 빛이었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루카 9,23-24 참조)

<서울대교구 김영국 요셉 신부>
  |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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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죄 많은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성경 전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입니다. 조금 더 부연해서 말하면 ‘인간의 죄와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당신을 닮은 완전한 모습으로 창조하시고, 당신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같아질 수 있다는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은 최초의 인간은 스스로 하느님을 피해 숨게 되었고, 마침내 낙원에서 추방되어 오늘날 우리처럼 유한하고 나약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후 성경의 역사는 끊임없이 하느님을 의심하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배신하는 죄를 저지르는 인간의 이야기와 끊임없이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두 개의 독서와 복음 말씀도 ‘죄 많은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관한 내용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에 분노하시며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겠다고 까지 말씀하시지만, 모세의간곡한 애원에 분노를 거두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해주십니다. 제2독서에서는 바오로가 자신의 죄스러운 과거를 고백하면서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과 자비가 얼마나 크고 위대한지를 티모테오에게 증언하며 용기를 북돋워줍니다.(1티모 1,15-16 참조) 인간의 죄를 뛰어넘는 그 무한하신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체험한 바오로는 기쁨으로 가득찬 찬미를 드립니다. (1티모 1,17 참조)

오늘 복음은 자비의 복음이라고 불리는 되찾은 양과 은전, 그리고 아들의 비유입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에서 목자와 양 떼는 하느님과 그분 백성의 관계를 가리키는 고전적 표상이며 잃어버린 양을 되찾는 것은 구원을 뜻하는 전통적 은유입니다. 양 백 마리 중에서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목자의 모습은 죄인의 회개를 위해 먼저 다가가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잘 드러내 줍니다. 그리고 그 잃어버린 양을 되찾고 기뻐하는 목자의 모습은 하느님께서 죄인의 회개를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되찾은 은전의 비유에서 ‘등불을 켜고 집안을 쓸며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는’ 부인의 모습은 감동적이기까지 합니다. 두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주인이 잃어버린 양과 은전을 온 마음을 다해 찾아 나선다는 점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죄인의 회개를 앞서갑니다. 그분은 우리가 죄를 짓는 순간부터 우리가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시며 찾아 나서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어떠한 모습에도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느껴 보십시오. 하느님께 용서받은 기쁨으로 가득 차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일상의 삶 속으로 들어가 하느님께서 내게 보여주신 그 큰 사랑으로 ‘나 또한 너를 사랑한다.’고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외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느님은영광과 찬미를 받으소서. 아멘!

▮ 서울대교구 홍인식 마티아 신부 : 2016년 9월 11일
  |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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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인간을 향해 달려오시는 하느님

하느님의 표정은 어떨지 궁금합니다. 초월적이고 전능하신 창조주 하느님, 구원하시는 하느님은 어떤 성격을 지니고 계시는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근엄하시기만 하신 하느님이실까.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시느라 너무 바빠서 웃으실 여유가 전혀 없으신 분인가. 소리 내서 웃으시는 분인지, 빙긋이 미소만 짓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뵐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았으면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씀하셨습니다. 영원히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인간이 되셔서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하느님 아버지께서 어떤 분인지 즉시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하느님 자비의 복음’을 담뿍 담고 있는 루카 복음 15장을 보면, 하느님은 온통 기쁨으로 가득하신 분이십니다. 보통 부모들은 자녀들이 시험 점수를 잘 받아오면 기뻐합니다. 자녀들이 착한 일을 하고, 남들보다 잘하면 더없이 기뻐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전혀 다른 분입니다. 무리를 떠나서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느라 갖은 고생을 다 하고 나서 그 양 때문에 기뻐합니다. 저 같으면 괘씸해서 그 양을 한 끼라도 굶길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매우 만족스러워 하는 얼굴을 하고 있는 양 주인은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 함께 기뻐합니다. 맨입으로 기뻐하자고 제안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상상해 봅니다. 잃어버렸던 은전을 찾느라고 고생을 많이 하고 나서 찾아낸 그 잃어버렸던 은전 때문에 마찬가지로 기뻐합니다. 하느님은 사람들과 사고방식이 전혀 다른 가 봅니다. 우리는 죄인을 감옥에 가두고 될 수 있으면 마주치는 것을 피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두고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흔히 ‘탕자의 비유’라고 말하는 내용은 더 적나라합니다. 하느님을 떠나는 원죄를 짓는 인간의 모습이 아버지를 두고 멀리 떠나는 작은아들에게서 엿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멀리 떠나서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도 보입니다.

하지만 잃어버린 양 한 마리가 주인을 찾아간 것도 아니고, 잃었던 은전이 떼굴떼굴 굴러서 그 부인에게 다가간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찾아 나서신 것이지요. 그러니 하느님께서 회개하신 것이라고 말하면 불경죄에 걸리겠지요? 작은아들을 향해서는 아버지가 달려갔습니다. 아버지를 떠나서 방탕하게 살다가 나중에는 돼지 먹이로라도 배를 채워 보려고 했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비참하기 짝이 없는 상태까지 이르고 말았습니다. 너무 배가 고파서 아버지 집에 품팔이꾼이라도 돼서 배고파서 죽는 것을 면해 보려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이기를 포기한 채 집으로 돌아가는 아들의 비참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완전히 모습이 변한 아들을 멀리서 알아보고 달려갔습니다. 항상 동네 길목을 바라보면서 아들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는 것이지요. 결정적인 순간에 아들을 향해서 돌진하다시피 아버지가 달려간 것입니다. 그리고 기뻐하는 것은 표정뿐만이 아닙니다. 잔치가 벌어지고 아버지는 술도 들고 덩실덩실 춤도 춥니다. 참을 수 없는 기쁨이 넘치는 것이지요. 그래서 살진 송아지도 잡았습니다. 나중에 큰아들은 이것 때문에 더 화를 낼 정도였습니다.

오늘도 인간은 하느님에게서 멀리 떠나고 싶어 합니다. 버젓이 그렇게 하면서 뽐내기도 합니다. 하느님 곁에 머무는 사람들을 멸시하는 눈초리로 바라보기도 하고 경멸하는 표정을 짓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 곁을 떠나서 자신만만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앞에서, 부러워하면서 주눅이 드는 신자들도 있습니다. 그래도 하느님을 떠난 인간을 향해서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달려가십니다. 마치 마라톤 선수처럼 영원히 인간을 향해서 달려가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인간을 얼싸 안고 이루 다 말할 수 없이 기뻐하십니다. 조건 없이 인간을 향해서 함박꽃같이 활짝 웃음을 지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과연 인간이 하느님께로 회개하는 것인지, 하느님께서 인간을 향해서 회개하시는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하겠습니다.

▮ 서울대교구 주수욱 신부 : 2016년 9월 11일
  |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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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7   [서울]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기  [4] 2358
746   [수원]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3] 491
745   [인천] 감사할 줄 알기에 행복한 삶  [5] 2587
744   [원주] 있지만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  [4] 2685
743   [춘천] “감사하는 마음으로 ‘탓’은 나에게”  [2] 63
742   [전주] 영혼이 병든 사람들  [1] 2500
741   [광주] 감사는 믿음의 축복  [1] 45
740   [의정부] “네 닭을 잊었느냐?”  [2] 2363
739   [군종] 감사의 기도  [1] 35
738   [대전] 나머지 아홉은 뭐야?  [2] 2632
737   [청주] 화장실 갈 때의 마음!  [1] 56
736   (녹) 연중 제28주일 독서와 복음 (나병 환자 열 사람)  [2] 2188
735   [마산]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신앙  [1] 2296
734   [대구] 내 믿음의 정도는  [1] 2358
733   [부산]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4] 2345
732   [안동]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과 종의 모습  [2] 2998
731   [춘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2] 2686
730   [수도회] 겨자씨  [10] 2637
729   [서울]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5] 2779
1 [2][3][4][5][6][7][8][9][10]..[20]  다음
 

 

주일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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