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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조회수 | 2,305
작성일 | 07.09.12
성경이 없어졌다? 그럴 리가 없다. 만일 성경이 없다면 우리는 하느님, 하느님의 사랑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어느 신학자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다 없어진다 하여도 루카복음15장만 있으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자비를 알 수 있다” 이 말 때문만이 아니라도 15장에는 너무도 많은 묵상거리와 영성의 보물이 담겨져 있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 이야기에서 우리는 양의 습성을 알 수 있습니다. 떼로 다니는 이유는 지독한 근시로 앞을 제대로 볼 수 없고 목자와의 필연적 관계 때문입니다. 양은 욕심이 많습니다. 방목하여 풀을 뜯는 양을 2~3시간이 지나면 이동시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양은 풀의 뿌리까지 다 뜯어먹습니다. 또 양은 광야에 4시간 이상 햇볕에 노출되면 죽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양에게는 목자가 반드시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길을 잃는다는 것 자체가 위험합니다. 지독한 근시, 생존의 위협 앞에 무방비로 노출되어있는 길 잃은 양에게 목자는 가엾은 마음을 갖습니다. 그러기에 수많은 노고를 아끼지 않고 양을 찾아나서는 목자의 심정을 헤아려봐야 하지 않을까요?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선 어느 목자가 성경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연 쿰란사본 성경을 발견한 것은 우연만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길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가엾은 마음이 탕자 이야기에서 한 번 더 중복됩니다. 양을 찾은 목자가 기쁨에 겨워 양을 가슴으로 끌어안듯, 돌아온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기뻐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바로 그러합니다. 아들 역시도 욕심이 많고 미련하여 재물이 아버지보다 좋았고, 재물의 남용이 가져오는 환희와 기쁨을 아버지의 따스함보다도 더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아들은 남용의 끝자락에서 다행히 따스한 아버지를 떠올렸고, 아버지께 돌아옵니다. 돼지들 사이에서 살았기에 거지만도 못한 아들의 더러운 냄새와 행색은 아버지에게 하나도, 조금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돌아온 아들이 감사하고 기쁠 뿐입니다.

부처님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했다면,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 너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수많은 말씀과 기적은 오직 한 가지만을 위해서입니다. 바로 “하느님 아버지, 하느님 나라”였습니다. 그러한 아버지 나라에 들기 위한 자격이랄까 조건이랄까 그것은 회개, 쇄신, 삶의 방식을 바꾸라는 절대 절명의 명령입니다. 지금까지 내 중심적인 삶의 방식, 가치관, 경험이었다면 이제 남은 생애는 하느님 아버지 중심적인 삶의 방식을 가져보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따스한 가슴이 그리운 날입니다.

의정부교구 지정태 요한보스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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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오늘 복음에는 ‘되찾은 양’, ‘되찾은 은전’, ‘되찾은 아들’이라는 제목의 3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이 비유들은 공통점을 갖고 있는데 ‘잃었던 것을 되찾기 위해서 애쓰던 이들이 소중한 것을 되찾고 난 후 크게 기뻐하고, 그 기쁨을 나누기 위해 이웃이나 친지들을 초대’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아버지께서 진정으로 기뻐하시며,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밝히시고, 그 기쁨을 함께 누리도록 우리를 초대하고자 하십니다.

먼저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를 ‘포기하지 않고 잃은 것을 끝까지 찾아 나서시는 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잃어버린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우리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존재인가’를 알려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우리는 당신의 분신이고, 잃어버리고도 아무 상관없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실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잃어버렸던 우리를 “되찾고”, 당신을 떠나 죽었던 우리가 “다시 살아날” 때 가장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또한 하느님은 당신의 기쁨을 우리와 나누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우리를 되찾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간절한 마음은 당신만의 기쁨을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치 자녀가 잘되고 행복하기를 한결같이 바라는 부모의 마음처럼 하느님도 그러하십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우리를 찾아 나서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느님을 찾기(회개)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함께 기쁨을 나눌 ‘즐거운 잔치’를 벌이고자 하십니다.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루카 15,6)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당신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초대에 여러분은 어떻게 응답하시겠습니까? 복음 말씀을 듣고 회개함으로써 기꺼이 하느님께로 돌아간 세리나 죄인들처럼 그분의 초대에 응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처럼 여전히 완고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돌아갈 기회를 놓치시겠습니까?

이재화 안셀모 신부
  |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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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넌 누구냐?

“누구냐 너는?” 한국 영화 ‘올드보이’에서 배우 최민식씨의 입을 통해 흘러 나왔던 인상 깊은 대사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 대사는 ‘올드보이’라는 영화 이전에 애니메이션 영화였던 ‘라이온 킹’에서 먼저 들었던 대사다.

“Who are you?” 우리말로 뜻을 풀이하면 “넌 누구냐?”라는 질문이다. 아주 단순한 질문이다. 그러나 인간사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질문이 아닐까 싶다. 특히, 믿음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그리스도인에겐 더 없이 중요한 질문이다. 이 질문에 어떤 답을 갖고 있는지, 어떤 답을 내놓을 것인지에 따라 삶의 궤적이 달라지기 때문일 것이다.

어린이들이 좋아했던 애니메이션 영화 ‘라이온 킹’의 주제와 같은 이 질문 “Who are you?”는 왕국의 임금이었던 아버지 사자 <무파사>를 삼촌 <스카>의 계략에 속아 죽음에 이르게 했던 죄책감으로 왕국을 떠나 진실을 깊이 묻어버리고 새로운 친구인 멧돼지 <품바>와 미어캣 <티몬>과 함께 “하쿠나마타타! (모든 게 다 잘 될거야!)”를 외치며 현실에 안주하고 살아가고자 했던 아들 <심바>에게 들려왔던 질문이다.

현재의 삶에 만족하며 왕이 되어야 할 자신의 사명을 버리고 살고 있던 <심바>에게 어느 날 여자 친구 <날라>와 아버지의 친구이자 예언자인 원숭이 <라피키>가 찾아온다. 그리고 그 날 과거의 악몽, 어둠의 무게에 짓눌려 있던 사자 <심바>에게 내면에 깊이 잠들어 있던 아버지 <무파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Who are you?” “넌 누구냐?” 이 깊은 물음에 <심바> 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다시 묻고, 찾게 된다. “난 사자왕 <무파사>의 아들, ‘심바’, 왕국의 후계자” 그리고 다시 아버지의 왕국, 자신의 왕국으로 돌아간다.

방탕한 작은 아들은 오늘 다시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길을 걷는다. 그가 그 길을 다시 걸을 수 있었던 근원적 힘은 그가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어떤 이유에서든 그는 자신이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다. 그것이 아들이 아버지에게로 돌아올 수 있었던 원천적 힘이다.

우리는 완벽하지도 않다. 우리는 <심바>이기도 하고, <작은 아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전이 우리는 <무파사의 아들 심바> 이며 <자비로운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을 기억해 내는 한 우리에겐 여전히 희망이 있다. 자신이 누구인가를 기억해 내는 것, 그곳에 구원의 근거가 있다고 믿는다.

“Who are you?” “너는 누구냐” 는 이 물음에 우리는 오래된 미래의 답을 해야 한다. “나는 하느님의 자녀, 그리스도인 입니다.”

<의정부교구 성준한 바르나바 신부>
  |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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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죄인을 바라보는 시선

의정부교도소에 고해 성사를 주기 위해 처음 방문했을 때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소지품을 모두 내고 교도관을 따라 여려 겹의 철문을 지나고, 숨 막힐 듯 무거운 공간으로 들어서던 그 순간은 마치 제가 죄인이 된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등 뒤로 철문이 철컥 닫힐 때의 싸늘함의 기억은 여전히 차갑게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들어가서 재소자들에게 면담 고해성사를 주었습니다. 처음에는 무서운(?) 사람들을 만난다는 생각과 그들에게 내가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두려움과 걱정을 한가득하며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고해성사 때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제가 아주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무섭고 나쁜 사람들이 아니라, 아프고 약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다른 사람보다 열악한 처지에 처해 있었고, 그래서 다른 사람보다 아프고 약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상태에서 맞닥뜨린 어떤 순간을 참지 못해 범죄자가 된 것뿐, 저와 다를 바 없는 똑같은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저 역시도 그분들에게 일어난 일들이 저에게 일어났다면, 충분히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었겠다는 생각까지도 들었습니다.

외국의 사례에서지만 좋은(?) 교도소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개신교에서 설립한 민간 교도소가 운영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곳의 재소자들은 편의시설이 갖추어진 곳에서 생활을 하기도 하고, 가족들과 함께 지내기도 합니다. 자율적인 공동체를 만들어 지내보기도 하고, 운동과 문화생활을 즐기기도 합니다. 그것은 죄인을 나쁜 사람이 아니라 아프고 약한 사람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들을 회복시키고 교육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죄인들에게 그렇게 잘 대해줘도 되느냐고 하지만, 이런 방식의 교도소를 거쳐간 사람들의 재범률은 벌을 주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일반 교도소를 거친 사람들의 십분의 일 수준으로 떨어진다는 것이 그 대답을 대신해 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이 죄인을 바라보는 시선은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죄인을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아프고 약한 사람"으로 바라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살리고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서 그들에게 다가가 만나고 치유하며 함께하셨습니다. 큰 죄를 지은 자녀일지라도 당신의 부족함 때문이라며 버리지 않고 돌봐주시는 부모님처럼,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끌어안으셨습니다. 죄인을 나쁜 사람이 아니라 아픈 사람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나도 언제든 아프고 약해질 수 있고 그래서 언제든 죄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깨닫고 닮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그들에게 다가가 함께할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을 것입니다.

▮ 의정부교구 이진원 십자가의바오로 신부 : 2016년 9월 11일
  |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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