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주일강론 (다해)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449 52.4%
[부산]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조회수 | 2,454
작성일 | 07.09.12
본당에서 신자들을 대할 때마다 언제나 그어지는 선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만들어 놓은, 보이지는 않으나 사람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일종의 ‘생명선’입니다. 그 선 안에는 제 나름의 시각에 따라 이러 저러한 사람들이 불려오곤 합니다. 예를 들어 본당을 위해 여러 가지 헌금과 기금을 많이 낸 사람들이나 혹은 본당 일에 헌신적이라고 여겨지는 이들이 여기에 해당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사제를 예수님 대하듯이 하는 이들은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게다가 여러 신심 단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기도하는 이들도 그러합니다. 물론 스스로 가난하게 되신 주님 때문에라도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 노인들과 그 밖에 이른바 사회에서 소외 받는 이들을 정말 가뭄에 콩 나듯 그렇게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 생명선 안이 아닌, 밖으로 내쳐진 이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제 관심 밖입니다. 그러나 단지 제 관심 밖에 머무는 것으로만 끝난다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이제 제게 있어 그 생명선 밖의 사람들은 오류에 물든 자들이며 교만이나 죄스러움 등의 말들로 비난받아 마땅한 자들, 말하자면 도무지 미워하지 않고서는, 도무지 저 멀리 내쳐버리지 않고서는 안 될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제가 만들어 놓은 하느님이란 이름으로 이쪽은 택함을 받고, 저쪽은 결국 배척을 받습니다. 분명 이것이 사제인 제게 버젓이 남아있는 ‘취함과 버림’의 틀이요, 하느님의 뜻으로 믿어 의심치 않은 혼자만의 기준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하느님은 꼭 그런 분이십니까? 취하고 버리는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우리들의 그것이 진정 하느님의 모습입니까?

그러나 오늘 복음은 결코 하느님은 그런 분이실 수 없음을 말합니다. 취함과 버림의 하느님이 아니라, 오직 사랑의 하느님이실 뿐이라고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저 사랑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그가 잃은 양이든 잃은 은전이든, 혹은 남아있는 아흔 아홉 마리 양이든, 품에 있는 아홉 닢의 은전이든 그 누구든 하느님은 그저 사랑하실 뿐입니다. 그분이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고 은전 한 닢을 애타게 찾으며 둘째 아들을 그렇게 반갑게 맞이하는 것은 그에게 그렇게 해 줄 만큼의 어떤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분이 곧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그분은 사랑 어린 눈길 자체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수없이 그분의 사랑을 피해 달아나서는 낯선 곳만을 헤매고 있었던 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었습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우리 모두를 당신의 사랑스런 자녀로 받아들이십니다. 이제 어둠은 지나고 사랑의 시간에 이르렀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내어 드리고 그분의 품에 안기도록 합시다. 진정 우리 주님이 그것을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눈에 우리는 오직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부산교구 천경훈 프란치스코 신부
449 52.4%
측은히 여기는 아버지의 넓은 마음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세 개의 비유를 소개합니다. 양 한 마리를 잃고 그것을 되찾아서 기뻐하는 목자의 비유, 은전 한 닢을 잃고 되찾아서 기뻐하는 여인의 비유,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탕진하고 배가 고파 집으로 돌아오는 자식을 영접하는 아버지의 비유입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들을 말씀하신 것은 죄인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음식까지 나눈다는 유대인들의 비난에 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가 죄인이라고 버린 사람들을 영접하고 그들과 어울렸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처신을 유대교 지도자들은 비웃고 비난하였습니다. 그 비난은 결국 예수님을 죽음에까지 몰고 갔습니다. 죄인들과 어울리는 사람을 죄인과 동일시하던 그들이었습니다.

오늘 비유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목자, 여인, 그리고 아버지는 분개할 여건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목자는 길 잃은 양을, 여인은 잃어버린 은전을, 그리고 아버지는 자기를 버리고 떠난 아들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잃었던 것을 되찾아서 기뻐합니다. 겪은 아픔에 대한 원망이나 보복은 전혀 없습니다. 하느님은 잃었던 죄인을 되찾아서 기뻐하시는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버지를 떠난 아들이 되돌아오는 것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우리는 오늘 자세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받아 떠나갔습니다. 유산을 취하고 아버지를 버린 것입니다. 패륜의 시작입니다. 그 아들은 재산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을 다 누렸고, 받은 유산은 결국 바닥나고 말았습니다. 재산이 없어지자 그는 모든 사람의 냉소를 받으면서 굶주려야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아버지의 집이 생각났습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종들도 굶주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집으로 돌아오기로 마음을 정하였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돌아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떠난 후 아들을 잊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멀리서 알아본 “아버지는 측은한 생각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제일 좋은 옷을 꺼내어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겨” 줍니다. 그리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합니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말합니다. “먹고 즐기자! 죽었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 왔다.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다.” 자기를 배신한 아들에 대한 울분도, 탕진한 재산에 대한 추궁도 없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되찾은 것이 기쁘기만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마음이고 이것이 죄인들과 어울리는 예수님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연장하여 하느님을 상상합니다. 사람을 단죄하고 그 죄 값을 치르게 하는 것은 우리가 당연시 하는 원칙입니다. 착한 사람 상 받고 악한 사람 벌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상선벌악(賞善罰惡)이라고 우리가 말하는 원칙입니다. 인간 사회는 이 원칙을 바탕으로 질서를 만들었습니다. 교육기관은 성적과 품행이 좋은 사람을 택하고 나쁜 학생을 버립니다. 우리는 운동시합에서 우승한 선수에게 박수갈채를 보내고 입상하지 못한 선수는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 사람을 사회에서 격리시킵니다. 잘못한 그만큼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런 질서에 익숙한 나머지 하느님을 생각할 때도 그분의 마음에 들지 못하면 버림과 벌을 받는다고 상상합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이라 그 벌은 더 철저할 것이라 상상합니다. 예수님에게 항의하는 오늘 복음의 바라사이파와 율사도 그런 하느님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에 나타나는 하느님은 우리 상상의 산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비롯해서 율법을 못 지키는 사람들, 성전이 요구하는 제물봉헌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들,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병에 걸린 사람들, 곧 유대교가 죄인이라고 버린 사람들과 어울리고 그들을 격려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늘 말씀하신 비유들은 한 사람도 버리지 않고, 한 사람도 잃지 않으실 뿐 아니라 되찾아서 기뻐하시는 하느님을 설명합니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말은 완성된 세상을 만드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계셔서 그 기원이 설명되는 세상이고, 하느님에게로 나가면서 완성되는 세상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을 완성시키는 것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여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때 완성되는 세상입니다. 창세기는 하느님이 인간을 당신 “모습대로 창조하셨다”고 말하고 “자식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창세 1,28)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인간으로 창조하셨다는 말이고, 인간은 온 땅에 퍼져서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명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지닌 사명입니다.

세상에는 가난한 이를 비롯해서 고통당하고 불행한 이들이 많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이 있는 곳에,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는 곳에 그런 불행들은 퇴치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상선벌악을 원칙으로 삼지 않고, 사람을 측은히 여기는 분이십니다. 측은히 여기는 우리의 마음들 안에 살아 계시면서 온 땅을 정복하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 것은 누구 하나도 버리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믿는 것이고, 어디서나 우리가 그 측은히 여기심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시선으로 주변을 보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만든 상선벌악의 좁은 벽을 헐고 측은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넓은 세상으로 초대하십니다. 오늘의 비유에 나오는 큰 아들은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자기 동생을 맞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는 상선벌악의 좁은 벽 안에 갇혀 있습니다. 측은히 여기는 아버지의 넓은 마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측은히 여기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 같이 외치는 거리의 선교사들도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의 세상을 알아듣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아무도 버리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그 하느님의 측은히 여기심을 온 땅에 실천하겠다는 사람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요한복음서는 말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그대들을 사랑했습니다. 내 사랑 안에 머무시오”(15,9).

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 09.12
449 52.4%
열손가락을 깨물어라.

우리 속담에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는 손가락 없다.”고 했다. 자식들에 대한 부모의 애정과 관심이 한결같다는 뜻이다. 1920년경 미국의 디트로이트에 살았던 막스 켄달의 열 손가락이 모두 엄지였다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가 있긴 하지만, 통상 사람의 열 손가락은 각각 다른 손가락이다. 엄지, 검지, 중지, 약지, 소지 등 손가락 각각의 모양과 기능이 다양하듯이 자식들도 매 한가지다. 부모의 마음에 들어 자랑이 되는 자식들이 있는가 하면, 부모의 속을 있는 대로 다 썩히고 끓이는 자식들도 있기 마련이다. 그래도 자식에 대한 부모의 애정은 한결같으며, 오히려 미운 자식에게 떡 하나 더 주면서 더 큰 사랑과 관심을 베푼다. 오늘 전례의 제1독서에서 보듯이 하느님의 자녀들인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랬다.(출애 32,7-14)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야훼로부터 계약의 판을 받으려 할 때, 백성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불충을 저질렀다. 그러나 모세의 간곡한 애원을 들어 하느님께서는 분노와 재앙을 거두셨다. 사실 모세의 애원보다는 하느님 자신이 이집트에서 해방시킨 백성들 모두를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이었다. 그 뿐만 아니다. 제2독서는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를 모독하고 박해하고 학대했던 죄인 중에 큰 죄인인 사울까지도 하느님께서는 자비를 베풀어 사도로 삼으셨다.(1디모 1,12-17) 오늘 복음도 예외는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여든 세리와 죄인들에게도 그분은 비유를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가르치신다.

루가복음 15장은 복음사가 고유의 하느님 사랑과 자비에 관한 복음으로서 세 가지 비유로 가득 차 있다. 잃은 양을 되찾고 기뻐하는 목자의 비유(4-7절; 마태 18,12-14), 잃은 은전을 되찾고 기뻐하는 여인의 비유(8-10절), 그리고 잃은 아들을 되찾고 기뻐하는 아버지의 비유(11-32절)가 그것이다. 세 비유는 이렇게 잃은 것을 되찾고 되찾은 것에 대하여 크게 기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예수께서 이런 비유들을 말씀하신 이유는 잃어버린 것에 비유될 수 있는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 말씀의 청자(聽者)로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비유의 내적 의도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지향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율법과 종교의 윤리성과 순수성을 구현한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었고, 이 때문에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예수의 말씀을 듣는다는 자체가 못마땅했기 때문이다.(1-3절)

누구나 무엇을 잃어버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만사를 제쳐두고 잃은 것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찾지 못하면 밤잠을 설치기도 했을 것이다. 또는 집을 나간 자식을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기도 했을 것이고, 외도하는 남편이나 아내가 제자리에 돌아오도록 기원하며 속을 태우기도 했을 것이다. 만백성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마찬가지다. 하느님도 잃은 것을 찾아 나서시는 분이며, 죄인들을 회개로 초대하시는 분이시다. 바리사이와 율사들에게는 스캔들이 될지는 몰라도 하늘에서는 죄인의 회개와 잃은 것의 되찾음이 큰 잔치의 이유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하늘나라의 잔칫상이 꽉 차기를 바라신다.(14,23) 그러나 아직도 자리가 남아있다. 100마리의 양 중에 99마리가 왔다 해도, 은전 10개중에 1개가 모자란다 해도, 비록 아들이 자신의 권리를 내세워 유산을 챙겨 떠나갔다 하더라도, 그 잃은 것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은 찾을 때까지 계속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런 비유를 말씀하시는 이유는 하느님의 끝없는 사랑과 자비를 통해 예수님 자신의 행동을 정당한 것으로 주장하실 뿐 아니라, 이참에 바리사이와 율사들의 그릇된 하느님 상을 고치자는 것이다.

이 세상에 죄인이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따지고 보면 우리 자신 스스로가 잃은 양 한 마리이고, 잃은 은전 하나이며, 자신의 힘과 재산을 믿고 가족도 이웃도 하느님도 잊고 지내는 탕자(蕩子)에 속한다. 특히 탕자의 비유에 우리 자신을 자주 비춰볼 필요가 있다. 흥미로운 점은 탕자의 비유에서 타락과정은 ① 자기고집(12절), ② 이기심(13절), ③ 분리(13절), ④ 육신의 욕심(14절), ⑤ 영적 빈곤(15절), ⑥ 비천함(16절), ⑦ 굶주림(16절)으로 전개되고, 회복과정은 ① 깨달음(17절), ② 결심(18절), ③ 회개(19절), ④ 돌아옴(19절), ⑤ 화목(20절), ⑥ 새 옷을 입음(22절), ⑦ 즐거움(23-24절)으로 전개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 그렇게 잃은 것에 속한다고 주저할 것이 아니라, 잃은 것을 향하여 다가오는 하느님의 끝없는 사랑과 자비를 외면하지 않고 회개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100 중에 1개인 나 자신을 보잘것없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나 하나쯤은 괜찮겠지 하는 생각을 버리고, 바로 나 하나 때문에 세상 끝까지 찾아 나서시고, 찾을 때까지 하늘나라의 잔치를 미루고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보잘것없다고 생각하는 나 하나의 회개를 하느님과 하늘의 천사들이 그렇게 기뻐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나 하나가 곧 전부이기 때문이다.

부산교구 박상대 신부
  | 09.13
449 52.4%
사랑이신 하느님

오늘 우리가 들은 루카복음 15장의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주인공인 아버지는 바로 우리가 부르고 있는 ‘하느님 아버지’를 일컫는다. 그러면 성경에서 하느님 아버지는 어떤 분이신가?

1) 아버지는 우리의 필요를 다 알고 계시는 분이시다.(마태 6, 31)
2) 아버지는 우리가 구하는 것을 다 들어 주시는 분이시다.(루카 11, 11)
3) 아버지는 모든 자녀에게 공평하게 사랑을 주시는 분이시다.(마태 5, 45)
4) 아버지는 우리가 행한 이웃 사랑, 자선, 기도 등을 보시고 다 갚아 주시는 분이시다.(마태 6, 4)
5) 아버지는 우리의 모범이 되시는 분이시다.(마태 5, 48)

하느님의 본성은 어떠하신가? 1) 永遠(영원)하시고 2) 全知(전지)하시고 3) 遍在(편재)하시고 4) 正義(정의)로우시고 5) 全善(전선)하신 분이시다.

위의 이러한 하느님을 구약에서는 ‘전능하신 하느님’이라고 표현했고, 신약에서는 ‘사랑이신 하느님’으로 표현했다. 그러니 전능하신 하느님은 사랑이신 하느님이시다. 사랑하는 자만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 하느님은 이 사랑으로 세상과 우리를 창조하였고, 역사를 이끌어 오셨고, 사람을 위하여 많은 기적을 베푸셨고, 당신 외아들을 우리를 위한 파스카 제물로 내어 놓으셨다.

왜 하느님은 못난 아들들(우리)을 사랑하시는가? 부모이기 때문에 무조건 자녀를 사랑하듯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사랑이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못난 우리를 사랑하신다. 이것은 하느님의 은총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Abba’라고 부르셨다. 그 Abba는 나를 위해 필요한 것을 다 사 주시고, 모든 것을 다 해 주시고, 못하는 것이 없는 Abba이시고, 또한 그 Abba는 나를 약하다고 깔보시지 않고, 져 주시기도 하고, 내가 억지를 부리면 쩔쩔 매시기도 하신다. 도움이 필요할 때 도와주시고, 내가 아플 때 밤새우시며 내 곁을 지켜주시고, 내가 곁길로 빠질 때 줄담배를 피우시며 노심초사 하시며 애간장을 녹이시는 그런 Abba이시다.

자신의 유산을 미리 달라 하며 집을 나가서는, 이내 탕진해 버리고 다시 아버지 품으로 돌아왔을 때, 목을 끌어안고 입맞춤해 줄 뿐만 아니라,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여 주시고 수건으로 눈물을 닦아 주시고 고통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시는 아버지이시다. 우리 모두 이러한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합시다. 아멘

부산교구 김윤근 베드로 신부
  | 09.15
0 100%
십우도가 생각나네요~! 감사합니다.
  | 09.15
449 52.4%
아름다우신 아버지의 자녀

작은 아들이 아버지께로 돌아왔을 때 누가 제일 싫어했을까요? 살찐 송아지이겠죠. 그날이 송아지 제삿날이니까요! 그 다음으로 큰 아들이 싫어했습니다. 보기 싫은 동생이 다시 와서 재산을 축낼 것이니까요. 그러면 작은 아들이 돌아왔을 때 누가 제일 기뻐했을까요? 물론 아버지입니다. 그 다음으로 아들의 품위를 되찾은 작은 아들, 잔치의 기쁨을 나누게 될 하인들, 동네 사람들이겠죠. 비유의 상황과 우리가 사는 삶의 자리도 비슷합니다. 아버지, 큰 아들, 작은 아들 같은 세 부류의 사람들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인들에게도 큰 아들, 작은 아들의 성향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작은 아들의 성향이란 하느님의 길에서 벗어나 수송아지를 섬기고 고집이 센 이스라엘 백성, 예수님을 박해하던 개종 이전의 사울, 자신의 죄나 부족함을 생각하지 않고 남의 탓만 하고 살아가는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라고 생각하면서도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늘 하느님께 요구만 하고 살아가는 오늘날 우리들이 아닐까요? 즉 하느님보다는 세상일에 우선 따르는 모습들일 것입니다.

또한 신앙인에게는 큰 아들의 성향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썽을 부릴 때 내가 낳은 자식이냐며 하느님께 투덜대는 모세, 죄인들을 보살피는 예수님을 못마땅해 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 겉모습은 아버지를 따르는 효자 같지만 실제로는 아버지의 마음보다는 자신의 공로와 보상에 더 기울어져 있는 큰 아들의 성향이 아닐까요? 즉 성사 생활은 하고 있지만 투덜대고 고집 세고, 남 잘되는 것 배 아파하고 자기만 잘되기를 바라며 살아가는 기쁨을 상실하고 감사할 줄 모르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결국 큰 아들이나 작은 아들 모두 자기중심적이지 자기들을 사랑하시는 아버지 중심적이지 못한 것이 공통점입니다.

우리는 큰 아들도, 작은 아들도 아닌 ‘아름다운 아버지’의 마음을 닮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회개하는 작은 아들을 감싸주시고, 아버지의 모든 것이 바로 자녀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어떤 죄인이라도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머리의 논리와 이익을 넘어서서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시는 바보(?) 같은 눈먼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아름다운 아버지’의 모습을 가르쳐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새기며 사랑 때문에 때로는 비웃음과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기쁘게 살아가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아멘.

박재구 시몬 신부
  | 09.11
449 52.4%
회개하면 하늘도 기뻐한다.

나치 시대를 배경으로 한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주인공인 독일인 사업가 오스카 쉰들러는 독일의 유대인 학살에 반대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유대인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막대한 재산을 쏟아 부어 결국 1100여 명의 유대인들을 구해 내게 됩니다. 시간이 지나 독일은 연합군에게 항복하게 되는데, 유대인들은 혹시 쉰들러가 독일인이기 때문에 체포될 것을 걱정합니다. 그래서 그간 쉰들러가 행한 일들을 글로 써서, 목숨을 구한 유대인들이 모두 서명을 하지요. 또 일부는 자신들의 금니를 뽑아 반지를 만들어 선물합니다. 그 반지에는 히브리어로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자는 온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라는 탈무드 문구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쉰들러는 자신이 행한 일에 만족하기는커녕 오히려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더 구할 수 있었는데... 더 살릴 수 있었는데..." 사람들은 쉰들러를 위로했습니다. "당신은 충분히 많은 사람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쉰들러는 자신의 자동차를 가리키며 말합니다. "어쩌자고 이 차를 붙들고 있었단 말입니까? 이 차를 판 돈으로 열 명을 더 살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는 자기 옷깃에 있던 나치 핀을 사람들에게 내보이며 울부짖습니다. "이것은 금입니다. 이걸로 두 명은 더 살렸을 것입니다. 아니, 최소한 한 명은 구했을 것이란 말입니다." 이상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마음은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는 목자의 마음, 은전 하나를 찾는 여인의 마음, 돌아온 탕자를 너그러이 맞이하는 아버지의 마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인생이란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구하는 것이다'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인생이 우리들의 생명 하나하나를 구하는 길이었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역시 그러하여야 합니다. 우리 모두 마지막 한 마리 양까지 찾아 헤매는 목자의 마음으로 냉담자를 찾아가고 이웃을 사랑하며 세상을 살아갑시

김홍석 신부
  | 09.12
449 52.4%
[부산] 죄인들을 가까이하시는 이유

우리는 오늘 ‘되찾은 양’(은전, 아들)의 비유를 통해, 주님 앞의 우리 처지를 묵상합니다. 우선, 오늘 복음의 제목이 ‘잃었던 양’에서 ‘되찾은 양’으로 바뀐 것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인생길을 자주 헤매며 사는 우리는 진리와 생명의 길이신 주님을 되찾아야만 안전하게 구원의 길을 걸을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참 생명의 길을 되찾고 구원의 좁은 길을 잘 가기 위해서는 수시로 하느님의 자비를 굳게 믿고 의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하느님도 꼼짝 못 하시는 최고의 기도가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는 사실입니다. “저는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루카15, 21) “그 누구의 탓도 아닌 바로 제 탓입니다. 하오니 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이렇게 우리가 자기 허물을 인정하고 용서 청하면 하느님께서는 틀림없이 가장 먼저 들어주십니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은 천사들과 함께 더 기뻐하십니다.”(루카15, 7. 10. 32 참조) 이처럼 나의 진정한 회개가 천상 교회와 하느님 백성 전체가 잔치를 벌일 정도로 하느님 아버지께는 가장 기쁜 일임이 틀림없습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님께 이 큰 기쁨을 드리며 살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기도의 노력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자비를 얻기 위해서는 말하는 기도가 아니라 ‘듣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실제로 조용히 주님과 마주하고 그분의 원의(뜻)을 가만히 새기고 있으면 첫째, 내 죄가 먼저 보입니다. 자신을 솔직히 인정하게 되지요. 둘째, ‘내 탓이오’의 참된 회개와 함께 죄와 악에 맞설 결심이 섭니다. 그리고 셋째, 그 마음 돌림과 결심 위에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 새 삶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이렇듯 우리가 주님 앞에 ‘머무는’ 기도 시간은, 우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사탄의 무리에 승리하는 순간이요, 회개의 은총을 입는 순간입니다. 이 순간은 순전히 주님 덕분입니다. 나는 그저 자신을 인정하기만 했을 뿐, 갈등하고 헤매던 나를 되찾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뒤쫓고, 샅샅이 뒤지며, 이제나저제나 매일 기다려주신 주님의 숨은 자비 덕택입니다.

우리의 악과 어둠, 교만과 방종의 죄에서의 해방! 이것을 가장 기뻐하시고 잔치까지 베푸시는 ‘대자대비’하신 주님을 늘 기억하며 삽시다. 이 기억이 우리에게 큰 위안과 새 힘이 되는 까닭입니다. 또한 내가 받은 만큼 다른 이들도 위로하고 자비를 베풀며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죄인들을 가까이하시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 참 행복하여라!”

<부산교구 경훈모 알렉시오 신부>
  | 09.15
449 52.4%
[부산] 잃어버린 것들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루카 15, 1)로 오늘 복음은 시작합니다. 우리가 어떠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는 필요성을 느끼거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이유가 존재하게 됩니다. 즉, 화자는 청자를 고려하게 되고, 청자는 화자가 어떠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인지를 파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리들과 죄인들이라는 청자와 예수님이라는 화자의 관계에서의 이야기가 오늘 복음 말씀의 테마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환자가 의사의 조언을 귀담아듣는 것처럼 자신의 문제를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문제 해결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찾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3가지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되찾은 것들에 대한 비유, 양과 은전 그리고 아들을 통한 이야기에서 세리들과 죄인들이라 인식하는 이들의 헤매고 있는 그 마음에 이정표를 제시해주십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의 품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그들의 벗어나 있는 시선을 교정해주시고, 그들의 닫혀있는 마음을 열어주심과 동시에 아버지의 따뜻한 품은 언제나 열려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복음에서 세리들과 죄인들은 자기 스스로의 한계와 부족함을 인식하였지만, 스스로가 거룩하다고 여기거나 스스로가 뛰어나다고 여긴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아픈 사람에게 손을 내미는 그 구원의 손길을 보기보다 자신 안에 갇혀 예수님조차 판단하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하고 투덜거렸다.”(루카 15, 2)

우리 역시 자기 스스로가 충분히 거룩하게 잘 살고 있고, 다른 사람들과 비교 판단하면서 자신이 더 뛰어나다고 여기고 있다면 하느님의 품에 안기기보다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삶을 살게 됩니다. 환자는 자신이 어디가 아픈지를 명확히 인식하여 의사에게 환부를 드러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픈 곳을 치유 받게 됩니다. 우리 역시 자신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인식하면서 주님의 자비로운 손길을 청할 수 있을 때 주님의 품에 안길 수 있게 됩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안아주시는 것처럼 내 이웃도 안아주고 계심을 발견할 수 있을 때 우리 역시 이웃들을 아버지의 자비로운 마음으로 안아줄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의인들을 찾으시기보다 잃어버렸던 것들을 찾음에 기뻐하신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힘이 됩니다. 아버지의 자비로운 마음 안에서 아버지와 함께 잃어버린 것들을 찾아볼 수 있는 한 주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부산교구 이상윤 도미니코 사비오 신부 : 2016년 9월 11일
  | 09.09
449 52.4%
[부산]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입은 ‘작은 아들’

이집트를 탈출하자마자 목이 뻣뻣해진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거슬러 황금 송아지를 만드는 죄를 짓습니다. 파라오의 완고한 마음 때문에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삼고자 하던 계획이 미루어졌는데, 이번에는 이스라엘의 뻣뻣함 때문에 하느님의 일이 방해받습니다. “완고함”과 “뻣뻣함”이 히브리어로는 같은 단어라는 것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스라엘의 뻣뻣함을 보신 하느님께서는 크게 진노하십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을 두고 모세에게 “네가 데리고 올라온 너희 백성”이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탈출 32,7). 당신의 백성이 아니라는 선언이십니다. 그러자 파라오의 완고함 앞에서 하느님의 일을 충실히 수행했던 모세가 하느님께 아룁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백성이 아니라 하느님 “당신이 직접 이끌어 내신 당신의 백성”이라고 말입니다(탈출 32,11).

이어서 모세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이스라엘”에게 하신 맹세를 기억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죄만 놓고 보면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하느님께서 당신 약속을 기억하신다면,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이스라엘을 용서하셔야 한다는 간청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신다면 하느님은 맹세를 어기는 하느님이 되실 것이니, 당신의 이름을 보아서라도 진노를 거두어 달라는 간청입니다. 모세의 간청을 들으신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내리기로 하신 진노를 거두십니다.

오늘 2독서에서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당신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인류의 죄를 용서하기로 결정하시고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고 증언합니다. 그러면서 하느님께서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던 자신마저도 용서하셨음을 강조합니다. 바오로 역시 용서받을 만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고백합니다.

사실, 우리 가운데 하느님 앞에서 죄인이 아닌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하느님 앞에서 목을 뻣뻣이 세우며 사는 우리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런 우리에게 작은 아들처럼 죄를 고백하며, 무한히 용서하시는 자비로우신 아버지께 다가갈 것을 권고합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구원으로 이끌고자 하는 당신의 계획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런데도 종종 우리는 스스로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처럼 타인의 죄를 비난하고, 그들을 하느님의 구원에서 제외시켜야 한다고 여기며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곤 합니다. 오늘 복음은 현대판 큰 아들인 우리에게 아버지처럼 자비로운 마음을 지닐 것을 권고합니다.

오늘 복음의 경우 큰 아들이 어떻게 처신하였는지 말해주지 않습니다. 이 “열린 결론”은 우리로 하여금 큰 아들로써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 결정하라고 초대합니다. 아니, 스스로를 큰 아들로 여기며, 작은 아들을 단죄하는 우리의 모습을 고발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 모두가 실은 하느님 앞에서 작은 아들이었음을 떠올려 줍니다.

결국 오늘 복음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께 자비를 입은 작은 아들들이었으니, 큰 아들처럼 굴지 말고 죄인에게 항상 자비를 베풀어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 부산교구 염철호 신부 : 2016년 9월 11일
  | 09.09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768   [수도회] 기도의 힘  [4] 2541
767   [전주] 끊임없이 기도해야  2158
766   [의정부]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17
765   [수원] 기도의 특징인 항구함으로  [3] 2569
764   [춘천]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1] 430
763   [인천] 내가 하는 기도는  [2] 2250
762   [서울] 더욱 보편적 기도, 이타적 기도  [4] 2499
761   [안동] 간절한 마음으로  [2] 2457
760   [마산] 기도는 무쇠[鑄物]도 녹인다  [1] 2508
759   [부산] 가난함, 절박함, 간절함으로  [3] 2517
758   [대전] 기도합시다.  347
757   [청주] ‘자비의 희년’ = 행보  7
756   [대구] 희망찬 항구한 기도  [2] 2434
755   [원주] "조급함 버리고 항구히 기도하자"  2595
754   [군종] 옳은 길로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  11
753   (녹) 연중 제29주일 독서와 복음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2] 2398
752   [수도회]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4] 3075
751   [마산] 항상 감사하는 마음  [3] 2662
750   [대구] 모든 일에 감사드릴 줄 아는 신앙인이기를...  [3] 2910
749   [부산] 만남의 길이냐 스침의 길이냐?  [4] 2461
748   [안동]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3] 2221
747   [서울]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기  [4] 2358
746   [수원]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3] 491
745   [인천] 감사할 줄 알기에 행복한 삶  [5] 2587
744   [원주] 있지만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  [4] 2685
743   [춘천] “감사하는 마음으로 ‘탓’은 나에게”  [2] 63
742   [전주] 영혼이 병든 사람들  [1] 2500
741   [광주] 감사는 믿음의 축복  [1] 45
740   [의정부] “네 닭을 잊었느냐?”  [2] 2363
739   [군종] 감사의 기도  [1] 35
738   [대전] 나머지 아홉은 뭐야?  [2] 2632
737   [청주] 화장실 갈 때의 마음!  [1] 56
736   (녹) 연중 제28주일 독서와 복음 (나병 환자 열 사람)  [2] 2188
735   [마산]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신앙  [1] 2296
734   [대구] 내 믿음의 정도는  [1] 2358
733   [부산]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4] 2345
732   [안동]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과 종의 모습  [2] 2998
731   [춘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2] 2686
730   [수도회] 겨자씨  [10] 2637
729   [서울]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5] 2779
1 [2][3][4][5][6][7][8][9][10]..[20]  다음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19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