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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자비와 연민의 하느님
조회수 | 2,504
작성일 | 07.09.12
사람은 자기 그릇만큼 하느님을 담는 모양입니다. 하느님은 하느님이시고 인간은 인간이라는 엄연한 진실을 외면하고 끊임없이 하느님상(像)을 만들어 내는 우(愚)를 범합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불가의 말처럼, 인간이 만드는 하느님의 상은 이미 하느님이 아닙니다. 그래서 구약시대부터 하느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계명이 엄중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약속의 땅을 향해 가던 히브리 백성은 광야에서 어려운 생활이 계속되자 과거의 습관으로 되돌아갑니다. 수송아지를 만들어 제물을 바치며 자기 식대로 만든 신상에 매달리게 됩니다. 분노하신 하느님의 노기를 풀어 드리려는 모세의 애원은 하느님의 자비를 닮았습니다. “제발 화를 내지 마시고 당신 백성에게 내리시려던 재앙을 거두어 주십시오”(출애 32,12).

예수께서는 당시의 그릇된 하느님상을 바르게 제시해 주십니다. 의인으로 자처하는 경건한 종교지도자들이 아니라 구제받지 못할 죄인으로 소외되었던 사람들에게 구원을 펼치시고, 진노와 심판의 무서운 하느님이 아니라 자비와 연민의 모습으로서 하느님을 말입니다. 상선벌악(賞善罰惡)의 틀에 갇힌 하느님상에 집착하여 용서와 사랑의 하느님을 믿지 못하는 것은 우리에게 자비와 연민의 마음이 없어서인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께 다가오는 것을 보고 투덜거리는 바리사이와 율사들에게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세 가지 비유로 말씀해 주십니다. 하느님은 잃었던 양을 되찾고 기뻐하는 목자와 같은 분이시며(루가 15,4-6, 마태 18,12-13), 잃었던 은전을 되찾고 기뻐하는 부인과 같은 분이시며(루가 15,8-9), 잃었던 아들을 되찾고 기뻐하는 자애로운 분(루가 15,11-32)이시라고 말입니다.

루가 사가는 죄인의 회개를 강조하는 구절을 삽입하지만(루가 15,7.10.18), 비유의 원래 뜻은 ‘하느님의 자비’에 역점이 있습니다. 무조건적 사랑으로 자녀를 감싸 주시는 부모님 같은 하느님과는 달리, 인간은 저마다 셈을 차리느라 헛된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일찍이 제 몫을 챙겨 길을 떠났던 망나니 같은 작은아들은 모든 것을 잃고서야 정신을 차려 아버지께 돌아왔습니다. 겉으로는 아버지를 극진히 섬겼으나 아버지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한 큰아들은 잔치를 베푸시는 아버지께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먹어 버린 아버지의 이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다니요”(새 번역 루가 15,30)라고 말하며 분노를 터뜨립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한 사람만이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며 하느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제2독서의 말씀처럼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의 체험은 믿는 이들에게 믿음과 사랑을 가져다 주며, 하느님을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하게 됩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얼굴로서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의 씨튼 수녀회 최혜영 엘리사벳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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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자처럼 방황할 때도

오늘 복음을 묵상하다가 노랫말이 너무 마음에 들어 자주 흥얼대던 '탕자처럼'이란 제목의 복음성가 가락이 떠올랐습니다.

"탕자처럼 방황할 때도 애타게 기다리는/부드러운 주님의 음성이 내 맘을 녹이셨네/오 주님, 나 이제 갑니다. 날 받아주소서/이제는 주님만 위하여 이 몸을 바치리다."

당신께로 발길을 돌릴 때마다 단 한번도 내치지 않으셨던 그분은 진정 자비의 주님이셨습니다. 당신께 하소연할 때마다 조용히 제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시던 분, 따뜻하게 감싸 안아주시던 그분은 진정 연민의 주님이셨습니다. 제가 아무리 못할 짓을 했어도 기다려주셨던 주님, 제가 아무리 거스르는 짓을 했어도 눈감아 주셨던 그분은 진정 인내의 주님이셨습니다.

이런 사랑의 주님을 두고 너무도 자주 한눈을 팔고, 딴길을 갔었던 지난날들을 다시 한번 뉘우칩니다. "오 주님, 나 이제 갑니다. 날 받아주소서" 하고 외치면서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작은아들이 보였던 행동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해서는 안될 행동, 어처구니없는 행동, 한마디로 막가는 행동이었습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사회에서도 '유산'이란 부친이 세상을 떠난 후에 고려하는 것이 기본 도리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작은 아들은 아직 아버지가 멀쩡히 살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 몫의 유산을 챙겨 아버지를 떠나갑니다.

이 말은 이제 '당신은 당신, 나는 나'란 말과도 같습니다. 결국 남남이 되었다는 말, 부자간 인연을 끊었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작은 아들이 떠나간 후 남은 아버지가 느꼈던 심정은 어떤 심정이었겠습니까? '참담함'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짐'이었겠지요.

완전히 '맛이 간' 작은 아들이었기에 챙겨온 거금도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수중에 땡전 한푼 남지 않게 되었을 때야 작은 아들은 자신이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자각합니다. 타향에서 알거지가 된 작은 아들은 너무도 배가 고픈 나머지 돼지들이나 먹는 '짬밥'으로 겨우겨우 연명하게 됩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최악의 상황,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작은 아들은 아버지를 떠올립니다. 아버지의 따뜻한 품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부끄럼을 무릅쓰고 아버지께로 발길을 돌립니다.

회개 과정에서 우리 자신의 잘못에 대한 철저한 반성도 중요합니다. 앞으로는 정말 정도(正道)를 걸어야겠다는 굳은 결심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한없이 자비로우신 아버지께로 우리 얼굴을 돌리는 일'입니다.

진정 수치스럽고 면목 없는 일이겠지만 아버지 집으로 발길을 돌려야겠다고 결심하는 일이야말로 회개의 가장 본질적 요소입니다.

회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향해 얼굴을 돌리는 일이 아니라 태초부터 주의깊게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그분을 향해 우리 얼굴을 돌리는 일입니다.

그분의 자비로운 눈길에 우리 시선을 맞추는 일입니다. 세상으로 향했던 우리 얼굴, 악에 기울었던 우리 마음을 다시 한번 아버지 쪽으로 돌리는 일이 바로 회개의 핵심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로 돌아가고자 했던 일차 목표는 다분히 표면적인 것이었습니다. "여기 그대로 있다가는 굶어죽는 것은 시간문제이겠구나. 아버지 집에는 먹을 것이 좀 많았던가? 빨리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서 종으로라도 지내면서 우선 이 지긋지긋한 배고픔에서 벗어나자"며 아버지 집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정확하게 구분하자면 이때까지 작은 아들은 회개의 순간에 도달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언제 작은 아들의 회개가 시작되었습니까?

집으로 돌아온 자신을 대하는 아버지의 모습-이제나 저제나 작은 아들이 돌아올까 목을 쭉 빼고 기다리다가 멀리서 작은 아들이 힘 없이 돌아오는 모습을 확인한 아버지가 맨발로 뛰어나오는 모습을 보고 둘째 아들은 회개를 시작합니다.

이렇게 참된 회개는 우리가 정확한 하느님 모습, 자비 충만한 하느님 아버지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비로소 시작됩니다. 결국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하심, 선하심으로 인해 우리는 회개를 시작합니다.

이 은총의 가을,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 가득한 눈길에 우리 시선을 고정시키는 은혜로운 나날 되길 바랍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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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또 어떤 부인이 은전 열 닢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닢을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 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느냐? 그러다가 그것을 찾으면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은전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주십시오.′’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주시는군요.’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루카 15,1-­32)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머리와 이론으로 하느님을 알 수 있고, 체험으로도 하느님을 알 수 있고, 깜깜한 어둠 가운데서 믿음으로도 하느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사람에 따라 하느님을 알아가는 과정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첫 번째 부류에 속한다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처럼 ‘자신도 들어가지 못하면서 남까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짓을 하기 십상입니다. 그들은 지식과 이론에 눈이 가려 현실 속의 생생한 하느님·예수님을 놓치고 있었습니다. 그들 눈에 비친 예수는 율법도 하느님도 모르는 사람, 따라서 하느님은 도저히 예수란 인물 편이 되면 안 되었습니다. 더구나 그가 어울리는 죄인의 무리에게 하느님은 더더욱 그들 편이 되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자기들과 같은 의인 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과연 하느님은 누구 편이어야 합니까?

1860년대 미국에서 노예제도를 반대하던 링컨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노예제도의 존속을 주장하던 남부 11개 주가 연합해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전쟁 초반기 북군이 고전을 면치 못하자 북부의 여론도 갈라졌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링컨은 하느님의 도우심과 지혜를 간구했습니다. 마침내 북군이 처음으로 승리를 거둔 메릴랜드를 방문했을 때 한 참모가 “대통령 각하! 이제부터 아무 염려 마십시오. 하느님은 우리 북군 편입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링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직 내 염려는 내가 하느님 편에 서 있는가 하는 것일세. 우리가 하느님을 향해 서 있기만 하면 하느님은 우리 편이 되어주신다네. 하느님께서는 성경의 다윗을 통해서 내게 그 사실을 깨우쳐 주셨네.” 링컨보다 성경을 더 잘 알았을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이 하느님 편인지를 생각하기보다 하느님이 언제나 자신들의 편이라고 못 박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세리들과 죄인들은 자신들이 하느님 편에 있다고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께서는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마태 21,31)며 그들 편이 되어주셨습니다. 회개를 해야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고 나서 회개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예수님 주변으로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루카 15,1) 있었습니다.

우리한테는 먼저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 필요합니다. 말씀의 씨가 내 마음밭에 떨어져 싹이 납니다. 싹은 실천을 통해 점점 자라 나를 링컨처럼 큰 나무가 되게 합니다. 이제 온갖 새들이 ‘나’라는 나무에 깃들이게 되는 영향력 있는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잃은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 예수님은 오늘 세 가지 비유를 들어 반복해 말씀하십니다. 남성을 위해서는 되찾은 양의 비유를, 여성을 위해서는 은전의 비유를,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부모를 위해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고 어머니이십니다.

비유에서 양을 잃은 사람이나 은전을 잃은 사람이나 아버지나 모두 ‘찾을 때까지’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어이 찾고야 맙니다. 시간이 얼마나 소요되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태초의 아담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은 잃은 양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할 때는 먼저 곰곰이 계산해 봐야 한다고 하셨지만(루카 14,28) 당신이 우리를 찾는 데 치러야 할 대가가 얼마나 될지는 계산하지 않습니다. 주인이 보낸 종들을 때리고 계속 빈손으로 돌려보내는 포도밭 소작인들에게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루카 20,13) 하며 사랑하는 아들을 위험한 곳으로 보내는 하느님은 아들의 죽음을 대가로 치르면서까지 잃은 양을 찾아 나섭니다.

그런데 그 대가는 하나를 위해서도 치르신다는 것입니다. 아흔아홉 마리 양이, 아홉 개 은전이, 큰아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는 관심조차 없는 것처럼, 그래서 그들이 섭섭해할 만큼 잃은 하나에 집착합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영화 ‘쉰들러 리스트’가 생각납니다. 히틀러 치하에서 유다인들이 죽음의 수용소로 끌려갈 때 쉰들러는 유다인들을 살리기 위해 자기 공장에서 일할 유다인들의 명단을 밤새 작성하고 그 대신 전 재산을 투자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자신도 전범자이기에 떠나려 할 때 그 덕분에 살아남은 유다인들이 그를 전송하며 금니를 뽑아 만든 반지를 감사의 선물로 줍니다. 그 반지에는 탈무드의 말씀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은 온 세상을 구하는 것입니다.’란 글귀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순간 쉰들러는 철로에 주저앉아 통곡합니다. 그동안 낭비한 재산과 끼고 있는 반지를 팔아 단 한 명이라도 더 구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하느님께서 타락한 소돔을 멸하시려 할 때 아브라함이 어떻게 해서라도 그 도시를 구하고 싶어 조심조심 하느님께 청을 드렸습니다. 오죽하면 하느님도 소돔을 멸하지 않을 구실만 찾으셨겠습니까? “너는 네가 수고하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았으며, 하룻밤 사이에 자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버린 이 아주까리를 그토록 동정하는구나! 그런데 하물며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요나 4,10-­11)라고 요나에게 말씀하실 때와 같은 마음이셨을 것입니다.

내가 아흔아홉 마리의 양에 속하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잃은 한 마리는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처사가 왠지 섭섭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내가 바로 그 잃은 한 마리의 양이었음을 깨닫는 바로 그 순간, 베드로보다 더한 통회의 눈물을 흘릴 것임을 압니다. 그리고 그날을 기대합니다.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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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마음의 힘

정신 못 차리는 자식 때문에 찾아오는 부모들을 면담할 때마다
반복되는 것이 있습니다.
저의 처방은 그가 정신 차릴 때까지 고생 쫄쫄이 시키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 복음의 작은 아들처럼 나가서 고생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집에서 내 쫓고, 돈 주지 말고 그래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깨닫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하고 가지만 그대로 하는 부모 한 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젊었을 때는 왜 그러지 못하는지 마음으로부터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저도 마음으로부터 이해하며
반대로 이런 부모의 사랑과 마음을 지니지 못한 저를 뉘우칩니다.

사랑으로 타일러도 알아듣지 못하고 계속해서 잘못을 저지르고
도무지 고치려고 하지 않는 놈들은 벌을 내려야 하고,
벌을 줘도 정신을 못 차리면 내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저의 사랑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이 먹을수록 점점
말썽꾸러기들은 계속해서 끼고 앉아 끌탕을 하고 싶지 않고,
빨리 포기해버리고 싶은 유혹이 하루에도 몇 번씩입니다.
이런 유혹을 느낄 때마다 전에 이해하지 못했던 세상의 부모들이
한 편으로 참으로 위대하고 존경스럽고
다른 한 편으로는 어떻게 저런 사랑을 지닐 수 있을까 고민합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말썽꾸러기를 빨리 포기하고 싶은 것은
말썽꾸러기와 씨름할 “마음의 힘”이 없기 때문이지요.
손자를 키우는 할머니들을 만나면
너무 사랑스러워 손자 때문에 행복하면서도
아이들과 씨름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
손자를 키우고 싶지 않다는 분을 많이 만납니다.
그런데 씨름하는 것은 물리적인 씨름만 힘든 것이 아니고
그래서 물리적 씨름을 위해서만 많은 힘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정신적인 씨름인 마음의 씨름도 힘이 들고
그래서 말썽꾸러기와 마음의 씨름을 하기 위해서도
힘이 많이 필요합니다.

아니 마음의 씨름이 힘을 더 필요로 합니다.
손자는 사랑스럽고 그래서 나를 행복하게 하는데도
힘이 들어서 키우고 싶지 않은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 사랑보다도 미움이 더 드는 사람을
계속해서 마음에 두고 씨름해야 하니
얼마나 힘이 더 들고 씨름을 하기 싫겠습니까?

사랑의 정의를 여러 관점에서 내릴 수 있지만
이런 관점에서 내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랑이란 마음의 힘이다.”

물론 미움도 마음의 힘입니다.
그런데 말썽꾸러기의 경우 미움을 한 편에 두고 사랑하려는 것입니다.
마음의 힘이 미움 쪽으로도 작용을 하고 사랑 쪽으로도 작용합니다.
말썽꾸러기와 씨름하는 것이 더 힘든 이유는 이 때문입니다.
긍정의 에너지를 쓰는 것보다 부정의 에너지를 쓰는 것이 더 힘드는데,
긍정의 에너지가 부정의 반대 에너지까지 누르고
힘을 쓰려하니 훨씬 더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말썽꾸러기어도 좋다. 튼튼하게만 자라다오!”
이렇게 할 수만 있으면 뭐 힘들 것도 없고 마냥 사랑스러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복음에서 말하는 길 잃은 양,
우리가 말하는 말썽꾸러기를
비유의 아버지처럼 떠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Let him/her go!", “가라!”

그는 길을 잃게 되겠지만 우리는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참 사랑은 모두를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하는 상대도 자유롭게 하고
사랑을 하는 나도 자유롭게 합니다.
자유롭게 길을 잃고 자유롭게 길을 찾게 하는 것입니다.
자유롭게 나를 떠나게 하고 자유롭게 나를 찾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길을 잃을까 염려하여 묶어두는 것도 사랑이지만
염려까지만 하고 묶어두는 것은 그만 두는 것입니다.
길 찾도록 기도만 하고 이래라저래라 너무 지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의 자유 안에서 활동하시는 더 큰 성령의 사랑을 믿을 뿐입니다.

작은 형제회 김찬선 신부
  |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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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루카15,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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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으로 선정된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비유나 탕자의 비유가 전하는 메시지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인생이라는 나그네길을 끝마치는 순간까지 우리 모두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이 아니라, 길을 잃고 헤매는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이며, 아버지의 사랑을 배신하고 모든 것을 탕진했을 때 살려달라고 아버지를 찾는 탕자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메시지이다.

또 다른 하나는 그 잃어버린 양을 찾아 헤매는 목자의 마음이, 그리고 집 떠난 아들이 돌아오자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을 표현한 아버지의 마음이 바로 하느님의 마음이라는 메시지다.

그런데 이 쉬운 메시지를 우리는 알아듣지 못하는 냥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교만이라는 어리석음 때문이다
우리의 교만은 늘 자신은 아흔아홉 마리의 양의 무리 중 하나일 것이라고, 최소한 집 나간 둘째 아들이 아닌 아버지의 뜻에 충실했던 큰 아들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교만은 진실을 못 보게 하며, 그 영혼을 더욱 그분과 멀어지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영적 겸손을 필요로 하고 있으며 하느님께 청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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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겸손에 대해 묵상했던 내용을 옮겨본다)

무엇을 겸손이라고 하는가?
복음서를 통해서 예수님께 야단을 맞는 이들은 대부분 교만한 이들이었음을 우리는 안다.

겸손은 어디에서 오는가? 분명한 것은 인위적인 것은 거짓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학습된 것도 거짓일 확률이 크다. 이는 상대를 의식해서 만들어진 겸손은 거짓이라는 말과 통한다.
특히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의식적이던 무의식적이던 보여지는 것은 만들어진 거짓 겸손일 수밖에 없다.

겸손한 마음은 저절로 나와야 한다.
저절로 나온다는 말의 뜻은 무엇인가?
어쩌면 무척 간단한 이치일 지도 모른다.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다. 가득 차 있다는 말이다.
무엇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일까?
그것은 삶의 시행착오 속에서 깨달은 모든 것에 대한 진실이다.
하여, 겸손에는 삶이 담겨 있다.
우리 신앙인의 눈으로 볼 때는 그것은 하느님께서 깨닫게 해주신 삶의 의미이고 우리가 걸어가야 할 참된 삶이다.

그분 안에서 세상에 대한 올바른 관조가 가능할 때 겸손은 내 것이 된다.
내가 미워하게 된 그 사람 안에서도 그 사람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겸손해진다.
모든 아픔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겸손해진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관계를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올바로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겸손해진다.
이러한 깨달음은 그분께서 주셔야만 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를 한다.
겸손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이 삶을 깨닫게 해달라고 청하는 것이다.
그러면 겸손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결과물이 될 수밖에 없다.

거짓 겸손은 비굴하다. 하지만 참 겸손은 비굴할 수가 없다.
진실로 겸손한 이들을 만날 때, 우리는 위로를 받고 치유를 받고 살아가야 할 지표를 얻게 된다.
나를 아는 이들이 나를 통해서 위안을 받는가?
나를 아는 이들이 나를 통해서 용기를 얻고 그분을 찾으려 하는가? 뒤돌아 볼 일이다.

<하늘 호수 / 마리아>제공
  |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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