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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머리의 논리보다 가슴의 논리로 살자
조회수 | 2,642
작성일 | 07.09.12
인간의 삶에는 가슴으로 접근해야 할 부분과 머리로 접근해야 할 부분이 있는데 가슴으로 접근해야할 대표적인 부분이 인간관계란 부분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물론 가슴의 논리를 앞세우다보면 많은 손해를 감수해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만 분명한 사실은 관계란 면에서는 머리의 논리가 차지하는 넓이 보다는 가슴의 논리가 차지하는 부분이 더 넓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왜 그래야 하는가 하면 가슴의 논리는 때로는 비합리적이고 충동적이란 약점은 가지고 있습니다만 그러한 약점에도 불구하고 가슴의 논리는 삶의 따스함을 불어 넣는 힘이요, 헌신적이고 이타적인 사랑이라는 우리 삶의 최고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동력이기 때문입니다.

경제의 발전과 인간의 행복이 비례하지 않고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오는 현상이나 경제 발전이 인간관계에 악영향을 미치는 현상도 결국 경제 자체에 그러한 요소가 있기 보다는 경제를 지배하는 머리의 논리가 가슴으로 접근해야할 많은 부분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삶의 숙제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가슴의 논리의 고유성을 인정함으로써 가슴과 머리가 조화되는 삶, 그리고 나와 너의 관계,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가슴의 영역을 넓혀 감이 바로 오늘의 숙제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오늘 복음은 3개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들은 모두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지내는 예수님에 대한 바라사이파 사람들의 공격에 대한 예수님의 자기변호로서 그 주제는 모두 잃은 것을 되찾는 기쁨으로 요약됩니다.

이 비유들은 실제 우리의 생활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가슴의 영역에 해당되는 이야기이기에 많은 면에서 쉽게 수긍이 갈 뿐 아니라 이야기의 흐름과 뜻에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순간의 감정을 자제하고 좀 더 차가운 머리의 논리로 생각해 본다면 이 이야기들은 많은 문제점을 가진 이야기들입니다.

먼저 잃은 양을 찾는 비유.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아흔 아홉 마리를 무시하는 것, 이것은 욕심입니다. 맹수와 강도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당시의 상황에서는 한 마리 때문에 99마리를 포기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잃어버린 양 한 마리에 대한 미련을 끊고 99마리를 잘 돌보는 것이 현명한 행동입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은전 한 닢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정확한 환산은 힘듭니다만 은전 한 닢은 대략 삼 백원(미화 18센트) 전후의 작은 돈입니다. 때문에 돈을 찾기 보다는 돈을 찾는 노력과 수고로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함이 더 적극적인 행위요 칭찬받을 행동입니다.

그리고 신약성서에서 가장 감동적인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는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잃은 아들을 되찾고 기뻐하지 않을 부모는 아무도 없기에 사실 복음의 아버지처럼 잔치를 베풀고 자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좀 더 현명한 아버지였다면 어쩌면 그 기쁨을 속으로 삭여야 했습니다. 아들을 다시 찾은 기쁨이 크다 하여도, 큰 아들을 생각하고, 또 작은 아들의 소행을 알고 있는 종들과 이웃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작은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기 보다는 차갑게 대함으로 근신케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래야지만 작은 아들은 자신이 저지른 죄의 무게를 실감할 수 있을 것이고, 또 그러한 질책은 성실히 일한 큰 아들에게는 위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작은 아들이 상을 받지 않고 질책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 때문입니다. 작은 아들의 행동이 지적을 받지 않고 상을 받는다면 탕자의 욕구를 가지고 있는 우리, 작은 아들처럼 행동하고자 하는 미래의 수많은 작은 아들들도 그러한 충동에 너무나 쉽게 빠져 들 위험이 있기에, 아버지의 기쁨이야 잔치를 베풀고도 남음이 있겠습니다만 잔치를 베풀고자 하는 욕구를 다른 이들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삭이고, 좀 더 냉정하게 아들을 대하는 것이 좀 더 성숙하고 지혜로운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목자와 여인, 그리고 아버지는 모두 어리석은 행동을 했다는 점이고 예수님은 이를 교훈으로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은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보여줌과 동시에 구체적인 대상에 대한 아낌의 마음으로 머리의 논리와 이익을 넘어서는 어리석은 사랑, 관계 때문에 모든 조건과 이유를 넘어서는 바보 같은 눈먼 사랑이 바로 하느님과 예수님이 가르치는 사랑이요, 신앙인이 추구해야할 사랑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현명함을 찾고 사랑의 조건과 이유를 찾는 머리의 유혹을 자제하는 일, 구체적인 사랑의 대상에 대한 아낌없는 사랑 때문에 때로는 비웃음과 손해를 감수하는 가슴의 논리로 사는 일, 죄인을 감싸안는 하느님과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삶이라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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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홍금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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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큰 아들들'

'저기 아들이 오고 있다. 영원한 시간 속에서 하나의 존재가 되어 내게 다가와준 아들이다. 아내의 태중에 있을 때부터 그 존재 자체가 기쁨이었던 아들. 태어나서도 그 아들은 곁에 있는 기쁨이요,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의 선물이었다. 그 아이가 내게 내뱉는 말은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하느님의 음성이었고, 그 아이에게 내가 하는 말은 현재의 시간을 충만하게 하는 고백이었다. 그 아이에게 주는 사랑은 백 배, 천 배가 되어 내 마음 안에 사랑이 샘솟게 하였다. 그런 아들이 오고 있다. 비록 세상의 논리로 인해 마음이 기울어져 생명이 아닌 죽음 속으로 달려갔었지만, 이제 새 사람, 새 마음이 되어 내게 달려오는 저 아들. 빈손으로 왔다가 맨 몸으로 돌아가는 우리네 삶이 몹시 아쉬워 뛰쳐나갔지만, 그것이 우리 삶의 이정표가 되는 것임을 깨닫고 돌아오는 저 아들. 빛과 어둠은 대립되는 동시에 동반한다는 진리를 머리에 새기고 돌아오는 저 아들. 그 아들이 돌아오고 있다. 땀과 피곤으로 범벅이 된 채 돌아오는 저 아들을 바라보는 내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있다. 그토록 소중한 아들을 그냥 둔 것이 후회스러울 뿐이다.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 저 아들을 안고, 입맞춤하며, 그동안의 일을 밤새도록 나누고 싶다. 나의 또 다른 살이요, 얼인 아들의 체험을 함께 나누고 싶다. 그러나 ……, 그런 나를 바라보는 큰 아들의 눈총이 부담스럽고, 매섭게 느껴진다.'

'저기 아버지가 서 계신다. 표현할 수 없는 큰 사랑으로 나를 세우신 분. 내가 바라보는 하늘 끝자락까지 나의 소유로 주시어 내 의지대로 살아가도록 허락하신 분. 늘 안타까운 눈길로 바라보면서 좌충우돌하는 내 삶을 곁에서 지켜보시는 분. 오로지 현재만이 있을 뿐 영원한 것이란 없다고 억지 쓰는 내게 말없이 진리를 일깨워주신 분. 이 세상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 중에서 하찮은 것이란 없음을 몸소 체험하도록 허락하신 분. 나 스스로 만들어낸 공간 속에 갇혀 허우적거릴 때 빛을 밝혀주시어 돌아올 수 있도록 이끌어주신 분. 가지면 가질수록 더 깊은 늪에 빠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참 생명으로 목마름을 채워주시는 분. 그분이 내 아버지시요, 저기 서 계시는 분이시다. 물을 떠나서 고기가 살 수 없고, 공기를 떠나서 인간이 살 수 없듯, 그분을 벗어난 삶이란 존재치 않음을 깨달았다. 벗어나면 자유로울 것이라는, 혼자라면 행복할 것이라는 착각은 완전히 무너졌다. 돌아오는 이 길은 죄송스러운 마음과 그런 아버지를 다시 볼 수 있다는 기쁨으로 점철되어 있다. 아버지 앞에 용서를 청하는 것은 창피하거나 두렵지 않다. 그분으로 인해 나는 더 큰 지평에 설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 아버지를 향한 내 발걸음을 힘들게 하는 하나의 시선이 있다. 돌아오는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형의 눈길을 이겨내기가 힘들다.'

용서와 평화, 기쁨과 행복. 이러한 단어들은 입에서 뿐만 아니라 삶에서 실현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를 드러내는 길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방해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미움과 시기, 질투와 무관심. 그러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큰 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만이 진리인양 위선을 떨고 있는 또 다른 큰아들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시선과 나의 시선이 같아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뒤돌아 볼 일입니다.

원주교구 성호영 신부
  |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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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었던 양을 되찾고 기뻐하시는 분

예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그분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잃었던 양을 되찾고 기뻐하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잃었던 은전을 되찾고 기뻐하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잃었던 아들을 되찾고 기뻐하는 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루카 15,7)

그래서일까요? 그분께서 잃은 양을 포근히 안고 있는 그림을 보면 왠지 편안해집니다. 착한 목자이신 그분의 그림을 가장 잘 담아낸 화가가 윌리엄 다이스(William Dyce, 1806-1864)입니다. 그는 스코틀랜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런던의 왕립 아카데미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1825년에 이탈리아로 건너가 나자렛파의 영향을 받아 라파엘전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주제로 아름다운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는 자기 고향인 스코틀랜드의 목장에 예수님을 모셨습니다. 예수님의 목장엔 튼튼한 울타리가 있고, 울타리엔 담쟁이도 있습니다. 또 여러 그루의 나무들이 있어 쓸쓸함도 덜어주고 있습니다. 양들은 대부분 목장 안에 평화롭게 있습니다. 예수님은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안고, 마지막 양 무리와 함께 목장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분은 오른손으로 지팡이를 꽉 쥐어 양들을 굳게 지키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그분의 맨발은 목자의 삶이 결코 순탄치 않음을 예견해 줍니다. 그래서일까요? 오늘의 목자들도 양들 때문에 지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착한 목자이신 주님, 당신은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으셨다죠. 그래서 남은 게 뭡니까? 달랑 십자가밖에 없지 않습니까? 저도 양들을 위해 애써 보았습니다. 그들을 위해 밤도 지새워 보았고, 그들을 찾아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양식을 주기 위해 제 주머니도 다 털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남는 게 없더군요. 그들은 끊임없이 달라고만 하고, 목자의 희생만을 요구하며, 주지 않으면 이내 달아나 버립니다. 제가 삯꾼이어서 그럴까요?

착한 목자이신 주님, 그래도 당신은 행복한 목자입니다. 당신은 길 잃은 양 한 마리만 찾으면 되었잖아요. 그런데 요즘은 잃은 양이 아흔 아홉 마리입니다. 당신의 양은 당신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당신을 따르지만, 저의 양은 아예 볼 수도 없으니 제 목소리를 알겠습니까? 그들은 자기 목장도 잊은 채 남의 목장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풀을 뜯어 먹는 게 더 쉽다고 제 목장을 떠나가 버렸습니다. 그들의 수효가 너무 많아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어찌할까요? 저도 제 목장을 버리고 다른 목장의 삯꾼이라도 될까요?

착한 목자이신 주님, 저도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고 싶습니다. 그러니 제 양들이 자기 목장 안에 들어오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그들도 제 목소리를 듣고, 제 목장 안에 살게 하는 게 이 목자의 소박한 꿈입니다. 그 꿈이 이루어질까요?”

그렇습니다. 요즘은 집을 떠난 양들이 너무 많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양들이 너무 많습니다. 양들이 불쌍하면 찾아가서 위로해주고 돌봐줄 텐데, 오히려 목자를 휘두르는 잘난 양들이 너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들 때문에 기뻐하듯이, 목자들도 잃은 양을 되찾고 기뻐합니다. 그런 기쁨을 주시면 안 될까요?

손용환 신부
  |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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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용서받을 줄 아무도 몰랐다!

오늘 복음 말씀은 너무나도 유명한 되찾은 아들의 비유 이야기입니다. 사실 오늘 복음은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너희도 빨리 회개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하기보다는 그 안에 나타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한 번 느껴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한없는 사랑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아버지의 집을 떠나 모든 자산을 탕진하고 정신을 차려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기로 마음 먹었을 때, 그는 오로지 자신의 죄에 대한 자책과 아버지께 받을 벌에 대한 두려움에만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라는 표현에서 그의 마음 상태가 잘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런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모두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라는 구절에서 그동안 매일 같이 애를 태우며 아들을 기다렸던 아버지의 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아마 아버지는 아들이 떠난 다음날부터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그 길의 끝자락을 바라보며 아들을기다렸을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하느님의 사랑을 잘못 이해합니다. 그분의 무한한 사랑은 우리의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볼 때는 전혀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마치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사랑을 잘못 이해했듯이, 하느님의 사랑 또한 우리가 머리로 계산하려 하면 잘못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의 죄를 묻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식이 몸성히 돌아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세상 모든 것을 얻은 것처럼 기뻐하고 감사했습니다. 작은 아들은 자기가 환대 받을 줄 몰랐고 큰 아들 역시 작은 아들이 환대 받을 줄 몰랐습니다. 죄지은 자신도 죄를 용서받을 줄 몰랐고 옆에서 지켜보던 이도 그 죄인이 용서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결국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의 생각과 한계를 뛰어 넘고 있으며 아무런 조건 없이 무상으로 베풀어지는 것으로 그저 우리의 존재 자체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있어 우리의 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자식이 어떤 잘못을 했던 부모에게는 한없이 사랑스러운 세상 하나뿐인 소중한 존재인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던 그저 당신의 집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우리의 죄를 뒤로 하시고, 오히려 따뜻하게 부둥켜 안아주시며 좋은 옷과 반지와 신발을 주실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다. 우리는 언제나 죄 속에서 허덕이는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이지만, 그 존재자체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고 있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이 얼마나 행복한 사실입니까? 용기를 내어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갑시다.

박병옥 바오로 신부
  |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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