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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잃은 자와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하느님
조회수 | 2,440
작성일 | 07.09.13
묵상 길잡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사실을 가르치시는 데 일생을 바치셨다. 오늘 복음에서 들려주시는 세 가지 비유는 신약성서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말씀이다. 하느님께서 죄인과 잃어버린 이들을 사랑하시는 분임을 깨달을 때 참된 신앙인이 될 수 있다.

1. 윤락여성에게 봉사하는 수녀님

하루는 평소에 잘 알고 지내는 수녀님이 방문을 했다. 그 수녀님은 서울역 근방 윤락가에서 윤락여성들을 돌보고 있다. 이야기를 듣는 중에 윤락여성들의 실태와 갖가지 사연, 그들을 돌보는 데 따르는 어려움들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함께 이야기를 듣던 나이 드신 아주머니 한 분이 “수녀님들이 ‘그런 것들’한테까지 신경을 쓰면서 봉사를 해야 합니까?” 하며 못마땅해하였다. 물론 천사 같은 수녀님들이 윤락가에서 일하는 것이 마음에 걸려서 그렇게까지 말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나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 식으로 교회는 죄인들과는 확실한 선을 긋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많은 신자들이 ‘미혼모들’의 집이나 ‘알코올 중독자’, ‘윤락여성들’을 위한 교회의 시설과 활동에 대해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속으로 ‘망할 것들’, ‘돈이 아깝다’는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복음을 통해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교회는 어떤 활동을 해야 하는지를 똑바로 깨달아야 한다.

2.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어떤 하느님이신가?

내가 믿고 있는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믿고 있는 신(神)의 모습에 따라 그 사람의 신앙생활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신관(神觀)에 따라 신앙생활도 달라진다는 말이다. 그런데 하느님의 참모습을 가장 잘 알려주신 분은 계시의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하느님은 어떤 하느님이신가? 오늘 복음에는 ‘잃었던 양 한 마리’, ‘잃었던 은전’, ‘잃었던 아들’의 비유가 나온다. 복음서 안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예수님 시대에는, 이스라엘을 식민통치하는 로마에 빌붙어 동족에게 세금을 걷어 로마에 바치고 자기들도 떼어먹는 세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민족의 배반자였다. 그리고 창녀와 함께 대표적인 죄인으로 취급받았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리인 마태오를 제자로 삼으셨고, 세관장이었던 자캐오의 집에서 식사를 하시기도 했다. 그리고 예수님 때문에 회개한 죄인 막달라 마리아의 집에 자주 드나드셨다. 어디 그뿐인가? 돌로 쳐죽인다고 모인 군중들 앞에서, 간음하다 들킨 여자를 “다시는 죄짓지 마라.” 하시며 용서해 주시기도 하셨다. 그리고 형제들을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 주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죄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이런 태도가 널리 알려지면서, 예수님의 주변에는 오늘 복음의 말씀대로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다.” 이 광경을 보고 율법학자들과, 가장 열심하고 경건한 자로 자처하던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보며 “저 사람은 죄인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함께 음식까지 나누고 있구나!” 하며 못마땅해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오늘 복음의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신다. 이 비유들을 통해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분명히 보여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죄인들을 벌주고 심판하시려고 정의의 칼날을 세우고 휘두르시는 분이 아니라,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헤매시고,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처럼 죄인들이 회개하며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아버지시다. 그래서 예수님은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하늘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라고 당당히 선언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늘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셨다. “하느님께서는 ‘죄인들’과 ‘잃은 자’를 찾으시며 사랑하신다.”는 사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선포하신 기쁜 소식, 곧 ‘복음’이다.

3. 하느님의 비할 데 없는 사랑

예수님은 “아들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다.”라고 하셨다.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확실히 보여주신다. 일찍이 신학자 ‘한스 큉’은 “인류역사상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가르치신 분은 예수님 외에는 없었다.”라고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도 결국 바리사이나 율법학자 등 당시 지도자들의 신관(神觀)과 예수님의 신관이 다르기 때문에 빚어진 것이라고 보았다.

예수님은 일생 동안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전하셨고, “우리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제물로 내놓으시고 돌아가셨다”(로마 5,8 참조). 한마디로 예수님은 전 생애를 통하여 ‘잃어버린 자들과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가르치시려고 당신의 생명마저 바치신 것이다. 우리가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려면 형제들을 거듭거듭 용서하며 살아야 한다. “하느님,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 아멘.

마산교구 유영봉 몬시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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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난 지금 무엇을 찾으려고 애를 쓰는 걸까? 난 지금 어디로 쉬지 않고 흘러가는가?…흠 주위를 둘러봐 너를 기다리고 있어… 그래 이만하면 됐어… 컴백홈…”

가수 서태지의 노래 ‘컴백홈’의 일부다.

많은 가출 청소년들이 이 노래를 듣고 집으로 귀가 했다고 한다. 이 노래를 듣기 전에도 그들은 수없이 집 주위를 서성거렸을 터이다.

그러나 집으로 가고 싶지만 받아 주질 않는다며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앵벌이를 하는 또다른 청소년들의 모습 속에서 현실의 비정함을 맞본다.

오늘의 복음 말씀은 잃었던 양과 잃었던 은전, 방탕한 아들의 비유 말씀이다.

이 비유 말씀은 루가 복음과 모든 복음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 무엇을 원하고 계신지를 명백히 전달한다.

세 가지 비유의 공통점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본래의 자리에서 본래의 모습으로 제 몫을 다하는 것이 기쁨이요 행복이다.

첫 인간들을 봐라. 욕심 때문에 에덴 동산을 떠나게 된 그들을 맞아준 것이 무엇인가?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가득 찬 척박한 땅 뿐이었다. 거기에서 무슨 기쁨과 행복을 찾을 수 있었으랴? 부딪쳐 봐야 깨달음을 얻는 모양이다. 깨달은 이상 머뭇거릴 필요가 없다.

당장 보따리를 챙겨 있어야 할 자리로 되돌아가야 한다. ‘아버지가 나를 받아 주실까?’ 라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아버지는 동구 밖에 나가 매일 매일을 기다리고 계시지 않았던가. 제일 좋은 옷과 가락지와 신으로 사랑하는 아들로 맞아주신다.

집 떠난 아들을 귀찮은 골칫거리요 차라리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영원히 사라졌으면 하는 아버지는 없다(이런 아버지만이 있길 간절히 염원하며…). 용기를 내어 집으로 가자. 거기가 내가 있어야 할 자리이다. 집에서 아버지의 품속에서만이 지친 육신을 쉬고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할 수 있다.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 17).”

마산교구 이원태 신부
  |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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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리 양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 오늘 복음의 주제입니다. 목자는 그 양을 찾아 나섭니다. 아흔 아홉 마리를 들판에 둔 채 한 마리를 찾아 나섭니다. 그러다 도둑이 와서 몰고 가면 어떡할는지요? 다른 짐승이 와서 나머지 양을 해코지하면 어떡할는지요? 하지만 목자는 그런 생각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엉뚱한 곳에서 헤매고 있을 한 마리 양이 보일 뿐입니다.

진정 그런 목자가 있을지 의문입니다. 오늘의 사회는 한 사람이 잘못하면 전체가 나무랍니다. 심한 경우, 다수를 위해 소수는 희생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수에 소수는 언제나 따라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진리는 다수의 의견에 있는 것일는지요? 세상은 그럴지 몰라도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의 숨은 교훈입니다.

세상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보다는 들판에서 서성되는 99마리 양을 더 중시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러실 분이 아닙니다. 그분께는 인간의 논리가 소용없습니다. 사람의 판단기준을 적용시킬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처지에서 살아가든 당신의 자녀로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병들면 모든 부모는 아파합니다. 자녀가 몹쓸 병이라도 걸리면 더욱 아파합니다. 자녀가 낫는다면 부모는 어떤 희생이라도 치를 것입니다. 건강한 아이를 제쳐두고 아픈 아이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것입니다. 한 마리 양을 찾는 목자의 마음은 이러한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에게는 들판에 있는 건강한 아흔 아홉 마리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목자의 마음을 지니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이 건강한 몸과 건전한 정신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렇지만 주위에는 한 마리 양으로 방황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목자의 마음을 전해야합니다. 누구에게나 좋은 모습이 있습니다. 하지만 바꾸어야할 모습도 있습니다. 어둡게 보고 부정적으로 보는 모습입니다. 이 습관은 반드시 고쳐야 합니다. 길 잃은 한 마리 양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밝은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들입니다. 삶의 방향을 점검해 보라는 것이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김대열 가브리엘 신부
  |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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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아버지가 떠나보낸 것

오늘 복음 말씀은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고, 잘 아는 말씀입니다. 때문에 너무나도 쉬이 지나칠 수도 있는 그런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런 복음 말씀을 대면하게 될 때, 쉬이 하지 않도록 마음을 다시 한 번 더 다지곤 합니다. 그러나 이미 잘 알고 있다 여긴 것에 눈을 한 번 더 들여다보는 것 또한 쉽지 않음을 더 잘 경험하게 됩니다. 다행히도 이번엔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여 한동안 말씀에 머물고 있었던 대목이 있었습니다. 작은아들이 자기 몫을 챙겨 먼 고장으로 떠났다가 빈털터리가 되어 아버지 집으로 되돌아올 때의 장면입니다.

살아계신 아버지의 가산을 챙겨 나갈 때만 해도 그는 분명 화려하게 치장한 옷차림에 누가 보아도 알아볼 만큼 말끔한 용모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돌아올 때에는 그렇지 않았음이 확실합니다. 복음서에서도 상세히 설명하고 있듯이 옷은 누더기였을 것이고, 신발도 없었을 것이며, 제대로 씻지도 못하여 남들이 누구인지 알아보지도 못할 행색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여느 거지나 다름없는 행색의 사람을 어떻게 자기의 작은아들이라고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을까요? 그것도 가까이 가서 자세히 살펴보고 난 뒤가 아니라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알아보았다고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하였을까요?

한동안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자식을 둔 부모라면 누구나 장면을 쉽게 수긍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왠지 ‘자식이 없어서 이해를 못 했나?’ 싶어 혼자 부끄러워지기도 했습니다. (자식 없이 사는 사제가 감히 추측해봅니다.) 아마도 아버지는 작은아들이 자기 몫을 챙겨 집을 떠나간 뒤부터 줄곧 그 아들을 걱정하였을 것입니다. 끼니는 제대로 챙겨 먹고 다니는지, 몸 편히 누워 잠잘 곳은 있는지, 나쁜 친구들을 만나 가진 것을 탕진하지는 않았는지, 강도짓을 당해 가진 것을 빼앗기고 어디 다치지는 않았는지, 죽지는 않았는지 하는 생각으로 마음 편할 날이 없었을 것이고, 이런 걱정스런 마음이 한시도 떠나지 않아 틈만 나면 마을 어귀에 나가 오가는 사람들을 살펴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아버지는 거지 행색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 떨어져 있을 때”부터 쉽게 알아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기 몫을 챙겨 나간 아들이 아니라 자기의 아들을 걱정했던 것이고, 집을 떠나보낸 것은 아들이 챙기고 나간 아들의 몫이었지 아들을 떠나보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잘못을 한 아들이 가지고 간 것보다 마냥 내 아들의 안위만을 걱정하는 우직한 아버지의 사랑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추석이 가까이 왔습니다. 나를 걱정하며 기다리고 계실 부모님께 안부 전화 한 통씩 해보시길 바랍니다.

▮ 마산교구 권기덕 안셀모 신부 : 2016년 9월 11일
  |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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