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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아버지의 마음
조회수 | 2,377
작성일 | 07.09.13
삼덕동에서 첫 보좌신부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토요일 저녁미사를 마치고 주일미사를 위해서 일찍 잠자리에 들려 하는데, 잠결에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일어나 보니 술 취한 사람이 사제관 문을 발로 차면서 “신부 있나!”하면서 부르는 소리였습니다. 혹시 아는 신자인가 싶어 나와서 목소리를 들어보니 전혀 모르는 사람 같았습니다. 누구냐고 물어보니 “지나가다가 보니 성당이 있어서 들어왔다. 당신, 신부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대답하니 고백성사라는 것을 보려고 하니 문을 좀 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자냐고 물어보니 자기는 신자는 아니지만 성당에는 고백성사라는 것이 있다는데 그것 좀 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할까? 이 술 취한 사람을 그냥 돌려보낼까? 혹시 들어와서 행패를 부리면 어떡하나’싶어 걱정도 되었지만, 한편으로 얼마나 답답한 마음의 짐이 있었으면 이 밤중에 생면부지의 신부를 찾아와서 이럴까 싶었습니다. ‘그래도 이 사람이 하느님을 믿고 신부를 믿기에 고백성사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와서 털어놓으려는 것이 아닌가? 주님, 당신이 알아서 하십시오’하면서 문을 열고 들어오라고 하였습니다. 들어서는 모습을 보니 30대 초반 정도의 수심이 가득한 표정을 한 남자였습니다. 자신은 신자도 아니지만 성당에서는 고백성사라는 것이 있다고 성당 다니는 친구에게서 듣고선 답답한 마음을 토로하려 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하였습니다. 고백성사? 아니면 면담? 어쨌든 장장 2시간 동안 긴 성사를 하고 나서는 그 어둡던 얼굴이 밝아지면서 속이 시원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신부님, 밤 늦게 이렇게 실례를 해서 죄송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라고 인사를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너나 할 것 없이 죄를 짓고 있고, 죄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살아있는 한 죄를 가까이 하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이런 우리를 하느님께서는 죄 속에 그냥 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찾아다니시면서 마치 길 잃은 양을 찾듯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따라다니시면서 용서해주시고자 하십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우리에게 주님의 용서와 자비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1독서는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하면서 하느님을 배신하고 모독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모세가 하느님께 간절히 애원함으로서 용서해주시는 장면을 보여주고,

2독서에서는 바오로 사도가 “나는 죄인 중에서 가장 큰 죄인입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는 이와 같은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하면서 자기 자신의 죄 많은 과거를 상기하면서 예수님이야말로 죄인을 구하러 오신 용서와 자비의 왕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복음에서는 세 가지 비유를 통해서 한없이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인내하심과 너그러우심을 통해서 인간에게로 향하는 가이없는 자비와 용서하시는 사랑의 모습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루하루를 수많은 좌절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실 이 세상의 어떤 사람도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실패와 좌절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좌절과 실패 속에서 주저앉아 버려서는 안됩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실패없는 성공은 있을 수 없으며, 실패할 때는 괴롭고 좌절하지만 그 실패를 통해서 우리는 완성에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짓는 모든 죄로 나 자신을 깨우치고, 얼마나 나약한 인간인지를 알게 해서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데 보탬이 되도록 해주시는 것이 하느님의 은총인 것 같습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죄가 많은 곳에는 은총도 풍성히 내렸습니다.”(로마 5,20)라고 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복음에서의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실망을 드리고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죄를 지었지만, 거기에서 주저앉지 않고 다시 일어서서 자신의 지나간 삶을 뉘우치고 다시 아버지께 용서를 청하면서 돌아온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항상 너그러운, 바다와 같은 마음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죄를 짓고 좌절하더라도 다시 일어서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고백성사가 무엇인지도 모르던 사람이 하느님 아버지를 보고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고 맡김으로써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었듯이 우리도 아버지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살도록 하여야겠습니다.

대구교구 장효원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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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다른 이름은 함께하기입니다

몇 년 전 비영리 단체의 운영에 대한 세미나를 여러 신부님과 함께한 적이 있었습니다. 기본정신이 “고객의 신을 신고 걸어보기”였습니다. 상대방의 마음과 입장을 헤아리지 않고는 성당이나 복지 시설같은 비영리 단체를 제대로 운영하기가 쉽지 않다는 뜻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첫 시간의 첫 번째 질문이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사랑의 다른 이름을 각자가 느끼는 대로 지어보라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덧붙인 설명으로 사랑은 구체적인 그 모습을 가질 때 제대로 이루어 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나에게 사랑의 구체적인 모습, 곧 새로운 이름은 무엇일까? 꽤 고민한 기억이 납니다.

잃어버린 양과 동전, 그리고 작은아들의 공통점은 함께 있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 주인과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있던 그들은 그 곁을 떠나 다른 곳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들을 바라보는 주인과 아버지의 마음을 오늘 우리는 복음에서 느끼게 됩니다. 잃은 양을 뒤쫓아 가고, 잃어버린 동전을 찾기 위해 등불을 켜고 샅샅이 뒤지고,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먼 곳을 쳐다보며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헤어져 있음의, 떨어져 있음의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왜 떨어져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간절함만이 주인과 아버지에게 중요한 모습입니다. 그 간절함이 통했나 봅니다. 결국 함께 있게 되었습니다. 함께 있게 된 모두는 잔치를 벌이게 됩니다. 다른 이들을 부르고 그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되찾았거나 돌아왔다는 것은 당사자 간의 일만이 아니라 주변의 다른 이들에게도 참으로 기쁜 일이었습니다. 다만 지금까지 아버지와 함께 있던 큰 아들만 제외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화가 나서 집밖에서 농성중인 큰 아들마저도 아버지에게는 함께하고픈 존재였습니다. 아버지와 주인들에게 사랑의 다른 이름은 ‘함께 하기’였습니다. 어떠한 이유나 잘못이 있다하더라도 아버지의 가장 큰 바람은 자식들과 함께 지내고 그 기쁨을 나누는 일이었습니다.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 듭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못마땅한 이들의 말을 통해 예수님의 의도가 드러납니다.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예수님을 통해 집나간 자식을 모으려는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마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 일을 예수님이 하고 계십니다.

제 주변을 봅니다.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여 주는 사람들이 주로 보입니다. 또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꾸준한 신앙생활과 성실한 자세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시는 좋은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예수님과는 다른 자리에 서 있음을 느낍니다. 조금씩이라도 제가 머무는 자리에서 예수님의 자리로 옮겨가야 함을 깨닫습니다. 좋은 사람만이 아니라 아버지를 떠나 함께 하지 못한 이들에게-그 이유가 무엇이든- 다가가기를 간절히 청해봅니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기쁨의 춤과 맛있는 음식이 있는 잔치가 벌어지길 더욱 간절히 청해봅니다. 함께 하시지 않겠습니까?

허남호 마르코 신부
  |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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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두 살 터울 동생과 자주 다투며 자랐습니다. 하루는 그만 동생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지요. 부모님이 온 동네를 찾아다녔지만 해가 기울도록 동생을 찾지 못했습니다. 급기야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고 아버지는 어찌할 줄 몰라 연신 담배를 피워 댔습니다. 어린 저도 걱정이 되어 기도가 절로 나왔습니다. ‘예수님! 제발 제 동생 좀 찾아주세요.’ 그 때 마침 안방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세상에…. 동생은 장롱 안에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혼 자 숨바꼭질을 했다나요? 영문도 모른 체 아버지께 빗자루 몽둥이로 혼나고 있는 동생을 바라보며 웃음과 눈물, 기쁨과 감사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작은 사건이었지만 그날 동생의 소중함을 새로이 깨닫게 되었고 잃은 자녀에 대한 부모의 애타는 사랑과 기다림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그것을 되찾기 위해 힘을 씁니다. 더구나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더 애타게 찾고 돌아오길 기다리겠습니까? 바로 오늘 복음은 어린양 한 마리를 찾아 헤매는 목자의 모습과 잃은 은전을 찾고 기뻐하는 부인의 비유를 통해 자녀인 우리를 하나하나 애타게 찾고 기다리시는 예수님의 마음,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은 죄로 당신과 멀어지고 교회를 벗어나 있는 형제들을 포기하거나 처벌하려 하지 않고 끝없는 사랑으로 다시 찾고자 하신다는 것이지요.

사실 목자를 잃은 양은 자유롭다기보다 오히려 온갖 맹수들의 먹잇감이 되어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고, 목자의 보호 안에서 가졌던 평화를 더 이상 누릴 수 없게 됩니다. 또한 주인의 손을 떠난 은전도 그 값어치를 제대로 발휘할 수 없게 되지요. 아무리 값나가는 은전이라도 장롱 밑에 처박혀 있거나 땅에 떨어져 묻혀 있으면 그 가치는 그만 잃어버리게 됩니다. 즉 신앙인인 우리들도 복음의 양들처럼 신앙 공동체와 목자의 보살핌 속에 있을 때, 주님의 평화와 생명을 누리게 되고, 주인의 손에 있는 은전처럼 하느님의 손에서 진정한 가치를 지니고 그 달란트를 주님 뜻에 맞게 발휘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혹시 여러분은 장롱속의 제 어린 동생처럼 하느님께 마음의 문을 닫고 신앙공동체로부터 잠시 숨어있지는 않으신지요? 혹은 미사에는 참여하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잊은 채 나의 뜻대로만 세상을 살거나 반복되는 죄 속에 살고 있지는 않은지요?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속된 모습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자녀인 우리(나)를 사랑하시고 찾으시며 기다리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다시 주님과 신앙공동체를 향해 마음의 문을 열고 회개(悔改)의 한걸음을 떼는 그 순간, 하느님께서는 잃은 자녀를 되찾은 아버지처럼 기쁘게 우리를 맞아 주실 것입니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루카 15,10)

<대구대교구 김영덕 루카 신부>
  |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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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

어떤 사람이 수도자에게 물었습니다. “하느님은 과연 저 같은 죄인을 용서하실까요?” 그 수도자는 잠시 묵상한 후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만일 당신의 옷이 찢어진다면 그 옷을 버리십니까?” 그 사람이 “고쳐서 입어야지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수도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도 자기 옷을 그렇게 아끼는데, 지극히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당연히 죄인들을 얼마나 아끼시며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오늘 세 개의 비유를 통해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하느님께서는 무한히 자비로우신 분이심을 계시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계시하는 하느님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목숨을 바쳐서 찾아내는 목자이시며 은전 한 닢을 찾기 위해 등불을 켜고 집안을 쓸며 샅샅이 뒤지는 분이십니다. 또한 하느님은 자녀들에 게 모든 것을 베풀어 주시고 잘못을 뉘우치고 되돌아온 작은아들과 동생을 거부하는 큰아들까지도 모두 아끼시는 아버지이심을 예수님은 분명하게 계시하십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이러한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사랑을 받아 회개한 사람들 때문에 일어 날 일들을 비유 끝에서 말씀하십니다.

“하늘에서는, …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루카 15,7)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루카 15,10)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루카 15,24) 또한 예수님은 하느님과 함께 기뻐하는 하늘과 천사들과 더불어 큰아들과 우리도 함께 기뻐해 주기를 바라시며 잔치에 초대하십니다.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 잃었던 은전을 찾았습니다.”(루카 15,6.9)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 다.”(루카 15,32)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선포하신 자비의 특별 희년을 살아가는 우리는 잃었던 사람들을 다시 찾으신 하느님과 함께 진심으로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사랑의 이중 계명인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당신도 자기 옷을 그렇게 아끼는데, 지극히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당연히 죄인들을 얼마나 아끼시며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겠습니까?”

▮대구대교구 소요한 요한 신부 : 2016년 9월 11일
  |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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