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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아버지” 하느님
조회수 | 2,323
작성일 | 07.09.14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또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쳐 주신 분입니다. 친히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를 드릴때마다 우리는 하느님을 익숙하게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오늘 복음의 세가지 비유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어떤 아버지의 모습으로 보여주고 계신지 도와주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에서 아흔 아홉 마리 양을 들판에 두고 한 마리를 찾으러 온 들판을 헤매는 목자는 어찌보면 어리석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온갖 고생 끝에 그 한 마리를 찾은 목자가 집에 돌아와서는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잔치를 베푸는 모습을 보면 더 어리석어 보입니다. 목자가 잃어버린 양 한 마리까지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말할 때 비로소 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은전 한 닙을 찾은 기쁨을 친구들, 이웃들과 나누는 여인의 이야기도 그 은전에 대한 애정과 사랑이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글이 있어서 옮겨 봅니다. ‘아버지는 누구인가’라는 글 중 일부분입니다. “아버지란 ‘내가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나? 내가 정말 아버지다운가?’하는 자책을 날마다 하는 사람이다. 아들, 딸이 밤늦게 돌아올 때에 어머니는 열 번 걱정하는 말을 하지만, 아버지는 열 번 현관을 쳐다본다. 아버지는 ‘아들, 딸들이 나를 닮아 주었으면’하고 생각하면서도, ‘나를 닮지 않아 주었으면’하는 생각을 동시에 한다. 아버지란 돌아가신 뒤에도 두고두고 그 말씀이 생각나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돌아가신 후에야 보고 싶은 사람이다. 아버지는 결코 무관심한 사람이 아니다. 아버지가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체면과 자존심과 미안함 같은 것이 어우러져서 그 마음을 쉽게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웃음은 어머니의 웃음의 2배쯤 농도가 진하다. 울음은 열 배쯤 될 것이다. 아버지는 가정에서 어른인 체를 해야 하지만, 친한 친구나 맘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면 소년이 된다. 아버지는 어머니 앞에서도 기도도 안 하지만, 혼자 차를 운전하면서는 큰소리로 기도도 하고 주문을 외기도 하는 사람이다. 아버지! 뒷동산의 바위 같은 이름이다. 시골마을의 느티나무 같은 크나 큰 이름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 속의 아버지도 바로 우리들의 아버지와 같은 모습일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물론 큰아들도 아버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그분께 마음을 돌리기만 하면 무엇이든 이해해 주시고 받아주실 분입니다. 방황하는 아들을 기다리며 항상 마을 입구를 바라보고 계신 든든한 우리 아버지 같은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알려주시는 하느님 아버지는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하느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부족함까지 사랑해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을 기억하며 그분의 사랑을 본받고 나눌 수 있는 한주간 되시길 바랍니다.  

인천교구 황성진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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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용서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용서만큼 힘든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 나에게 불이익이나 언짢은 감정을 가져다준 이웃 동료들, 내 자신 조차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내 안의 부족함, 개개인의 성실에도 불구하고 알게 모르게 자신을 억압하고 있는 구조나 제도들에 대해 맘 편히 용서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특히 자신이 생각하기에 상식적으로 용납이 되지 않는 사건이 벌어졌다고 느껴졌을 때에는 더더욱 용서가 불가능합니다. 행여 용서했다고 할지라도 실은 그저 묻어두고 무관심 하는 것으로서 용서를 대신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이웃이 내게 끼친 잘못에 대해서는 가끔 자신의 도량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 벌을 감면해 주는 듯한 제스츄어를 쓰지만 아직 마음은 굳을 대로 굳어져 진실된 용서는 아닐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어쩌다 자비를 베푸는 듯한 용서는 진정한 용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용서란 근본적으로 잘못을 행한 이를 새롭게 일어서게 하는 힘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실상 사람이 사람을 용서하는 일만큼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 용서야말로 하느님 나라의 문을 여는 열쇠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용서하는 일에 그리도 서툰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아마 나 자신, 우리 자신이 각자의 부족함을 인정하지 않고, 혹시 의인으로 착각하고 있는데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실상 의인은 제대로 용서할 줄을 모릅니다. 사람이 너그러이 사면을 내리는 입장이 되면 점점 자신을 의인으로 치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한 사람은 용서가 자기의 힘으로 베푸는 것이 아닌 서로 나누는 것임을 압니다. 제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선물로 주어지는 것임을 알게 되면, 용서하는 이나 용서받는 이나 같은 화해의 잔치에 참여하게 됩니다.

자신이 늘 용서받아야할 인간이라고 생각하면 실상 내게 피해를 준 어떤 행위도 용서하지 못할 일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아니 용서하는 주체는 나 자신이 아님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잃었던 아들의 비유처럼 아들이 잘못을 고백하기 전부터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던 아버지의 품이야말로 아들을 뉘우치게 만들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들이 새로운 용기를 얻어 새 삶을 시작하게 만든 창조적인 힘을 지니고 있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용서는 아들을 뉘우치는 척하게 하지 않고 깊이 통회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생각합시다.

이상희 마르띠노 신부
  |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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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여러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여러분들의 기도와 염려 덕분에 피정 강의 잘하고 어제 다시 일상의 생활로 돌아왔습니다. 사실 피정 강의를 하면 내가 무엇인가를 준다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게 됩니다. 즉, 사람들의 열정, 주님께 대한 뜨거운 마음 등을 보게 되어 더 많은 힘을 얻습니다. 아무튼 피정 강의에 초대해주시고 잘 들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리며, 더욱 더 열심히 살아갈 것을 약속드립니다. 그럼 오늘의 새벽 묵상 글 시작합니다.

고해성사를 주다보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과 그렇지 않은 분의 구분이 확연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열심히 신앙생활 하시는 분의 죄 고백은 매우 구체적이지만, 그렇지 않은 분은 매우 간략하며 포괄적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엄청나게 죄를 많이 지은 것 같고, 그렇지 않은 분은 참된 의인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삶을 더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면서 하느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사람일수록 참회하는 마음이 생겨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날까요? 이러한 예를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안경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안경이 지저분하다는 것을 평소에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밝은 곳에 가게 되면 안경에 묻은 이 물질들이 너무나도 잘 보이게 됩니다. 이렇게 지저분한데도 불구하고 어두운 곳에서는 깨닫지 못합니다. 바로 밝은 곳에서만 얼룩이 많이 있고 지저분함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예를 들어보지요. 어항이 어두운 방 안에 있을 때에는 깨끗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햇빛이 이 어항을 비추면 어떨까요? 어항 물에 떠다니는 무수한 찌꺼기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이 어두울 때는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느님의 밝은 빛이 나를 비추게 되면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온갖 죄악들을 밝히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며 죄를 뉘우칠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어두운 곳에 있을 때에는 그것이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죄를 고백해도 무덤덤할 수밖에 없으며, 진심으로 회개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복음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시는 분이십니다. 즉, 회개하는 죄인을 향해 항상 찾아나서는 주님이십니다. 이러한 이유로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님께 나아가지 않는, 아니 나를 찾고 계시는 주님을 오히려 피해 도망치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얼마나 더럽고 지저분한지를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죄를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난날 지은 죄와 허물을 보시지 않고 회개하여 당신 앞에 나아가는 것 자체로 만족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가지고 다가오시는 주님께 우리 모두 이제는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조명연 신부
  |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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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하느님 백성도 광야 생활 중에 죄에 떨어지고, 모세의 중재로 말미암아, 하느님께서는 죄지은 백성을 처벌하시지 않으십니다. 중개자로서 모세는 장차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상에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주십시오”, “그분께서는 늘 살아 계시어 그들을 위하여 빌어 주시는”(히브 7, 25) 예수님을 예시해 줍니다.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빌어주심으로 인해,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을 처벌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용서받을 필요조건은? 바로 죄를 깊이 뉘우치는 참회의 기도인 시편 51장을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지속적인 기도로 삼는 데 있습니다.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

사실 복음서 여러 곳에서도 주 예수님께서는 죄인들과 함께 식사 하시는 것에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말에 즉시 답변 하십니다.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 13),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 19, 10)라고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똑같은 상황인데 즉답을 피하시고 세 가지 비유를 들어 답변하십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와 되찾은 은전의 두 비유를 통해서, 죄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배려를,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통해서, 죄사함을 위한 조건(“나는 내 아버지께로 돌아가리라”)을 가르쳐주시고 참회하는 죄인을 용서하기 위한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계시하십니다.

이제는 독자의 입장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탕자는 ‘나 하고는 상관이 없고 어떤 특정한 한 인물에만 해당되겠지?’ 하는 질문이 다가 옵니다. 답변은 의외로 놀랍습니다.

회칙 ‘화해와 참회’에서 교황님은 이렇게 풀이 하십니다. “여기의 탕자는? 인간을 뜻합니다. 사람 하나하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5항 참조), “어느 의미에서 이 아들은 은총과 원초적 정의를 상실한 첫 인간을 비롯하여 모든 시대의 모든 인간이기도 합니다”(회칙, 자비로우신 하느님, 5항 참조). 한편 큰 아들은? “인간-하나 하나-은 여기에 나오는 형이기도 합니다. 이기심은 그를 시기에 차게 하고 마음을 굳게 하며 눈을 가려서 다른 사람들이나 하느님으로부터 그를 갈라 세웁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진정한 화해를 위해서는 그 사람 역시 회개할 필요가 있다 하겠습니다”(6항 참조).

겉으로는 의롭게 보이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 큰 아들의 마음 상태는 “스스로를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루카 18, 9) 교만한 태도가 드러납니다. 영적으로는 위험한 상태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자기인식을 통해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필립 2, 3) 마음과 삶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또한, 주님의 자비에 감사드리고 자신을 진실하게 아는 사도 바오로의 겸손의 모범도 빛납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를 통한 주님의 풍성한 자비와 죄인들과 같이 식사하시는 겸손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소중히 여기시는 사랑이 서로 간의 소통이 부족한 우리 세대에 모범과 빛이 됩니다. 일어나 아버지께 돌아가는 회개의 여정과 화해의 직무에 봉사하는 은혜로운 한 주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인천교구 박창목 바르톨로메오 신부>
  |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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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하느님의 품으로’

하루하루 참 많은 잘못과 실수를 저지르며 살아갑니다. 나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그렇고, 또 세상의 여러 유혹 앞에 쉽게 무너지기 때문에도 그런 것 같습니다. 가정에서 또는 일터에서 크고 작은 죄를 하루에도 수없이 지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오늘도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며 죄를 짓고 있습니다. 과연 이 죄성(罪性)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옹졸하고 이기적인 마음으로 내 자존심을 먼저 지키느라 주위를 둘러보지 못하고 무심합니다. 나를 변호하고 합리화하느라 상대를 헤아리지 못하고 품어주지 못합니다. 이러한 짐스러운 죄책감들이 쌓여 불편해진 내 마음을, 고해성사로 정리하고 정화하여 하느님과 화해하려 합니다. 하지만 잘못을 하고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이들을 보면, 무언가 억울한 것 같아 뉘우치지 못하고 다시 또 원치 않았던 죄를 짓습니다. 점점 더 안타까운 악습이 늘어만 가는 것 같아 헛헛한 마음이 듭니다.

이렇게 길 잃은 양으로 살아가는 우리를, 하느님께서는 열 일 젖혀두고 찾으십니다. 집 나간 아들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지금도 기다리고 또 기다리십니다. 무사히 찾았고 돌아온 것에만 감사할 뿐, 꾸짖지도 탓하지도 않으십니다. 이해하기 힘들지만 하느님은 그런 분이신가 봅니다.

많이 변한 세상 속에 살고 있지만, 자녀가 죄를 지었다 해서 내치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자녀가 죄를 지을수록, 그 죄가 크고 깊을수록, 더 아파하고 속상해하는 것은 부모의 마음입니다. 하느님 아버지도 그런 마음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묻지도 않으시고 따지지도 않으십니다. 원망하지도 않으십니다. 그저 찾아서 다행이라고 기뻐하실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발길을 돌려 그 품에 안기면 됩니다. 나의 부족함을 깨달아 잘못을 인정하고, 다시 편안한 마음으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아직 완벽하지 못하고 얼룩지고 실수투성이기는 마찬가지일 수도 있겠지만, 하느님과 함께 있다면 다시 깨끗해지고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개인과 물질이 우선시되는 세상이기에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비의 특별희년을 보내고 있는 만큼, 하느님 자비에 대한 굳은 믿음을 더욱 많이 청해봅니다. 또한 그 실천으로 먼저 서로가 서로에게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를 품어주고 안아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또 하루가 시작됩니다. 하느님의 허락으로 주어진 새로운 기회의 오늘을 후회 없이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소소한 일상 안에서 얻게 되는 하느님의 자비에 대해 감사한 마음으로, 늘 주님의 울타리에 있는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 인천교구 김수현 요셉 신부 : 2016년 9월 11일
  |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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