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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조회수 | 2,781
작성일 | 07.10.04
[서울]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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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사회 전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나오는 것은 긴 한숨과 탄식이요. 밀려오는 것은 오직 고통과 절망인 때가 있습니다. 하바쿡 예언자처럼 “주님, 당신께서 듣지 않으시는데, 제가 언제까지 살려 달라고 부르짖어야 합니
까?”(하바 1,2)라고 외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캄캄한 어둠 한가운데에 놓이면 하느님께 볼멘소리나 원망의 속내를 드러내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순간에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내려놓아서는 안 됩니다. 그 어둠이 빛으로 바뀔 것이라는, 흐릿한 안개가 맑고 뚜렷해질 것이라는, 그러한 희망을 간직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좋은 길로 이끌어 주시리라 믿고 희망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인내로 기다릴 수 있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이 성숙한 신앙인이요. 성실한 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숙하고 성실한 주님의 종을 묵주 기도 성월에 더욱 기억할 것입니다. “한생을 주님 위해 바치신 어머니, 아드님이 가신 길 함께 걸으셨네.”

성모님의 삶은 신앙인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일깨워 줍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받아들인 분이십니다. 나자렛에서는 드러나지 않게 예수님을 기르시고, 때가 차자 시작된 아드님의 복음 선포 여정에 함께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는 사도들과 함께 부활을 증언하셨고, 지금은 하늘나라에서 우리의 전구자로 생활하고 계십니다. 어머니는 일생을 주님 안에서 주님을 위해 사셨고, 지금은 우리를 위해 살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성모님은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루카 1,38) 그저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라고 말하십니다.

성모님께서 당신의 사명과 역할에 충실하신 것처럼 우리도 각자의 사명과 역할에 충실해야겠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 자녀로서, 직장인으로서, 학생으로서, 신앙인으로서의 사명과 역할에 성실하게 임해야겠습니다. 각자의 사명과 역할에 맞게 ‘답게 살아가야겠습니다.’ 이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2티모 1,8)하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머무르시는 성령께서 우리의 도움이 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모님께 우리가 성숙하고 성실한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전구도 청해야겠습니다.

한 주간 동안 우리의 사명과 역할에 걸맞은 삶을 살아가도록 합시다. 그러고 나서 “저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겸손히 말씀드리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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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성풍 아우구스티노 신부
2016년 10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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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이들만이 만드는 기적

미국 텍사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해 대단히 심한 가뭄이 들어서 각 성당마다 비를 기원하는 기도와 미사가 끊이지 않고 봉헌됐습니다. 날이 갈수록 가뭄은 심해져 가고 성당을 찾는 신자들 수도 늘어만 갔습니다.
 
그런 어느 날 미사 중에 강론을 하던 신부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성당에 와서 아무리 기도를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비를 내려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신자들이 깜짝 놀랐지요.
 
"아니, 신부님께서 어떻게 저런 말씀을 하시는가?"
 
여기저기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로 성당 안은 금방 소란스러워졌습니다.
 
이런 신자들의 반응을 지켜본 신부님이 신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정말 기도를 하면 비가 오리라고 믿습니까?"
 
"믿습니다!"
 
신자들이 입을 모아 큰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지금 여러분 중에 우산을 가져오신 분은 손을 들어 보십시오."
 
그 자리에 우산을 챙겨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도들은 예수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하고 청합니다. 제자들의 요청에 에수님께서는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6)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말씀으로 봐서 제자들에게는 눈곱만한 믿음도 없는 것일까요? 또 우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다면 정말 놀라운 기적을 일으킬 힘이 생기는 것일까요?
 
어느 가을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등산을 떠났습니다.
 
꽤 높은 산을 등반하는데 눈앞에 고지를 두고 해가 저물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하산을 선택했는데 다시 쉽게 산에 올 수 없다는 이유로 유독 한 사람이 정상 등반을 고집했습니다. 일행과 헤어진 그는 열심히 정상을 향해 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런데 해가 짧아진 늦가을 산 속은 삽시간에 어둠이 내리고 기온은 뚝 떨어져 혼자 남은 그 사람은 자신의 판단을 후회하며 서둘러 길을 찾아 내려오게 됐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을 헤매게 된 이 사람은 너무나 두렵고 당황한 나머지 발을 헛디뎌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한참을 구르던 남자는 구사일생으로 나뭇가지 하나를 잡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숨을 내쉬는 것도 잠시뿐 나뭇가지를 잡은 팔에 점점 힘이 빠지고 온몸에는 진땀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기도를 했습니다.
 
"하느님 제발 살려주십시오. 살려만 주신다면 하느님 뜻대로 정말 착하게 살겠습니다."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했지요. 그러자 어디선가 응답이 들려왔습니다.
 
"나를 정말 믿느냐?"
 
"믿습니다!"
 
"무엇이든 내 말대로 하겠느냐?"
 
"네, 무엇이든 시키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나뭇가지에서 손을 떼거라."
 
"예? 그것만은 절대 안 됩니다."
 
다음 날 조난당한 그 사람을 찾으러 갔던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높이가 바닥에서 1m 도 채 안 된 곳에서 나뭇가지를 움켜쥔 채 죽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는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입으로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 믿는 것은 자기 자신인 경우가 많지요. 그런데 문제는 자기를 믿으면 살 것 같지만 결국은 죽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나의 경험과 지식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큽니다.
 
믿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느님을 믿는 바로 여러분의 삶 속에서 기적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번 한 주간도 믿는 사람인 여러분의 삶 속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참 생명이신 하느님을 찾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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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해야 할 일들

1. 성서이야기

제1독서 하바꾹 1,2-4는 바빌론 제국의 느부갓네살이 고대 근동 세계의 통치자로 등장한 때 활약한 예언자인 하바꾹의 외침을 얘기합니다. 그는 악인들이 의인들을 괴롭히는데도 하느님께서는 침묵하고 오히려 악의 세력인 바빌론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는 데 대하여 항의합니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의로운 사람은 그의 신실함으로써 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제2독서 디모테오 후서 1,6-8.13-14는 신앙고백에 관한 격려와 교직자의 자세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교직자는 받은 은사를 잘 활용해야 하며 어떤 어려움과 고난이 닥칠지라도 복음을 위해서 비겁하게 처신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루가 17,5-10은 믿음의 힘(5-6절)과 종의 처지에 대한 비유(7-10절)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죄의 유혹을 경고하면서 형제가 죄를 짓거든 몇 번이고 용서하라고 말씀하자 제자들은 이를 실천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생각했던지 그분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이때 예수께서는 “여러분이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갖고 있다면 뽕나무더러 뿌리째 뽑혀 바다에 심어져라 하더라도 그것이 여러분에게 순종할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종의 처지 비유는 루가 복음서에만 수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밭과 양을 돌보는 일을 위해서 종 하나를 두었는데, 그 종은 맡은 일을 다하고서도 아무런 보수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는 보수를 요구할 수 있는 품꾼이 아니고 무상으로 일하는 종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품꾼은 보수를 요구할 수 있지만 종은 무상으로 일하는 법입니다. 종은 주인이 지시한 대로 일을 다 마치고 나서도 ‘저희는 쓸모 없는 종입니다. 저희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습니다’라고 말할 뿐입니다.

2. 우리의 이해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자신들의 믿음이 부족하니까 그것을 더하여 달라고 예수께 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의 중요성을 말씀하심으로써 믿음은 결코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님을 일깨워 줍니다. 제자들은 믿음을 수량적 개념으로 이해한 반면에 예수는 질적인 개념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믿음은 결코 크고 작고,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있고 없음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는 인과응보 사상에 젖어서 율법을 잘 지키고 공덕을 많이 쌓으면 거기에 정비례해서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을 향하여 종의 처지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저들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채무자와 채권자의 관계로 보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는 비유를 통하여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주인과 종의 관계임을 천명합니다. 종이 온종일 일을 했다고 해서 보상을 바랄 수 없듯이, 인간 역시 아무리 공덕을 많이 쌓아도 하느님 앞에서는 마치 종처럼 처신해야 하기 때문에 보상을 요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하느님의 명령대로 처신한 후에 보상을 바라거나 자랑해서는 안되고 비유에 나오는 종처럼 “저는 쓸모 없는 종입니다. 저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종으로서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실천하는 그 자체로 기쁨과 보람을 삼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언제 어떻게 어떤 상급을 주실 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상급을 주고 안 주고는 하느님의 소관이기 때문입니다.

“실상 내가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내게 자랑거리는 아닙니다. 그것은 내게 부과되는 하나의 필연성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내게는 불행이 있을 것입니다”(1고린 9,16).

2001년 10월 7일 서울대교구 사무처 홍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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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믿음에 대해서 자칫 큰 오해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 특히 오늘 복음 말씀을 들어보면 그렇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째 뽑혀서 바다에 그대로 심어져라 하더라도 그대로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 복음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믿음이란 마술쟁이 또는 요술쟁이처럼 인간이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척척 해내는 것처럼 오해를 불러 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란 결코 마술이나 요술을 부리는 비법이 아니다. 믿음이란 하느님께 대한 신뢰요 사랑이다. 믿음이란 오로지 하느님께만 바치는 전인적인 기도이며 의탁이요 순명이다. 믿음이란 하느님의 사랑과 경륜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며 하느님께서 원하시면 무엇이나 하겠다는 결연한 의지이다. 그래서 믿음은 과연 그 무엇보다도 강하고 힘이 있는 것이어서 서슬이 시퍼런 죽음까지도 무서워하지 않는 순교자적 위대한 능력이기도 하다.

오늘 제1독서 하바꾹 예언서와 제2독서 티모데오 후서를 묵상해 보자. 먼저“하바꾹 예언서에 나타나고 있는 믿음의 생활”을 보자! 진정한 믿음이란 세상이 온갖 부정, 부패, 억울하고 한심한 일로 치닫고 있는 것 같아도 언제나 하느님의 정의는 실현된다고 생각하면서 “제멋대로 설치지 않는다”는 정신이 들어있다. “세상이 온통 부조리와 부정부패를 일삼는다 해도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의 길을 걷는 사람들은 항상 진실과 정의와 善의 편에 서 있어야 한다”는 정신이 올바른 믿음의 자세라고 가르치고 있다.

오늘 제2독서인 디모테오 후서에는 좀더 자세하게 믿음의 구체적인 생활 수칙이 나와 있다. ① 비겁하거나 옹졸하지 않게 진정한 용기로써 정의를 실천하고 진실을 말한다. ② 모든 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포용하며 나누어준다. ③ 절제로써 탐욕을 누르고 이기심을 억제할줄 안다. ④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수모도 당하고, 고통도 위험도 감수한다. ⑤ 복음의 선포를 위해서 헌신적으로 일하고 봉사한다. ⑥ 모든 일상생활이 건전하고 아름다워서 자못 신성함까지 느끼게 하는 것이다. ⑦ 성령의 도움을 의식하며 언제나 성령께 맡기고 위탁하는 겸손함과 열정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니까 믿음의 생활이란 단순히 “주님, 믿습니다”만 외치면 되는 것도 아니고, 주님께 무슨 청탁의 기도만 열심히 드린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진정한 믿음의 생활은 위에 제1독서와 제2독서의 말씀에서와 같이 “자기의 모든 생활이 아름답고 성스럽게 변화되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믿음의 의미를 정의하고 났을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물음에 긍정적인 대답이 나올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과연 나의 생활은 얼마나 아름다우며, 성스러우리만큼 정의롭고 진실한가? 정말로 성령의 불길처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열정이 뜨거운 생활인가? 남을 이해하고 용서하며, 나의 것을 아낌없이 나누고 쪼개는 아픔 속에서도 조용한 행복을 느끼는 생활인가...?

마지막으로 더욱 중요한 것은...? 비록 이상의 말씀과 같이 정말 열심히 산다고 하더라도, 또 남을 도우며 정의대로 산다고 하더라도, 또는 복음 선포를 부지런히 하면서 산다고 자부하더라도... 결코 그것을 자랑으로 내세우며 인정을 받으려하거나, 상을 받으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오늘 복음의 마지막 단서이다.

“마치 종이나 하인이 밭에서 돌아와 주인의 음식을 차려놓고 시중들 때 주인의 칭찬이나 인정을 기다릴 필요 없이 그저 보잘것없는 종이 할 바를 했을 따름입니다.” 하는 겸손한 자세가 중요 하다는 것이다.

서울대교구 김충수 신부
  |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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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모테오가 받은 영

바오로 서간 중 3편의 서간, 즉 티모테오 전후서와 티토서는 18세기부터 “사목서간(Pastoral Epistles)”이라는 별도의 이름으로 불려 왔습니다. 대부분의 바오로 서간이 특정 공동체를 향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사목서간은 티모테오와 티토라는 인물에게 보내진 서간들입니다.

하지만 그 서간의 내용으로 볼 때에 3편의 사목서간은 개인에게 보내진 사사로운 편지라기보다는 바오로가 지역 공동체의 지도자였던 티모테오와 티토에게 보내는 공적 권고의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 서간들을 통해 바오로는 교회의 제도와 조직, 잘못된 가르침 등에 관한 사목신학적 답변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사도 바오로는 티모테오에게 자신의 안수를 통해 티모테오가 받은 영은 “비겁함의 영”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임을 말합니다. 여기서 바오로가 비겁함에 대해 말하는 것은 바오로가 감옥에 갇히게 되자 많은 사람들이 그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위해 옳은 일을 하다가 감옥에 갇힌 사실과 그렇게 갇혀 있는 바오로와의 관계를 티모테오가 결코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음을 바오로는 재차 명시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충고합니다: “우리 안에 머무르시는 성령의 도움으로, 그대가 맡은 그 훌륭한 것을 지키십시오.”

바오로가 살았던 시대와 우리의 시대를 비교해 본다면 우리는 참으로 신앙하기에 편한 세월을 살고 있는 듯 보입니다. 박해의 공포나 감옥에 갈 두려움 없이 신앙생활을 할 수 있고,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주일이면 성당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오로의 시대나 우리의 시대나 교회와 세상의 대조는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문명을 통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으리라 믿는 세상 안에서 교회는 하느님 앞에서의 경외와 겸손에 대해 가르쳐야 하고, 물질주의의 소비사회 안에서 가난과 절제에 대해 묵상해야 하며, 자신만을 생각하라는 세상의 이기주의 앞에서 나눔과 섬김의 가치에 대해 역설해야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바오로의 시대와 우리의 세상 사이에서 참 그리스도인이 느끼는 감옥 같은 현실은 별반 큰 차이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단단한 벽으로 사방이 둘러싸인 감옥처럼 결코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세상 한가운데서 죄인처럼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바오로는 역시 성령을 통한 “믿음과 사랑”으로 부끄럼 없이 살아가라고 충고할 것입니다.

오늘의 루카 복음에서 예수님은 조금 다른 어조로 바오로가 말하는 신앙의 긍지에 대해 언급합니다. 세상은 변하지 않을 것 같고, 모든 것은 불가능해 보이지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돌무화과나무에게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해도 복종할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태오 복음은 같은 말씀을 전하며 아예 나무들이 자라는 “산을 (통째로!) 옮기는 믿음”의 위대한 능력에 대해 언급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영 안에서 살아갈 때 세상은 분명히 변할 것이라고, 참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 얼마나 위대한 일을 이룰 것인지에 대해 예수님께서 생생하게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들의 수고로운 삶을 통해 세상 안에서 작은 변화의 기쁨을 맛보게 되었을 때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오늘의 복음의 말미에서 예수님은 역시 잊지 않고 가르쳐 주십니다: “저희는 저희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아멘

최승정 베네딕토 신부
  |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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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군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날입니다. 예전에 이런 말들을 하곤 하였습니다. 면제를 받은 사람은 ‘신의 아들’이라고 불렀고, 18개월 방위를 받는 사람은 ‘사람의 아들’이라고 불렀고, 30개월 현역으로 입대하는 사람은 ‘어둠의 자식’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만큼 군 생활은 따분하고, 힘들고,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정당한 사유가 있어서 군 면제를 받은 사람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군 생활의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서, 3년간의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아서 부당한 방법으로 군 면제를 받았다면 잘못입니다.

저는 1986년 1월에 군대엘 갔습니다. 30년 전입니다. 군대의 추억 중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군번입니다. 저의 군번은 ‘13660791’입니다. 30년이 더 지나도 군번은 기억날 것 같습니다. 또 다른 추억은 동기생들입니다. 저의 동기들은 모두 특과병이었습니다. ‘번역을 하는 동기, 붓글씨를 쓰는 동기, 테니스장을 관리하는 동기, 요리를 하는 동기’가 있었습니다. 저도 성당에서 일을 하였습니다. ‘국방부의 시계는 돌아간다.’라는 말을 믿으며 제대하는 날을 기다렸습니다.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군인들이 모두 건강한 모습으로 지내다가, 제대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처음 군대 생활을 할 때 3년이 언제 갈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시간은 흘러가고 제대하는 날은 오기 마련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똑 같은 시간을 선물로 주십니다. 어떤 분은 그 시간을 소중하게 간직하여 보람 있게 사용합니다. 그러나 어떤 분은 그 시간을 낭비하여, 흘려보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시간이라는 선물을 어떻게 사용하는가는 우리들의 선택입니다. 물론 선택의 결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저는 군 생활 중에 틈틈이 영어공부를 했습니다. 그것이 씨앗이 되어서 제대를 한 후에는 돈 보스코 센터에서 외국 분들과 함께 지내게 되었고, 신학교 복학 후에는 성체대회 통역봉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사제가 된 후에는 필리핀에 소공동체 연수를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캐나다에 연수를 2년간 다녀왔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군에서 시간을 아껴서 영어 공부를 한 것이 제게는 큰 결실이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주님 저희에게 믿음을 더 주십시오!’라고 청하였습니다. 밥을 청한 것도 아니고, 재물을 청한 것도 아니고, 높은 자리를 청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른 모든 것을 떠나서 강한 믿음을 청하였습니다. 제자들은 가족들을 떠났고, 생업을 포기하였으며,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기에 ‘강한 믿음’을 청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 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실함과 믿음은 신앙생활의 두 날개입니다. 믿음은 하느님과의 거래가 아니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삼국지에서 제갈 공명은 ‘盡人事待天命’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으로서 최선을 다하고, 결과는 하늘에 맡긴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바오로 사도는 ‘성실함과 믿음’은 우리의 힘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니, 성령의 도움을 청하라고 합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면 두려움도 이겨낼 수 있고, 고난도 참을 수 있다고 말을 합니다. “우리 안에 머무르시는 성령의 도움으로, 그대가 맡은 그 훌륭한 것을 지키십시오.”

10월의 첫 번째 주일입니다. 성령의 도움을 청하며, 성실함과 믿음으로 신앙의 알찬 열매를 맺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신부 : 2016년 10월 2일
  |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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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0   [마산] 영세한 미신자(未信者)가 많다.  [1] 2277
759   [대구] 부활의 삶, 지금 여기서 시작되고 있다.  499
758   [인천]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4] 2833
757   [부산] 알 수 없는, 그래도 좋은 하느님 나라  [2] 2583
756   [안동] 부활을 믿는다면 부활을 살아가십시오  [1] 2573
755   [대전]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은 모두 살아있는 것입니다”  [1] 2898
754   [청주] 부활 신앙  [2] 76
753   [광주] 학벌(學閥)과 사두가이파  2576
752   [전주] 부활 에 대한 확신과 희망  56
751   [춘천] 영원히 하나인 하느님 가족  [2] 2396
750   [원주] 부활 이후의 새로운 삶  54
749   [군종] 두 여자  2131
748   [의정부]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62
747   (녹) 연중 제32주일 독서와 복음 (하느님께서는 산 이들의 하느님)  [3] 1931
746   [수도회] 용서와 자비  [2] 2073
745   [전주] 자캐오, 아! 행복한 사람  [1] 1718
744   [인천] 자캐오! 나무에서 (빨리)내려와!  [3] 2165
743   [서울] 회개의 증거는 착한 행실  [3] 1740
742   [안동] 자캐오 이야기  [1] 2313
741   [부산] 세리 자캐오와 예수님의 만남  [2] 12010
740   [수원] “저 사람이 죄인의 집에 들어 가 묵는구나!”  [3] 2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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