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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겨자씨
조회수 | 2,647
작성일 | 07.10.04
겨자씨 하면 생각나는 일이 있습니다. 원주에서 소임을 하고 있을 때 ‘성서세계 특별전’이 배론 성지에서 열렸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겨자씨를 보았습니다. ‘훅’ 불면 약한 입김으로도 날아가 버릴 것 같은 그런 조그마한 모습으로 작은 종지에 들어있었습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다면 …”이라는 말씀이 저절로 떠올랐습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 향한 조건 없는 신뢰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지요.

교회에서는 ‘단순함’이 하느님께로 향하는 가장 첫 번째 준비라고 말합니다. 살아가는 와중에 많은 문제들과 어려움들이 우리 안에서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 가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 말씀은 그저 단순하게 아버지를 믿으셨던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게 합니다. 이러한 단순함의 믿음이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 가고 피곤하고 지치게 만드는 돌무화과 같은 많은 문제들이 뽑혀져 바다에 심길수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렇게 아무런 조건이 없어야하는데, 스스로에게 익숙하지 않은 우리의 믿음은 스스로 조건을 달아 그분께 드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왠지 모를 우리의 치장들이 더 중요하다고 느껴지는 것이지요.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군더더기보다 각자가 품고 있는 고유한 아름다움을 내어 보이도록, 그리고 그것이 ‘아름답다!’라고 말씀해 주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의 실재에 대한 시선을 어둡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그러기 위해서 ‘겸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시면서 지금 우리가 제대로 가지고 있지 못하는 부분을 또다시 일깨워 주십니다.  

나의 존재가 소중한 것인 만큼, 내 이웃의 존재도 소중합니다. 그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겨자씨만한 믿음과 겸손으로도 가능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온 존재를 받아들이는 시작이 겨자씨 크기만한 믿음으로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작은 일상이, 예상치 못한 기적의 텃밭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하면서 여러분의 삶이 겨자씨를 품은 소중한 밭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우리의 밭에는  하나의 커다란 선물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밭은, 그냥 밭이 아니라 순교자들의  신앙 유산이 고스란히 묻혀서 거름이 되어 있는 기름진 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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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이크리산다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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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한 믿음

저희는 보잘것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루가 17,5-10)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언뜻 보기엔 서로 연결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앞부분에서는 믿음의 힘을 강조하는 상징어(17,6遁)가 나오고, 뒷부분에서는 보상을 바라지 말고 자신이 해야 할 바를 충실히 하라는 비유 말씀(17,7-10)이 나옵니다. 그런데, 루가 복음사가는 이 두 가르침을 연결하여 사도들이 갖추어야 할 태도에 적용시키는 것입니다(17,5-6?.7).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뽕나무더러(마태 17,20에는 ‘산더러’) ‘뿌리째 뽑혀서 바다에 그대로 심어져라’ 하더라도 그대로 될 것이다”(비교: 마태 21,21; 마르 11,22-23). 도대체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란 어떤 믿음일까요? 산이나 바위 같은 믿음이라면 몰라도 겨자씨 같은 믿음은 어쩐지 어색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대목을 풀이하면서 아무리 하찮은 믿음이라도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는 일종의 과장법으로 이해하기도 하고, 혹자는 종말의 엄청난 기적에 비하면 지금의 믿음은 아주 보잘것없다고 풀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면, 씨앗 자체가 중요하지 어느 것이 더 크니 작으니 비교하는 것은 인간적인 셈법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람들은 가치를 따질 때 끊임없이 양으로 계산합니다.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보시니 참 좋았다”고 할 법한데, 인간적인 잣대로는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비교하는 순간 상대적이 되고 맙니다. 믿음에 있어서도 누구의 믿음이 더 크고 강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든 것을 양으로 따지는 우리의 생각입니다.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하지만 실상 중요한 것은 하느님 중심으로 살피는 것이지 인간적인 기준으로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종의 처지’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 말씀은, 그 청중이 인과응보 사상에 젖어 있던 율사들과 그들의 가르침을 받은 바리사이와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잘 지켜서 공덕을 쌓으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도 그들처럼 곧잘 하느님과 흥정을 하지 않습니까? “이번 일만 잘 되면…”, “내 병을 낫게 해 주시면…” 등.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마치 주인과 종의 관계 같아서 주인을 신뢰하는 종은 보상을 바라지 않고 자기 할 바를 충실히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시대의 주종 관계는 가족처럼 자발적이고 지속적인 관계였기에 상호 신뢰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양적인 타산으로 셈을 따지는 관계가 된다면 그 안에 신뢰는 없습니다.

루가 복음사가는 이 비유를 사도들에게 적용하여, 보답을 바라고 사도 직분을 수행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자처한 사도 바오로처럼(로마 1,1; 갈라 1,10; 필립 1,1), 오늘 우리에게도 그리스도인의 직분을 다하고서는 “저희는 보잘것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겸손한 믿음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씨튼 까리따스 최혜영 엘리사벳 수녀
  |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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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종

첫째, 믿음에 대해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믿음을 청하였다. 제자들이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고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같이 저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루가11,1) 하고 청한 적이 있었다. 이번에는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청하고 있다. 이들이 청하고 있는 ‘기도하는 법과 믿음’은 영성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것이다. 청하는 것도 각자의 영적 수준에 달려 있는 것 같다. 영적 수준에 따라 어떤 사람은 물질적인 것을, 어떤 사람은 영적인 것을 청할 것이다.

예수께서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마태 5,6)라고 말씀하셨듯이 ‘옳은 일에 목마른 사람’만이 영적인 것, 곧 ‘기도하는 법과 믿음’을 청한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는다'는 말을 라틴어로 Credere라고 하는데, 이 말은 cor(마음·심장)와 dare(주다·넘겨주다)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믿는다는 것은 내가 믿는 대상에게 내 마음(심장)을 넘겨주는 것이다. ‘내 마음을 넘겨준다’는 것은 내 전부를 넘겨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께 나의 모든 것을 넘겨준다는 것이다. 넘겨주지 못한다는 것은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나를 하느님께 넘겨줄 수 있을까?

나를 하느님께 넘겨준다는 것은 몸을 넘겨준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첫번째로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고 선포하셨다. 믿음을 청하는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째 뽑혀서 바다에 그대로 심어져라’하더라도 그대로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란 바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믿음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복음을 믿기 위해서는 회개해야 한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행동으로 보여주신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내 생각으로 살아왔고, 내 능력으로 모든 것을 했고, 내가 모든 것을 판단했지만 이제부터는 복음에 입각해서 생각하고 말하고 가르치고 판단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나를 하느님께 넘겨주는 것이다. 이 믿음이 처음에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은 겨자씨와 같은 믿음이겠지만 복음으로 점점 성숙해지면 어떤 푸성귀보다도 더 크게 자라고 큰 가지가 뻗어서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된다. 이런 믿음의 대표적인 모델이 바오로 사도이다. 이방인이었고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였지만 다마스커스에서 예수님을 만나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면서 “나에게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도 존귀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모두 쓰레기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려는 것입니다”(필립 3,8)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결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라고 말할 수 있었다. 바오로야말로 나를 완전히 하느님께 넘겨준 믿음의 모델이다.

믿음은 양이 아니라 질이다. 믿음은 얼마나 오랫동안 믿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진실된 믿음으로 성숙되었느냐가 중요하다. 믿음의 근본이 잘못되어 있으면, 곧 복음을 믿지 않는 믿음, 복음에 근본을 두지 않는 믿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

둘째, 저희는 보잘것없는 종입니다

사도들은 누구인가? 사도들은 보잘것없는 종이다. 종이 곧 그들의 신원이다. 올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주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왜냐하면 이미 자기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넘겨드렸기 때문이다. 아직도 자기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완전히 하느님께 넘겨주지 못한 것이다. 바오로가 서간 첫머리에 항상 “그리스도의 종 나 바오로가 이 편지를 씁니다”라고 적었듯이 자신이 하느님의 종임임을 분명히 밝혔다.

성서에서 말하는 ‘종’이란 무슨 의미인가?

종이란 주인에게 예속되어 있는 몸이다. 따라서 자기 인생이 없는 사람이요, 자기 주장이나 자기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이다. 종은 주인에게 매여 있는 몸으로 오직 주인이 하라는 일만 하는 사람이다. 과거에 우리나라에도 머슴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머슴은 온종일 주인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우리는 성서에서 자신이 주님의 종임을 고백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우선 구약에서 아브라함은 자신이 ‘당신의 종’(시편 105,42;다니 3,35)이라고 했고, 모세도 ‘당신의 종’(민수 12,7)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다윗도 ‘주님의 종’(2사무 7,5)이라고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마리아도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라고 하였다. ‘믿음’과 ‘종’이라는 두 단어는 사도들의 특성이며 영성생활을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단어이다.

‘사도란 어떤 사람들인가?’라는 질문에 사도는 믿음의 사람이요, 하느님의 종이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사도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다. ‘믿음’은 복음을 전하는 이로서 제일 먼저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바탕이고 ‘종’이라는 신분은 믿음에 근거한 복음을 어떻게 전해야 하는가 하는 사도들의 자세에 대한 가르침이다. 이런 기본적인 자세로 성숙해질 때 바오로처럼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매여 있지 않는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나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과 다같이 복음의 축복을 나누려는 것입니다”(1고린 9,19.23)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유광수 수사(성바오로수도회)
  |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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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너희 가운데 누가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으면, 들에서 돌아오는 그 종에게 ‘어서 와 식탁에 앉아라.’ 하겠느냐? 오히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허리에 띠를 매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 먹고 마셔라.’ 하지 않겠느냐?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루카 17,5-­10)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루카복음 17장, 오늘 복음의 앞뒤에는 악한 표양을 보이지 않는 것, 형제적 상호교정, 용서, 믿음의 힘, 겸손하게 하느님을 섬김 등 제자들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것에 대한 말씀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주제는 믿음의 위력입니다. 그런데 의아한 점은, 사도들이 자신들한테 믿음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자 예수께서는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들한테 믿음이 전혀 없는 듯 말씀하신 것입니다. 정말 그들에게 믿음이 전혀 없었을까요?

복음서를 통해 볼 때,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군중의 반응은 다양합니다. “군중 가운데 어떤 이들은 ‘저분은 참으로 그 예언자시다.’ 하고, 어떤 이들은 ‘저분은 메시아시다.’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성경에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그리고 다윗이 살았던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렇게 군중 가운데에서 예수님 때문에 논란이 일어났다.”(요한 7,40-­43)

공관복음의 제자들 정보에 의하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두고 ‘세례자 요한이라고도 하고 엘리야라고도 하고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면서 예수님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요한복음은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12,44)고 하면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바로 죄라고 합니다. 또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6,29)이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의 경우를 두고 생각해 봅니다. 복음서에 가끔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요한 2,11)는 표현이 나옵니다.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빵이라는 말에 많은 제자들이 떠나갔으나, 베드로는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9) 하며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고 꾸중 들은 적도 많습니다. 군중도 제자들도 ‘도대체 이분이 누구신가?’ 하며 반신반의합니다. 사실 그들의 믿음은 어떤 표징을 보고 난 뒤에 믿는 수준이요, 예수님이 자신들의 기대에 상응할 때만 믿는 상대적이며 오락가락하는 믿음입니다. 티 섞인 믿음이 순수해지고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2코린 5,7) 하기까지 걸러내야 할 것이 많습니다. 완전한 나무로 성장해야 하는 믿음, 그래서 예수님은 겨자씨를 예로 드셨나 봅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티 없이 믿는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태 15,27) 하고 뒤로 물러서지 않은 가나안 여인, 예리코의 소경, 돌아와 감사를 드린 치유받은 나병환자,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기만 해도 나을 것이라고 믿은 하혈하는 부인, 중풍병자를 지붕을 뚫고 내려 보낸 친구들, 그저 한 말씀만 해도 낫게 하실 수 있다는 백인대장`…. 이런 사람들에게 주님은 “네 믿음이 크구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며 감탄하셨습니다. 믿음의 위력입니다. 열매 맺지 않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다음날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라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믿어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면서 마음속으로 의심하지 않고 자기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으면 그대로 될 것이다.”(마르 11,23)고 하셨습니다. 믿음의 모범이신 마리아는 동정녀로서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하였습니다.

믿는 이는 자신을 ‘주님의 종’이라고 합니다. 종은 자기 뜻대로 하지 않고 주인의 지시에 따라 일을 합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주인에 대한 충실함입니다. 우리는 피에타 조각상을 알고 있습니다. ‘피에타’의 의미는 ‘충실한 믿음’이라고 합니다. 마리아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여 낳았으나, 그 믿음은 십자가에서 처참히 죽은 아들의 시신을 부둥켜안기까지 계속된 충실한 믿음이었다는 말입니다. 비록 시메온의 예언대로 영혼이 예리한 칼날에 꿰뚫리는 아픔을 당하시지만 마리아는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라고 말한 여인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는 종들에게 비로소 하느님은 일하십니다. 손수 허리띠를 두르고 그들을 식탁에 앉히고 곁에서 시중을 들어주시며 당신 아들딸의 대열에 불러올리십니다. 예수께서도 더 이상 우리를 ‘종이라 부르지 않고 친구’(요한 15,15 참조)라고 부르십니다.

주님을 맥 빠지게 하는 일은 그분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아, 믿음이 없는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 곁에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주어야 한다는 말이냐?”(마르 9,19)라고 한탄하셨고, “이제 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마르 9,22)라는 말을 탓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믿지 않는 나자렛 고향에서는 아무 일도 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장자」 제10편(거협)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천하는 언제나 혼란스러운 것인데 그 죄는 지혜를 좋아한 데 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은 모두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추구하고 있는 줄 알면서도 그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추구할 줄 모른다. 모두가 자신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난할 줄 알아도, 그가 이미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난할 줄 모른다. 그래서 큰 혼란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위로는 해와 달의 밝음을 흐리게 하고, 아래로는 산천의 정기를 녹이며, 가운데로는 사계절의 운행을 파괴하여, 꿈틀거리는 벌레로부터 날아다니는 새에 이르기까지 그 본성을 잃지 않은 것이 없다. 심하도다! 지혜를 좋아함으로 해서 천하가 이토록 어지러워지다니. 삼대 이후로 이러했으니, 순박한 백성들을 버리고 교활한 자들을 좋아하며, 담백 무욕한 생활을 버리고 수다스러운 말을 좋아하는데, 그렇듯 번다한 말들로 인해 세상이 이렇듯 혼란스러워진 것이다.”

이런 얄팍한 지혜와 생각들이 우직하게 하느님을 신뢰하지 못하게 하고 근심 걱정을 초래하게 하지 않는지? 토끼와 경주한 거북이 이야기에서 승리한 자는 얄팍한 꾀를 부린 토끼가 아니라 처음부터 토끼와 시합한 것이 아닌(자기 자신과의 경주) 거북이의 우직함입니다. 신영복 교수는 ‘우직한 노인이 산을 옮긴다.’고 했지요.
‘주님, 저희의 믿음이 부족하다면 도와주십시오.’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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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는 쓸 모 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5-10)

<작아지고 작아지면 찾아오실 당신>

언젠가 형제들과 한 식당에 들렀을 때의 일입니다. 메뉴를 들고 온 여종업원이 얼마나 친절한지 깜짝 놀랄 지경이었습니다. 뻣뻣이 서서 주문을 받는 것이 아니라 손님 앞에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메뉴판을 건넵니다. 온몸에 친절이 철철 넘쳤습니다. 상냥한 미소를 지으면서 주문을 받았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상황 앞에 저는 너무나 황송해서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그 여종업원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우리 교회의 모습도 저렇게 바뀌어야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런 겸손한 모습이야말로 우리 교회가 살 길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자세가 아니라 낮은 자세로, 뻣뻣한 태도가 아니라 상냥한 태도로, 1대 다수가 아니라 1대 1로 접근하는 그런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훌륭한 의사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환자는 제 고객이기도 하지만 제 스승입니다.”

“병원은 환자가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혹은 숨질 때까지 책임져주는 곳이어야 합니다.”

“끊임없는 연구는 의사의 의무이지, 결코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이 세상 하나뿐인 생명을 맡겨주는 환자들과 하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입니다.”

참 겸손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계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겸손의 덕을 지니고 이 세상을 살아갈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말하여라.”

공동체 안에서, 봉사활동 안에서, 대인관계 안에서 참으로 중요한 자세가 겸손입니다. 봉사활동이나 사목활동을 수행해나가면서 빠지게 되는 가장 위험한 함정이 있습니다. 바로 박수갈채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구입니다. 실적주의입니다. 결과지상주의입니다. 박수갈채에, 칭찬에 맛들이기 시작하면서 자꾸만 진실함을 상실하게 됩니다. 자신을 과장하거나 거짓포장하게 됩니다. 점점 외적인 것, 크고 화려한 것, 때깔 나는 것만 찾게 됩니다. 작고 소박한 것의 아름다움은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어떤 자세로 봉사할 것인지 친절하게 정답까지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하고 말하여라.”

당신이 그리우면
촛불을 켭니다.
작아지고 작아지면
어느새 찾아오실 당신...
-하삼두-

<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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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루카 17,5-10)

믿음은 우리의 존재 이유이자 마르지 않을 우리의 영혼입니다. 믿음 없이는 참된 소통이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느님을 향한 집중이며 가장 살아있는 충만 된 소통입니다. 믿음은 하느님을 갈구하는 이만이 누리는 무한한 기쁨입니다.

믿음은 헛된 것을 잡으려 발버둥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을 위해 기다리고 깨어있는 종처럼 본질이 되시는 하느님만을 바라보고 하느님만을 섬기는 것입니다. 믿음의 본질은 믿음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조차 없는 우리를 먼저 성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기도를 통하여 믿음을 더하여 주시길 기도하는 일입니다. 믿음을 통해서만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아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과 기적은 하나의 것입니다.

생명의 순간순간이 믿음으로 더하여 지는 회개의 순간순간이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모든 것을 합하여 믿음의 열매를 맺는 은총의 시간 되십시오.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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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바른 세상살이

예수님은 하느님과 그분의 나라를 여러 비유를 들어 가르치셨습니다. 그 비유 말씀의 소재는 대부분 청중들이 일상에서 접하는 것이었습니다. 생업과 관계된 일, 삶 속에 있는 상식적인 것, 그리고 그들이 알고 있을 법한 정치 사회적인 사건들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씨 뿌리기, 양치기, 밀가루 반죽, 집안 청소, 아버지와 아들 사이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 관계, 물고기 잡기 그리고 잔칫집 분위기, 부자와 가난한 이들의 생활, 전쟁(루카 14,31-32)과 권력에 관한 이야기(루카 19,12.27) 등 청중들의 삶의 다양한 부분들을 비유 이야기의 소재로 삼으셨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고고학적, 인류학적인 증거들을 들면서 예수님은 그런 일들의 거의 전문적인 지식들을 지니고 계셨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씨앗이 자라는 과정과 물고기들의 생리 그리고 돌무화과나무가 얼마나 단단하고 그 뿌리가 얼마나 깊고 튼튼한지 알고 계셨다는 겁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머리가 좋으셨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세상살이에 대해 관심이 많으셨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사람들의 삶에 관심이 많으셨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일상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관찰자와 감시자로서가 아니라 그분도 우리처럼 그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세상살이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살이가 만만치 않다는 것과 단순하지 않다는 것도 아셨을 겁니다. 그 모습은 많이 다르겠지만, 예나 지금이나 세상 안에는 언제나 사건과 사고 그리고 집단 사이의 갈등이 있어왔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 우리나라도 그렇습니다. 북핵과 사드배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정부의 대처 방식, 커지는 소득의 불균형과 계층 갈등, 청년 실업률과 불안한 고용, 낮은 출산율, 개선되지 않는 정치인들의 모습, 상상도 되지 않는 거액의 뒷돈 거래, 지진의 공포 그리고 최근 백남기 임마누엘 형제의 죽음 등이 요즘 우리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과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것은 피부로 느낄 수 있을 만큼 자신에게 가까운 것이고 어떤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 하나도 자신의 삶과 전혀 무관한 것이 아닐 겁니다. 우리는 이런 곳 안에서 세상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우리와 함께 이 세상살이를 하신다고 믿습니다.

세례로 우리는 세상에 죽고 하느님의 자녀이며 예수 그리스도님의 제자인 그리스도인으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등지고 내세의 삶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게다가 세상에서 살 때와 성당에서 예배드릴 때의 마음이 서로 다른 사람들은 더욱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러셨듯이 세상일에 관심과 애정을 지닙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에 그러셨지만 우리는 그렇게까지 할 수는 없습니다. 그 대신 우선 자신의 생업과 가족 공동체 안에서, 그 다음 사회와 나라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원리는 아주 간단하지만, 구체적인 세상살이 안에서 그것을 적용하고 실현하는 것이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살이가 복잡해서도 그렇겠지만 너와 나의 옳음이 서로 다름이 큰 이유일 것 같습니다. 같은 사건에 대해 자신의 입장과 이해관계 그리고 단순한 기호에 따라 서로 다르게 주장합니다. 자신이 비록 죄인이기는 하지만, 언제나 선한 삶과 완전한 사랑을 바랍니다. 자신이 그렇다면 상대방도 그럴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한 곳을 바라보는 데, 왜 서로 반대편에서 상대를 비방하는 걸까요? 나는 옳고 그는 그른 것일까요? 그러기를 바라지만 그렇다고 확신할 수 없습니다. 선하시고 옳게 판단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 한 분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서로의 이 다름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겠습니까? 하느님의 뜻에 따라 바르게 사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이런 갈등과 다양한 생각을 지닌 사람들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너와 내가 다르다고 상대를 배척하고 적대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한 발자국도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종교의 자유가 아니라 생명입니다. 그것은 죽고 사는 차원뿐만 아니라 우리의 세상살이입니다. 그의 언행 그리고 사회분위기와 법규범이 세상살이를 어렵게 하고 희망을 잃어버리게 한다면, 우리는 그 반대편에 서서 ‘아니오.’라고 자신 있게 외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보수든 진보든, 그리스도인이든 다른 종교이든 생명과 세상살이를 위협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저항해야 합니다. 비록 그들의 마음을 바꾸고 제도와 법을 고칠 수 없어도 끝까지 외쳐야 합니다. 때로는 그런 외침들이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와서 기운 빠지고 심지어 우리가 서 있는 자리에 예수님이 안 계신 것 같은 의심이 들더라도 우리는 끝까지 외쳐야 합니다. 그 외침은 우리의 믿음의 표현이고, 하느님의 정의로운 심판에 대한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하바꾹 예언자가 세상의 불의를 고발하며 외치고 또 외쳐도 대답 없는 하느님께 실망하고 지쳐갈 때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환시를 기록하여라. 누구나 막힘없이 읽어 갈 수 있도록 판에다 분명하게 써라. 지금 이 환시는 정해진 때를 기다린다.

끝을 향해 치닫는 이 환시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늦어지는 듯하더라도 너는 기다려라. 그것은 오고야 만다, 지체하지 않는다. 보라, 뻔뻔스러운 자를. 그의 정신은 바르지 않다. 그러나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하바꾹 2,2-4).” 그 환시가 어떤 것이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은 분명 하느님의 승리와 불의하게 고통 받던 이들에게 주어지는 위로이고, 불의한 자들에 대한 심판일 겁니다.

그 날이 언제 올지 모르지만, 그 날은 반드시 옵니다. 우리는 믿습니다. 믿음이 부족하면 사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 라고 청해야 하겠습니다. 그 자리에 꿋꿋하게 서 있고, 상대방에게 적대감을 지니지 않은 채 ‘아니오.’라고 외치게 하는 힘은 내 안에 그리고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님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6).”

▮ 구속주회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 : 2016년 10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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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첫 주일입니다. 가을이 익어갑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도 여물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믿음”을 주제로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제1독서>는 패망의 길을 걷고 있는 유다 나라의 대한 예언자 하바쿡의 하소연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전해줍니다. 곧 정해진 때가 늦어지는 듯 하여도 오고야 말 것이니, 기다리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하바1,4)

여기서 ‘성실함’(아무나)으로 번역된 원어 뜻은 성실함, 확고함, 믿음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70인역> 성경에서는 ‘피스티스’라고 번역하였고, 신약에서 이 단어는 ‘믿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곧 ‘믿음’의 삶, 곧 믿음의 실천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하바꾹의 이 구절을 인용하여,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로마 1,17)라고 합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성령의 도움으로 하느님의 은사를 불태우며,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삶으로 살라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주어지는 믿음과 사랑으로, ~그대가 맡은 그 훌융한 것을 지키십시오.”(2티모 1,14)

오늘 <복음>은 믿음의 힘과 실행에 말씀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사도들이 예수님께 청합니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

우리는 여기에서, 사도들의 이러한 간청의 배경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이러한 간청은 그들이 갖고 있는 믿음관, 곧 믿음에 대한 편견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그들의 질문과 예수님의 두 가지 답변에서 알아들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그들은 마치 믿음을 크기나 양적인 것으로 알아듣고 있어서, 믿음을 더 크고 더 많은 것으로 더하여 달라고 간청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양이나 규모로 드러나는 것이라기보다, 지향의 순수성과 질적인 확실성으로 드러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아무리 작은 믿음이라 할지라도 그 믿음이 순수하고 확고하면 그 믿음의 권능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6)

이 말씀은 당신을 믿고 따라나선 제자들이건만, 당신을 믿고 따르며 파견까지 받은 사도들이건만,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들립니다.

또한 당신을 믿고 따라나선 우리에게도 똑같은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리고 우리 믿음의 실상을 들통 냅니다. 우리의 간청과 기도가 아무리 반복해도 이루어지지가 않는 것은 바로 우리의 믿음이 그토록 없다는 것을 드러내주니 말입니다. 또한 우리의 믿음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비춥니다.

사도들이 가지고 있었던 <또 하나>의 믿음관은 그들은 마치 믿음이 특별한 신비체험을 통해 주어지거나 그것을 통해서 누리는 자신들의 충족이나 안정으로 알아듣고 있어서, 자신들의 특별한 체험으로 자신들의 믿음을 강화하고자 간청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 어떤 신비로운 체험을 통해 커지거나 자신들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을 통해서 강화되고 성장해지고 굳세지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믿음은 감정적 열정이나 심리적 안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재난과 억압과 불의 앞에서도 하느님께 뜻을 따르는 실천적인 충실함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종의 비유를 들려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

이는 믿음이 주님의 뜻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실천을 통하여 강화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당신이 분부하신 대로 살면 믿음이 더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종은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일을 하며 주인의 권능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의 종으로서 “분부 받은 대로 살면”, 곧 말씀을 충실히 실행하면 믿음이 더해질 것입니다. 아멘.

▮ 파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 2016년 10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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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우리 함께 '믿음의 전사戰士'로 살아갑시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보려해도 엄연한,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이웃이 불편한데 나 혼자 편할 수는 없습니다. 외로운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어려운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아픈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이런 세태를 반영하는 자연인 듯 요즘은 꽃도 벌도 나비도 매미도 보기 힘듭니다. 매년 가을이면 영롱하게 노래하든 풀벌레 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는 적막한 가을밤입니다.

‘이게 나라냐?’라는 부정적 말이 회자되는데, 저절로 ‘이게 가정이냐?’ ‘이게 사회냐?’ ‘이게 학교냐?’라는 말이 줄줄이 나옵니다. 1인 가족이 너무 많고 더욱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이 또한 외롭고, 어렵고, 아픈 세상의 반영입니다. 생미사를 신청하는 분들의 간절한 소망이 담긴 말은 ‘영육靈肉의 건강’입니다.

영혼과 육신은, 마음과 몸은 하나입니다. 영혼이 건강해야 육신이 건강합니다. 마음이 건강해야 몸도 건강합니다. 이것이 우선 순위입니다. 정작 두렵고 무서운 것은 영혼의 병, 마음의 병입니다. 영혼이, 마음이 병든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토록 무지와 죄악이 만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어제 일간신문에서 읽은 ‘살아내야 한다는 결기’라는 칼럼의 마지막 결론같은 글귀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요즘은 바람 정도가 아니라 아예 광풍狂風이 분다. 그 어느 때보다 내 아이가 위험하며 내 여자가 위험하다. 더욱더 굳건하게 살아내야 할 때이다.’

광풍狂風을 찾아 봤습니다. 미칠 광狂, 바람 풍風, 미친 듯이 사납게 부는 바람이었습니다. 이런 세상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광풍光風, 빛광 바람풍 따뜻한 봄날에 부는 산들 바람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굳건하게 살아내야 할 때입니다.

얼마전 단체피정 답사차 방문했던 형제님의 모습도 생각납니다. 노동으로 야윈 까만 얼굴에 참으로 초라한 모습이었습니다. 얼굴은 웃는데 우는 모습이었습니다. 웃음과 울음이 겹친 묘한 모습이 참 아프게 느껴졌습니다.

“우리 레지오 단원들이 살기가 너무 힘듭니다. 다음 피정 오면 힘이되는 좋은 말씀 좀 해주십시오.”

진정성 가득 담긴 부탁이었습니다. 흩어지면 죽고 뭉치면 삽니다. 끊어지면 죽고 이어지면 삽니다.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각자도생各自圖生이 살 길 같지만 다 죽는 길이며 함께 할 때 다 삽니다. 살기위하여 더불어의 신앙공동체를 찾고 만들고 살아야 합니다. 생각나는 세 성경 구절입니다.

“너희는 멈추고 하느님 나를 알라.”는 시편 말씀이 그 하나이고, 역시 시편 중 ‘오히려 저는 제 영혼을 다독이고 달랬나이다.’구절이 그 하나이고, 오늘 복음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는 제자들의 주님 향한 절박한 청원입니다.

외롭고 어렵고 아픈 현실일수록 ‘살기위하여’ 멈추고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아야 합니다. 내 영혼도 육신도 다독이고 달래야 합니다. 주님께 믿음을 더하여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영혼의 병, 마음의 병에 믿음보다 더 좋은 영약靈藥은 없습니다. 하여 오늘 강론은 ‘우리 함께 믿음의 전사戰士'로 살아갑시다’로 정했고 구체적 실천 사항을 나누려 합니다.

첫째, 주님께 기도하는 믿음입니다.

기도와 믿음은 함께 갑니다. ‘살기위하여’ 기도입니다. 하느님과 생명의 소통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간절하고 항구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영혼의 건강입니다. 기도하지 않아 허영과 교만에 빠진 영혼의 골다공증 환자들입니다.

하느님과 소통의 기도가 있어야 기쁨과 평화, 희망도 선물로 받습니다. 하느님은 기쁨과 평화, 희망의 궁극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성서의 믿음의 사람들이 한결같이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제1독서 하박꾹의 기도가 참으로 간절하고 절실합니다.

“주님, 당신께서 듣지 않으시는데, 제가 언제까지 살려 달라고 부르짖어야 합니까? 어찌하여 제가 불의를 보게 하십니까? 어찌하야 재난을 바라보아야 합니까?”

이런 탄원의 기도든 청원의 기도든 찬미와 감사의 기도든 좌우간 기도는 끊어지면 안 됩니다. 기도가 끊어지면 영혼은 서서히 병들어 죽어갑니다. 오늘 복음의 사도들도 주님께 믿음을 더하여 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주님은 신실하십니다. 언제 어디서나 살아 함께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어떤 형태로든 응답하시는 주님이십니다. 하바꾹에 응답하셨고, 사도들에 응답하신 주님이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입니다.”

바로 이런 믿음의 힘은 기도의 힘입니다. 탓 할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내 부족한 믿음입니다. 그러니 믿음이 더하여 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기도에 저절로 따라야 하는 기다림입니다. 기다리는 인내의 믿음입니다. 세상에 기다리지 않고 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습니다. 때가 될 때까지 항구히 인내하며 기다리는 믿음입니다. 하바쿡의 기도에 대한 주님의 응답입니다.

“너는 환시를 기록하여라. 지금 이 환시는 정해진 때를 기다린다. 끝을 향해 치닫는 이 환시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늦어지는 듯 하더라도 너는 기다려라. 그것은 오고야 만다. 지체하지 않는다.”

언젠가 때는 옵니다. 막연히 기다리는 게 아니라 환시 대신 내 영적 깨달음들을 기록하며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영적 깨달음을 기록하는 습관과 더불어 생각도, 믿음도 깊어집니다. 꼭 한가지 더해야 할 것은 독서입니다. 쓰기와 더불어 읽기가 기다림에 제일입니다.

성경은 물론이고 좋은 글의 독서도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어제 읽은 일본 최고의 지성이라 불리는 사사키 아타루의 도전적인,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이 라는 책이름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일하지 않고, 책읽지 않고 기도만하는 그 손을 잘라 버리라는 것입니다. ‘부당한 세상을 바꿔달라는 기도대신 읽고 또 읽어라, 그것이 혁명이다.’ 바로 책의 요지입니다.

항구한 독서를 통한 내외적 변화의 혁명이요, 기다림중에 더욱 성숙되는 내면입니다. 오늘 하바쿡의 결론 같은 말씀입니다.

“보라, 뻔뻔스러운 자를, 그의 정신은 바르지 않다. 그러나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

기도하지 않으면, 쓰고 읽으며 생각하며 기다리지 않으면 정신은 바르지 않고 뻔뻔스러워지기 십중팔구입니다. 의인은 성실함으로 삽니다. 항구한 기도와 기다림의 인내가 성실한 의인으로 만들어 줍니다.

셋째, 주님을 따르는 믿음입니다.

기도만으로는, 기다림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버리고, 비우고 떠나기가 아니라 주님을 따르기입니다. 주님을 따를 때 삶은 단순해 지고 진실해 집니다. 방황하지 않고 시간과 정력의 낭비도 최소화합니다. 주님을 잊고, 잃고 방황하기에 죄악의 유혹에 빠집니다. 제2독서 바오로의 권고가 참으로 적절합니다.

“그대가 받은 은사를 불태우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주님을 항구히 충실히 따를 때 주님의 은총으로 우리가 받은 은사를 불태울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힘과 사랑과 절제의 성령을 주십니다. 바로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이 항구히 충실히 주님을 따르게 합니다. 우리 안에 머무르시는 성령의 도움으로 우리가 맡은 훌륭한 것들을 지킬 수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데 성령의 도움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넷째, 주님을 섬기는 믿음입니다.

비상한 믿음이 아닙니다. 비상한 믿음의 은총을 청하지 말아야 합니다. 평범함이 위대함입니다. 평범한 일상을 충실히 살아내는 것이 건강한 믿음입니다. 믿음은 섬김으로 표현됩니다.

섬김의 사랑, 섬김의 직무, 섬김의 권위입니다. 섬김안에 함축된 겸손과 순종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잘 섬기는 사람이 형제들도 잘 섬깁니다. 섬기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이고 순종의 사람입니다. 믿음을 더하여 달라는 사도들에게 주님이 들려주신 ‘주인과 종의 비유’가 참으로 심오합니다.

비상한 믿음의 은총을 청하지 말고 네 현재의 직분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답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가까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 내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종으로서 묵묵히 그 섬김의 직무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이런 삶 자체가 보상이요 보람이기에 칭찬도 바라지 않습니다.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아 이것이 진정 순수한 믿음이요 겸손입니다. 지극히 평범하나 지극히 비상한 경지의 믿음입니다. 영성의 절정입니다. 바로 위의 주님 말씀을 평생 좌우명으로 삼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랑할 것도 인정을 받으려 할 것도 없습니다. 이런 삶 자체가 보상이요 보람이기에 주위의 칭찬에도 비난에도 요지부동입니다.

주님은 연중 27주일 우리 모두에게 험난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음만이 어둠을 밝히는 빛이요, 죽음을 살리는 생명이요 유혹과 악을 이기는 힘입니다. 원래 오늘은 수호천사 기념일입니다. 우리 각자의 수호천사가 우리를 도와줍니다.

1.주님께 기도하는 믿음입니다.
2.주님을 기다리는 믿음입니다.
3.주님을 따르는 믿음입니다.
4.주님을 섬기는 믿음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살아야 영적성장에 존엄한 인간 품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 삶의 목표, 방향, 중심, 의미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런 믿음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당신을 바라는 이게게, 당신을 찾는 영혼에게 주님은 좋으신 분.”(애가3,25). 아멘.

▮ 분도회 이수철 신부 : 2016년 10월 2일
  |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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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순종의 당위성

기차가 기차 길을 따라 달리는 것은 가야할 길을 간 것뿐입니다. 자기 자랑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잘 준비된 도로 위를 차가 자유롭게 달릴 수 있는 것을 도로를 놓아준 이에게 감사해야합니다. 계절에 따라 자연을 누리는 것은 한 치도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우주의 주인이신 조물주의 섭리입니다.

태양이 하늘에 있고 구름이 있어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 이리저리 생명을 자라게 하는 것은 세상의 권력이나 재력이나 명예로 이루지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어제 치과에서 2시간 반을 치과 의자에 앉아 의사의 지시를 따라 이빨 치료를 받으면서 의사와 간호사에게 순종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입을 벌리라면 벌리고 입 몸에 마취 주사를 놓으면 놓게 참고 인내해야하고 이빨을 뽑으면 뽑는 대로 순종하여야 했습니다. 병든 이빨을 치료하고 음식을 잘 먹으려면 의사의 지시에 순종해야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 종이 주인에게 순종해야 함은 종과 주인의 관계에서 인격이 손상되는 말을 듣는 것같이 생각됩니다. “ 저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가끔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종교는 너무나 순종을 강조하여 “악한 사람들의 행위에 동조하는 것 힘 있는 사람에게 맹종하는 것은 헛된 것이다” 지도자나 장상에 말에 순종만이 미덕이 아니다. 힘 있는 사람의 불의에 저항 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주님도 그 당시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의 율법이나 계율을 문자 그대로 지키라고 하시지 않고 “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지 않고 사람을 위해있다.” 는 말씀으로 모든 율법 위에 사람의 존엄성을 강조하시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경우는 힘 있는 사람에게 순종해야합니다. 조건은 진실과 사랑의 질서 안에서입니다. 무질서 한 힘에게 순종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죄를 지은 사람 무릅을 끓고 죄를 용서 받기위해 순종해야 합니다. 무능한 사람 능력 있는 사람에게 능력을 힘을 얻으려면 순종해야 합니다. 저는 아직 컴퓨터를 제대로 작동 법을 모르고 스마트 폰도 한정된 범위 내에서 알고 있어 아는 사람이 누구에게든지 물어 그대로 따라 해야 합니다.

지식이 부족한 사람이 배우려면 선생님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제자는 스승보다 더 나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시하는 대로 해야 합니다. 기억의 한계가 있어 우리는 기억이 기록된 내용을 따라 다시 답습하여 그대로 따라야합니다. 그래서 순종의 당위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늘 보다 높은 것은 없습니다. 아무리 산이 높다고 해도 하늘 아래 있고 기차가 힘이 있어 달린다 해도 기차 길 위에 달리고 사람이 아무리 빨리 달린다 해도 세월의 흐름을 따라잡을 수 없으며 사람이 아무리 머리가 비상해서 지식이 있다 해도 우주의 신비를 전부 알아 낼 수 없으며 인간이 자비가 넘쳐흐른다 해도 하느님의 자비를 따를 수 없으며 사람이 아무리 거룩하다 해도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따를 수 없습니다.

주여, 우리를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여 죄에서, 무지에서, 무능에서 벗어나 구원을 받도록 기도합니다. 거룩하신 하느님!

▮ 분도회 이석진 신부 : 2016년 10월 2일
  |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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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믿음은 볼 수 없는 것에 대한 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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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택배로 고구마 한 상자를 받았습니다. 주소를 보니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송정리 땅 끝 아름다운 교회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지도상으로는 우리나라 땅 끝에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그 곳에 사시는 크리스티나 자매님이 보내 준 것입니다. 그 고구마 상자에는 가슴 저린 사연이 있습니다.

작년 늦가을에 엘리사벳 자매님으로부터 급한 전화가 왔습니다. 형부가 폐암으로 위독하니 정신이 맑을 때 세례성사를 받았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형부가 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그 자매님이 평소에 준비를 해 두었답니다. 서둘러서 병원에 도착해서 보니 엘리사벳 자매님의 형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천주교 신자가 되겠다고 자신의 의지를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교리를 간략하게 가르치고 믿음을 확인한 다음에 세례명을 요셉으로 하고 세례성사를 거행했습니다. 그리고 난 뒤 병세가 더욱 더 악화된 요셉 형제에게 병자성사를 주었습니다. 그 때 가족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시라고 했더니 “한평생 나와 함께 살아 준 아내에게 정말 고맙고 미안하다”는 말을 하시면서 하염없이 우셨습니다. 그 말씀에 아내와 자식들도 모두 울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요셉 형제님은 평화롭게 주님 품으로 떠났다고 합니다. 그 후로 요셉 형제의 믿음을 옆에서 지켜보던 아내와 아들이 세례를 받고 성당에 열심히 다닌다는 소식을 엘리사벳 자매님에게서 들었습니다. 고구마 상자는 온 가족이 천주교 신자가 된 것에 대한 기쁨과 감사의 표시로 요셉 형제의 맏딸인 크리스티나 자매님이 보낸 것입니다.

오늘 복음(루카 17,5-10)에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더해 달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 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에게는 네 가지 눈이 있다고 합니다. 사물을 보는 육안, 지혜를 터득하여 가지는 지안, 마음으로 보는 심안, 그리고 하느님을 믿고 영원한 세상을 보는 영안이 바로 그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천주교 신자에게 가장 필요한 눈은 믿음으로 세상을 보는 ‘영적인 눈’입니다. 이 영적인 눈은 우리가 지닌 믿음의 양에 따라, 믿음의 질에 따라 하느님 나라에 대한 기대와 확신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렇기에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고, 이 믿음에 대한 보상은 우리가 믿은 것을 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진실한 마음과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께 나아가면(히브 10,22)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써, 우리는 이 세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마련되었음을, 따라서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음을 깨달을 때 우리의 믿음이 진정한 믿음이 되었음을 알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히브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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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정원순 토마스 데 아퀴노 수사 신부
  |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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