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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신앙
조회수 | 2,299
작성일 | 07.10.04
순교자들은 죽음의 순간을 참 생명의 시작으로,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는 영광으로 생각했다. 죽음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불가능이 없다. 최소한의 의무만을 하면서도 크게 생색을 내는 것은 참 신앙이 없다는 증거이다.

1. 뽕나무나 산을 옮기는 믿음

오늘 예수님은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며 청하는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째 뽑혀서 바다에 그대로 심어져라.’ 하더라도 그대로 될 것이다.” 하신다. 다른 복음의 병행구절에는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져라.’ 해도 그대로 될 것이다.”(마태 17,20)라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을 실제로 보여준 이야기가 있다. 1874년 미국의 노스캐롤라이나 주(州) 스완쿼트라는 마을에 성당을 짓게 되었다. 그런데 신자들은 그토록 원하던 자리가 아니라 근처 다른 자리에 성당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땅 주인이 땅을 팔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자들은 원하는 자리에 성당을 세우지 못하여 못내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성당을 짓고 봉헌식을 가진 지 2년이 지난 1876년 9월 17일 엄청난 폭우와 폭풍이 그 지방에 몰아쳤다. 그래서 성당도 폭풍우에 떠밀려 90여 미터나 옮겨졌는데, 그 자리는 정확하게 신자들이 그토록 원하던 곳이었다. 이렇게 하느님의 손으로 성당이 옮겨지게 되자 사람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땅 주인도 마음을 돌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 성당 이름도 ‘하느님의 교회’라고 바꾸게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2.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믿음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는 107년 로마의 트라야누스 황제 때에 콜로세움(원형극장)에서 사자의 먹이가 되어 순교하였다. 성인은 스미르나의 주교 성 ‘폴리카르포’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가 여러분에게 청하는 것은 단 한 가지 하느님께 바치는 내 피의 봉헌을 허락해 달라는 것입니다. 나는 주님의 밀로서 그리스도의 순수한 빵이 되고 싶습니다. 짐승의 이빨로 고운 가루로 갈아지기를 바랍니다.” 하며 순교의 열망을 피력하였다.

순교자들은 죽음의 순간을 새 생명의 시작으로,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는 영광의 순간으로 여겼다. 수많은 신자들을 사자 우리에 처넣은 네로 황제는, 달려드는 사자들도 두려워하지 않고 성가를 부르며 태연히 죽음을 맞는 신자들을 보고는 기겁을 하였다고 한다. 죽음을 영광으로 여기며, 죽기를 각오한 사람들에게 무엇이 두려울 것인가?

이렇게 신앙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교회사 안에서 보게 되는 수많은 기적적인 사건과 상상을 초월하는 신앙의 승리는 이를 잘 증명해 주고 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이런 신앙의 힘을 강조하시는 것이다.

3. 무신앙적인 적반하장(賊反荷杖)

오늘 복음은 언뜻 보기에 신앙과 별 관계가 없어 보이는 종과 주인의 관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종은 주인의 명령대로 다 실행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신의 의무를 다 한 것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신자로서의 본분을 다하고 나서 “저희는 보잘것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하고 말하라고 하신다.

우리 주변에는 가정을 알뜰히 돌보면서도 평일미사 참여는 물론이고, 레지오 마리애나 신심단체 활동으로 환자를 방문하고, 선교나 본당행사에 노력봉사를 하면서 피정에도 열심히 참여하는 신자들이 많다. 그리고 각종 후원회에 가입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다. 그러면서도 늘 주님께 받은 은혜에 제대로 보답하지 못한다고 신앙 안에서 겸손해하는 이들을 본다.

그런가 하면 평소에는 냉담을 하고 있다가 부활이나 성탄 때 판공성사만 겨우 보고, 또다시 냉담을 하면서도 ‘그래도 판공성사 봐주는 것을 고맙게 생각하라.’는 식으로 적반하장(賊反荷杖)격인 ‘대축일 신자’도 적지 않다. 그리고 어쩌다가 작은 봉사라도 하면 동네방네 떠벌리며 자기자랑을 하는 이들도 있다. 신앙적인 자세가 전혀 없어, 모든 것을 이해타산적으로 보는 세속적인 가치관에 찌든 이들에게는 봉사활동은 ‘노동력 착취’요, 감사헌금은 ‘금품 사기’ 정도로 보일 것이다.

신앙이 없는 이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이기에, 그들의 시야는 이 현실 안에 갇혀있게 마련이다. 그들은 “하느님, 당신은 제 삶에 끼어들지 마십시오. 제가 다 알아서 합니다.” 하는 자세로 하느님을 실생활 안에 받아들이지 않는다. 늘 자신의 얄팍한 계산 안에서 살아갈 뿐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죽는 날까지 결코 불가능을 가능하게 해주는 신앙의 세계를 경험할 수 없을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믿는 만큼 당신의 권능을 보여주신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신앙도 하느님께 오는 선물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우리도 이 미사 중에 오늘 복음의 제자들처럼 “주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며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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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유영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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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종이 해야 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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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연중 제27 주일입니다. 벌써 9월도 다 지나가고 10월에 접어들었습니다. 온 누리가 풍요로운 결실을 거두는 이 시기에 우리의 신앙 생활도 결실을 거두는 시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로부터 대단히 중요한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종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종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 종이 하루 종일 들에서, 농장에서 힘들게 일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종에게 수고했다는 말도 하지 않았고 또 저녁을 먹으라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루 종일 일에 지친 종에게 저녁밥을 짓도록 했고, 주인이 저녁밥을 먹는 동안 시중을 들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밖에서 열심히 일하고 또 집에서도 주인의 시중을 들었다고 해서 그 종이 칭찬받을 이유가 있겠는가? 그렇게 힘들게 일하고 난 후에도 ‘저는 보잘것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종의 태도가 아니겠느냐?” 바로 이것이 예수의 가르침입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한마디로 “우리 인간이란 누구인가? 특별히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누구이며, 삶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한마디로 우리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어째서 우리가 하느님의 종입니까? 사도 바오로는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7장 2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노예라도 부르심을 받고 주님을 믿는 사람은 주님의 자유인이 되고, 자유인이라도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값을 치르시고 여러분을 사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인간의 노예가 되지 마십시오.” 본래 우리 인간은 악의 세력과 죄와 죽음의 노예였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대가를 치르시고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를 당신의 종으로 삼으시려고 하느님께서 치르신 대가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통하여 죄와 죽음과 악마의 세력에서 해방된 우리는 하느님의 종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 6장 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진실한 가르침을 전해 받고 그것에 성심껏 복종하게 되었으니, 하느님께 감사할 일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죄의 권세를 벗어나서 이제는 정의의 종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온몸을 더러운 일과 불법의 종으로 내맡기어 불법을 일삼았지만, 이제는 온몸을 정의의 종으로 바쳐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제는 여러분이 죄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종은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종의 신분이라는 것은 주인의 명령에 복종함으로써 자신의 도리를 다하는 사람입니다. 종은 자신의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인의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말하자면 종이 된다는 것은 주인의 권한에 참여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종이 하는 일은 종의 일이 아니라 주인의 일입니다. 주인은 종을 통해서 자신의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은 열심히 그리고 성실히 주인의 일을 하고도 그 어떤 보상이나 대가 혹은 칭찬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종으로서 불림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 주신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우리를 죄와 죽음과 악마의 세력에서부터 해방시키시려고 당신의 목숨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예수를 주님이라, 그리스도라 부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종, 주님의 종이 되어서 그분의 권능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생명과 권능에 참여하여 당신의 일을 하도록 죄와 죽음의 세력에서 해방시키시어 당신의 종으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세례를 받아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예수를 주님이라 부르는 당신의 종인 우리에게 하느님은 믿음의 힘을 주십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째 뽑혀서 바다에 그대로 심어져라.' 하더라도 그대로 될 것이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 여러분은 겨자씨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겨자씨는 정말 작은 씨앗입니다. 새까맣고 작은 씨앗인데 마치 채송화 씨앗처럼 생겼습니다. 이렇게 작은 씨앗 같은 믿음이라도 뽕나무를 뽑아서 바다에 심겨지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정도는 사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믿음의 힘은 그보다도 훨씬 더 큰 일, 아니 우리 인간들이 상상할 수 없는 일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을 근원적으로 바꾸어 놓을 수도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 17장 20절에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져라.' 해도 그대로 될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산을 옮길 수 있을 만큼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 그러면 그 힘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입니까? 겨자씨 한 알 같은 믿음을 지닌 그 사람에게서 나옵니까? 결코 그렇지 알습니다. 그 힘은 하느님의 능력과 권능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하느님의 힘과 권능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는 행위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믿음이란 자신을 온전히 비워서 하느님으로 충만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갖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은 자신의 힘과 능력을 믿거나 혹은 재물과 돈의 힘을 믿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힘과 능력을 믿는 사람, 돈과 재물과 권력의 힘을 믿는 사람은 하느님을 믿지 않아도 됩니다.

아니 이런 사람은 하느님을 믿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돈과 재물과 세상 권세의 종이지 하느님의 종은 아닙니다. 이런 사람 안에 하느님의 힘과 권능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돈과 재물과 권력의 총이 되어 돈과 재물과 권력의 힘을 믿는 사람은 하느님의 권능에 의지하지 않고 돈의 힘으로, 권력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권능은 그런 사람들 가운데서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로 죄와 죽음의 세력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종이 된 사람은 돈과 재물과 권세를 믿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마치 어린 아이가 어머니를 믿듯이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 권능과 능력의 팔에 내어 맡깁니다. 우리 인간은 참으로 약하고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무한히 강합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으로 산을 옮길 만큼 강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하느님의 그 무한하신 능력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예수를 주님으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는 무한히 강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강함은 나약한 우리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권능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으로 불러 주신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종의 직분이 무엇입니까? 종의 직분은 첫째로 주인의 말씀과 명령에 복종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는 무엇을 명령하셨습니까? 서로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용서하라 하셨습니다. 종으로서 주인의 명령과 말씀에 순종함은 너무나 당연한 처사입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여야 합니다. 서로 용서하여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용서하는 것은 다 함께 사는 길이며 더불어 사는 방법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구원이 있고, 천국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서로 나누고, 서로 베풀라 하셨습니다. 서로 나누고 서로 베풀면 다 함께 풍요롭게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명령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분의 종의 신분이라는 사실만 깨닫는다면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는 쉬운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이 세상의 노예, 돈의 노예, 재물과 향락의 노예가 되어서 살려고 하기 때문에, 주인이신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자신을 망각하는 처사이지요. 이 세상은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합니다. “약게 살라. 남을 짓밟아라. 자기의 탐욕을 충족시켜라.”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의 명령을 따르게 되면 여기 미움과 증오가 시작되고, 싸움과 분열이 시작됩니다. 그러면 죄를 짓게 되고 죽음이 옵니다. 지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노예가 되어서 그 명령에 따르게 될 때에 거기 지옥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느님의 종이 되어서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나누고, 베푸는 생활을 했다고 해서 자신을 자랑하거나 그 대가를 바랄 이유는 없습니다. 그렇게 성실히 살고도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할 것입니다. “저희는 보잘것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그 다음으로 종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인을 위해서 헌신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주인이신 하느님을 위해서 헌신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신앙인으로서 성실하게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부는 신부답게, 수도자는 수도자답게, 평신도인 여러분은 평신도답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 곧 하느님께 헌신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가장은 가장답게, 주부는 주부답게, 자식은 자식된 도리를 다하면서 부모님에게 효도하는 것, 그리고 성당에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여러 가지 책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것이 곧 하느님께 헌신하는 것입니다. 레지오 단원은 레지오 단원답게, 평협 임원들은 평협 임원답게 자신에게 맡겨진 책무를 다하는 것이 하느님께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저희는 보잘 것 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하느님 앞에 자신을 내세우거나 아무 것도 자랑할 건더기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죄와 죽음의 노예살이에서 신음하는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구원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권능을 드러내시도록 성실한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도록 합시다.

“저희는 보잘것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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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강영구 신부
  |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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