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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조회수 | 2,356
작성일 | 07.10.04
사도들이 예수님께 바라는 것을 아뢰는 이 한 줄의 말로 시작된 오늘 복음은 우리가 믿음이라 부르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게 합니다. 처음 예수님께 드리는 사도들의 이 청은 우리 귀에 겸손하고 당연한 제자로서의 도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그런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답을 내놓으십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째 뽑혀서 바다에 그대로 심어져라’하더라도 그대로 될 것이다.” 예수님은 마치 당신이 뽑으신 사도들에게 믿음이 전혀 없는 것처럼 이야기하십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란 표현은 믿음을 더 하여 달라는 사도들의 바람을 한꺼번에 무너뜨리는 대답이십니다. 예수님은 왜 당신이 뽑으신 사도들에게 이런 무서운 말씀을 하셨을까요?

사도들의 뜻을 온전히 헤아릴 수 없지만 복음 속에 예수님의 대답이 능력에 대한 이야기인 것으로 봐선 사도들이 생각한 믿음이란 ‘어찌하면 위대한 하느님의 은총을 받게 되는가’ 이거나 ‘어찌해야 예수님의 그 능력을 얻을 수 있을까’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 속에서 고생하는 종의 태도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하면 사도들의 바램 속에는 ‘이제 이 만큼 당신을 따라다녔으니 뭐 하나 좀 주십시오’라는 속 뜻까지 숨어 있지 않았나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 생각에 예수님은 단호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믿음을 더’ 달라는 사도들의 말에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란 답을 내 놓으십니다. 사도들이 바란 것은 뽕나무가 뿌리 채 바다에 던져져 심겨지는 놀라운 일을 하는 것이었지만, 예수님은 그것이 왜 필요한가를 헤아리고, 필요하다면, 그것이 불가능한 것이라도 이루어진다는 확신을 가지는 것이 믿음이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러나 그분 곁에 머무르던 사도들이 그러했듯 우리도 사랑보다는 눈에 보이는 것에 의존해 살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확신 보다는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일의 결과들로만 우리의 믿음을 판단하고, 하느님의 사랑마저 판단하는 잘못을 일으킵니다. 중요한 것은 무조건적인 강한 믿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이해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분의 사랑을 이해하고 믿는 것이 참 믿음이요, 가장 큰 기적의 출발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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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정호 빈첸시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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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치셨습니다

복음서들은 유대인 문화권에서 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의 과장된 표현들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제자들은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예수님에게 청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째 뽑혀서 바다에 그대로 심어져라 하더라도 그대로 될 것이다.” 마르코복음서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께 믿음을 가지시오. 진실히 여러분에게 이르거니와,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던져져라 하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11,23). 우리 한국어에도 고유의 과장법이 있습니다. “좋아 죽겠다”, “바빠 죽겠다”, “백발 삼 천척” 같은 말입니다. 우리가 의식하지 않고 사용하는 우리 고유의 과장법입니다. 외국어로 옮기면 말이 안 되는 표현들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의 역사에 뽕나무를 바다에 심은 사람도 없고, 산을 바다에 던진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도 그런 일은 하지 못하셨습니다. 뽕나무를 바다에 옮겨 심는다는 오늘 복음의 표현이나, 산을 바다에 던진다는 마르코복음서의 표현은 그 시대 유대인들에게는 전달하는 뜻이 있었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놀라운 일이라는 뜻입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청한 것은 믿음을 더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믿음은 어떤 신통력 같은 것입니다. 기적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인간이면 모두가 가지고 싶은 초능력입니다. 마태오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후 마귀가 그분을 유혹했다고 말합니다. 유혹의 내용은 기적하는 초능력을 사람들에게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거절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주신 것은 기적의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이었습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 대한 깨들음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런 기적을 행하는 능력이나 탐하는 사람은 합께 계시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삶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이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면서 살면,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믿음의 놀라움은 바로 이 하느님 나라의 진실을 깨달은 사람이 자기 위주로 살던 삶을 하느님 위주로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은 모두 자기 위주로 삽니다. 자기의 미래를 위해서 대책을 세웁니다. 사람이 재물이나 지위를 탐하는 것도 자기 힘으로 자기 미래를 보장하는 데에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주시는 믿음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며 사는 삶입니다. 그것은 뽕나무를 바다에 심는 것, 혹은 산을 바다에 던지는 것과 같이 놀라운 일이라는 말입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하느님의 일을 소중히 생각하고 스스로 실천합니다. 부모를 모시고 있는 자녀와 자녀를 키우는 부모는 자기 위주로 살지 않습니다. 자녀가 부모 앞에 자기 위주로 살면 불효자식 혹은 패륜아가 될 것이고, 자녀를 키우는 부모가 자기 위주로 살면 자녀들은 문제아가 됩니다. 부모를 사랑한다, 혹은 자녀를 사랑한다는 말이 모두 자기 자신을 위주로 살지 않는 사람의 자세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것은 오늘 복음의 제자들이 요구하듯이 더해 질 수 있는 초능력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녀 되어 그분의 일을 실천하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례 후 받으신 유혹의 이야기에서 마귀가 권한 것은 빵과 기적하는 능력과 부귀영화를 사람들에게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그런 것을 가지면 큰소리치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의 일은 아닙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으로부터 그런 것을 기적적으로 얻어내는 길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신앙이면 이 세상의 가난한 사람, 건강에 피해를 입은 사람, 실패한 사람은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당시 유대교의 생각입니다. 유대교는 가난한 이와 병든 이 그리고 모든 불행한 이는 하느님이 버린 죄인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가르침에 반발하셔서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1)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신앙은 하느님이 불쌍히 여기고, 측은히 여기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고 그분의 일을 실천하는 데에 있습니다. 신앙인은 불쌍히 여기고 측은히 여기는 시선으로 자기 주변을 봅니다. 하느님이 용서하시는 분이라 자기도 용서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자기 한 사람만 생각하고 잘 되기 위해 노력하던 사람이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고 행동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믿음의 놀라움은 이런 변화를 의미합니다. 초인적인 능력을 탐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자기 삶의 현실 안에 살아 계시게 하는 놀라운 입입니다. 우리가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이 우리 안에 계셔서 이루시는 놀라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잠시 이 세상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기준으로 세상을 보고 우리 자신이 잘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자기 처지를 모르는 망상이고 자기집착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그런 망상과 집착을 깨고 나와서 하느님을 발견하게 합니다. 그것은 뽕나무를 바다에 심듯이 인간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세례로써 새롭게 태어난다고 말합니다. 자기중심의 삶을 버리고 하느님 중심으로 살겠다는 약속입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더 있습니다. 종이 주인에게 봉사하듯이 봉사를 한 후에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저희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습니다”고 말하고 물러나라는 말씀입니다. 유대교를 비롯한 인류역사의 모든 종교와 사상은 인과응보(因果應報)를 말합니다. 무엇이든 잘 했으면 상응하는 보상을 당연히 받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다가 죽어 가셨습니다. 쓸모없는 종과 같이 죽어 가셨습니다. 그것은 인과응보가 아니었습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 안에서 신앙인은 자신의 의미를 찾습니다. 우리 자신을 내세우는 망상과 집착에서 보람을 찾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한 일이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일이었으면, 우리 자신은 쓸모없는 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자각할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에 집착하여 표류하던 생명이 하느님의 바다 안에 심어져서 뿌리를 내리는 놀라운 일입니다.

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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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명령만 따르는 종에게도 믿음이 있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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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나간 3번의 주일동안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은 비유’, ‘약은 청지기의 비유’,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복음으로 들었다.(루가 15-16장) 오늘 연중 제27주일에 듣게 되는 복음은 두 가지의 내용을 담고 있는데, 첫째는 믿음의 힘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5-6절)이고, 둘째는 종의 의무에 관한 비유말씀(7-10절)이다. 전혀 별개의 두 개의 내용이 한데 묶여있는 것 같은데 하나씩 살펴보고 연결점을 찾아보자.

그리스의 신화를 접해 본 사람은 ‘판도라의 상자’에 대하여 알 것이다. 하늘과 땅을 지배하는 최고의 신 제우스가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를 땅으로 보내 처음으로 남자 사람과 동물들을 만들게 한다.

프로메테우스는 사람들에게 이성과 영리함 등 많은 좋은 것들을 선사하고 마지막에 신들만이 사용하는 불을 훔쳐다가 준다. 제우스의 뜻을 거역한 프로메테우스는 카프카스 산꼭대기에 매달려 독수리가 그의 간을 쪼아 먹는 형벌을 받는다.

제우스의 인간에 대한 형벌은 여자 사람을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헤파이스토스가 진흙으로 사람을 만들고, 아프로디테가 아름다움을 선사하며, 아폴론이 음악을 선사하여 창조된 여자인간이 바로 ‘판도라’이다. 제우스는 판도라에게 절대로 열어봐서는 안 된다는 항아리를 하나 줘서 지상의 에피메테우스에게 보내는데, 판도라의 호기심과 궁금증은 날로 더해 결국은 항아리를 열고 만다.

순식간에 항아리로부터 시기, 질투, 분노, 미움, 음행, 불목, 싸움, 전쟁, 질병, 죽음 등 온갖 나쁜 것들이 나온다. 깜짝 놀란 판도라가 뚜껑을 다시 닫았을 때 그 속에 남아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 희망뿐이었다. 그래서 인간은 온갖 역경과 환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희망은 무엇인가? 희망을 곧 미래의 것에 대한 바램이며, 바램은 믿음을 전제한다. 믿음 없이는 아무 것도 바랄 수 없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도 “사실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가며”(2고린 5,7), “예수는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또 하느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로마 10,9)고 가르쳤다.

그보다 먼저 제자들은 어떠했는가? 예수님의 요구에 따라 가진 재산은 물론 가족들과 자기 목숨까지 버릴 각오로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단은 내렸지만 그 결단에 수행되어야 마음과 몸이 턱없이 부족했다. 사도들에게 스승의 요구는 한 마디로 감당하기에 벅찼던 것이다. 그래서 사도들은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5절) 하며 자신들의 부족한 믿음을 고백하고 아울러 ‘믿음을 더해 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더해 달라는 말은 믿음의 기본은 이미 있다는 말인데, 예수님의 대답은 완전히 뜻밖이다. 예수께서는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째 뽑혀서 바다에 그대고 심어져라’ 하더라도 그대로 될 것이다.”고 하셨다. 이와 비슷한 대목에서 마태오는 겨자씨 한 알의 믿음으로 산을 옮길 수 있다(마태 17,20)고 했고, 마르코는 의심 없는 믿음으로 산을 바다에 통째로 빠뜨릴 수 있다(마르 11,23)고 했다.

무슨 말인가? 결국 사도들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도 없다는 말이 아닌가 말이다. 겨자씨는 씨앗 가운데서 가장 작은 씨앗이며, 뽕나무는 그 뿌리가 깊어서 거센 바람에도 뿌리 뽑히지 않고 수백 년을 견딜 수 있다는 나무이다. 그렇다고 2,000년의 교회역사 안에서 뽕나무를 뽑아 바다에 심고, 산을 옮기거나 바다에 빠뜨린 믿음을 가진 자는 아무도 없었다.

결론은 제자들이 부족하나마 가진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도 안 된다는 것이다. 왜 그런 것일까? 이유는 사도들 스스로의 편에서 찾아야 한다. 그들의 믿음은 대가를 바라는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믿음에는 대가를 요구할 수 없다. 믿음은 철저하게 하느님의 선물임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가진 그만한 믿음으로 무언가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서로 윗자리 다툼을 하며(마르 9,33; 마태 18,1; 루가 9,46), 베드로도 나서서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가 무엇을 받게 되겠습니까?”(마태 19,27) 하며 믿음에 대한 대가를 넌지시 요구하기도 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하느님과 예수께 대한 올바른 믿음의 자세는 오늘 복음의 두 번째 내용인 ‘종의 의무에 관한 비유’에 비추어 볼 수 있겠다. 오늘날 보수 없이는 아무 것도 이루어질 수 없는 사회적 구조 속에서 ‘종의 신분’에 관하여 논한다는 것은 전근대적인 발상으로 치부(置簿)될 지도 모른다.

굳이 논한다면 ‘자원봉사’의 개념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종의 신분이 법적으로 인정되던 시절로 돌아간다면 오늘 비유는 쉽게 이해된다. 품꾼이 보수를 요구하는 일은 당연하지만 종은 무상(無償)으로 일해야 한다. 종은 주인의 법적인 소유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누구를 염두에 두고, 종의 의무에 관한 비유를 들려주시는 것일까? 앞서간 부정직한 청지기의 비유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16,1-15)에서 보았듯이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율법을 잘 준수한 대가로 넉넉한 생활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율법준수가 재물을 보상으로 줬다는 말이다. 그들은 이렇게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사상에 깊이 젖어있었던 것이다.

이 점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사람을 주인이신 하느님에 대한 종의 신분으로 설정하신다. 인간이 하느님의 종이라면, 인간은 하느님께 자신이 한 일에 대하여 어떤 보상도 요구할 수 없다. 반대로 하느님만이 인간에게 온전한 섬김을 요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이다.(루가 6,13; 마태 6,24) 하느님께 대한 그리스도인의 믿음도 바로 이런 관계에 있다. 예수님도 ‘파견된 자’로서 ‘파견하신’ 아버지와의 관계를 철저한 ‘종의 신분’ 관계로 이해했다. 이 이해는 곧 아들의 아버지께 대한 믿음이다. 그래서 하느님이신 예수님도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던 것이다.(필립 2,7)

결국 예수께서는 종의 신분으로 종들인 인간을 죄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여 자유를 주신 것이고, 우리는 그 자유를 선물로 받은 셈이다. 우리는 선사된 자유를 마음껏 누리면서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며 그분의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저희는 보잘것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10절) 하며 사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우리의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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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신부
  |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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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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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1독서의 하바 2,4는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성실함’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 ‘아무나’는 ‘확고함, 성실함, 충실함, 믿음’ 등 다양한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그리스어로 옮긴 70인역 그리스어 성경은 이 구절의 ‘아무나’를 ‘피스티스’로 번역하는데, 신약성경에서 ‘피스티스’는 ‘믿음’이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흥미롭게도 사도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된다고 말하면서 하바 2,4를 인용하는데, 이때 70인역 그리스어 성경 번역에 따라 ‘피스티스’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우리 말 「성경」도 로마 1,17을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로 옮깁니다. 하지만 이 표현은 본래 하바 2,4에서 인용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바 2,4는 사도 바오로가 믿음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종종 우리는 바오로 사도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강조할 때 믿음을 그리스도에 대한 감정적 열정이나 믿음을 통해서 오는 심리적 안정 정도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바오로 사도가 인용하고 있는 하바 2,4는 이 믿음이 단순히 감정적이고 심리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라 불의와 재난, 억압과 폭력, 시비와 다툼 앞에서도 끊임없이 하느님께 충실히 살아가는 대단히 실천적인 것임을 분명히 알려줍니다.

물론, 하바 2,4에서 하느님께 충실하다는 것은 하느님과의 계약에 충실한 것, 곧 율법을 충실히 지키는 것이고 로마 1,17에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충실히 믿는 것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곧, 바오로에게서 믿음이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고, 그분의 가르침에 충실한 것이라는 점에서 하바 2,4와 다릅니다. 하지만 하바 2,4의 ‘충실함’이나 로마 1,17의 ‘믿음’이나 구약 전통 안에서 볼 때는 동일한 의미임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간혹 믿음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곤 합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믿음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휩싸이는 일종의 신비 체험을 통해 주어지거나 강화되는 것으로 오해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도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께 믿음을 더해달라고 청하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말하라고 명하십니다. 신비로운 체험을 통해 믿음이 강화되기를 기다리지 말고, 당신이 전하는 하느님의 뜻에 충실하게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오로도 오늘 2독서에서 티모테오에게 하느님의 은사를 불태우고,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며,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할 것을 권합니다. 성령의 도움으로 자신이 맡은 훌륭한 것을 지키라고 권합니다. 믿음이 더해져 신비로운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대하거나, 하느님에 대한 확신이 가져다주는 심리적 안정에 도취되지 말고, 자신이 믿는 바, 곧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가르침을 굳건히 지키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예수님의 가르침에 충실한 이들을 두고 의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의인들은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충실하였기 때문에 영원히 살 것이라는 것이 오늘 독서와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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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염철호 신부
2016년 10월 2일
  |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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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우리가 가진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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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거의 예외 없이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누구의 것입니까?”라는 질문의 정답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몸소 창조하셨기에 그분에게 속해져 있는데,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에 맞도록 잘 관리하도록 우리에게 위탁해 주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살아간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우리가 가진 것이란 비단 물질적인 재화뿐 아니라 우리가 가진 육체적·정신적인 모든 재능과 능력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느님께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에 우리가 행하고 열매를 맺는 그 모든 것도 바로 하느님의 은총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과연 하느님의 은총 없이 우리가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다면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을 통하여 하신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하고 말하여라.”는 말씀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께서 매우 계산적이며 냉혹한 주인으로 묘사되는 것이, 평소 우리가 생각하고 있던 하느님의 자비로운 모습과는 많이 동떨어져 있어, 우리를 많이 당황스럽게 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하여,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강조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께서 주신 능력에 의해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야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이루어놓은 모든 것을 마땅히 하느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면 당연히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더구나 바로 이 겸손한 마음이 우리를 참된 믿음으로 이끌어준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실제로 이 믿음을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고 주님께서는 다시금 우리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은총을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루어놓은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에서 비롯된 사실에 감사하면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면 하느님께서는 틀림없이 우리에게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십니다. 그리하여 비록 우리가 돌무화과나무를 바다에 심을 수 있는 능력은 가질 수 없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나라와 함께 이 세상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받아 누리며 살아 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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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구경국 알로이시오 신부
  |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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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4   (녹) 연중 제33주일 독서와 복음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1] 2120
763   [수도회]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5] 1496
762   [수원] 그리스도의 몸으로 사는 삶  [2] 2355
761   [서울] 부활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3] 2303
760   [마산] 영세한 미신자(未信者)가 많다.  [1] 2281
759   [대구] 부활의 삶, 지금 여기서 시작되고 있다.  504
758   [인천]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4] 2837
757   [부산] 알 수 없는, 그래도 좋은 하느님 나라  [2] 2585
756   [안동] 부활을 믿는다면 부활을 살아가십시오  [1] 2574
755   [대전]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은 모두 살아있는 것입니다”  [1] 2901
754   [청주] 부활 신앙  [2] 88
753   [광주] 학벌(學閥)과 사두가이파  2579
752   [전주] 부활 에 대한 확신과 희망  63
751   [춘천] 영원히 하나인 하느님 가족  [2] 2399
750   [원주] 부활 이후의 새로운 삶  56
749   [군종] 두 여자  2133
748   [의정부]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64
747   (녹) 연중 제32주일 독서와 복음 (하느님께서는 산 이들의 하느님)  [3] 1933
746   [수도회] 용서와 자비  [2] 2075
745   [전주] 자캐오, 아! 행복한 사람  [1] 1719
744   [인천] 자캐오! 나무에서 (빨리)내려와!  [3] 2172
743   [서울] 회개의 증거는 착한 행실  [3] 1742
742   [안동] 자캐오 이야기  [1] 2320
741   [부산] 세리 자캐오와 예수님의 만남  [2] 12015
740   [수원] “저 사람이 죄인의 집에 들어 가 묵는구나!”  [3] 20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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