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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기
조회수 | 2,373
작성일 | 07.10.12
조그마한 상점을 운영하는 마리아 자매님은 10여 전에 외환위기 때 삶의 절망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잘 되던 상점이 경제 사정의 어려움으로 인해 대단히 어렵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그 자매님은 삶에 대한 회의가 들어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성당에 나가는 것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고 합니다. 우울함과 절망감으로 서너 달을 힘들게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을 뒤돌아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지금까지 먹고 입고 자녀들을 교육시키고 한 것은 누구의 덕인가 하고 생각하니 주님의 은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었다고 합니다. 감사할 일이 무엇이 있을까하고 살펴보니 옆에 묵묵히 함께 있는 남편 요셉이 있어 감사하고, 두 딸이 성장해 있어 감사하며, 주일에 가족이 함께 성당에 나가 미사를 드리는 것에 감사하고,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 온 모든 것에 감사했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루카 17,11-19)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길을 가시다가 어떤 마을 입구에서 나병환자 열 사람을 고쳐 주십니다. 그런데 병이 회복된 열 사람 가운데 사마리아인만이 가던 길을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나머지 아홉 사람은 그냥 길을 떠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오지 않았단 말이냐?”라고 말씀하십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사람을 교만해지지 않도록 자신을 살피게 해 주고 겸손한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전서에서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1코린 15,10).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처지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의 마음은 매일의 삶에서 오는 보잘것없어 보이는 선물에도 기쁨을 느끼게 해 줍니다. 감사히 받기만 하면 거부할 것이 하나도 없게 됩니다(1티모 4,4). 감사의 마음을 가지면 불만스러운 마음이 줄어들고 대신에 만족감이 찾아옵니다. 세상은 아마도 감사하는 사람의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감사의 마음은 사랑이 넘치도록 만들어 주고 인간관계의 갈등을 해결해 주며 서로의 협력을 증가시켜 줍니다.

가까이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감사하면 할수록 감사할 일들이 더 많이 생깁니다. 그런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고 저축해 두면 어려울 때 든든한 도움이 됩니다. 마치 만일을 대비하여 보험을 드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지금이라는 시간에 감사하면, 인생을 두 번째로 살고 있는 것과 같이 지금을 소중히 여기며 살 것입니다. 그리고 두려움을 느끼거나 다른 사람 앞에 망설여지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또한 감사의 마음은 사람과 관계를 계산적으로 사귀지 않고, 풍요로운 마음으로 여유로움을 가지고 사람을 만나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기뻐하고 끊임없이 기도하며 모든 일에 감사하며(1테살 5,16-18) 살아가야겠습니다.

정원순 토마스 데 아퀴노 수사 신부·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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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의 소외와 하느님의 말씀의 연대

어느 시대나, 어느 사회나, 그리고 어느 분야에서나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 흔히 ‘소외계층’이라 부르는 이들이 있습니다. 경제 분야의 소외계층은 이제 언급하는 것도 부질없습니다. 대다수의 사람이 자신의 경제생활을 주도적으로 꾸려갈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경제시스템이 촘촘한 그물망의 씨줄과 날줄처럼 상호의존의 구조임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 그물망에 대다수가 갇혀 있을 수밖에 없고, 소수의 특정인이 그들의 이익에 따라 그물을 던졌다 거두어들였다 하는 형국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정치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자발적이며 능동적인 ‘참여’입니다. 특히 자신과 사회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정책이나 제도와 법을 만들 때 참여할 수 없다면,그 사회는 전제주의 사회거나 독재사회에 불과합니다.

정보사회에서 정보의 생산과 유통을 다루는 대중매체가 미치는 영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대중매체는 사람들의 참여를 촉진할 수도, 방해할 수도, 그리고 왜곡할 수도 있습니다.

문화는 “인간의 전인적 완성과 온 인류 사회와 공동체의 행복을 지향”(사목헌장 59항)해야 하지만, 현대 사회의 문화는 매매할 수 있는 수많은 상품 가운데 하나쯤으로 간주되고, 그것을 구매할 능력이 없는 수많은 사람은 전인적 완성과 행복은커녕 생존 그 자체를 위해 몸부림쳐야 합니다.

누군들 소외계층으로 전락하여, 가난하고 힘없이 그리고 초라하게 살고 싶겠습니까? 또 누군들 그 같은 세상을 만들겠다고 드러내놓고 나서겠습니까? 모두가 인간의 존엄함과 공동선과 행복을 추구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왜 여전히 ‘소외’의 현상은 남아 있고, 오히려 그 정도와 범위는 심각해지고 있을까요?

오늘 하느님의 말씀에서 그 원인의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연대’의 결핍이 바로 그 원인입니다. 1독서에서 시리아의 고관 나아만은 한센 환자였지만, 유다인으로서 하느님의 사람인 엘리사와 연대합니다. 복음에서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은 열 명의 한센 환자와 연대합니다. 열명의 한센 환자가 예수님께 다가가는 장면을 그려봅니다. 그들 사이 인종에 의한 구별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들의 동행은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는 한하운의 시 구절 그대로입니다. 2독서의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다고 선언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머물지 않았고, 유다 종교의 테두리에 갇혀 있지도 않았고,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셔서, 곳곳의 가난하고 힘없고 초라한 이들을 당신벗으로 삼아 연대하셨습니다. “선택된 이들”이라 할 수 있는 교회(하느님 백성)는 그분이 하시던 일을 계속(사목헌장, 3항)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입니다.

박동호 안드레아 신부
  |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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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보리피리’의 시인 한하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20대 초반에 발병한 나병으로 청춘의 모든 꿈을 접고 일생을방랑하며 그 한을 시로 남기고 1975년 5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의 유명한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라는 시는 이런 절절한 내용입니다.

“아버지가 문둥이올시다. / 어머니가 문둥이올시다. / 나는 문둥이 새끼올시다. / 그러나 정말은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하늘과 땅 사이에 / 꽃과 나비가 / 해와 별을 속인 사랑이 / 목숨이 된 것이올시다. 세상은 이 목숨을 서러워서 / 사람인 나를 문둥이라 부릅니다. 호적도 없이 / 되씹고 되씹어도 알 수는 없어 / 성한 사람이 되려고 애써도 될 수는 없어 / 어처구니없는 사람이올시다.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 나는 정말로 문둥이가 아닌 / 성한 사람이올시다.”

이 시는 나병이라는 장애를 가진 시인이 세상의 편견과 멸시를 받고 “나도 사람이올시다!”라고 목메인 절규를 한 시입니다. 문둥이, 나병, 한센병….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으로서 최소의 기본권조차 박탈당하는 병이었습니다.

오늘 루카 복음에서 바로 이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예수님께 치유를 받고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그들은 분명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처럼 놀라운 기쁨으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이방인이었던 사마리아 사람 한사람만이 큰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한탄하시듯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어쩌면 예수님의 물음은 우리 모두를 향한 안타까운 마음이기도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성사를 통해서 나병 환자처럼 더럽고 흉한 죄악으로 물든 우리의 영혼을 새로 태어난 것처럼 깨끗하게 해 주시고, 당신의 자녀로 새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면서도 책임을 묻거나 벌을 내리지 않으시고 무조건 모든 죄를 한꺼번에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례성사 이후에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삶을얼마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감사를 드리러 돌아온 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돌아오지 않은 아홉 명 중의 하나입니까?

감사하는 마음은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된 모든 그리스도인의 필수적인 삶의 양식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이며,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인생의 온갖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감사를 드리러 돌아온 이방인 나병 환자에게처럼 우리에게도 축복의 말씀을 주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 서울대교구 홍인식 마티아 신부 : 2016년 10월 9일
  |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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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나병(한센병) 환자들이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 큰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열 명이 간절하게 소리를 질러댔으니 귀가 따가울 정도였을 것입니다. 저 같으면 우선 급한 김에 나병을 고쳐 달라고 매달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들은 예수님께 하느님의 자비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현대 의학에서 나병은 죽을병이 아닙니다. 세상에 새로 생긴 많은 병으로 사람들이 극심한 고통을 받고 불안해하고 죽어갑니다. 몸으로 드러나는 큰 병도 있지만, 정신적인 병도 많이 생겼고 영적인 병도 많습니다. 제가 어릴 적에는 들어보지 못한 우울증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갑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많은 사람이 심각하게 병들어 있다는 것을 자신들도 모르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이나 적은 사람, 권력을 쥔 이들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 많이 배웠다는 사람들이나 못 배웠다는 이들 모두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겉으로는 부유해 보이지만, 조금만 속을 들여다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얼마 전까지 매우 가난했습니다. 열심히 노력해 이제 세계가 인정하는 부자 나라가 됐습니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한국 교육열은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한때 자주 부러워했습니다. 고학력 사회입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절망하고 있습니다. 돈이 없어서 결혼할 꿈도 못 꿉니다. 한국 사회는 병들어 있습니다. 어디를 바라봐도 희망을 찾기 힘듭니다. ‘헬조선’이라는 말이 우리 귀에 익숙해졌습니다.

그 나병 환자와 같은 사람들이 오늘 우리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진심으로 외쳐야 할 차례입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자비를 입어야 한다는 것을 올해 프란치스코 교황님과 함께 온 세상의 신자들이 마음에 새기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로 말미암아 모두 치유됩니다. 그 자비는 사람을, 죽어가는 사람을 살립니다.

그들은 당장 고쳐 주시지 않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들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궁금합니다. 예수님께 뭔가 잔뜩 기대했을 텐데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피부 상처도 보시고 그들이 고되게 살아온 인생 여정도 살펴보셨을 것입니다. 사람들로부터 멸시받고 무시당해 온 삶을 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좀 엉뚱하지 않습니까? 책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떠넘기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들은 순순히 떠납니다. 체념하는 것에 익숙해서일까요? 그렇게 떠난 그들은 길에서 자신들이 치유됐음을 알아봤습니다.

우리도 이미 치유되고, 바라는 것이 이뤄졌는데도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계속 불만을 품고 살아갑니다. 기쁨도 살아가는 재미도 없고 보람을 느끼지도 못하고 불만에 가득 차서 살아가곤 합니다.

그 열 명 가운데 유일한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은 기뻐하면서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께 깊이 감사드렸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온 그 사마리아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선언하셨습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로 이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께 ‘하느님의 자비를 간절히 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장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신뢰하고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 안에서 생명으로 치유해주시는 하느님의 업적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주님께 엎드려 감사드리러 오는 것입니다. 특히 감사 기도인 주일 미사에 참여하는 신자들은 바로 이 신앙의 가르침대로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드러나는 참된 하느님의 자비를 입고 치유돼 참 생명을 되찾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할 때입니다. 하느님께 감사하고, 함께 고생한 사람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 영광을 드러내야 할 때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살아 있는 사람들한테서 빛납니다. 숨만 쉰다고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일어나 가거라.” 곧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해 영원히 살아 있도록 우리의 신앙은 초대받고 있는 것입니다.

▮ 서울대교구 주수욱 신부 : 2016년 10월 9일
  |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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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누구나 지니고 있는 것이 ‘핸드폰’입니다. 제가 처음으로 핸드폰을 가졌던 것은 지금부터 21년 전입니다. 국산은 없었고, 모토롤라 제품을 샀습니다. ‘삐삐’를 가지고 다니다가, 동창들이 핸드폰을 마련하자고 해서 큰마음 먹고 장만했습니다. 그리고 핸드폰 끝 번호는 축일로 정했습니다. 저의 핸드폰 끝 번호는 0929입니다. 핸드폰은 컸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기억나는 핸드폰 선전이 있습니다. ‘걸리니까 걸리버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애니콜입니다. 자장면 시키신 분, 소중한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잠시 꺼 주셔도 좋습니다.’ 21년 시간이 흐르면서 핸드폰의 기능은 무척 다양해졌습니다. 단순히 전화를 걸고 받는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카메라 기능, 교통카드 기능, 음악을 듣는 기능, 내비게이션 기능, 신용카드 기능을 갖추고 있습니다. 인터넷과 연결된 핸드폰은 각종 정보를 검색할 수 있고, 유용한 애플리케이션은 생활에 편리함을 주고 있습니다. 앞으로 핸드폰의 가능성은 더욱 커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전에 있던 본당에서 설립 20주년을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작은 공소였던 성당은 20년이 지나면서 많은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초대 신부님은 성당과 사제관을 마련하였습니다. 저는 식당과 주차장, 손님들이 지낼 수 있는 숙소를 마련하였습니다. 후임 신부님은 넓은 마당을 마련하였습니다. 다음 신부님들은 신앙의 꽃을 피우는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고 있습니다. 교우들의 땀과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고, 모든 것이 하느님의 축복이었습니다.

과학과 기술만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명과 사회만 발전하고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이성, 우리의 감성, 우리의 신앙도 발전하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공자님은 그러한 삶을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라고 하였습니다. 부처님은 그러한 삶을 ‘팔정도(八正道)’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이라는 아름다운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들 마음의 밭에 뿌려진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세상의 것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마치 자갈밭에 뿌려진 씨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말씀을 듣고서 살고자 하지만 유혹 앞에 흔들리는 사람은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말씀을 듣고서 삶이 변하고, 이웃에게도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좋은 밭에 뿌려진 씨와 같아서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신앙인은 3단계의 과정을 거쳐서 영적인 성장을 이룬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것을 운전의 3단계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 번째는 준법운전입니다. 교통법규를 잘 지키는 운전입니다. 빨간 불에는 서고, 중앙선을 침범하지 않고, 규정 속도를 지키는 것입니다. 이런 운전만으로도 우리는 교통사고를 예방할 수 있습니다. 주일미사를 잘 지키고, 성경 말씀을 자주 읽고, 교무금 헌금을 기쁜 마음으로 내는 신앙인과 같습니다.

두 번째는 안전운전입니다. 교통법규는 당연히 잘 지키고, 무리한 운전을 하지 않습니다. 장거리 운전을 할 경우에는 중간에 잠시 쉬고, 차량 정비를 자주하고, 앞차와의 거리를 유지하는 하는 것입니다. 이런 운전을 하면 인생도 푸른 신호등처럼 늘 맑고 푸른 날이 될 것입니다. 주일미사는 물론이고 평일미사도 자주 참례하는 분, 본당의 단체에 가입을 해서 봉사하는 분, 각종 피정과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분, 소공동체 모임에 빠짐없이 참석하는 분입니다. 이런 분들이 있으면 본당도 기쁨과 평화가 넘쳐날 것입니다.

세 번째는 양보운전입니다. 급한 사람이 먼저 갈 수 있도록 양보해 주는 운전, 몸이 아픈 이웃을 병원으로 모셔다 드리는 운전, 짐을 들고 가는 어르신을 태워 드리는 운전, 고장 난 차를 보면 내려서 도와주는 운전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운전은 단순히 이동수단이 아닙니다. 운전이 곧 선교이고, 운전이 곧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것처럼 나의 삶에 다가오는 시련과 고통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 놓을 수 있는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 살지만 이미 하느님 나라에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 나의 신앙은 어디에 속하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엘리사의 도움으로 나병에서 치유된 시리아 사람 나아만은 이제 몸만 건강해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도움으로 치유된 사마리아 사람도 이제 몸만 건강해 진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러한 삶을 ‘복음의 기쁨’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분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복음입니다. 나는 선택된 이들을 위하여 이 모든 것을 견디어냅니다.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은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우리가 견디어 내면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입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신부 : 2016년 10월 9일
  |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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