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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조회수 | 2,224
작성일 | 07.10.12
오늘 복음 말씀을 듣고 저는 이런 말이 먼저 떠오르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다르다.’는 말을 합니다. 급해서 화장실을 찾을 때의 모습과 볼 일을 다 보고 나서 느긋하게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올 때의 모습은 완전히 다릅니다. 급해서 화장실을 찾을 때 발을 동동거리면서 어쩔 줄을 모르는 모습과 볼 일을 다 보고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는 그 여유로운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시면 입가에 웃음이 절로 날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고, 오늘 복음에 나오는 나병환자들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다가 나병환자 열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 나병환자들은 한 목소리로 멀찍이 서서 큰소리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힘들게 살아가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그 나병환자 열 사람은 사제에게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진 것을 두 눈으로 확인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돌아온 사람은 오직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 한 사람도 평소에 이방인으로 취급을 받았던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이 나병환자 열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이스라엘의 율법 규정에 의하면 나병환자는 문둥병을 포함한 온갖 종류의 피부병에 걸린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나병은 불결하고 전염성이 강하다고 믿었기에 다른 사람들과 접촉하지 못하게 했으며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도 갈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길을 가다가 성한 사람을 만나면 ‘나는 불결한 사람이오.’라고 외쳐야 했던 사람들이 나병환자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동구 밖으로 밀려나게 되었고 같은 처지의 사람들끼리 모여 살게 되었습니다. 이 나병환자 중에는 사마리아 사람과 갈릴래아 사람,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함께 모여 살았을 것입니다. 혼자 돌아다니다가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죽을 수 있으니까 같은 처지의 사람들끼리 똘똘 뭉쳤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어디 출신이고, 이방인이고 유대인이고, 남성이고 여성이고, 그 어떤 차별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저 절박함 속에서 함께 모여 나병의 고통을 이겨내려는 모습만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자신들이 모여 사는 곳을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한 목소리로 이렇게 외쳤던 것입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이 목소리는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예수님에게 한 가닥 희망을 걸었던 울부짖음일 것입니다. 그리고 나병이 나았습니다. 그러기에 나병을 고쳐주신 예수님은 분명 생명의 은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감사드리려 돌아온 사람은 한 사람 밖에 없었습니다.

이 아홉은 어디로 간 것일까요? 그들은 왜 생명의 은인이신 예수님께 돌아오지 않았을까요? 그들은 정말 배은망덕한 사람들일까요? 이 아홉 사람도 예수님께 감사드리고 싶은 맘이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병에 걸렸던 사실을 어쩌면 더 숨기고 싶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방인으로 취급되었던 사마리아 사람들과 함께 뒹굴었던 자신의 삶도 숨기고 싶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이 아홉은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우리 자신들의 모습은 아닌지요. 한 예로 우리는 고해소를 들어갈 때의 모습과 나와서 사는 모습도 전혀 다른 모습이지 않습니까! 과거 살았던 모습, 남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던 모습들을 체면 때문에 잊어버리는 사는 경우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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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구 조인래 미카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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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는 마음

형제자매 여러분! 건강히 잘 지내고 계십니까? 이맘 때가 되면 곡식이 여물어 거두어들일 마음에 기쁨이 앞서는데, 요즘은 농산물 특히 쌀 수입 개방 문제로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더 굳은 믿음으로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오늘 복음을 보면, 나병환자 열 사람이 예수님께 자비를 청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분의 자비를 입습니다. 당시 나병환자는 죄인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숨어 살아야 했고, 예수님 앞에 가까이 오지 못하고 멀찍이 서 있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병을 고치고자 하는 그들의 간절한 마음은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게 했고, 그분께 대한 믿음을 낳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모습을 보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나 이들에겐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자비에 감사할 줄 모르는 마음입니다. 그분께 청하기는 했지만, 감사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육체의 병은 나을 수 있었지만, 영적인 기쁨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되돌아와 감사드리는 그 사람만이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라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감사하는 마음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언젠가 읽은 이야기인데, 시골에서 농사짓는 아버지와 외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버지에게는 외아들이 너무도 귀했기 때문에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들어주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아쉬운 것 없이 저만 알고 자란 아이들이 대게 그러하듯이 이 아이도 버릇없이 외골수로 자랐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먼 도시로 나간 아들은 돈이 필요하면 언제나 아버지께 요구했고, 객지에서 고생할 아들 생각에 아버지는 소를 팔고, 논을 팔아서라도 아들이 필요하다면 언제나 보내 주었습니다. 전화 한통이면 돈이 생겼던 아들은 그저 흥청망청 친구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고 노는데 다 탕진해 버렸습니다.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은 이해 할 수 있지만, 아버지의 아들 사랑법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무조건 다 들어주는 것이 사랑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필요하면 주어야하겠지만 무조건 다 들어주다보니 방탕한 아들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진정으로 아들을 사랑한다면 흥청망청 먹고 마시고 노는 아들의 버릇을 고치기 위해서라도 더 이상 원하는 데로 주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다 들어주시지 않는 이유도 이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을 원하지만 그분께서는 영원을 생각하고 계신 분이고, 그 안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안배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이와 같다면 우리는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내게 일어나는 일의 결과가 지금 당장 좋은 것이든 아니든,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는 것만큼은 확실하다는 것을 믿고 감사드려야 합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분의 섭리대로 이루어지도록, 그 섭리를 받아들일 마음을 갖도록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도리여야 합니다. 그리고 나병환자 열명 중 한 사람처럼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예수께 돌아와 그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려야 할 것이다. 그러면 그분께서 말씀하실 것이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안동교구 황영화 마티아 신부
  |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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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감사합니다.

우리 인간 사회에서 모든 죄 중에 가장 우둔하고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아마도 배은망덕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갈릴레아와 사마리아의 경계 지방에서 일어난 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한 떼의 유다인 나병 환자들 틈에 사마리아 사람 하나가 끼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의 몫을 보여라.”하셨습니다. 그들이 사제들에게 가는 동안에 그들의 몸이 깨끗해 졌습니다.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님께 치유의 은혜를 받고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 하나만이 하느님을 찬미하며 감사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마리아 사람을 칭찬하며 그의 믿음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을 슬프게 한 것은 열 사람 중 단 한사람만이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나머지 아홉 사람은 그처럼 은혜를 많이 받고서도 보답할 줄 모르는 배은망덕한 이들이며 염치없는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았습니다. 그 많은 환자들 중에 시리아의 나아만이 나병의 치유를 받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그 위대함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
사마리아 사람과 나아만처럼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단 한 순간도 하느님의 보살핌과 이끄심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기 혼자의 힘만으로 잘 살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은혜를 체험하고도 그 분께 감사드리는데 인색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아홉 사람은 구원의 놀라운 선물을 기쁘게 받았으나, 이 기쁨이 표면에 머물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나병은 치유되었으나 그들의 마음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선물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그 선물을 준 손은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즉 그들은 이 구원을 가져다 준 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영국의 선교사 스펄젼은 감사에 대해 이렇게 표현을 하였습니다.

“촛불을 바라보며 감사하면 전등을 주시고
전등을 바라보며 감사하면 달빛을 주시며
달빛을 바라보며 감사하면 햇빛을 주시고
햇빛을 바라보며 감사하면 천국, 영혼의 빛을 주신다.”

신앙의 바탕은 감사에서 시작됩니다. 감사는 모든 것의 바탕이 됩니다. 감사합시다. 감사를 드리는 것이 바로 은총의 바탕입니다. 감사는 내가 좋을 때, 나에게 어떤 좋은 것이 생겼을 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하느님을 만납니다.

바오로 사도는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Ⅰ테살 5.16-18)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감사할 줄을 모를 때, 감사함을 잊을 때 우리 자신은 자신 안에만 머물게 되고 자신은 더욱 작아지고 좁아지게 될 것입니다. 감사하는 삶이야말로 우리를 더욱 넓히고, 높은 곳으로, 높은 분께로 인도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열 명의 나병 환자를 고쳐주시며 감사와 찬양의 중요함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믿음은 하느님께 대한 감사에서 나오고 끊임없는 감사 안에서 표현됩니다. 왜 하느님께서 더 많은 은총을 주시지 않느냐고 원망하지 말고 지금까지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시다. 주님,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조상래 다미아노 신부
  |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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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는 나병 환자가 등장합니다. 신학생 시절, 나병 환자들과 몇 달 정도 함께 생활 한 적이 있습니다. 함께 식사도 하고 가정 방문을 통해 그분들의 아픔을 조금은 알 수 있었습니다. 똑같습니다. 늘 자녀들 걱정입니다. 나환자들이 제일 힘들어 하는 것이 바로 공동체의 삶을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가족도 외면했습니다. 그러니 이웃사람들이야 더 하겠지요. 나환자 분들과 함께 생활할 때 들은 이야기입니다. 나환자 마을 사람들이 노래방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노래방 주인이 나환자 분들을 받아 주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말을 듣고 그분들의 아픔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치 죄를 지어 그렇게 되었다는 인식과 함께 모든 사람들에게 외면 받아 왔습니다. 잘못된 인식입니다. 현대에는 일상생활에서 전염성은 거의 없습니다. 치료제의 발전으로 치료가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에는 그것이 어려웠습니다. 나환자는 동굴 같은 곳에서 가족과 떨어져, 공동체와 떨어져, 쓸쓸이 살아갔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에 대한 소식은 그들에게 곧 희망이였습니다.

외적으로, 내적으로 상처가 가득한 나병 환자 열 명이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그런데 가깝게 다가가지 못하고 “멀찍이 서서” 예수님께 자비를 청합니다. “멀찍이 서서” 예수님께 자비를 청하는 모습에서 그분들의 아픔이 느껴집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아픔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간절함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말씀합니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이 말씀을 믿고 사제들에게 달려간 나병환자들은 치유를 받게 됩니다. 여기에는 믿음이 존재합니다. 자신이 나병환자였기 때문에, 병이 있는 상태에서 사제를 찾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예수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믿음으로, 그 간절함으로, 나병 환자는 모두 병이 낫게 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로 다음에 있습니다. 주님께 은총을 받은 열사람 가운데, 주님을 찬양하며 감사를 드린 사람은 한 사람 뿐입니다. 그것도 이스라엘 사회에서 사람취급 받지 못하는 사마리아인 이였습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에게 예수님은 기쁜 소식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 늘 어떤 바람이 있습니다. 특별히 몸이 아픈 사람들은 몸이 낫기를 바라고 마음이 아픈 사람은 그 아픔을 위로받기를 바랍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들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홉 명의 나병환자와 한 명의 외국인 나병환자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열 명 모두 몸이 낫는 자신의 목적을 다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영광을 올리는 영역에서는 달랐습니다. 한명의 외국인에게는 이 세상의 삶을 넘어 구원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그분께 감사를 드리는 행위가 구원에 대한 희망을 간직한 행위가 아닐까요? 그리고 그 믿음대로 육체적 치유를 넘어 그는 구원을 받습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우리 역시 하느님께 이미 많은 은총을 받고 있습니다. 그분의 자비를 입고 있습니다. 단지 많은 이들이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열 사람 중에 어디에 속하고 있는지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그분께 감사를 드리는 신앙인 인지?’, ‘하느님의 영광이 아니라, 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게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여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너희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이다.”(1테살 5, 18) 감사는 신앙의 열매입니다. 주님께 감사하며 행복한 주일되시길 바랍니다.

▮ 안동교구 윤성규 바오로 신부 : 2016년 10월 9일
  |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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