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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네 닭을 잊었느냐?”
조회수 | 2,369
작성일 | 07.10.12
고해소에서 교우들을 기다리다가 읽은 책 속의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죽어서 천국 문 앞에 섰는데, 우리의 수문장 베드로 사도가, “자네! 죄가 너무 커! 들어올 생각도 말게!” 하고는 문을 닫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이 죄인은 급히 한 손으로 그 문을 붙잡고, 다른 손으로는 뒤춤에서 뭔가를 꺼내 사도에게 보이며 말하였습니다. “사도님! 그 새 이놈을 잊으셨습니까?” 눈을 돌려 그것을 본 베드로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아무 말도 못하고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가 꺼낸 것은 바로 “닭 한 마리”였던 것입니다.

이 글을 읽고 웃기는 했지만 속은 편치 못했습니다. 사실 죄로 따지자면 저도 만만치 않고,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면서도 그 은총을 자주 잊고 사는 것 역시 남들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어떤 때는 제 알량한 지식의 틀 안에 주님을 가두기도 했으니, 당연히 불편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시리아 사람 나아만은 요르단 강에서 몸을 씻으라는 엘리사의 말대로 하여 나병을 고치고, 물보다 앞서신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야말로 참된 주님이심을 깨닫고 믿음을 고백하며, 그 땅의 흙을 통해서나마 자신에게 베푸신 주님을 경배할 줄 아는 사람으로 거듭 납니다. 그리고 이제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당신께서 사랑과 자비의 신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께 다가오며 자비를 청한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율법대로 사제들에게 가서 보이라는 말씀을 따릅니다. 그 모두가 말씀대로 하여 병이 나았지만, 정작 그분께 돌아와 하느님을 찬미한 이는, 율법과 상관없는 한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율법을 넘어서 계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깨닫고 믿는 것이 진정한 구원의 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가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된 다윗의 후손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이 복음의 핵심이라고 한 것도, 구원은 옛 문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말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성실하신 사랑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변함없음을 믿는다면, 우리도 자신의 “선하지 못한 온갖 틀”을 부술 수 있어야 합니다. 겉만 새롭고 속은 여전하다면, 주님 곁을 슬쩍 떠난 아홉 명의 나병환자나 “새벽 닭”을 잊은 베드로와 다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사랑을 잊지 말고, 꾸준함과 인내로 그 은총을 이웃과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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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강진구 야고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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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일 새로 부임한 본당에서 미사를 드리면서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감사합니다.”라는 말이었습니다. ‘돌아보면 모든 것이 은총이었다.’라는 고백처럼, 지난 본당에서 하느님과 교우들로부터 받은 많은 사랑에 ‘감사하다’는 말밖에 표현할 것이 없었습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새로 파견하신 공동체에서 앞으로 받을 많은 은총을 떠올릴 때,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저는 그동안 사제 생활을 하면서 감사하기보다는 불평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제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면 늘 불평을 달고 살았습니다. 저를 위한 하느님의 뜻이 아닌 제 뜻에 얽매여 살았기 때문에, 하느님의 은총을 감사하게 바라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자비를 청하는 나병환자 열 사람을 치유해 주십니다. 그런데 자비를 입은 열 사람 중, 단 한 사람 만이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 다른 아홉은 감사할 줄 모르고 제 갈 길을 가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치유 받은 열 사람의 서로 다른 처신을 통해, 우리에게 ‘감사’하는 삶의 소중함에 대해서 가르치고자 하십니다. ‘감사’는 단순히 예의를 차리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할 줄 알 때 비로소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 삶 안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언급되고 있지 않지만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린 한 사람과 다른 아홉 사람의 삶은 분명 그 결과가 달랐을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매일의 삶 속에서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축복에 감사드리며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받은 것에 감사 할 줄 모르고 늘 불평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제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루카17,17) 이번 한 주간 하느님과 주변의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로 다짐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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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이재화 안셀모 신부
  |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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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가장 행복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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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무드에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배우는 사람이고,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자기를 이기는 사람이며,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모든 일에 감사하는 사람이다.”

지금 행복하십니까?
그렇다면 감사하며 사시는 분일 것입니다.
감사하며 살아가십니까?
그렇다면 지금 행복한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 역시 ‘감사하며 살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알아듣고 싶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인간이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의 표현,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 될 수도 있겠고, 시간일 수도 있겠고, 또 마음일 수도 있을 텐데, 그것이 무엇이든, 그러한 감사의 표현이 ‘하느님께 무슨 유익이 되겠나’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어떤 일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든 안 드리든 그것이 하느님께는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리며 살라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알아들어야 할까요?

‘감사하면서 살라’는 것은, 어쩌면 ‘인간에 대한 또 다른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주변을 한 번 보세요. 늘 감사하면서 사는 사람은 조금 부족하더라도, 모자라더라도, 또 없더라도 늘 행복하고 기쁘게 사는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리들의 모습도 한 번 보세요. 감사하며 살았던 순간이 단 한순간이라도 있었다면, 그 시간이 얼마나 행복한 시간이었는지 생각해보세요. 이런 이유로, ‘감사하면서 살라’는 것은, 하느님께 어떤 유익이 있어서가 아니라, 인간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그렇게 하라는 하느님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열 사람 중에 진정으로 병이 나은 사람은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께 돌아와 그분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린 사마리아 사람뿐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육체의 병뿐만 아니라 마음의 병까지 나았기 때문입니다. 즉, 이 사람은 이제부터 감사하면서 살 줄 아는 삶을 살게 된 것이고, 그것이 행복과 기쁨을 더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하지 못하며 사는 사람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작은 일에도 감사하면서 사는 사람은 늘 행복합니다.

자꾸 감사하면 할수록 감사할 일이 더 많아지는 것이 감사의 신비입니다. 그러니 늘 감사하면서 살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 환호송에 나오는 바오로 사도의 1테살 5:18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삶으로도 실천하며 살면 좋겠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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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김형근 세례자 요한 신부
2016년 10월 9일
  |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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