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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영혼이 병든 사람들
조회수 | 2,537
작성일 | 07.10.12
예수님의 주변에는 늘 사회로부터 버림받고 소외된 병자들이 많았다. 예수님을 병자들의 벗으로 보는 관점에는 병자에 대한 우리의 편견과 비난, 동정과 안쓰러운 눈길을 객관적으로 보자는 관용이 숨어 있다. 병자의 소외된 삶을 떠오르게 하는 한 편의 시.

<전라도길> -소록도로 가는 길-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나환우 시인인 한하운씨의 대표적인 시 ‘전라도 길’이다. 하늘이 내린 천형이라 여겼던 병자들, 친구와 이웃들과의 단절은 물론 천륜인 부모와의 인연도 끊어지는 형벌이었다. 그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폐렴을 앓듯 누구나 걸릴 수 있는 질병을 앓는 병자에 불과하다.

소록도, 그곳은 유형지였다. 부모와 가족, 고향과 친구가 그리운 사람들의 수용소였다. 나환우들이 만든 정원에는 서너 그루의 나무들이 한데 모여 한 그루의 나무를 이룬다. 아버지와 어머니 나무, 누나와 동생의 나무들이다. 서산의 노을이 물들고 아버지가 그립거나 어머니가 보고 싶으면 자기가 심어 놓은 나무아래 앉아 고개를 떨구고 남몰래 울었던 것이다.

육체적인 질병으로 인해 가족으로부터도 격리되어야 했던 사람들. 눈썹이 빠지고 코가 문드러지고 손가락과 발가락이 잘려나가 선한 눈빛이 아니고서는 눈을 돌리고 싶은 사람들. 그러나 그들의 가슴은 따뜻하고 마음은 한없이 선량하고 그들의 신앙은 나병이라는 육체적 형벌을 통해 부활한 신앙이었다. 눈물과 기도 속에서 피어난 맑은 영혼의 꽃이었다.

몸은 성하지만 마음과 영혼이 병든 사람들, 어쩌면 나환우들보다 더 불쌍한 사람들이다. 얼굴이 일그러진 나환우들보다 마음과 정신이 일그러진 사람들이 그러할 것이다.

남과 북이 갈린 우리 민족, 분단된 국토로 인해 정신도 병들었는지 모르겠다. 분단병을 치유하기 위한 진통이 언제쯤이나 끝이 날까. 2008년 북한과 미국의 수교가 이루어질 전망이다. ‘친북좌파’를 운운하는 시대착오적인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그 후보에게서 분단병을 치유하는 길이 멀고도 험한 길임을 본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느님 아버지! 분단병에 걸린 우리 민족에게 통일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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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최종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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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주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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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 시쳇말로 ‘사람의 마음이 화장실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다’라는 표현을 합니다. 즉 화장실이 급하고 아쉬울 때 먼저 볼 일을 보는 사람이 늦게 나오면 야속한 생각이 들지만 정작 자신의 볼 일을 볼 때는 다음을 기다리는 사람의 처지를 까맣게 잊고 정작 자신은 여유있게 볼 일을 보는 경우입니다. 그리 긴 시간이 아니어도 입장이 바뀌면 마치 스프링처럼 자기중심으로 돌아가는 사람의 본성을 드러낸 표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병환자 열 사람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제들에게 몸을 보이기 위해 길을 가는 동안에 나병이 깨끗이 낫습니다. 그들이 사제에게 가서 몸을 보였는지 복음사가는 더 이상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열 명 가운데 사마리아 이방인 한 사람만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서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치 모두를 기다렸다는 듯이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처음에 나병환자들이 예수님께 자비를 요청했고, 그들의 요청을 하느님께서는 들어주셨지만 그들은 자신의 몸이 이미 깨끗해진 것을 확인하고는 너무 기쁜 나머지 각자 자기의 갈 길을 간 것입니다. 즉 ‘어떻게, 누구 때문에 자기가 나을 수 있었는가!’를 까맣게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라고 묻고 계십니다.

돌아오지 않은 아홉 명의 나병환자와는 대조적으로 오늘 제 1독서에서는 아람 임금의 군대 장수인 나아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나아만은 용맹하고 힘센 장수였지만 나병환자였습니다. 나아만은 이스라엘 소녀의 말대로 자신의 나병을 고치기 위해서 이스라엘로 갑니다. 요르단 강에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는 엘리사 예언자의 말을 그의 심부름꾼을 통해서 듣지만 화를 내며 발길을 돌립니다. 그러나 그의 부하들의 간절한 요청으로 엘리사의 말대로 요르단 강에서 몸을 씻자 그의 나병은 깨끗해집니다. 그 후 나아만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하며 엘리사에게 자신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청합니다.

일상생활에서 크든 작든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았거나 은혜를 입었을 때 그에 대한 감사를 표하는 것은 당연한 도리입니다. 이는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다양한 지향과 함께 하느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특히 가족이나 동료, 이웃 가운데서 기도가 필요한 처지에 놓인 이들을 기억합니다. 각자가 원하는 기도의 응답을 듣기를 바라는 마음이지만 기도의 응답은 다양합니다. 즉 우리 각자가 드린 기도의 내용이 그대로 이루어질 수도 있지만 어떤 때는 정반대의 결과를 확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느님께 실망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실망하기 전에 아니 기도하기 전에 먼저 하느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지금까지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기도를 통해 드려지는 청원이 우리 각자의 뜻이 아닌 하느님 뜻대로 이루어지도록 청해야 합니다.

설사 기도와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오더라도 그 안에서 기도의 의미를 찾고 서로 위로해 주는 것이 신앙인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언제나 성실하시고, 우리에게 좋은 것을 다 베풀어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먼저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그저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기도의 첫 마디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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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김창신 아우구스티노 신부
  |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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