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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만남의 길이냐 스침의 길이냐?
조회수 | 2,465
작성일 | 07.10.12
최윤의 소설 ‘하나코는 없다’의 무대는 서울입니다. 어느 날 고등학교 대학교 동기생으로 이뤄진 한 패거리에 한 여자가 우연히 소개됩니다. 그녀는 특별한 미인은 아니지만 코 하나만은 예뻐서 ‘하나코’란 별명이 붙었습니다. 그런데 ‘하나코’는 패거리 중 누구든 만나자면 어느 때나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런 자리는 끝까지 지켜줍니다. 어느 날 ‘하나코’는 ‘패거리들’과 지방 여행을 갔는데, 그 날 밤 패거리들이 광란의 추태를 부리자, ‘하나코’는 그곳을 피해서 밖으로 나섭니다. 그러나 아무도 ‘하나코’를 붙잡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마실 술이 있고 부를 노래가 있는 동안만은 ‘하나코’가 결코 관심거리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누군가와 만남을 이루기 위해서는 특별한 절차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독서와 복음에서 들었듯이, 주님께선 당연히 스쳐버릴 수도 있었던 나병환자들과 서로 마주앉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계산기가 아니라 장미 한 송이를 들고 그 환자들의 미세한 동작들 하나하나까지 그 뜻을 읽어내고 있습니다. 이어 서로에게 특별한 의미가 되는 치유의 사건을 일으켜서 변화와 성숙으로 이끌어 갑니다. 그러나 자기들끼리 무리지어 남들이 만들어 준 유행을 따랐던 10명은 그 치유된 사건을 당연하게 여긴 채 남들이 주입한 그 욕망에 휩싸여 살아갑니다.(17, 17∼18).

그러나 자기의 개성을 지키고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지며 살던 나아만 장군(1독서)과 사마리아인은 남이 주입한 유행을 거부하고 내 발로 걸어서 ‘감사’하며 삽니다(17,15). 특히 엘리사 예언자는 나아만이 ‘감사’의 표시로 건네주는 선물을 거절하고 있습니다(1독서). 이것은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달라야 하고, 그것은 세상과 적당하게 타협하며 섞이기를 거부하는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휴대폰에다 귀를 바짝 붙여놓고 수다를 떨면서 걸어가는 이들 속에서, 카메라 앞에서 속옷까지 벗어던지며 돈이 주는 쾌감에 머문 채 자신이 시들어져 가는 것을 잊고 사는 그 당돌함 속에서 오늘의 ‘패거리들’문화를 발견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사람 사이는 물론 꽃 한 송이까지도 소유욕으로만 보는 그 미친 권력과 이웃을 이해득실의 눈으로만 보는 자본의 권력을 거부하게 합니다. 비록 아름다운 모델의 부드러운 음성과 현란한 동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다가 혼자 남는 한이 있어도 자유와 창조의 길로 들어서라는 것이 오늘 복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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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석찬귀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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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선생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 가까이에 가지도 못하고, 멀찍이 서서 나병환자 열 사람이 크게 소리칩니다. 자신들이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실 분은 바로 예수님뿐임을 그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자신들 앞을 지나가는 예수님께 있는 힘껏 자비를 청합니다. 그들의 안타까움을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들의 애원을 물리치지 않으시고 그들 모두의 병을 깨끗이 고쳐주십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서 단 한 사람의 이방인만이 돌아와 예수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립니다.

비록 9명의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러 오지 않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 모두도 치유해주셨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이런 분입니다. 우리도 하느님께 끊임없이 용서와 치유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지만, 그런 우리 중의 아홉은 감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치유해주시는 분이시고, 용서해주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은 이만큼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우리는 이 하느님의 자비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들처럼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우리도 끊임없이 고백해야 합니다. 이런 우리들의 고백을 통해 하느님은 우리들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치유해 주십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주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리지 못했으면 이제부터라도 감사를 드리는 삶을 살아갑시다. 제 1 독서의 나아만과 복음의 이방인 나병환자처럼 주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립시다. 이처럼 주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리는 것은 바로 우리들의 삶이 주님께로 완전히 돌아섬을 의미합니다. 치유되고 나서 다시금 똑같은 죄를 반복하는 우리들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즉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에의 길로 들어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여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너희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의 뜻이로다."(복음 환호송)

부산교구 이재혁 루가 신부
  |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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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 가시오. 그대 믿음이 그대를 구원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나병환자 열 사람을 만난 이야기였습니다. 유대교 율법은 나병환자가 사람들 가까이에 오는 것을 금합니다. 오늘 이야기에 등장하는 열 사람도 멀찍이 서서 예수님에게 외칩니다. “예수 선생님,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은 제관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병이 치유된 사실을 확인하고 공민권을 회복시켜 주는 것은 제관의 몫이었습니다. 그들은 제관에게 가는 도중에 몸이 깨끗해졌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들 중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은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시오. 그대 믿음이 그대를 구원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 이야기의 줄거리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는 나병을 하늘이 준 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불행 앞에 우리는 하느님 혹은 하늘이 준 벌이라고 쉽게 생각합니다. 나병은 천형(天刑), 곧 하늘이 내려준 형벌로 일컬어진 대표적 불행입니다. 한하운 시인은 중국과 일본에서 공부하고 함경남도 공무원으로도 재직했던 사람입니다. 자신이 나병에 감염된 사실을 알고 후에 남긴 시의 몇 구절입니다. “죄명은 문둥이.../ 이건 참 어처구니없는 벌(罰)이올시다./ 아무 법문(法文)의 어느 조항에도 없는/ 내 죄를 변호할 길이 없다/...나를/ 아무도 없는 이 하늘 밖에 내세워놓고/ 죄명은 문둥이..../ 이건 참 어처구니없는 벌이올시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셨다, 혹은 나병을 깨끗하게 하셨다는 이야기는 복음서들 안에 많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들은 기적을 행하는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시대 사람들, 특히 유대인들은 질병을 비롯한 모든 불행을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병이나 나병을 낫게 하셨다는 이야기는 하느님이 죄에 대한 벌로서 병을 주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벌을 주거나 저주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온 몸으로 선포하셨습니다. 벌주고 저주하는 일은 우리 인간이 하는 일입니다. 그와 반대로 하느님은 고치고 살리시는 분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믿으신 하느님이고 그렇게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를 아홉 명은 배은망덕했고, 한 사람만 감사할 줄 알았다는 교훈으로 이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정도의 교훈은 우리의 흥부전, 춘향전에도 있고, 이솝의 우화들 안에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 처신을 위한 윤리를 가르치지 않고 하느님을 가르쳤습니다. 오늘 복음에 치유된 사람들 중 한 사람은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돌아와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드렸다”고 말합니다.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은 성당 전례에서 신자들이 성가를 부르는 모습입니다.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드리는 행위는 그리스도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오늘의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베푸심을 받은 것은 열 사람이지만,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알아보고, 찬양하고 그것을 배우려 나선 사람은 한 사람뿐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이 하신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대 믿음이 그대를 구원했습니다.” 예수님에게 돌아온 한 사람은 하느님의 베푸심에 감사드리면서, 그리스도 신앙인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셔서 우리가 살아 있습니다. 나의 삶, 나의 가족,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내가 할 수 있는 일들, 모두가 하느님이 베푸셔서 있는 것들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에는 감사할 일이 많습니다. 우리가 먹는 것, 우리가 입는 것, 우리가 사는 집, 친한 친구들 모두가 우리에게 베풀어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쓰라린 순간들도 있습니다. 오늘의 나병환자들과 같이 사람들로부터 버려지고 참담한 심경으로 하늘을 원망하며 살 수밖에 없는 순간들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서, 돈이 없어서, 계획했던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좌절과 실망을 안고 실의에 차서 배회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생존이 없으면, 그런 고통과 좌절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누리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만 확대해서 보는 시력의 소유자들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주변에 두고도, 우리를 미워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들만 확대해서 보는 시력의 소유자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 있는 은혜로운 삶의 따뜻함을 외면하고, 멀리 있는 냉혹함만 탐지하고 불행하게 살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쁩니다. 더 많이 갖고, 더 건강하고, 더 높은 자리를 얻기 위해 바쁩니다. 대책도 세워야 하고, 계획도 만들어 시행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치유된 열 명의 나환자 중 아홉 명도 바삐 가야 했습니다. 자기들이 원하는 바를 차지하고 누리기 위해 바삐 가야만 했습니다. 이제 치유되었으니 할 일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자기가 먼저 해야 할 일을 보았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경멸하던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그는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그분의 베푸심을 큰소리로 찬양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 엎드려 예수님을 배우는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 안에는 초기 교회가 생각하던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소박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사람들의 외면이라는 절망을 안고 살았습니다. 그들은 살리시는 하느님의 힘이신 예수님을 만나 건강한 몸으로 사회에 복귀하였습니다. 병에서 혹은 소외에서 회복되어 사회로 돌아오는 것은 모두 고치고 살리시는 하느님이 하시는 은혜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느님이 하신 일이라고 깨닫고 하느님을 찬양하고, 예수님에게 와서 엎드려 예수님을 배우는 사람의 수는 적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대 믿음이 그대를 구원했습니다.” 신앙이 주는 구원은 그런 사람에게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은혜로우신 하느님에게 감사드리고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일을 배우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인간을 소외시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은혜로운 분이십니다. 그 사실을 알고 예수님에게서 그분의 일을 배워서 구원에로 나가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섬기고 내어주고 쏟아서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라고 오늘도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말씀을 들어서 새롭게 살아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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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감사할 줄 모르는 아홉에 속한 나 자신.

철저한 분업과 사유재산이 보장되는 현대사회의 종합경제 안에서 상품의 교환과 유통을 원활히 하는데 꼭 필요한 것은 단연 ‘돈’이라고 부르는 화폐이다. 돈은 유통경제와 시장경제의 매개적 수단이며, 돈은 그 자체로도 증대(增大)된다. 누구나 상품을 구입한 대가로 그 가격만큼 정확히 돈을 지불해야 한다. 몸이 아파 병원에 가더라도 ‘의술(醫術)을 구매한 대가’를 돈으로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현대인의 삶의 거의 대부분은 돈과 함께 전개된다.

현대인은 돈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에는 명백한 이론이나 정확한 계산으로 되지 않는 일들도 많다. 여기에 속하는 것 중의 하나가 공짜, 또는 선물이다. 선물은 이론이나 계산의 선을 무너뜨린다. 합리적인 이론이나 계산에는 ‘감사’라는 단어가 그리 걸맞지 않지만, 선물에는 참으로 어울리는 말이다.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은 인간관계에서, 나아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꼭 필요한 요소이다. 그러기에 감사는 하나의 덕(德)이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와 전혀 다른 믿음을 가지거나, 하느님을 우리와 다르게 배운 사람들에게서 이러한 덕을 발견한다. 그들의 덕이 우리들의 것보다 크게 발견되거나 느껴진다면 우리는 참으로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언젠가 “그저 한 말씀만 하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낫겠습니다.”라는 백인대장의 말을 듣고 감탄하신 예수께서 따라오는 군중들에게 “잘 들어 두어라. 나는 이런 믿음을 이스라엘 사람에게서도 본 일이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읽은 적이 있다.(루가 7,2-10) 유대인들보다 이방인들이 가진 큰 믿음에 대한 예수의 감탄은 복음의 단지 몇 군데서 발견될 뿐이지만,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가나안 여자의 믿음(마태 15,21-28)이나 시로 페니키아 여자의 믿음(마르 7,24-30)이 그랬고, 루가복음사가 고유의 편집에 속하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10,25-37)와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치유된 나병환자 열사람 중에서 감사를 드리기 위해 예수께 돌아온 단 한 명의 사마리아 사람(17,11-19)이 그렇다.

오늘 복음은 단연 그 진수(眞髓)를 이룬다. 그 뿐만이 아니다.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 고향 나자렛에서 배척을 받자, 구약의 예언자 엘리야가 당시대 이방인이었던 시돈지방 사렙다 마을의 어느 과부만을 구제한 일(1열왕 17,7-16)과, 엘리사가 수많은 나병환자들 중에서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을 깨끗하게 고쳐 주었다(2열왕 5,1-14)는 이야기를 통하여 메시아이신 예수님 자신의 구원활동이 이방인들을 향할 수도 있음을 암시하셨다.

물론 예수님은 이 이야기로 말미암아 고향 사람들의 화를 불러 일으켜 벼랑 끝에서 객사할 뻔한 위기를 모면하셨다.(루가 4,16-30) 아무튼 예수님의 이방인에 대한 연민의 정과 그들 믿음에 대한 감탄은 자신의 지상적 사명과 아버지의 보편적 구원의지를 담은 것으로서, 복음선포 가운데 아주 중요한 테마 중의 하나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노골적으로 배척했고, 초대교회 또한 유대인들을 향한 선교에 다분히 어려움을 안고 있었던 사실을 감안한다면, 위에 열거한 대목들은 이방인 선교에 대한 복음서 저자들의 의도가 내포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 보다 위에 하느님과 예수님의 보편적 구원의지가 서 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그리스도인이든, 어느 누가 되었든 간에 하느님 앞에 자신의 참된 믿음을 발원(發願)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그는 분명 감사할 줄 아는 자이다. 감사할 줄 하는 자가 참된 믿음을 가지기 마련이다. 자신의 처지가 좋건 나쁘건 언제나 감사할 줄 하는 사람이 구원 받을 수 있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다.(19절)

오늘 복음이 보여주는 그 진수를 보자.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나병환자 열 사람이 마을 안에 살지 못하고 어귀에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율법이 규정하고 있는 바였다. 레위기 13장은 사람에게 생긴 문둥병이 그 자체뿐 아니라 환자까지 부정한 것으로 선언하고 진지에서 격리시켜 살도록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부정을 선언하는 보건소 소장은 바로 사제들이다. 사제들은 이들의 병이 전염될 위험 때문이 아니라 경신적 의미에서 ‘부정 탄다’는 이유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동료와 가족으로부터의 격리요, 사회로부터의 추방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삶이란 죽음에 부쳐진 실존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한 가닥의 희망이 있었으니, 바로 기적을 베푼다는 예수와의 만남이었다. 그들은 소문으로만 들었던 예수께 나아가 멀찍이 서서나마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자신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줄 것을 절규한다. 이 절규에는 표현되지 않은 ‘감사’가 들어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잠재적일 뿐이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의 몸을 보여라!”(14절)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선 율법의 규정을 따른 것이었지만, 그 말씀 안에 이미 기적의 힘이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열 사람의 믿음이 약하거나 없었다면, 자기들이 나을 때까지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거기서 사생결단을 낼 참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들이 사제들에게 가는 동안에 몸은 깨끗해진다.

오늘 복음의 초점은 열 명의 나병환자가 치유 받는 사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찬양하러 돌아온 한 명의 사마리아 사람이 가진 천진난만하면서도 감동을 자아내는 믿음에 있다. 나머지 아홉 명은 그길로 계속 달려가 사제들에게 자신의 몸을 보임으로써 ‘부정에서 정함’을 인정받고, 제단에 희생제물을 올린 다음, 그동안의 격리와 추방으로부터 당한 불이익을 만회하는 데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명만은 정신이 있었다. “몸이 깨끗해진 사람은 열 사람이 아니었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 갔느냐?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온 사람은 이 이방인 한사람밖에 없단 말이냐!,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17-19절)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대하면서, 분명히 열 사람이 다 처음에 믿음을 가졌었는데, 막판에 와서 왜 한 명만이 믿음을 가졌다는 말인가라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예수님은 과연 무엇을 바라고 계신 것인가? 여기서 우리가 시도해야 할 것은 9명의 믿음과 1명 사마리아 사람이 가진 믿음의 구별이다. 이는 곧 감사의 구별이기도 하다. 9명의 믿음은 필요와 욕구(欲求)의 질서에서 기인된 것이며, 사마리아인의 믿음은 원의(願意)의 질서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전자는 육체의 치유만으로 기뻐하는 반쪽의 믿음이요, 후자는 ‘무상’으로 주어진 치유에 대한 완전한 깨달음의 믿음이다. 즉, 후자의 경우가 제대로 된 감사인 셈이다. 9명의 믿음은 필요의 성취에 머물러 버린 그 다음 단계가 없는 믿음이며, 예수께로 돌아온 자의 믿음은 하느님을 자기 삶의 진정한 파트너로 존중하고 인정하는 살아 있는 믿음이요 감사인 것이다.

믿음은 우리의 마음을 긍정적으로 집중시킬 때 얻어지는 창조적인 에너지이다. 우리는 이 믿음을 통하여 사물과 운명을 변화시킬 수 있으며, 우리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다. 예수님은 대부분 기적을 행하실 때 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하셨다. 앉은뱅이를 향하여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할 때에 그가 일어났고, 장님에게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할 때에 그는 다시 보게 되었다.

돌아온 한명의 사마리아 사람에게 해 주신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본질적인 치유의 힘이 너 자신 안에 있다”고 하시는 말씀과도 같다. 그것은 그가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지녔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도 분명 이런 힘이 있다. 문제는 우리 안에 있는 이러한 힘이 하느님의 현존임을 망각하고 순전히 자기 것으로 여기는 데 있다. 즉 무상으로 와 계시기를 원하시는 하느님 스스로임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하느님과 그분의 사랑과 능력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궁극적 목적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곳은 우리가 실제로 서 있고, 살아 있고, 참 삶을 살고 있는 이곳뿐이다.

우리에게 맡겨진 작은 세상과 거룩한 관계를 맺고, 매일 일어나는 평범한 기적의 외적인 모습에 맴돌지 않고, 그 기적의 내적인 원동력에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길 때 거기에 하느님은 자신의 신적 현존의 거처를 마련하시는 것이다. “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느냐?” 결국 예수님께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나병도, 불치의 병도 아니요, 어떤 어려움이나 고통도, 천재지변도 아니다. 문제는 늘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 바로 나 자신이다.

▮ 부산교구 박상대 신부
  |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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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하느님께 얼마나 충실한가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 전체를 흐르는 중요한 주제는 “믿음”, 곧 “성실함”입니다. 지난주 복음 생각에서 “믿음”과 “성실함”이 히브리어로는 같은 단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신약이든 구약이든 모두 믿음, 곧 성실함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것은 동일한 생각입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믿음을 지닌 이들은 유다인이 아니라 이방인들입니다. 먼저 1독서에서는 당시 이스라엘과 적대관계에 있던 시리아 사람 나아만이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를 찾아옵니다. 자존심이 강했던 나아만은 처음에는 엘리사의 말을 듣지 않지만, 수행원들의 말을 듣고 엘리사가 시킨 대로 하자 나병이 낫습니다. 이에 나아만은 엘리사에게 큰 선물을 주면서 오직 하느님만을 섬기겠다고 다짐합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선물을 받지 않고 나아만을 고향으로 돌려보냅니다.

오늘 1독서에는 나오지 않지만 이 이야기에 이어 엘리사의 종 게하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게하지는 나아만이 가지고 돌아가던 선물에 탐을 내고 쫓아가서는 거짓으로 그 선물을 챙겨 돌아옵니다. 게하지가 자신의 말을 거역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엘리사는 나아만의 병이 게하지와 그 후손에게 돌아가도록 만듭니다. 이방인은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충실히 지키는데, 유다인 게하지가 자기 마음대로 하느님의 계획을 거스르다 나병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 이야기의 초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 열 사람을 치유해 주십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유다인이 아홉 명이나 되었는데, 그들은 치유를 얻은 뒤 즉시 자기 갈 길을 가버립니다. 하지만 열 가운데 유다인들의 원수였던 사마리아 사람 하나만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 충실한 그를 보면서 사마리아 사람인 그가 진정 구원을 얻었다고 선언하십니다.

구원은 출신성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충실한가, 믿음이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교회를 다니고 있고, 많은 이들이 하느님의 은총을 입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 충실한 사람, 믿음을 지닌 사람, 하느님의 은총에 진정으로 감사하는 이들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는 것이 오늘 독서와 복음의 말씀입니다.
사실, 세상에서 큰 어려움 없이 살아갈 때는 이런 가르침이 별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진리를 위해 살아가는데도 불구하고 고통당하거나, 핍박받고, 감옥에 갇히거나 박해받으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많은 이들은 고통, 핍박, 박해 상황이 되면 하느님을 비난하며 떠날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지닌 우리에게 사도 바오로는 오늘 2독서에서 분명하게 말합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우리가 견디어 내면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이며, 우리가 그분을 모른다고 하면 그분도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2티모 2,11-12)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충실함,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처럼 우리에게 충실한 분이시기 때문에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는 분이시면서도 동시에 당신 약속에 충실하신 분이시기에 당신을 버리는 이들을 기꺼워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 부산교구 염철호 신부 : 2016년 10월 9일
  |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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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5   [수도회] 보라, 내가 곧 간다. ...(묵시 22,12)  [10] 2853
774   [부산] 하느님의 미래를 택한 사람은 하느님의 현재를 삽니다  [4] 2746
773   [마산] 교회의 생명력은 평신도에게 있다.  [3] 2499
772   [서울] 부활을 믿는 사람  [3] 2330
771   [안동] ‘복음을 전하는 발걸음’  [1] 1175
770   연중 제33주일 세계 가난한 이의 날  130
769   [춘천] 신념  [3] 2316
768   [원주] 재난의 시작  48
767   [대전] 착한 교우들에게 예수님의 측은지심을  [1] 2625
766   [전주] 종말 전의 재난  [2] 58
765   [청주]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1] 64
764   (녹) 연중 제33주일 독서와 복음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1] 2120
763   [수도회]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5] 1496
762   [수원] 그리스도의 몸으로 사는 삶  [2] 2355
761   [서울] 부활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3] 2303
760   [마산] 영세한 미신자(未信者)가 많다.  [1] 2281
759   [대구] 부활의 삶, 지금 여기서 시작되고 있다.  504
758   [인천]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4] 2837
757   [부산] 알 수 없는, 그래도 좋은 하느님 나라  [2] 2585
756   [안동] 부활을 믿는다면 부활을 살아가십시오  [1] 2574
755   [대전]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은 모두 살아있는 것입니다”  [1] 2901
754   [청주] 부활 신앙  [2] 87
753   [광주] 학벌(學閥)과 사두가이파  2579
752   [전주] 부활 에 대한 확신과 희망  63
751   [춘천] 영원히 하나인 하느님 가족  [2] 2399
750   [원주] 부활 이후의 새로운 삶  56
749   [군종] 두 여자  2133
748   [의정부]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64
747   (녹) 연중 제32주일 독서와 복음 (하느님께서는 산 이들의 하느님)  [3] 1933
746   [수도회] 용서와 자비  [2] 2075
745   [전주] 자캐오, 아! 행복한 사람  [1] 1719
744   [인천] 자캐오! 나무에서 (빨리)내려와!  [3] 2172
743   [서울] 회개의 증거는 착한 행실  [3] 1742
742   [안동] 자캐오 이야기  [1] 2320
741   [부산] 세리 자캐오와 예수님의 만남  [2] 12015
740   [수원] “저 사람이 죄인의 집에 들어 가 묵는구나!”  [3] 20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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