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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모든 일에 감사드릴 줄 아는 신앙인이기를...
조회수 | 2,927
작성일 | 07.10.12
우리 인간사에 있어서 가장 슬프게 만드는 것이 있 다면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물에 빠진 사람을 살려 놓으니 자기 보따리를 내어놓으라는 것처럼, 은혜를 입었지만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오히려 배신으로 그 갚음을 하는 배은망덕(背恩忘德)한 행위일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접할 수 있는 모 습입니다. 미물이라 일컫는 짐승들도 자기가 입은 은 혜를 잊지 않고 언젠가는 목숨을 다하여 꼭 갚는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모르는 사 람을 짐승만도 못한 사람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만물 의 영장이라고 일컫는 우리 인간들은 입에 달면 삼키 고 쓰면 뱉어버리는 얕은 잔꾀를 부려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열 명의 나병환자들을 낫게 해주십니다. 병이 나은 열 명의 나병환자 중에 단 한 사람만이 가던 길을 멈추고, 즉시 돌아와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 사마리아인에게 더 큰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17,19).” 이 말씀에서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구원은 이제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선택된 민족인 유다인들 뿐만 아니라, 신앙고백을 하는 이방인들에게도 열려져 있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본다면 하느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전혀 느끼지 못한 나머지 아홉 명의 유다인들은 육체적으로는 건강을 회복하였는지는 몰라도 오히려 구원의 대열에서는 낙오자로 남게 되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의 최종 목표는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구원입니다. 구원의 초대에 최고의 응답은 바로 감사일 것입니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할 줄 아는 신앙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원하는 일이 아닐지라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여라(1테살5,18)”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때 비로소 하느님의 구원행위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감사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 중에서 그 어느 하나라도 당연하다고 여기지 않는 마음에서 시작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감사할 줄 아는 사람만이 참된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감사와 믿음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를 하게 되면 오늘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린 사마리아인처럼 자신을 낮출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감사할 줄 알고 겸손할 줄 아는 사람의 삶은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의 삶을 산다는 것은 하느님께 찬양과 흠숭을 드리는 행위인 동시에 예수님께서 베푸신 모든 일에 감사드리는 진정한 신앙인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구원의 은혜가 어떠한 모습으로 다가오든지 간에 우리 신앙인들은 배은망덕한 자세가 아니라, 겸손을 통한 감사의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 신앙인들에게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위로의 말씀을 건네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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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김영우 마르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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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활한 금도

어느 주일에 미사 봉헌 부탁을 받고 성당 골목으로 들어서는데 공교롭게 개신교 교회가 성당 옆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 교회 입구에서는 담임목사로 보이는 분이 주일예배에 참례하는 신자들을 일일이 맞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그 목사님이 건네는 인사마디가 무척 인상 깊었습니다“. 주일예배에 참석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어쩌면 너무나 당연하고 대수롭지 않은 일인 듯 뵈지만, 그때 속으로‘과연 나는 주일미사에 참례하는 신자들에게 그런 인사를 드린 적 있었던가? 아니, 과연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적이 있었던가?’ 하며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이란 참으로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 생활의 특징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우리는 여러 가지로 그 특징들을 말할 수 있겠지만,‘ 감사하는 생활’이라는 대답만큼 가장 적절한 대답은 없는 것 같습니다. 실로‘감사하는 생활’이야말로 우리들 신자들의 삶이며, 또한 그것은 우리의 보람이며 자랑이기도 합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는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들으며 우리의 삶을 돌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은혜를 입고 있는지 모릅니다. 지금 이 순간, 이 성당에 와 있다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서도 천번 만번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할 줄 압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간절히 외치던 사람들은 곧 그 자비를 망각해버립니다. 신자가 되어 살아간다는 자체가 하느님께서 주신 큰 은총이며 자비이지만 우리는 너무 쉽게 이를 망각하고 있습니다.

일상 속에서 우리 주변의 가족 혹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나 당연하고 대수롭지 않은 일인 듯하지만, 사실 우리가 감사에 너무 인색하지 않은가 싶습니다. 어느 저명한 국어학자가 쓰던 표현 중에‘쾌활한 금도(襟度)’라는 말이 있습니다. 평소에 남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넓은 도량을 뜻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잘 이룰 수 있도록 하기위해서는 먼저 일상 속에서 타인에 대한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좁은 마음은 한순간의 그것밖에 볼 수 없어 곧 망각
해버립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우리가 진정으로 구원받은 사람이기 위해서는 감사할 줄 아는 넓은 마음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임석환 스테파노 신부
  |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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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감사가 있는 믿음

믿음이 하루 아침에 생기고 완성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단감 익히듯 시간으로 덮어두고 기다려 얻을 것도 아닙니다. 믿음은 나를 떠나 주님 당신을 향해 있는 것인데도 자신과 세상의 틀 속에 매여 갇혀 있으니 늘 설익은 믿음입니다.

특별한 기회에 가끔은 용감하게 주님께 나를 내맡겨보지만 그 일이 지나고 긴장이 풀어지면 다시 이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버립니다. 그러니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하시는 주님 말씀처럼 ‘나를 살릴 내 믿음’을 과연 내 안에서 찾을 수 있을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복음에서 나병이 낫고도 그 엄청난 은혜를 입은 당사자들이 자기를 낫게 해 주신 분을 찾아와 감사드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꽤나 황당하고 도대체 무슨 이런 경우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그 시대에 하느님 말고 누가 나병을 낫게 했단 말은 들어본 일도 없었을텐데 예수께 와서 그렇게 자비를 베푸시라고, 제발 낫게 해달라고 청했다는 것은 분명 그들의 믿음입니다. 더구나 별다른 치료나 도움도 주지도 않고서 ‘가서 사제에게 너희의 몸을 보여라’하며 돌려보내시는 주님의 요구에도 그들이 그렇게 순순히 따랐다는 것도 그분께 걸었던 그들의 기대와 믿음이 컸다는 것을 짐작케 합니다.

그리고 실재로 그 믿음의 결과로 사제에게로 가던 도중에, 곧 믿음의 길을 따라 가던 과정 안에서 그들의 병은 나았습니다. 하지만 나병환자 열의 아홉은 거기까지가 그들 믿음의 한계였습니다. 깨끗해진 사람은 열이었지만 오직 사마리아 사람만이 돌아와 감사드렸을 뿐입니다. 감사를 잊어버린 믿음은 더 이상 그들 믿음이 믿음으로 남아있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들이 다시 믿고 의지하고 싶은 것은 깨끗하게 되돌려진 육신과 그 사실을 보장해줄 율법과 사제들, 그리고 다시 함께 할 가족과 이전 세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은총처럼 믿음의 눈이 열리고 빛과 희망으로 받아들여졌던 주님을 그들은 마치 어둠 속 섬광처럼 다시 그들 삶의 어둠 속으로 묻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주님이 이루신 기적은 보지만 정작 그 일을 이루신 주님은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조직이 죽고 감각을 잃어 온몸이 일그러지게 했던 육신의 나병은 나았지만 감동과 감사를 잃어버린 영의 무감각은 그들의 또다른 나병으로 남게 된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열심히는 하고 싶은데 늘 마음뿐이라 합니다. 감사드릴 일들도 많은데, 왠지 요즘에 와서는 기도도 못하고 주일도 잘 못지켜서 주님께 정말 죄송해 죽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물어봅니다. “정말로 주님을 믿기는 믿고 있습니까?” 믿음은 아스피린처럼 철따라 증상 따라 필요할 때마다 꺼내 복용하는 그런 것일 수 없습니다. 믿음은 삶의 시작과 마침 그 전부를 위한 우리의 마음, 우리 영혼의 자세입니다. 현재를 지키고 미래를 다지는 든든한 담보로, 혹은 아홉 나병환자들처럼 기껏 자신이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다시 회복할 방편으로 삼는 그런 믿음은 아니라야 하겠습니다.

1독서의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은 나병이 낫자 감사하며 이스라엘의 흙을 담아가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 흙으로 제단을 쌓고 일생을 통해 이제는 오직 하느님만을 섬기며 하느님만을 위해 제사를 올릴 것을 약속한 것입니다. 참 믿음이 없으면 호들갑스런 인사치레는 할지 몰라도 참된 감사, 일생을 통한 감사는 결코 드릴 수 없습니다. 감사드림 자체가 믿음의 열매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우러나오는 것 자체가 건강한 믿음으로 오늘을 살고 있다는 영적건강의 청신호일 것입니다.

믿음은 언제나 희망을 향해 열려져 있고, 내 삶의 모든 마디 마디들이 기쁨과 평화로 채워지게 하는 기초입니다. 믿음이 결코 실망을 안겨주지 않을 줄 알기에 믿는 이들은 그래서 늘 감사함으로 자신의 삶을 채워 갈 것입니다.

▮ 대구대교구 서정섭 바르톨로메오 신부
  |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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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예수님의 시각

어떤 신학생이 칠곡 가톨릭피부과병원에 있는 한센인 공동체에 봉사 활동을 갔습니다. 봉사 활동이라고 해 봐야 입원실 청소를 도와주고 외로운 분들 말벗이 되어드리는 것입니다. 물론 모두음성 환우들이었기에 감염 위험은 전혀 없었습니다. 하지만 병의 흔적이 팔과 다리, 얼굴에 그대로 남아있는 그분들을 대할 때 처음에는 어쩔 수 없는 거리감을 느꼈습니다. 몇 시간만 함께 있으면 그런 느낌은 다 사라진다는 선배들의 말을 듣고 열심히 청소하고 함께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봉사 활동이 다 끝나고 식사 시간이 되었습니다. 병원 식당 안 그 신학생 앞자리에도 한 명의 한센병 환우가 앉았습니다. 그 분은 특히 얼굴에 병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던 분이었습니다. 눈한 쪽과 코가 없었고, 독한 약의 영향으로 얼굴빛이 거뭇했습니다. 서로 묵묵히 밥을 먹고 있는데 그 환우가 자신의 식판에 있는 삶은 계란을 손으로 집어 건네주며 ‘학사님, 하나 더 드세요.’라고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그 학생은 삶은 계란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순간 손이 잘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식욕도 떨어졌습니다. 큰 용기를 내어 맛있게 먹는 척하고 학교로 돌아온 학생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머리로만 사랑을 이해했던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신학생이 26년 전 저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무려 열 명의 한센병(나병) 환자를 만나십니다. 약이 없을 때니까 당연히 전염될 수 있는 양성 환자들이었을 것이고, 말할 수 없이 일그러진 외모였을 것입니다. 아마도 저라면 도망갔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르십니다. 소리치며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다가오는 그들을 바라보십니다. 그리고 말씀을 건네십니다. 당시의 모든 사람들 눈에 나병 환자는 중죄인이었습니다. 접촉하거나 만나서는 안 되는 부정한 이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눈에 그들은 그저 치유가 필요한 한 명 한 명의 소중한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시각입니다. 그 시각을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자비’라는 단어로 표현하십니다. 열 명 가운데서 한 명은 자신이 치유된 것을 깨닫고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다시 예수님 앞으로 돌아옵니다. 자신이 열심히 청해서가 아니라, 그 고통에도 불구하고 착하게 살아왔기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예수님께서 거저 주신 선물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거저, 공짜로 주시는 모든 것들을 우리는 ‘은총’이라고 부릅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예수님의 시각을 배웁시다. 그리고 이미 삶 안에서 거저 받은 수많은 선물들을 다시 한 번 기억하고 하느님께 감사드립시다.

▮ 대구대교구 한인갑 베네딕토 신부 : 2016년 10월 9일
  |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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