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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항상 감사하는 마음
조회수 | 2,673
작성일 | 07.10.12
예수께서는 열 사람의 나병 환자에게 치유의 은혜를 베풀었지만 한 사람만이 돌아와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네 믿음이 네 행동이 네 감사하는 마음이 너를 살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나병이 낫게 된 사실보다도 그 병을 낫게 해주신 예수님을 찾아 뵙고 감사를 드렸기에 병의 치유는 물론 생명의 치유까지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편 감사 드릴 줄 몰랐던 다른 나머지 아홉  사람은 나병에서 치유되는 은혜는 얻었지만 참 생명을 얻을 기회는 놓쳐 버렸습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께 무한한 선물을 받으면서도 감사할 줄 모른다면 아홉 사람의 나병 환자와 다름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자신의 능력이나 덕으로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교만과 고마운 것을 생각하기보다는 잘되기만 늘 바라는 욕심은 우리가 감사하며 살아가는 길을 방해합니다.

우리 삶에는 항상 감사거리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모든 것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언제나 인생의 어두운 면, 부정적인 면만을 보게 됩니다. 감사는 더 감사할 여건을 만들어 주지만 불평은 불평거리만을 만들어 줄 뿐입니다.

“성시와 찬송가와 영가를 모두 같이 부르십시오. 그리고 진정한 마음으로 노래 불러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또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 드리십시오(에페 5, 19-20).”

삶의 환경이 좋던지 나쁘던지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늘 감사드리는 삶은 구원의 길과 복음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의 특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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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박호철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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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는 또 하나의 축복이다

묵상 길잡이
감사할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사람은 없다. 감사하고 하지 않고는 각자의 마음가짐에 달려있는 것이다. 하느님께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바로 하느님께서 세상만물의 주인이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임을 믿는 사람이다.

1. 임종 때의 감사

사람은 대개 죽음이 임박해 오면 자신의 일생을 회고해 보게 된다. 철학자 플라톤은 임종을 앞두고 자신의 일생을 회고하면서 세 가지에 대해서 감사를 드렸다고 한다. 첫째는 남자로 태어난 것을 감사하였고, 둘째는 야만인이나 짐승으로서가 아니라 그리스인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하였고, 셋째로 소크라테스와 같은 시대에 태어난 것을 감사하였다고 한다.

우리 속담에 “잘되면 제 탓, 잘못되면 조상 탓”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고 모든 책임을 질 줄 아는 자세가 아니라, 불행한 모든 일에 대해서 책임을 회피하는 운명론적 사고라 하겠다. 이는 또한 다행스럽고 좋은 일에 대해 감사할 줄 모르는 자세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2. 아홉은 어디 갔느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치유받은 나병환자 열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나병은 흔히 천형(天刑)이라고도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든 병고나 재난은 ‘죄의 벌’이라고 여겼기에, 이런 몹쓸 병은 큰 죄의 벌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나병환자들에게는 몸이 썩어 들어가는 병고와 안타까움도 참기 힘든 고통이지만, 자신이 하느님께 천벌받은 대죄인임을 이마에 써 붙이고 다니는 격이었기에, 그것이 더욱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병의 전염을 막는다는 이유로 나병환자들은 가족과 사회에서도 철저히 격리되어 일반인과 접촉할 수 없었고, 이것을 법으로 금하고 있었다. 나병환자인 줄 모르고 어떤 사람이 접근하면 “나는 불결한 사람이요.” 하며 소리를 쳐 자신이 나병환자임을 알려야 했다.

이렇게 사람과 하느님께 철저히 버림받은 나병환자들은 복음에서 보듯이 예수님께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고 멀찍이 서서 “예수 선생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하며 크게 소리쳐야 했다. 예수님은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의 몸을 보여라.” 하셨다. 가족들과 사회에 되돌아가려면 병이 나았다는 공인(公認)을 사제들에게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병이 아직 낫지도 않았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을 믿고 사제에게 갔다. 가는 도중에 그들의 병이 나았던 것이다. 그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처럼 뛸 듯이 기뻤을 것이다. 혹시 꿈이 아닌가 하고 자신들의 살을 꼬집어보았을 것이다. 그들은 기쁨에 취한 나머지 그 엄청난 은혜를 받고도 감사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유다인들이 이방인이라고 짐승처럼 멸시해 오던 사마리아 사람만이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렸다. 예수님은 “아홉은 어디 갔느냐?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인 한 사람밖에 없단 말이냐!” 하시며 감사할 줄 모르는 배은(背恩)을 꾸짖으신다.

제1독서에서 예언자 엘리사에게서 나병을 치유받은 이방인 장군 ‘나아만’은 감사하는 자세의 모범을 보여준다.

3. 감사는 또 다른 축복을 부른다

일반적으로 우리 한국 사람들은 서양 사람들에 비해 대체로 “감사합니다.”라는 말에 인색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내가 누군가를 애써 도와주었는데, 도움을 받은 사람이 진솔하게 감사를 표현할 때, 그를 돕기 위한 지금까지의 고통은 안개 걷히듯 잊혀지고, 더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생기는 것을 누구나 한두 번은 경험했을 것이다. 이렇게 감사는 또 다른 축복을 부르는 것이다.

더구나 신앙적인 차원에서 볼 때 우리가 가진 모든 것, 건강과 재능과 소유물, 나아가 나의 존재 그 자체도 하느님께 받은 것이 아닌가? 우리가 아무리 애써 노력해도 하느님의 도우심과 축복 없이는 우리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음을 우리는 경험으로 잘 안다.

올해는 예년에 볼 수 없었던 폭염으로 농작물이 더위에 녹아내리고, 닭이나 소나 가축들이 더위를 못 이겨 폐사(斃死)하였다. 그런데 어떤 해에는 계속되는 장마로 일조량이 부족해서 곡식이 제대로 여물지 못하다가도, 마지막 한 보름 동안의 늦더위가 벼 수확을 수백만 섬 증가시킨 때도 있다.

모든 일이 내 손에 달려있고, 내가 무엇이나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아직도 인생의 깊이를 모르는 철부지라고 해야 할 것이다. 감사할 줄 안다는 것은 세상만사가 주님의 손에 달려있음을 믿는 믿음의 또 다른 표현이다. 더 나아가서 당장 이해할 수 없는 시련과 불행이 오더라도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을 믿고, ‘모든 것을 선(善)으로 이끄시는 분’임을 믿으며 감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미사는 감사의 제사이다. 우리가 바치는 헌금에 가장 먼저 담아 봉헌해야 할 것은 바로 감사하는 마음이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는 마음은 그 어떤 기도보다 하느님의 뜻에 맞는 좋은 기도임을 깨닫자. 그리고 감사는 또 다른 축복의 근원임을 잊지 말자.

마산교구 유영봉 신부
  |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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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드리는 믿음은 사람을 구원한다”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靑山) 어린 때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人寰)의 거리 인간사(人間事)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소위 ‘ 문둥이 시인 ’이라고 불리던 한하운 시인의 ‘ 보리피리’입니다.

시인은 다시는 되돌아 갈 수 없는 고향과, 살 부대끼고 숨결 느끼며 함께 살아가는 인간 관계를 그리워하며 인간 사회에서 떨어져 나온 애끓는 마음을 노래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열 사람의 나병환자들은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소리 높여 애원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나병환자라고 하면 가족과 사회 공동체로부터 버려진 사람들이었으며 삶에 대한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은 그들을 버렸다 하드라도 예수님만은 자신들을 받아주시고 자기들에게 따뜻한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유일한 분이라는 것을 굳게 믿었고 또한 그 혹독한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유일한 분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자비와 능력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그들을 새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의 몸을 보여라” 하시고는 그들을 인간 사회 공동체의 당당한 구성원으로 회복시켜 주시고 돌려보내십니다.

하지만 변소에 갈 때의 마음이 다르고 갔다 와서의 마음이 다른 것이 얄팍한 인간의 마음이라는 말도 있듯이 예수님으로부터 자비를 입은 사람들 중에 겨우 한 사람만이 주님께 되돌아와서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엎드려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바로 그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하고 말씀하십니다. 그 사마리아인은 육체적인 치료를 받은 것뿐만 아니라 감사를 드리는 믿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 즉 구원을 얻게 되었지만 다른 아홉 사람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었고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행복과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성체성사를 통하여 날마다 사랑과 은총을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로서 우리는 그 열 명의 나병환자들보다 훨씬 더 풍성한 주님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따지고 보면 나병은 표면의 일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피부질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다 깊은 주님의 손닿음, 즉 보다 깊은 치유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를 닮았습니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세상의 일상적인 생활로 사라져 버린, 그래서 자기들의 입으로 고백한 작은 신앙마저 스스로 지켜가지 못하고 떨어져 나가는 아홉 사람입니까? 아니면 자신에게 닥쳐온 일이 은총이었음을 깨달은 한 사람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와 흠숭을 드린 한 명의 사마리아 사람입니까?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가 드리는 하느님께 대한 감사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께 바치는 완전한 신앙의 고백입니다. 아멘

조정제 오딜론 신부
  |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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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뭣이 중헌디!

올여름 한 영화를 통해 알려진 대사 한마디를 자주 듣게 됩니다.

“뭣이 중헌디!”

처음에는 그냥 영화의 대사로 받아들였지만, 자주 듣게 되면서 고민을 해 봅니다. ‘그래, 살면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각자의 바쁜 일상의 삶 속에서 우리 모두는 행복을 찾으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시대의 모습에서 아무리 열심히 해도 행복은 자꾸만 멀게 느껴집니다.

무엇이 문제일까?
무엇을 놓치고 있기에 내 삶은 자꾸만 제자리 걸음일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한 외국인. 사마리아 사람의 삶을 통해 답을 찾아봅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병이라는 굴레 속에서, 사람들의 멸시와 고통 속에서 살아온 사마리아 사람. 그의 삶 속에서 과연 감사라는 단어는 존재했을까(?)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감사의 삶은 어떤 고통 속에서 그 고통마저 하느님의 선물, 은총으로 받아들이게 합니다. 감사의 삶은 부족함 속에서 행복을 찾아낼 수 있지만, 감사의 삶이 없을 때는 풍요로움 속에서도 불만이 넘쳐납니다.

그렇기에 사마리아 사람은 고통의 삶 속에서도, 나병이 치유가 되었을 때도 감사의 삶을 살아냅니다. 그 사마리아 사람의 삶을 통해, 나의 일상과 신앙적 삶을 되돌아봅니다. 얼마만큼 일상과 신앙 안에서 감사의 삶을 살고 있는지. 하느님을 찬미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러 지나쳐 온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다시금 되돌아온 사마리아인의 삶을 바라봅니다.

신앙의 시작과 끝은 감사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 역시 중요한 것들을 계속해서 찾아 나가고, 얻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꾸만 우리는 이 감사라는 단어를 잊고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나의 신앙을 되돌아봅니다.

세상 안에서도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바람 잘날 없는 일상의 연속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 딛고 살아가는 이 자리, 이 시간에는 항상 하느님께서 함께하십니다. 그렇기에 우리 모두는 감사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금 오늘 복음을 통해, 사마리아인의 감사의 삶을 통해 나에게 묻습니다.

“뭣이 중헌디!”

▮ 마산교구 정윤호 베드로 신부 : 2016년 10월 9일
  |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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