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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조회수 | 3,084
작성일 | 07.10.13
그때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분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는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루카 17,11-­19)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지나간 것도 아름답다`
이제 문둥이 삶도 아름답다`
또 오려는 문드러짐도 아름답다`
`모두가`
`꽃같이 아름답고`
`…`꽃같이 서러워라`
`한세상`
`한 세월`
`살고 살면서`
`난 보람`
`아라리`
`꿈이라 하오리(한하운 <생명의 노래>)

나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보는 세계입니다. 모두가 꽃같이 아름답다고 하는 마음이 더 서럽고 애절하게 느껴집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의 어떤 마을에 들어가십니다. 이름도 없는 이 마을은 애매한 경계 지점에 있습니다. 양쪽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마을일 수도 있고, 두 지역을 연결하는 완충지대 구실을 할 수도 있는 지점입니다. 그때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옵니다. 나병 환자 그들은 사회에서 분리된 죄인, 서러운 운명을 안고 사는 사람들로서 갈릴래아에서도 사마리아에서도 환영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울타리 바깥으로 쫓겨난 경계 지점이 그들의 거처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면 나병이라는 공통점이 유다인과 사마리아인이라는 혈통과 지역감정을 넘어서서 함께 사는 공동체를 이루도록 한다는 사실도 의미가 있습니다. 절박한 아픔을 겪은 사람들은 꿈같은 한세상 사랑하며 살아도 아까운 시간을 눈 흘기며 살 이유가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 높여 말합니다.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처지이니 소리를 높일 수밖에 없지요. 세상에는 목소리조차 낼 수 없이 죽어 지내는 사람도 많고, 자신의 처지를 알리기 위해 목소리를 높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래도 무관심하니까 분신자살이란 방법을 선택하면서까지 부르짖기도 합니다. 예리코의 소경도 그랬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자신의 처지를 알릴 방법은 목소리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중하였지만 그는 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8,38)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 열 사람도 소리 높여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이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듯, 우리도 이런 이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레위기 13장에 따르면 악성 피부병이 생겼을 때 사제에게 보여주고 사제의 판결을 받아야 합니다. 부정한 이로 선언되면 공동체에서 격리되고, 병이 나으면 정결한 이로 선언됩니다. 예수께서는 나병환자 열 사람이 정식 절차를 밟아 공동체에 귀속할 수 있도록 배려하시면서 그들을 치유하기 위한 시간을 따로 마련하지도, 그로 인한 영광을 누리려고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가는 동안 낫게 해주십니다. 이 엄청난 결과에 비해 나병환자는 한 일이 없습니다. 단지 말씀에 순종하면 되었습니다. 나아만은 나병을 치유하기 위해 엘리사 예언자가 일러준 대로 요르단 강에 들어가 일곱 번 몸을 씻었습니다. 처음에 나아만은 이 치유 방법이 너무도 시시한 것이어서 화를 내며 돌아가려 했지요.(2열왕 5,10-­12) 하느님께서 일을 하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믿는’ 것입니다. 겨자씨 한 알 같은 단순한 믿음만 보이면 이 같은 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말씀을 너무 거창하고 힘든 것으로 여김으로써 은총이 머물 자리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루카복음은 예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한 이방인들을 언급합니다. 이웃에 대한 비유 이야기에서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준 사람은 사제도 레위인도 아닌 사마리아 사람이었고(루카 10,29-­37),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는 광경을 보고 있던 백인대장도 예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합니다(루카 23,47). 요한복음에서는 야곱의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이 구원을 받고 마을 사람들에게도 전해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요한 4,1-­42)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질책하시는 것도 같고 서운해하시는 것도 같습니다. 무엇보다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말하고 싶어하는 것은, 은혜를 받고 난 뒤의 일입니다. 주님은 백 마리의 양 떼 중 한 마리를 잃어버려도 아흔아홉 마리를 두고 그 하나를 찾아 나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열 명을 낫게 해주셨지만 단 한 명만 감사드리러 오는 실속 없는 일만 하십니다. 그런데 아홉은 어디로 갔을까요? 감사드리러 오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돌아보면 나 역시 아홉에 속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열 개를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와 찬양보다는 없는 하나 때문에 불평하고 있습니다.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와 찬양은 하느님께 드리는 영광입니다.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1코린 10,31)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되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상처의 치유가 구원의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열 명 중 구원에까지 이른 사람은 사마리아인뿐입니다. 자신에게 그만한 자격이 있어서 은혜를 입는 것이 아니라 거저 받은 선물임을 인식할 때 감사와 찬양이 우러나옵니다. 결국 이 사마리아인은 육신뿐 아니라 영혼까지 온전해진 것입니다. 아홉은 그들의 공동체로 돌아갔지만 여전히 하느님과 ‘멀찍이 선’ 관계에 머물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을 알고 믿고 고백하는 사람으로 살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유다인을 넘어서 세세대대 모든 이가 당신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도록 구원의 길을 넓혀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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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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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삶의 양 날개

믿음은 찬양과 감사로 표현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치유 받은 열 명의 나병 환자 중에서 오직 한 사람만이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찬양과 감사로 표현되는 나병환자의 믿음에 감동하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나병을 치유 받았으나 찬양과 감사를 드리러 오지 않은 아홉 명의 사람들은 온전한 치유가 이뤄진 것이라 볼 수 없습니다. 비록 육신은 치유 받았을지라도 하느님께 찬양과 감사의 고백이 없어 영혼은 치유 받았다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알렐루야’와 ‘아멘’의 두 말로 요약될 수 있다 합니다. 바로 ‘알렐루야’의 찬양과 ‘아멘’의 감사 생활이 있어야 비로소 건강한 신앙인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그래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찬양과 감사, 이는 믿음의 표현이자 우리 삶의 양 날개와도 같습니다. 불평과 불만은 영육을 어둡고 무겁게 하지만, 찬양과 감사는 삶의 양 날개와 같아 영육을 밝고 가볍게 만들어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합니다.

▮ 분도회 이수철 신부
  |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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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

예수님 시대에 나병환자들은 가족과는 물론이고 동네에서도 격리되어 살아야 했습니다. 사람들 근처에도 갈 수 없어서 멀찍이 떨어져서 이야기해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병이 나으면 사제에게 자신의 몸을 보이고 완치 판정을 받은 후에 비로소 가족의 품으로 다시 돌아가 예전처럼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만났던 나병환자 열 사람도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루카 17,11-13). 그들은 율법에 따라 예수님 멀찍이 서서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외치며 치유의 은총을 청했습니다. 예수님도 율법에 따라 그들을 만지거나 침을 바르는 등 신체 접촉이나 눈 맞춤도 없이 그저 말씀만으로 그들을 치유하셨습니다. 사제에게 완치된 자신의 몸을 보이고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 살라고 하셨습니다(루카 17,14). 예수님이 병자들을 치유해주실 때 그들과 눈을 맞추거나 손을 대시거나 침을 바르셨지만, 이 이야기나 백인대장의 종을 치유하셨던 이야기(루카 7,1-10)에서 보면 그런 행위 자체가 치유행위의 본질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보다는 그분의 말씀, 즉 그분의 의지와 마음이 진정한 치유 행위였던 것 같습니다. 나병환자들의 딱한 처지를 보고 당신 안에서 일었던 연민과 사랑의 마음이 곧 치유의 시작이고 마침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그분의 말씀대로 따라서 모두 치유를 받았습니다.

기도는 청원이고 바람입니다. 감사 또한 그것의 일부입니다. 우리는 성당과 집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며 우리의 청원과 바람을 아뢰고 또 감사의 기도를 바치기도 합니다. 치유, 건강, 사업, 평화, 문제해결 등 우리의 기도는 거의 대부분 이런 것들로 채워집니다. 이런 모습을 나무라고 기복적인 신앙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예수님도 당신이 만나셨던 사람들의 이런 처지를 나무라지 않으시고 그들이 바라는 대로 치유해주셨습니다. 그 때 그러셨던 것처럼 오늘도 우리의 이런 청원들을 모두 들어주시면 좋겠는데 현실은 그런 바람과 다르다는 것을 잘 압니다. 지극정성은 아니더라도 나름 열심히 기도하지만 자신이 바라는 대로 잘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실망하지 말고 의심을 버리면서 계속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치유 받은 열 명의 나병환자 중 한 명만 예수님께로 돌아와 감사인사를 했습니다. 나머지 아홉 명은 완치된 몸을 사제에게 보이고 가족 품으로 돌아갔을 겁니다. 그들은 율법을 따랐고, 도중에 돌아 온 한 명은 율법을 어긴 셈이 됐습니다. 먼저 사제에게 완치된 몸을 보여주고 판결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가족과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데, 그는 그 전에 먼저 예수님께로 가까이 와서 감사인사를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치유가 온전히 그분의 말씀, 마음, 의지 때문이라는 것에 대한 깊은 확신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생사가 걸린 율법 조항마저 뛰어넘을 수 있는 확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뵈었고, 그분의 또 다른 그리고 강력한 구원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8).”

그분의 얼굴을 직접 뵌 그 나병환자는 그때부터 죽는 날까지 그분의 얼굴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말씀을 결코 잊어버리지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다른 아홉 명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며 서운해 하시는 그분의 표정도 함께 기억했을 겁니다. 그가 그 이후 평화롭게 무병장수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어쩌면 나병이 재발해서 다시 격리되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랬다면 그는 예수님을 다시 애타게 찾았을 것이고, 그 분의 목소리와 말씀을 기억해냈을 겁니다. 오래 된 일이지만 어제 일인 것처럼 생생한 그 때가 떠올랐을 겁니다. 거기서 그는 다시 ‘예수님, 스승님!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라고 부르짖으며 기도했을 겁니다. 그렇게 그는 그분을 또 만났습니다. 그분이 자신을 만져주지 않아도, 그분을 직접 뵙지 못해도 그분께서 자신에게 자비를 또 베풀어주시리라 확신을 가졌을 겁니다. 그 당시 율법을 어기고 사제보다 먼저 그분에게 되돌아가게 했던 그 확신입니다. 사실 예수님이야말로 대사제이시니 그의 확신이 그를 하느님과 만나게 해준 것이었습니다.

살면서 필요한 것이 참 많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런 모든 것들을 다 이루어주시고 건강하고 평화롭게 살게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모든 청원과 바람의 근원에는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고 싶은 열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되돌아가 그분을 가까이서 뵐 수 있었던 그 나병환자가가 지녔던 그 확신입니다. 바로 ‘그분’ 이시다는 확신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 나병환자처럼 예수님을, 하느님을 뵐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도 그 이후에는 그분과의 만남과 말씀에 대한 기억만으로 살았습니다. 그의 믿음이 그를 살게 했다면, 그분과의 그런 강렬한 만남도 없이 그분의 말씀만을 간직한 우리의 믿음은 얼마나 더 크고 순수한 것이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살게 해줄 것은 자명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우리보다 더 잘 알고 계십니다(마태 6,8). 그런데도 우리가 그런 것들을 계속 청하는 것은 우리가 그분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함일 겁니다. 하느님을 잊어버린 나의 삶과 세상이 어떻게 될 지는 상상하기도 싫습니다. 언제나 바라고 청해야하는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가난은 하느님을 만났고 또 만나는 자리입니다.

요르단 강에서 나병을 치유의 기적을 체험한 나아만은 그곳의 흙을 퍼가서(2열왕 5,17) 그 흙을 깔고 그 위에 제단을 쌓고 엘리사가 섬기는 하느님께 예배를 드렸을 겁니다. 아니면 그 흙을 볼 때마다 그 하느님을 떠올렸을 겁니다. 우리가 되돌아가야 할 장소는 다름 아닌 바로 우리 마음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입니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바로 저 분입니다. 우리는 성실하지 못해도 그분은 성실하신 분이니(2티모 2,13), 그분을 찾아 되돌아가면 언제나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시며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실 겁니다.

▮ 구속주회 이종훈 마가리오 신부 : 2016년 10월 9일
  |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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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연중 28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순종과 믿음과 감사에 대한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이민족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은 예언자 엘리사에 일러준 대로, 요르단 강에 일곱 번 몸을 담그고, 나병이 나앗습니다. 그러나 사실 나아만은 요르단 강에 몸을 일곱 번 담그고 씻으라는 나아만의 전달을 받았을 때 무시당하는 것으로 여기고 화가 나서 돌아가려 했지만, ‘장군님, 만일 엘리야가 더 어려운 일을 시켰더라면 틀림없이 장군님은 그 일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니 예언자가 시키는 대로 해 보시지요’라는 부하의 말을 듣고서, 마음을 바꿔 엘리야가 시키는 대로 순명하여 치유를 입었습니다. 그러니, 그가 치유를 입은 것은 그가 엘리야의 말에 순명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치유를 입은 그는 엘리야께로 ‘돌아와’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감사의 표현으로 선물을 하고자 하였습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복음에 대한 자신의 순종과 믿음을 고백하며, 티모테오에게 권고합니다. 곧 죽음에서 되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복음이라고 선언하면서, 그분을 기억하라고 말하면서 복음에 대한 순명과 믿음의 행동을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던 중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사이의 어떤 마을에서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소리 지르는 열 명의 나병환자에게,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는 말을 이르셨는데, 그들이 예수님께서 시키는 대로 사제들에게 가던 동안에 깨끗이 낫게 되었습니다. 곧 <제1독서>에서 나아만이 엘리야의 말을 순명하여 나병이 나았듯이, 나병환자 열 명도 예수님의 말씀에 순명하여 치유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치유 받은 열 사람 중에서 한 사람만이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제1독서>에서 마찬가지로 외국인 취급을 받던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물으십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루카 17,18)

만약 오늘 우리가 감사하지 않은 채 살고 있다면, 우리는 그 아홉 중에 한 사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감사하지 못하고 있다면, 대체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혹 자기 자신이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여기는 까닭은 아닐까요? 그래서 자비를 입었으면서도 여전히 무엇인가를 채우고자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은 아닐까요? 마치 자비를 다 누리고 있으면서도 아버지께서 베푸는 잔치에 들어가지 않고, 문밖에 서 있는 큰 아들처럼 말입니다.

결국, 나병을 치유 받았으면서도, 이미 자비를 입었으면서도, 하느님을 찬양하지도 감사를 드리지도 못함은 자비에 대한 믿음이 약한 탓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여전히 자비가 충분하지 않다고 여기는 탓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나병환자 나아만과 사마리아인과는 달리 자신으로부터 떠나 ‘돌아와’ 믿음으로 회개를 하지 않은 까닭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돌아와’ 감사를 드린 사마리아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그렇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이 하느님께 대한 감사를 불러왔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치유가 구원인 것이 아니라, 그 치유가 하느님의 사랑임을 믿는 것이 구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자비가 아니라 자비가 하느님의 사랑임을 믿는 것이 구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나병환자 아홉이 비록 자비를 입고 치유는 받았어도 구원을 받지는 않았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돌아와’ 감사를 드린 사마리아인에게는 구원이 선언되었습니다. 그러기에, 비록 자비를 입고서도 그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으로 돌아서지 않는다면, 여전히 아버지의 집 문밖에 서 있을 뿐일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치유 받고도 감사하지 못함은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의 문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모든 것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살고 있느냐 마느냐를 가림 질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지금 감사하며 기쁘게 살고 있다면, 그것은 곧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을 드러내줍니다. 그리하여, 감사함이 곧 구원이 됩니다.

이를 우리는 오늘도 <미사경문 감사송>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구원의 도리요 길이옵니다.”

오늘도 우리는 우리 주님의 자비를 믿으며, 이 감사제를 통하여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아멘.

▮ 파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 2016년 10월 9일
  |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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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과의 만남-만남의 은총-

오늘 주일 강론은 ‘만남’에 대한 묵상입니다. 만남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삶도 온통 만남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만남의 은총, 만남의 선물, 만남의 기쁨, 만남의 행복 등 끝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늘 새로운 만남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반복되는 만남도 마음이 새로워져 눈이 열리면 모두가 새로운 만남, 만남의 선물이 됩니다.

어제의 만남도 새로웠습니다. 원주교구 말씀봉사자들 스물 여섯 분과 지도신부, 지도수녀 각각 한 분, 도합 스물 여덟 분이 하루 순례중 여기 요셉수도원에 들렸고 한 시간 동안 강의를 했습니다. 수녀님을 제외한 모든 분들이 생전 처음 수도원을 방문한다 했습니다.

주로 순례여정인생중 ‘만남의 놀라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여기서 여러분과의 만남은 놀라운 사건입니다. 놀라운 기적입니다. 놀라운 선물입니다. 놀라운 축복입니다. 같은 하늘 아래 같은 시대에 살면서 처음 만나지 않습니까? 만남 중의 만남이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이런 만남도 아예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깨달음에서 저절로 터져 나오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입니다.”

이어 주로 오늘 강론 주제인 주님과의 만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성경의 이야기들 역시 모두가 살아계신 주님과의 만남들의 기록입니다. 우리 또한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고자 이 거룩한 주일미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살아계신 주님을 만날 때 위로와 치유, 기쁨과 평화, 정화와 성화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늘 주님을 새롭게 만날 수 있을까요?

첫째, 주님을 찾을 때 만납니다.

다른 무엇보도 우선 찾아야 할 분은 주님입니다. 주님을 찾는 열정은 영성생활의 시발점이자 원동력입니다. 주님을 찾는 열정의 불이 꺼지면 영성생활은 끝입니다. 수도생활 역시 하느님을 찾는 삶이라 정의합니다. 하루 이틀 찾고 끝나는 하느님이 아니라 매일, 죽는 날까지 새롭게 찾아야 하는 하느님입니다. 우리의 모든 병고의 시련과 상처의 아픔 등 모두가 하느님을 찾으라는 신호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 열명, 제1독서의 시리아 사람 나아만, 모두 나병이 없었다면 주님을 찾지 않았을 것입니다. 겸손한 믿음도 지니지 못했을 것입니다. 말 그대로 나병을 통해 주님을 만났으니 나병은 전화위복이 되었습니다.

이슬람의 신비가이자 시인인 루미의 말입니다.

'상처는 빛이 들어오는 길이다.'

상처뿐만이 아니라 병도 빛이, 하느님의 빛이 들어오는 길입니다. 주님을 찾을 때 주님은 우리에게 나타나시고 우리는 주님을 만납니다. 주님을 만난 열명 나병환자들은 소리 높여 말합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바로 우리가 미사가 시작되면서 바치는 자비송이 아닙니까? 새삼 미사의 구조가 얼마나 은혜로운지 깨닫습니다. 나병환자처럼 간절하고 절실한 마음으로 자비송을 바치며 미사를 시작해야 자비하신 주님을 만납니다. 이런 자비송에 바탕을 둔 동방수도자들이 늘 숨쉬듯 끊임없이 바쳐온 기도가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주 예수 그리스도님, 죄인이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복음의 요약과도 같은 기도입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주님의 자비를 청하는 기도를 바칠 때 자비하신 주님을 만납니다.

둘째, 주님을 만날 때 치유의 구원입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기 위해, 주님을 만나 치유의 구원을 받기 위해 이 거룩한 미사전례에 참석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열명 나병환자들은 주님을 찾았고 주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의 즉각적 응답입니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 졌다 합니다. 일방적 치유의 기적은 없습니다. 나병환자의 주님을 찾는 간절한 믿음과 주님의 말씀의 은총이 만날 때 비로소 치유의 기적, 치유의 구원입니다.

제1독서 열왕기 하권의 나아만의 치유과정도 은혜롭습니다.

‘시리아 사람 나아만은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가 일러 준 대로, 요르단 강에 내려가서 일곱 번 몸을 담갔다. 그러자 나병 환자인 그는 어린아이 살처럼 새살이 돋아 깨끗해졌다.’

매사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평범한 사물이나 사건도 우리를 치유하는 하느님의 도구 역할을 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역시 나아만의 순종의 믿음과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를 통한 주님의 은총이 만남으로 발생한 치유의 기적입니다. 우리가 치유를 받지 못함은 겸손한 순종의 믿음이 없어 주님의 은총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을 통해 열명의 나병환자를 치유하셨고, 엘리사를 통해 나아만을 치유하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만나는 모든 하느님의 사람들, 바로 하느님의 치유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셋째, 주님을 고백하는 믿음을 지녀야 합니다.

성경은 사실언어보다는 거의가 고백언어입니다. 주님께 사랑을, 믿음을, 희망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고백하면서 주님과의 관계는 깊어지고 주님 햔한 믿음도 사랑도 희망도 더욱 더 견실해 집니다.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는 물론 우리 모두를 향해 당부하며 믿음을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분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위하여 아는 죄인처럼 감옥에 갇히는 고통까지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주님께 대한 고백입니다. 감옥은 물론 어디에도 갇혀 있지 않은 하느님의 말씀이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옥중에 있으면서 하느님의 말씀으로 무한한 내적자유를 누리는 대자유인 바오로 사도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주님께 드리는 찬양과 감사의 고백입니다. 찬양과 감사의 고백보다 영육의 건강에 좋은 것은 없습니다. 영혼의 병의 예방과 치유에 찬양과 감사보다 더좋은 예방제, 치유제도 없습니다. 특히 주목되는 두 장면에 대한 집중적 탐구입니다. 하나는 예수님과 치유받은 열명의 나병환자의 관계요,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와 치유받은 나아만의 관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놀라운 사실은 치유받은 한 사람만이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라는 평범한 묘사가 신선한 충격입니다. 나머지는 신앙 좋다는 유다인이 분명한데 찬양과 감사의 사람은 단 하나 사마리아인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경탄하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이어 예수님은 나머지 사람들에 대한 실망감을 드러내십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오지 않았단 말이냐?”

‘모든 일에 하느님께 영광’ 바로 분도회의 모토이자 수도원 정문 바위판에 새겨져 있는 글귀입니다. 아, 정말 치유받은 아홉명의 결정적인 실수입니다. 하느님께 영광의 찬양을 드리며 감사해야 온전한 치유의 구원인데 정말 안타깝습니다. 여러분은 아홉과 하나중 어느 편에 속하는 지요. 아홉명은 바로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배은망덕한 사람들이라 질타하지 마십시오. 나름대로 갈길이 바쁘고 할 일이 많다보니 순간 하느님을 잊은 것입니다. 이래서 ‘너희는 멈추고 하느님 나를 알라’라는 시편 말씀을 상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갈길이 바쁘고 할 일이 많아도 잠시 멈추어 하느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영적습관을 지니기기 바랍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주님께서 미사가 끝나고 파견하실 때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하느님께 찬양과 감사의 고백의 믿음으로 영육의 온전한 치유와 구원을 받은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 하나였습니다. 육신의 치유에 찬양과 감사의 믿음이 고백이 따라야 영육의 전인적 치유와 구원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여 끊임없이 찬양과 감사의 공동시편전례기도를 바치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다음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와 나아만의 헤어지기 전의 장면도 참 멋지고 아름답습니다. 멋지고 아름다운 사람이 엘리사와 나아만입니다.

-나아만;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이 종이 드리는 선물을 부디 받아 주십시오.”

참 겸손한 고백의 사람 엘리사입니다. 진정성 가득 담긴 선물입니다만, 엘리사의 반응이 우리를 참으로 부끄럽게 합니다.

엘리사; “내가 모시는 주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결코 선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거듭 나아만은 간청합니다만 끝내 거절하는 엘리사의 청렴결백함이 지도자의 귀감입니다. 이어지는 나아만의 소망은 얼마나 소박하고 진실한지, 이 또한 감동입니다.

나아만; “그러시다면, 나귀 두 마리에 실을 만큼의 흙을 이 종에게 주십시오. 이 종은 이제부터 주님 말고는 다른 어떤 신에게도 번제물이나 희생제물을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흙은 선물로 받아가겠다는 나아만의 진정성에 분명 엘리사도 감동했을 것입니다. 참으로 멋있는 사람이 복음의 치유받은 사마리아 한 사람이요, 독서의 치유받은 시리아 사람 나아만입니다. 모두가 이스라엘인이 아닌 이방인이라는 사실이 우리에겐 화두입니다.-

육신의 나병도 무섭지만 영혼의 나병 역시 무섭습니다. 무지, 나태, 탐욕, 교만, 무의욕, 무기력, 무감각 등이 영혼의 나병입니다. 이런 영혼의 나병으로 인해 일상의 늪에서,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영적 나병환자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주님을 찾아야 만나고, 주님을 만나야 이런 영적 나병도 치유받고 살아납니다. 온전한 영육의 치유와 구원에 하느님 찬양과 감사의 고백은 필수입니다. 바로 연중 제28주일에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진리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을 만나 찬양과 감사로 당신께 믿음을 고백하는 우리 모두의 영육의 상처와 질병을 말끔히 치유해 주십니다.

“부자들도 궁색해져 굶주리게 되지만, 주님을 찾는 이에게는 좋은 것뿐이리라.”(시편34,11). 아멘.

▮ 분도회 이수철 신부 : 2016년 10월 9일
  |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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