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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간절한 마음으로
조회수 | 2,472
작성일 | 07.10.18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하느님께 많은 기도를 하며 살아가지만,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 드리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며칠 전 전화가 왔습니다. 가끔 듣던 목소리였지만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신부님! 우리 아이, 이제는 말도 못하고, 잘 듣지도 못해요. 보이지도 않고요. 그래도 전화 바꿔 드릴께요" "그래, 잘 지내고…, 엄마 말씀 잘 듣고…, 놀러 갈께." 그렇게 어렵게 통화를 했는데,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습니다. 웃으면서 뭐라고 중얼거립니다. 엄마 말로는 아이가 "보좌 신부님"이라고 한답니다. 지금 그 아이의 엄마는 생명의 불이 꺼져 가고 있는 아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하느님께 의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이가 아프기 시작 하면서 생명이 오래 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신부님 왜 이런 일이 우리 아이한테 일어나야 해요..." 하면서 하느님을 원망했습니다. 그 앞에서 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머릿속으로는 많은 말이 맴돌았습니다. '하느님의 뜻, 새로운 생명, 꺼져가는 촛불이 어둠을 밝히듯 가족에게 더 큰 하느님의 뜻을 밝혀 줄 것이라고, 그 아이는 천사라고...' 그러나 어머니의 고통 앞에서, 아이의 죽음 앞에서 그 말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다 언젠가 전화가 왔습니다. "신부님,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네요. 저는 우리 아이가 중학교 올라가면 해주고 싶은 것이 참 많았어요. 고등학교 올라가면 더 큰 집으로 이사도 가고 싶었고, 유학도 생각했는데, 내 뜻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네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닌가 봐요... 전에는 하느님을 원망하며 아이가 죽지 않기를 바랬는데, 이제는 고통스럽지 않게 하느님 품으로 가길 기도해요"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요? 아픈 마음을 안고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을까요? 그런 고통에 겪어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하느님만 아시는 간절함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엄마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주신 것이 아닐까요?

억울한 일을 당한 어떤 과부이야기(루가 18,1-8)를 보면서, 그 억울함에 담겨 있는 마음이 어떤 것일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던 재판관에게 늘 찾아가서 하소연하는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그 마음에는 하느님만이 아시는 간절함이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겠습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부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여, 당신을 부르오니, 내게 귀를 기울이시와 이 말씀을 들어주소서. 눈동자처럼 나를 지켜 주시고, 당신 날개 그늘 아래 이 몸을 숨겨 주소서."(입당송)라고 기도하면 그분께서는 "죽음에서 그들의(우리의) 목숨을 건지시고, 굶주릴 제 그들을(우리를) 살게"(영성체송) 하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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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구 황영화 마티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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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는 기도

루카 복음에서 기도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여러 구절에서 예수님 자신이 기도하는 사람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3, 31; 5, 16; 6, 12; 9,18)오늘 복음 말씀인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는 기도에 관한 비유이고 또 루카 복음에만 나온다는 점에서 기도에 대한 루카의 특별한 관심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과부의 끈기가 문제 해결의 주요 요인이었습니다. 과부의 집요성이 재판관의 마음을 돌리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재판관은 과부의 끝없는 요청에 지쳤으며 평안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재판관은 과부에게 정의를 베품 으로써 그 소송을 끝내고자 했습니다. 그리고는 주님의 요구가 나옵니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루카 18, 6-7)하고 말씀하십니다. 즉 불의한 재판관도 과부의 끈질긴 청을 들어 주었는데 의로우신 하느님께서야 구하는 백성들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두실 것 같으냐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하여 아버지 하느님은 지치지 않고 끈기 있게 부르짖는 자들에게 귀를 기울이시는 분이시며, 애원하는 이들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이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은 정의로운 재판관으로서 억압과 불의를 당신 희생자들에게는 희망을 갖게 하는 격려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참을성 있게 기도를 계속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굽힐 줄 모르는 신뢰의 표시가 됩니다. 만일 우리가 잠깐 기도하고 나서 그대로 이루어 지지 않았다고 그만둔다거나 상실한다면 그것은 자비하신 하느님을 충분히 신뢰하지 않는 증거이며 그런 기도는 들어줄만한 가치 없는 기도는 아닐까요? 왜냐하면 우리가 진정으로 하느님을 모시고 그 분 밖에 믿을 분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마치 어린 아이가 부모에게 어리광을 부리듯이 끝까지 하느님께 매달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잠시 침묵하시는 것 같아도 결코 우리를 버려두실 리가 없습니다.

이처럼 기도는 끈기 있게 계속되어야 하며 하느님께서 속히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결코 중단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은 항상 우리 편이며 틀림없이 우리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항구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모세가 끝까지 팔을 들고 있었기에 이스라엘이 승리를 거둔 것처럼 우리도 기도를 중단하지 않는 한 우리의 소원은 꼭 이루어질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바라는 소원이 하느님의 영광과 이웃에 대한 사랑, 그리고 우리 자신의 구원과 직결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에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위배되는 것이나 부당한 것을 청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처분에 맡기고 그 분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원해야 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믿고 희망하며 기도합시다. 오늘 복음에서 힘없고 연약한 과부가 고약한 재판관을 끈질기게 찾아가 요청하여 마침내 청을 이루었듯이 항구하게 기도합시다. 한두 번 찾아가 보고 안 되자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연약한 싸움으로 포기하고 살았다면 그 과부는 얻는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귀찮을 정도로 재판관에게 매달렸고 완고한 재판관은 마침내 마음을 돌렸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야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조상래 다미아노 신부
  |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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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오늘 복음은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입니다. 어떤 고을에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과부가 불의한 재판관을 찾아가서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라며 계속 요구합니다. 이 재판관은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나 그 과부가 계속 찾아와 조르자, 귀찮아 질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과부의 청을 들어주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가르침은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공정하신 재판관이라는 점입니다. 불의한 재판관도 끈질기게 찾아오는 과부의 청을 들어주었는데,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야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을 외면할까요? 오히려 찾아가서 그들의 청을 들어주실 것입니다. 복음에서도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실 것이다.”(루카 18,8)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불의한 재판관은 끈질긴 간청이 귀찮아서 판결을 내려주지만, 하느님은 자비하시고 사랑이시기에 우리의 목소리를 언제나 듣고 계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기도를 귀찮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청하기를 바랍니다. 당신을 귀찮게 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가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지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 하십시오” 이 말씀이 깊게 다가옵니다. 믿음과 신뢰를 간직할 때, 우리는 끊임없이 청할 수 있습니다. 간절함과 하느님께 신뢰가 없는 사람은 끊임없이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분께 신뢰가 없는 사람은 어느날 자신의 생각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기도를 멈추게 됩니다.

그럼 기도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기도를 하면 할수록 결국 하느님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변화는 것이지요. 나의 의지가 아니라, 그분의 뜻을 따라가게 됩니다. 때로는 나의 지향이 틀릴 수도 있습니다. 성찰과 함께 드리는 기도는 그 지향을 바꾸어 줍니다. 그것이 기도의 힘입니다. 기도는 주님께서 주시려는 은총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로 바꾸어주는 힘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좋은 것을 주시려고 하지만, 우리가 그분의 은총을 다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왜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을까? 많은 분들이 이 고민에 빠집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의 삶이 하느님 중심이냐? 아니면 내 중심인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응답의 때는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결정합니다. 한치 앞도 모르는 우리들입니다. 나를 가장 사랑하고 나를 가장 잘 아는 분은 내가 아니라 하느님입니다. 마태오 복음서를 보면, “하느님은 사람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입니다.”(마태 7,11) 그분께서 원하시는 때에 기도를 들어주는 것이 우리 구원에 가장 이롭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때에 당장 기도의 응답을 바랍니다. 그러나 나의 인생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은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 그분께 대한 이러한 믿음을 내안에 간직할 때 우리는 낙심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글을 읽는 분들은 먼저 자신의 기도 지향을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기도의 지향이 주님께서 바라시는 지향인가? 나의 욕심에서 나오는 이기적인 지향인가?’ 기도 역시 성찰이 필요합니다. 나의기도 지향은 과연 복음적인가? 자신의 삶을 갉아먹는 지향이나,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는 지향은 그분께서 들어주시지 않겠지요. 기도를 하면 할수록 그분께서 뜻하시는 지향에 가깝게 다가가게 됩니다. 그분을 사랑한다는 것, 그분과 친밀한 대화를 한다는 것은 그분께서 간직하신 마음과 시선을 내가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포함된 것입니다. 과부 역시 올바른 판결을 청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시고 사랑이심을 믿으며 그분을 내 마음 첫 자리에 두는 우리들이 되어야겠습니다.

▮ 안동교구 윤성규 바오로 신부 : 2016년 10월 16일
  |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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