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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기도의 특징인 항구함으로
조회수 | 2,593
작성일 | 07.10.18
오늘 복음은 기도의 특징인 항구성에 대해서 전해준다. 기도의 특징은 다름이 아니라 들어줄 때 까지 해야 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재판관은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재판관이 “과부가 너무나도 성가시게 구니 그 소원대로 판결해 주어야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꾸 찾아와서 못 견디게 굴 것이 아닌가!”하며 과부의 청을 들어준다. 불의한 재판관이 그렇다면 의로우신 하느님께서야 더욱 올바르게 판결해 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렇게 불의한 재판관과 의로우신 하느님을 비교하여 기도의 특징인 항구성을 강조하여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항구성은 기도만이 아니라 신앙인의 모습에서도 요구되며, 신앙인의 모습은 ‘늘’ ‘항상’ ‘꾸준히’로 표현될 수 있다. 신앙인은 늘 깨어 기도해야 하고(루가 21,36), 항상 준비해야 하며(루가 12,40), 꾸준히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루가 8,15)이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 복음의 서두에서는 “언제나 기도하라.”고 전한다. ‘언제나’와 ‘늘’로 표현되는 기도의 항구함이 신앙인에게도 필요한 것이다.

또 한편 오늘 복음은 기도의 항구함만이 믿음을 지킬 수 있는 길임을 알려준다. 그래서 성서는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과연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오늘 복음이 “언제나”로 표현되는 기도의 항구성으로 시작해서 믿음에 대한 내용으로 결말을 짓는 것을 보면 기도와 믿음의 관계를 잘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루가 21장 36절에서는 주님께서 “너희는 앞으로 닥쳐 올 이 모든 일을 피하여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고 말씀하신다. 이 성서 말씀의 내용을 보면 ‘늘’로 표현되는 기도의 항구성과 함께 사람의 아들 앞에 올바로 설 수 있는 길 또한 바로 ‘기도’라는 것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기도의 특징은 항구성이라는 것이고, 기도의 항구함만이 믿음을 지킬 수 있는 길이며, 기도의 항구함만이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길”인 것이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았다.”고 불평하기보다 언젠가는 들어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쉼 없는 기도생활을 통해서 주님 앞에 올바로 설 수 있도록 준비 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기도만이 믿음을 지킬 수 있는 길이고, 기도만이 믿음을 성숙시킬 수 있는 길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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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이강건(빈첸시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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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은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던 적이 있으신가요?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되면 내가 의지할만한 어떤 대상을 찾게 마련이지요. 그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한 통로가 되어줄 것들 말입니다. 내가 가진 재물에 의지한다거나, 모든 인맥을 동원한다거나, 골똘히 고민도 해가면서 무언가를 통해 이 절망에서 벗어날 궁리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들이 다 소용없게 되어 버리고, 그래서 어디 하나 의지할 대상이 없어져 버리는 그야말로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생각만 해도 가슴이 먹먹합니다.

내가 살아가는 모습을 돌아보면, 하루에도 수많은 것들이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루카 18,2) 여기며 나를 괴롭힙니다. 그것은 이 세상이 될 수도 있고, 내 가족이 될 수도, 내 주변 사람들, 또 내 자신이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런 온갖 형태의 절망 앞에서 우리는 한낱 나약하고 초라한 ‘과부’가 될 수밖에 없는지도 모릅니다. 의지할 곳이라고는 완벽하게 주님 밖에 없음을 고백하게 되는 존재, 아무것도 없는 빈손으로 주님 앞에 홀로 서게 되는 존재 말입니다. 오늘 복음이 이런 우리들 마음을 건드립니다.

복음 말씀에서, 이런 우리네 처지를 너무도 잘 알고 계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절대 우리에게서 멀리 계신 것이 아닌 아버지를 보여주시고자 애타는 예수님을 봅니다. 그분은 절망과 고통 속에서도 끝까지 아버지를 놓치지 않는 항구함을 몸소 드러내시려 우리네 삶의 고뇌를 똑같이 살아내시며 십자가의 길로 가신 분이십니다. 주님께 의지하고 매달리면서 ‘내가 절망에서 벗어났느냐’하는 결과를 따지기 이전에, 차라리 ‘과부’의 처지가 되어서라도 홀로 주님 앞에 서서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믿음, 그 자체가 아버지께는 더 없이 귀하고 소중한 것이기에, 그러한 항구함이 간절해지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과 절망 앞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느껴봅시다.

질그릇 같은 우리들, 언제나 내가 숨 쉴 수 있고 시련 속에서 앞으로 나아갈 힘을 낼 수 있는 것은 잠들지 않으시고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은총임을 잊지 맙시다(1독서에서 모세를 통해 내리는 주님의 은총 속에 있을 때만이 아말렉족을 이겨낼 수 있었음을 우리는 듣습니다). 자꾸만 내 자신에게로 기울고 그래서 나약함에 무너져 좌절하고 울부짖는 나에게, 끊임없이 말씀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의 마음을 품으려 노력합시다. 바오로 사도가 복음을 위해 투쟁하고 거짓 교사들을 대항할 것을 가르치며 티모테오에게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 지혜를 그대에게 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2독서, 2티모 3,15ㄴ-16)라고 강조했던 것처럼, 말씀으로 친근하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만나는 하루하루 삶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김유곤(테오필로) 신부
  |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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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미적거리시는’ 하느님

신앙에 입문하여 기도에 관심과 열정을 갖던 시간들을 떠올려봅니다. 여린 철부지의 마음으로, 까까머리 사춘기의 넋두리로, 고민에 빠진 청춘의 가슴으로, 봉헌의 삶을 살겠노라 낮게 엎드린 순백 사제의 몸짓으로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소임지마다 공동체 가족들과 그들의 사연 많은 삶에 동고동락하며 매번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하느님께 절절한 기도를 바치다가도 수 일, 아니 수 주간을 무덤덤한 빈 마음으로 보낸 때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가끔은 그렇습니다. 곰곰이 성찰해봅니다. 기도 가운데 머물렀던 순간은 누구보다도 내게 절실했고 또 절박했기 때문이었으리라. 반대로 기도 밖에서 배회했던 시간들은 한없이 공허했고 다른 곳에서 답을 찾으려 했던 내 욕심이 빈번하게 앞선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그러하시듯 변치 않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계시는데, 어쩌면 우리는 자신의 필요에 따라 그분 앞에 머무르다가도 배회하고, 대화를 하다가도 스스로 단절하고, 평정심을 유지하다가도 나약함에 중심 잃은 생활을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삶의 양태가 이렇다보니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 자체가 왠지 그분께 누를 끼치는 것 같아 답답한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루카 18,1)하도록 오히려 우리에게 용기를 북돋아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대하시는 데에 상상 이상으로 관대하신 분이십니다. 그분께 드리는 우리의 기도와 청원은 반드시 그 응답을 받습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성경의 표현대로 하느님을‘줄곧 찾아와 졸라대며’ ‘귀찮게 해드려야 하고’ 심지어 하느님을 ‘괴롭혀 드려야’ 합니다(루카 18,3. 5 참조). 상상이 가십니까? 한마디로 하느님께 ‘밤낮으로 부르짖는’(루카 18,7 참조) 호소력 짙은 기도의 습성을 몸에 배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불의한’ 재판관은 그 인품과 자질에 있어 타인의 말을 경청하거나 신속한 판결을 내리는 데에는 최악의 인물입니다. 더구나 소송을 제기했던 과부는 그에게 영향력을 미칠만한 인물도 아니었습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과부에게 유리한 최종 판결을 내려주기로 결심한 계기는 놀랍게도 억울한 소송의 진위 여부나 그 긴박성이 아닌, ‘줄곧 그를 찾아와 귀찮게 졸라대고 밤낮으로 괴롭히면서 그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과부의 근성 있는 태도에서 비롯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끈기 있는 호소에 약하신 분이십니다. 적어도 복음 속 재판관처럼 거만하고 비정하며 누구의 말도 귀담아 듣지 않는 불의한 분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분께서는 ‘미적거리시는 일 없이’ 자녀들의 호소에 ‘지체 없이’ 응답을 주십니다(루카 18,7-8 참조).

이제까지 내 필요에 따라 단발성 청원으로 끝나버렸던, 그리고 더 유익한 방식으로 나를 성장시켜 주시고 채워주시는 하느님의 의중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해 중도에 기도를 포기하고 말았던 지난날을 돌이켜봅니다. 가끔은 안달하고 애쓰기보다는 하느님의 넓은 품에 가만히 기대어 고단한 삶을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성찰과 의탁의 모습은 미약하지만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우리의 진심이며, 이는 하느님께 드리는 사랑에 찬 고백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 수원교구 박현창 베드로 신부 : 2016년 10월 16일
  |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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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항구한 기도생활

오늘 전례의 주제는 “항구한 기도생활”에 관한 것이다. 1독서와 복음에 나타나는 것을 보면 그 기도는 항구하여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항구한 기도생활에 대한 오늘 전례의 주제를 묵상해 보기로 하자.

제1독서: 출애 17,8-13: 모세의 기도

이스라엘 백성이 아말렉을 대항하여 전쟁을 하며 거두는 승리는 모세가 산 위에서 홀로 그러나 항구하게 하는 ‘기도’에 의해 조정되고 있다. 이것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실현되는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이 기도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기도의 도움에 의지해서만 이길 수 있었다. 모세가 계속 기도할 수 있을 때만이 여호수아는 이길 수 있었다. 이것은 모세의 중재적 역할이 육체적인 행동, 즉 팔을 드는 행동이 아니라 그를 통해 표현되는 기도의 중재능력이라는 것이다. 모세가 들고 있는 ‘하느님의 지팡이’(9절)도 그가 행한 놀라운 능력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표현되고 있는 그와 하느님과의 신비스러운 접촉을 의미한다. 즉 기도는 그가 행하는 모든 능력의 원천이 되고 있다.

모세의 이 행위는 기도와 생활, 묵상과 행동 사이의 불가분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모세의 기도는 여호수아의 싸움과 정복에 ‘내적으로’ 그 행위를 뒷받침해주고 밀어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세의 기도가 없었다면 여호수아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모세의 예는 어떠한 인간적 행위도, 자유를 위해 그리고 조상들에게 약속된 땅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싸움까지도 하느님과의 관계를 벗어나서는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기도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행동 속에 스스로 소외되지 않도록 해준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과업이 엄청난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기도로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사명을 완수하여 나갔다.

복음: 루가 18,1-8: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라

기도에 대한 주제는 오늘 복음에서도 다루고 있다. 복음의 본래의 뜻은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1절)이다. 그 비유의 내용은 불의한 재판관과 가난한 과부에 관한 것이다. 이 비유를 통해 기도의 특별한 관점이 강조되고 있다. 즉 고달프고 힘들더라도 ‘항구하게’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용기를 잃지 말고’ ‘언제나 기도하도록’ 허락해주시는 주님께 끊임없이 간청해야 한다는 것이다. ‘항상 기도해야할’ 필요성은 주님의 명령이라기보다 그리스도인의 입장을 항구하게 지키고자 하는 본질적이며 내적 필요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택하신’ 백성이 ‘밤낮으로’ 하느님께 ‘부르짖는다.’는 구절(7절)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일반적 사람들보다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내용이다.

과부가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지 않는다고 끊임없이 매달린,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이라고 한 그 ‘불의한 재판관’의 입장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이것은 역설적인 효과를 위한 것이다. ‘악한 사람’조차도 한 가난한 여인의 간청을 들어줄 줄 안다면 당신이 몸소 택하신 백성에 대한 하느님 아버지의 배려야 이에 비길 수 있는 것이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 비유의 의미는 기도를 함에 있어서 항구할 것과 또 그 기도를 들어주시리라고 믿으라는 것이다.

이 비유는 그리스도 신자들이 자신들의 어려움을 끊임없이 주님께 말씀드리라고 한다.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또 믿지 않는 이들 때문에 겪게 되는 모든 어려움에 대해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실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꾸준히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모습은 초기 그리스도 신자들에게서 잘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주님께서 당신의 오심을 지나치게 미루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참조: 2베드 3,1-16). 이 때문에 종말론적 긴장을 이완시키고 감소시켜 신자들이 현재 당하는 고통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게 하고, 거기에서 해방되고자 하느님께 의탁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루가는 이러한 상황을 제시하면서 신자들로 하여금 긴장과 동시에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 신자가 오늘날 부딪치게 될 가장 큰 위험요소는 기다릴 줄 모르고 과학과 경제적 발전이 제공하는 현실에 안주하고 거기에 희망을 두고자 하는 경향이다. 이렇게 되고 만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과연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8절). “이 불의 한 재판관의 비유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종말론적’ 차원이 있다. 즉 우리가 신앙적 차원에서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은 어떤 지상 ‘천국’으로도 채워지지 않으며, 오직 ‘아버지’께서 우리의 원의를 채워주시러, 그리고 무엇보다도 특히 우리의 믿음과 희망을 위협하는 모든 시련과 어려움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주시러 ‘즉시’ 와주시기를 간청하는 것이다”(S. Cipriani, La preghiera nel N. Testamento, Milano 19783, pp. 177-178).

우리가 바치는 기도는 항구한 기도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기도하여야 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자신의 모든 것을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기도는 진정 감사의 표현이 될 수 있으며, 또 그 기도가 꼭 이루어지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항구하게 끝까지 바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항상 참된 기도를 바칠 수 있는 우리 되도록 기도하며 이 미사를 봉헌하자.

▮ 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 2016년 10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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