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주일강론 (다해)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450 84.4%
[마산] 기도는 무쇠[鑄物]도 녹인다
조회수 | 2,524
작성일 | 07.10.18
모니카 성녀는 아들 아우구스티노의 회개를 위해서 십수 년을 꾸준히 기도했다고 한다. 꾸준한 기도 그것은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힘 있는 무기이다. ‘얼마나 꾸준히 기도할 수 있는가?’는 신앙의 깊이에 비례하는 것이 아닐까?

-------------------------------------------------------

1. 기도는 영(靈)의 호흡이다

현대인들은 얼마간의 노력과 시간을 투자하면 눈에 보이는 효과가 두드러지게 나타나야 직성이 풀린다. 말하자면 ‘효과주의’에 사로잡혀 있다고 하겠다. 속전속결로 승부를 내려고 한다. 확신이나 신념을 갖고 일생 동안 무언가에 도전하고, 그래서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결과를 내는 그런 일은 점점 보기 힘들어진 세상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가만히 앉아서 묵상하는 것을 보면 시간 낭비하는 비생산적인 일로 여기는 듯하다. 그러면, 현대인들에게 기도는 무익한 것인가?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바쁘다, 바빠’를 연발하며 산다. 이런 현상의 이면에는 ‘바쁘게 사는 것이 알차게 사는 것’이라는 착각이 한몫을 한다. 그래서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죽을 지경이다.”라는 넋두리는 자신이 요즘 잘나가고 있는 사람이라는 자기과시일 때가 많다. 우리는 우선 ‘바쁜 삶이 바로 알찬 삶은 아니라는 것’을 똑똑히 깨달아야 한다. 바쁘게 허둥대는 삶은 반성 없이 사는 삶이고, 시간에 떠밀려 사는 삶이다.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무엇을 위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나의 자리에서 내가 해야 할 몫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에 대해 올바른 자의식(自意識) 없이 사는 삶이 되기 쉽다. 하느님 앞에 자신을 비추어보면서 그분의 말씀을 듣는 기도 시간이야말로 우리 자신의 참모습을 찾는 귀한 시간이 아닐 수 없다.

요즘 우리는 텔레비전, 라디오, 신문, 잡지, 컴퓨터 등을 통해 수많은 정보를 접하는 ‘정보의 홍수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가 어떤 것을 보고 들으면, 어쩔 수 없이 우리의 마음에는 그 보고 들은 것들의 생각과 상(像)이 남게 마련이다. 시내의 수많은 간판과 광고를 보면, 모두가 ‘나를 사가시오’, ‘나를 먹어보시오’, ‘나와 함께 잠을 자보시오’, ‘나를 입어보시오’, ‘여기로 와보시오’, ‘나를 가지고 놀아보시오’ 하는 것들이다. 그 결과 우리의 정신은 천 갈래 만 갈래로 흐트러진다. 우리의 정신을 끊임없이 밖으로 잡아당기는 원심력 때문에 자신의 중심을 잃기 십상이다. 여기서 자신의 내적 중심을 잡고,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려면 기도와 묵상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안으로 모아들이는 구심력이 필요하다. 이것이 기도를 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이다.

호흡은 필요한 신선한 공기를 몸 안에 들이고, 찌꺼기를 내뿜는 행위이다. 모든 생명체는 이 작용을 중단하면 죽는다. 우리 영적 생명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기도 시간을 통해 ‘나는 누구이며, 지금 어디쯤 가고 있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내 안의 영적 노폐물을 밖으로 내보내고, 새로운 영적 힘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밖으로 찢겨 나가려고 하는 자신을 안으로 모으는 내적 중심을 지켜야 한다. 그래서 기도는 영(靈)의 호흡이라고 한다. 다른 말로 하면 ‘기도는 영혼의 삼림욕’이라 할 수 있다.

2. 기도는 끊임없는 수련이다

어떤 사람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는 많은 인내와 노력이 필요하다. 감각으로 익히는 녹차의 은은한 향기를 아는 데도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하느님과의 우정관계라 할 수 있는 영성생활, 기도 안에서 하느님을 체험하는 데에도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 잡다한 일상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에게는 기도를 위해 마음을 가라앉히는 작업〔潛心〕과 집중을 위한 많은 훈련이 필요하다.

기도는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의 수련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도를 ‘하느님께 마음을 들어올림’이라고 할 때, 이는 마치 높은 산을 오르는 것처럼 지속적인 노력과 훈련을 통해서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를 할 때 피곤을 느끼고 힘들어하는 것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기도의 신학에서는 “기도는 하나의 도전이며, 완성했다고 결코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라고 말한다. 오늘 복음 말씀처럼 기도에는 ‘꾸준함’이 가장 중요하다.

기도를 수련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초월자(超越者)이신 ‘하느님을 찾아가는 여정’, ‘하느님을 향한 상승’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를 통한 하느님과의 만남을 위해서는 지속적인 훈련을 해야 한다. 시간을 정해놓고 날마다 기도를 바쳐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하고 싶을 때 해야지, 억지로 한다고 기도가 되나?” 하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는 기도에 대한 문외한(門外漢)들이 하는 생각이다. 등산을 하듯이 정진(精進)하지 않을 때 우리는 결코 기도에 맛들일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기도를 할 줄 아는 사람만이 신앙인이며 영성생활을 하는 사람이다.

3. 기도는 믿음의 표현이다

우리 주변에는 ‘피정꾼’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그런 신자들도 있다. 여기저기 피정을 한답시고 뻔질나게 쏘다니는 이들을 말한다. 기도에 대한 강의나 피정에는 많이 참여하는데 기도생활과는 거리가 먼 이들이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자세로 한두 번 기도하다가 그만두는 이들도 많다.

시련이 닥치거나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을 때조차 꾸준히 기도하는 것, 이것은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믿음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1910년부터 1968년까지 사제생활을 하는 동안 내내 예수님의 오상(五傷)을 지니고 사셨던 비오 신부(2002년 6월 16일 시성)는 “기도는 끈질겨야 합니다. 끈질김은 믿음을 의미합니다.”라고 말하였다.

-------------------------------------------------------------------

마산교구 유영봉 신부
450 84.4%
[마산] 올바른 판결

적대자를 혼자서 상대해야 하는 과부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그나마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은 불의한 재판관입니다. 하지만 그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과연 과부를 도와줄리 만무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과부는 줄곧 재판관을 찾아가서 졸라댑니다. 과부에게는 정당한 명분이 있습니다. 자신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려달라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판결을 내려달라는 것입니다. 불의한 재판관은 자신이 귀찮아질 것이 싫어서라도 올바른 판결을 내려줍니다. 과부는 올바른 판결만이 자신이 살아갈 희망이 된다는 것을, 그래서 그것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매달립니다. 과부의 끈질김이 좋게 작용했든 아니든 재판관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불의한 재판관도 결국에는 올바른 판결을 해주는데, 좋은 것을 베풀어 주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선택된 이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신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올바른 판결이란 내가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과 올바른 판결이 다르다고 생각할 때, 하느님의 침묵 시간이 길어질 때, 내가 드리는 기도가 거절당했다고 느낄 때 대부분 기도를 멈추고 낙심하게 됩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죽음을 앞두고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청하셨지만, 아버지의 뜻은 십자가였음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 고통 속에서도 주님께서는 아버지께 대한 믿음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믿음이 이해를 넘어서는 것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계속해서 기도할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의 기도의 지향이 다른 무엇이 아니라 하느님의 올바른 판결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느님께 밤낮으로 부르짖는 것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올바른 판결 안에서 살아갈 때 하느님의 뜻에 나의 뜻을 맞춰갈 수 있게 되며, 지루함과 의미 없이 느끼는 시간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 마산교구 유청 안셀모 신부 : 2016년 10월 16일
  | 10.14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779   [수원] 정해진 시간과 일들 안에서  [4] 2508
778   [대구] “희망의 징조"  [3] 2012
777   [의정부] “예수님 한 분만 이상하다”  [3] 657
776   [인천] “예수님은 ‘보스(boss)’인가 ‘리더(leader)’인가?”  [5] 2536
775   [수도회] 보라, 내가 곧 간다. ...(묵시 22,12)  [10] 2853
774   [부산] 하느님의 미래를 택한 사람은 하느님의 현재를 삽니다  [4] 2746
773   [마산] 교회의 생명력은 평신도에게 있다.  [3] 2499
772   [서울] 부활을 믿는 사람  [3] 2330
771   [안동] ‘복음을 전하는 발걸음’  [1] 1175
770   연중 제33주일 세계 가난한 이의 날  130
769   [춘천] 신념  [3] 2316
768   [원주] 재난의 시작  48
767   [대전] 착한 교우들에게 예수님의 측은지심을  [1] 2625
766   [전주] 종말 전의 재난  [2] 58
765   [청주]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1] 64
764   (녹) 연중 제33주일 독서와 복음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1] 2120
763   [수도회]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5] 1496
762   [수원] 그리스도의 몸으로 사는 삶  [2] 2355
761   [서울] 부활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3] 2303
760   [마산] 영세한 미신자(未信者)가 많다.  [1] 2281
759   [대구] 부활의 삶, 지금 여기서 시작되고 있다.  504
758   [인천]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4] 2837
757   [부산] 알 수 없는, 그래도 좋은 하느님 나라  [2] 2585
756   [안동] 부활을 믿는다면 부활을 살아가십시오  [1] 2574
755   [대전]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은 모두 살아있는 것입니다”  [1] 2901
754   [청주] 부활 신앙  [2] 88
753   [광주] 학벌(學閥)과 사두가이파  2579
752   [전주] 부활 에 대한 확신과 희망  63
751   [춘천] 영원히 하나인 하느님 가족  [2] 2399
750   [원주] 부활 이후의 새로운 삶  56
749   [군종] 두 여자  2133
748   [의정부]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64
747   (녹) 연중 제32주일 독서와 복음 (하느님께서는 산 이들의 하느님)  [3] 1933
746   [수도회] 용서와 자비  [2] 2075
745   [전주] 자캐오, 아! 행복한 사람  [1] 1719
744   [인천] 자캐오! 나무에서 (빨리)내려와!  [3] 2172
743   [서울] 회개의 증거는 착한 행실  [3] 1742
742   [안동] 자캐오 이야기  [1] 2320
741   [부산] 세리 자캐오와 예수님의 만남  [2] 12015
740   [수원] “저 사람이 죄인의 집에 들어 가 묵는구나!”  [3] 2083
1 [2][3][4][5][6][7][8][9][10]..[20]  다음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19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