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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더욱 보편적 기도, 이타적 기도
조회수 | 2,521
작성일 | 07.10.18
아이들과 함께 기도하는 시간은 참으로 의미있는 시간인 동시에 재미있는 순간입니다. 언젠가 한 아이의 간절한 청원기도를 듣고 다들 '뒤집어졌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너무도 단순하고 순수한 아이였기에 기도 역시 너무나 솔직했습니다.

이런저런 청원기도들이 대충 끝난 후의 일이었습니다. 마무리 기도인 '주님의 기도'가 언제 시작되나 다들 기다리고 있는데, 그 아이가 큰 목소리로 자신의 간절한 바람을 솔직하게 외쳤습니다.

"주님, 제발 저 장가들게 좀 해주십시오!"

아이들은 담당 수사님의 심각해진 얼굴 때문에 대놓고 웃지는 못하고 속으로 웃느라고 다들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그 와중에도 다들 "주님,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를 빼먹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 아이는 기도시간이 끝난 후 사감 수사님에게 불려가 장시간에 걸친 '정신교육'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 아이는 때로 '오버'도 많이 했지만 천사같은 마음을 지닌 아이였습니다. 그 아이 특기는 청원기도였습니다. 7~8개 청원기도 가운데, 절반을 도맡아서 하는 게 보통이었습니다. 더욱 기특한 것은 아이가 바치는 청원기도의 내용이었지요. 언제나 나가서 고생하고 있는 친구들, 병원에 입원해 있는 친구들, 아픈 동생들, 재판을 앞두고 초조해하는 아이들을 위해서 아주 간절히 기도하곤 했습니다.

어디서 그런 정보를 입수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아이는 언제나 기도 거리들을 잔뜩 가지고 있습니다. 그 아이의 간절한 기도 덕분인지 나간 아이들이 별탈 없이 귀가하곤 했습니다.

그 아이의 강력한 '기도발', 그 배경에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봤을 때, 그 아이가 바치던 모든 기도는 다 이웃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리라는 제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려봅니다.

그 아이를 생각하면서 '나는 과연 무엇을 청하고 있는가?'하고 반성해 봤습니다.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부끄럽게도 너무나 이기적인 기도를 바쳐왔습니다. 내 한 몸 고통이 없기를, 내가 행하는 사목이 무난히 돌아가도록, 만사형통하기를, 건강 잃지 않기를, 나와 연관된 사람들 일이 잘 풀리기를 등…. 정말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기도였습니다.

다시 한번 한 차원 높은 기도, 간절한 마음이 담긴 기도, 순수하고 진실한 기도를 바쳐야겠다고 다짐해봅니다. 그 기도는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바치셨던 기도이겠지요.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주십시오"라고 간구하셨던 예수님 기도같이 말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 고통을 더욱 적극적이고 진취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힘을 청하는 기도, 더욱 보편적 기도, 이타적 기도를 바치고 싶습니다.

나 자신의 사리사욕만이 아니라 이웃의 선익을 위한 간절한 기도는 언제나 하느님께서 기꺼이 들어주신다는 것을 늘 체험하며 삽니다. 아이들 미래를 위한 투자에 도움을 청할 때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여러 천사들을 보내시어 간단하게 해결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바치는 모든 기도가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들의 결핍과 고통에로 향하는 이타적인 기도, 진지한 기도, 간절한 기도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언제 단 한번이라도 간절히 기도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밤새워 눈물을 펑펑 쏟으며 예수님께 매달려 본 적이 있는지요? 간절한 기도는 하늘까지 닿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절대로 외면하지 못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간절함과 절박함이 담긴 기도, 열과 성이 지극한 기도, 이웃 선익을 위해 바치는 순수한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자주 최선의 노력이나 간절한 기도도 해보지 않고 당면한 문제를 쉽게 포기하곤 합니다. 그리고 일이 잘 안 풀린 결과에 대해 하느님 뜻으로 돌리며 우리 자신을 합리화시키곤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릇된 자세는 하느님 존재나 역할을 지극히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틀 안에 규정해놓고 초월적이며 초자연적인 하느님 역할을 무시하는 경향입니다.

하느님은 진리의 하느님, 정의의 하느님이시기도 하지만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우리 인간들 사고방식이나 기준을 여지없이 깨뜨리시는 파격적인 하느님이시며, 때론 불가능을 가능케하시는 능력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나약함으로 인한 불가능 앞에서 좌절과 포기만 거듭할 것이 아니라 최선의 모든 인간적 노력과 함께 하느님의 개입과 도우심도 적극적으로 구하는 이 한 주간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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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신문 제793 호
발행일 : 2004-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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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 밤낮으로 부르짖는 신앙인

로마에서 한창 시험공부를 하고 있던 때, 가끔 음식을 보내준 어느 자매님의 남편이 암에 걸렸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서 매 미사 때 기도를 하느님께 올렸습니다. 빨리 쾌차하시어, 가정과 교회에 봉사할 수 있기를 기원하면서. 나중에 들었는데 한국에서 본당 신자들이 구역별로 반에서 그 형제를 위해서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 자매님은 구역장으로 열심히 본당에서 일했습니다. 그렇게 기도가 끊임없이 이어졌고, 저는 그분을 위해서 용기를 내시라는 편지를 썼습니다. 그 형제님이 있던 곳이 암 병동이었기에 제 편지는 다른 환자들에게도 용기가 되었는지 복사해서 바로 옆에 있는 환자도 읽어보게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의 끊임없는 기도와 저의 바람이 보태어져서 그 형제님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고, 교회에 열심히 봉사하고 있습니다.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루카 18,5)라고 복음에 등장하는 과부처럼 끊임없이 주님께 조르면, 무엇이든 들어주신다는 것이 오늘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 과부는 자신의 삶에서 하느님 체험을 강하게 한 사람으로서 완전히 하느님께 돌아선 사람, 즉 회개한 사람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과부와 같은 회개한 이들에게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주님께서 이루어주신 것이고, 그분의 의지대로 사는 신앙인들입니다. 이들에게는 현실의 힘겨움도 좋지 않은 일도 하느님께서 다른 의도로 섭리하시는 것으로 읽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원하는 것이 반드시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바람이 현실에서 실현되지 않으면 하느님께 원망하고, 심지어는 등을 돌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주님을 귀찮게 한다고 우리 입맛에 맞게만 주시지는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밤낮으로 재판관에게 올바른 판결을 해 달라고 청하는 과부처럼 온전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청하는지 신앙생활을 살펴봐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청하는 시간과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시간을 따져볼 때, 밤낮으로 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우리 스승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밤낮으로 기도하시고, 설사 당신의 뜻이 다르더라도 아버지 뜻에 따라 행하셨습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것을 위해서 사셨습니다. 밤낮으로 부르짖는 것은 주님의 뜻에 따라 모든 것을 행한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시간과 노력을 하느님께 초점을 맞춘다면, 나의 것보다 하느님 것을 실현하도록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인 신앙인들은 하느님 섭리에 모든 것을 맡기는 사람이고, 밤낮으로 청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밤낮으로 청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의 하소연도 들으시고 올바른 판단을 내려주시며, 우리의 삶을 보살피십니다. 과부처럼 그토록 귀찮게 하는 사람의 소원 들어주시지 않는 주님이 어디에 계십니까?

양해룡 사도요한 신부
  |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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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주님의 가르침

오늘 독서와 복음의 내용은 기도에 관한 여러 가르침을 묵상해 볼 수 있는 본문들입니다. 먼저 오늘 첫 번째 독서에서 ‘기도의 중요성’이 잘 드러납니다.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가 장정들을 이끌고 아말렉과 싸울 때, 모세가 두 팔을 높이 들고 있으면 이스라엘이 우세하고, 팔을 내리면 아말렉이 우세하였다는 이야기에서 ‘승리는 싸우는 이들이 얻어낸 결과라기보다는 기도의 결과요. 하느님의 선물임’이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즉, 이방민족과의 전투도 그 승리여부는 전략이나 군마 등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하느님께서 결정하시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우리네 삶도 그러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사실 루카 복음서에서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앞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 다음, 바로 이어서 ‘한밤중에 친구에게 빵 세 개를 꾸어달라는 벗의 끈질긴 간청’을 비유로 말씀하실 때(루카 11장) 이미 한 번 등장했던 가르침입니다. 기도에 관한 가르침을 이렇게 한 번 더 반복하는 까닭은, 그것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시는 여정의 마지막 단계에서 한 번 더 반복하여 가르침을 주시는 것은 그만큼 끈질긴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려는 뜻이 있을 겁니다.

불의한 재판관도 끈질긴 간청 앞에는 들어주지 않고는 못 배기는데, 하물며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의 간청을 얼마나 잘 들어주시겠습니까? 그런데 실상 우리가 살면서 하느님께 무언가를 청하는 기도를 드릴 때, 우리의 기도가 즉시 들어지지 않을 때가 더 많다는 것을 체험으로 압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이유는 여러 가지일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청하는 것이 바른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즉, 우리가 바라고 있는 것이 실상 하느님께서 보실 때에는 정말 우리에게 좋은 것이 아니라 좋은 것처럼 보일 뿐, 오히려 해롭거나 덜 좋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지금’이 아니라 ‘다른 때’가 더 우리에게 적절한 때이거나, 혹은 당장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번 간청케 함으로써, 우리의 신앙과 삶의 자세가 좀 더 정화되기를 바라시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이렇게 여러 차례 간청하는 동안 우리 스스로의 가난함과 보잘것없음, 하느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아님을 더 깊이 깨닫게 하시려는 단련의 뜻이 들어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끊임없이 간청하는 우리 기도의 최종 단계는 겟세마니에서 하신 예수님의 기도처럼 되어야 함을 훗날 당신 몸소 보여주십니다. “아버지,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당장 들어지는 기도가 아니라, 끊임없이 간청하는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께 더 겸손되이 다가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차츰 예수님을 따라 결국엔 우리도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시는가 봅니다.“ 그러나 아버지, 제 뜻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 서울대교구 정순택 베드로 보좌주교 : 2016년 10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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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끈질기게 하느님께 졸라야

낙심하지 말고 꾸준히 기도하라고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어떤 과부가 고약한 사람을 만나 매우 억울한 일을 당한 모양입니다. 재판관이란 자가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이라고 합니다. 오로지 돈만 좋아한 사람인가 봅니다. 요즘 한국 사회에서 뉴스거리가 되고 있는 그 지위 높은 법조인들의 모습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요즘 같으면 어림없을지 모르지만, 그 당시에는 찾아가서 조르기라도 할 수 있었던 모양입니다. 가난하고 억울한 과부가 하도 졸라대니까 하느님도 무시하고 사람도 뵈는 것이 없던 그 재판관이 그제야 올바른 재판을 내려주었답니다. 조르지 않았으면 올바르지 않은 재판을 내렸다는 얘깁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돈 있으면 죄가 없는 것이고, 돈이 없으면 죄가 되는가 봅니다.

‘낙심하지 말고 꾸준히 기도하라’고 예수님께서는 힘없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이르십니다. 예수님은 항상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 활동하셨습니다. 오늘도, 불의한 세력 앞에서 살아가는 힘없고 고통당하고 억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깊이 신뢰하고 하느님께 나아가서 실망하지 말고 꾸준히 기도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우리도 그 억울한 과부의 편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 과부와 적대적인 관계, 즉 가난한 사람들을 못살게 하는 사람들 편에 서거나 무관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 사람들은 힘 있는 사람들 편에 서는 경향이 있습니다. 최소한 그런 사람들 편에서 침묵을 지킵니다. 그러면서 중립을 지킨다고 주장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그렇게 방관하면서, 자신이 잘못하지 않았다고 위로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에 눈을 감고 귀를 닫아버리곤 합니다.

예수님의 비유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억울한 일을 당한 그 과부입니다. 그는 용기를 내서 억울한 일을 비정한 재판관을 끈질기게 찾아가서 호소합니다. 오늘도 고통받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나서야 합니다. 자신들의 권리를 스스로 찾아 나서야 합니다. 누가 대신해서 말해 주고 행동해 주길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힘없는 많은 사람들이 죽게 생겼습니다. 새로운 형태의 억울한 일을 많은 이들이 당하고 있습니다. 이는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누가 우리를 위해 대신 나서 주지 않습니다.

한강의 기적으로 부유한 나라가 됐다는 한국 사회는 소수의 부자만이 잔치하는 나라가 됐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많은 사람들의 삶의 질은 형편없이 추락했습니다. 많은 아이가 이렇게 교육받아서는 그들의 가혹한 운명을 절대로 벗어날 수 없게 됐습니다.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지 못해 방황하면서 절망 속에 세월을 보냅니다. 일자리도 불안하게 유지하다가 어느 순간 맨손으로 길거리로 쫓겨납니다. 그리고 비참한 노년기를 보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억울한 일을 당한 그 과부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자신이 나서야 합니다. 우리가 그 고약한 재판관과 같은 사람들을 찾아 나서서 끈질기게 행동해야 합니다. 과거에는 웃음을 자아내던 극우 정치인들이 이제는 세계 정치 세계의 주류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이제 가난한 대중이 일어나서 낙심하지 말고 끈질기게 기도하면서 행동해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감나무 아래에 누워서 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라는 게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모두가 함께 살아나기 위해 희망을 저버리지 말고 끈질기게 기도하면서 ‘공동선’을 위해 투신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살아나기 위해서 말입니다. 휘청거리는 무거운 발걸음을 하면서 비틀거리는 현대인이 정의 자체이신 하느님께로 돌아와서 올바른 구원의 질서를 회복하고 평화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온 세상이 어려움에 부닥치면 부닥칠수록, 하느님께서 직접 나서시어 우리를 올바로 살도록 해주시는 하느님 나라가 모습을 확연히 드러내야 할 때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말씀대로, 낙심하지 말고 희망을 품고 꾸준히 기도하면서 살아남아야 합니다.

▮ 서울대교구 주수욱 신부 : 2016년 10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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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강의를 하는 편이지만, 기회가 되면 강의를 듣곤 합니다. 오늘은 신학생들과 함께 들었던 강의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강의는 하나의 질문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복음화’는 무엇입니까? 저는 예수님께서 전한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 예수님께서 전한 표징과 가르침 그리고 그분의 수난과 죽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이야기 하곤 했습니다. 신학생들도 나름 복음화에 대한 견해를 이야기 하였습니다.

결국 복음화는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아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구세주’입니다. 구세주는 우리를 무엇으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분입니까?

첫째는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분입니다.

많은 죄인들이 예수님을 만났고, 죄를 용서받았으며, 구원의 기쁨을 얻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하느님께서는 죄인이 회개하면 용서해 주시는 분이심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는 목자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자비하시니, 여러분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악’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분입니다.

40일 동안 단식하신 예수님께서는 악의 유혹을 이겨내셨습니다. 악의 유혹을 이겨내신 힘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셨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셨고, 하느님만을 섬겨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고, 그 끝은 ‘악에서 구하소서.’입니다. 악은 새로운 방법으로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남들도 다 그러는데 머’라는 생각으로 지금 나의 잘못을 합리화 하려고 합니다. ‘다음에 하지’라는 생각으로 이웃과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멈추게 합니다. ‘나는 할 수 없어.’라는 열등감으로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리게 합니다.

세 번째는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분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알을 깨고 나온 병아리는 더 큰 세상을 볼 수 있듯이, 죽음이라는 껍질을 깨고 나오면 하느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알려 주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시련과 고통이 무의미한 것이 아님을 알게 해 줍니다. 영원한 생명은 지금 내가 행하는 잘못들을 뉘우치게 해 줍니다. 생각의 지평이 넓어지면 분쟁과 갈등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머물 곳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나눌 수 있고, 목숨까지 바칠 수 있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믿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있으면 산도 옮길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믿는 사람은 죄를 용서받고, 구원 받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십니다. 물을 마시면 갈증이 풀린다는 것을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관념이 아닙니다. 믿음은 생활이고, 실천입니다. 모세는 손을 들어 기도하였고, 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신부 : 2016년 10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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