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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가난한 마음으로 주님께
조회수 | 1,661
작성일 | 07.02.09
오늘 복음은 우리가 마태오 복음 5,1-12의 산상설교와 내용적으로 일치하고 있는 평지설교의 대목을 전해주고 있다. 마태오 복음은 이 설교를 산에서 하셨고 루가 복음은 산에서 내려와 하셨다고 하고 있다. 마태오 복음의 사상은 예수께서 마치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백성들에게 해방자이며 입법자 역할을 했던 것처럼 ‘새로운’ 모세가 되시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 신앙인들은 구원의 말씀을 생활화하고 실천하기 위하여 ‘올라가려는’ 노력을 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루가 복음은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내려오신다’. 즉 우리가 당신을 향해 올라갈 수 있도록 당신을 낮추어 내려오신다는 것이다.

복음: 루카 6,17.20-26: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성서에서 ‘축복’이란 미래에 얻게될 기쁨을 선포하거나(이사 30,18; 32,20; 다니12,12), 현재의 기쁨에 감사를 드리거나(시편 32,1-2; 33,12; 85,5-6.13) 보상에 대한 약속을 표현하는데(잠언 3,13; 8,32.34; 시편 1,1; 2,12) 사용된다. 때문에 축복은 항상 하느님께서 당신께 충실한 사람들에게 주실 ‘기쁨’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축복이란 어떤 희망사항이나 원의의 표현이 아니라, 예수께서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시는데 방해가 되는 모든 상황을 뒤집고 그 나라를 실현시키실 것을 장엄하게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오늘 복음의 축복이 지금 현재의 상황이 뒤바뀌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어떻게 바뀐다는 것인가? 가난한 이들이 부유하게 되고, 배고픈 이들이 배불리 먹게되는 그런 상황으로 된다는 말은 아니다.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예수님의 축복은 불행한 사람들과 행운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처지만 바뀔 뿐 여전히 세상에 불의는 존속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예수께서 계속해서 부유한 사람들과 배부른 사람들을 저주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부유해지고 다른 사람들의 칭찬을 받는 입장에 놓이게 되면 그 때문에 다시 저주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뒤집어엎는’다는 것은 다른 의미에서 일어난다. 즉 정신적 내면 상태의 변화와 또한 마음의 회개로 말미암은 외적 변화를 통해 일어나게 된다.

사람들의 이기심으로 이 사회에 가난한 이들, 배고픈 이들, 고통받고 박해받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하느님의 나라가 아직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그 나라는 이미 그리스도와 더불어 역사 속에 이미 활동하고 있고 이러한 상황을 끊임없이 고발하고, 여기에 고통 당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물질적인 면이 충분치 못할 뿐이다. 그들이 영적인 배부름과 기쁨을 주시는 하느님을 드러내는 밝은 생활을 할 때는 부요 하다. 이 같이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의 생활이 감추어진 차원 즉 세상이 간단히 알아챌 수 없는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 때문에 이 지상의 부와 외적으로 드러나는 성공과 쾌락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가난은 더 이상 단순한 빈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인간들의 마음의 개방이다. 이 때문에 자신들의 행위와 법에 의존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부유한 자들로 여겨지듯이 물질적 재화의 풍요를 자신의 생활의 기반과 보증으로 삼는 사람들은 부유한 사람들이다. 가난한 사람은 구하는 사람이다. 즉 하느님께 자신을 열고 청하는 사람이다. 가난이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법을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하며 구체적으로 가난한 이들과 자신의 삶을 그리고 물질을 나누는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모든 형태의 가난한 이들, 지상에서 안주할 곳을 찾지 못하고 헤매는 이들 모두가 축복의 대상자들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나라는 용서와 참된 재화와 풍요로움과 즐거움의 형태로 모든 이에게 주어졌고 또한 거기에 다다르고 있기 때문이다”(J. Pikaza, Leggere Luca, Torino 1976, p. 42).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회적 현실에 대한 ‘축복’이나 ‘저주’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 모두는 형제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진정 가난한 사람들이 되어야 하며, 그래서 다 함께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서로 육체적 정신적 굶주림을 채울 수 있는 것들을 하느님과 사람들로부터 채워야 하는 그 ‘배고픔’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야기될 수 있는 영신적, 물질적인 악에 대해 회개하는 용기를 가짐으로써 하느님께로부터 위로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나 자신의 마음의 비움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가난을 가질 때에 우리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에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23절).

제2독서: 1고린 15,12.16-20: 주님의 부활이 보증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알아듣기 힘든 역설적인 것이지만, 사도 바오로는 그 보증으로서 예수님의 부활을 말하고 있다. 가장 심한 박해를 당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부활의 영광을 입으셨다. 고통과 부활의 신비 안에서 우리는 오늘 복음의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뜻에 배고프고 고통 당하고 가난하게 될 수 있도록 나 자신을 끊고 살도록 노력한다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그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잠시 조용한 시간을 가지고 기도하며 우리 자신을 반성해 보기로 하자.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지금 굶주린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배부를 것이다. 지금 우는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21절).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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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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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의 달인 예수 그리스도

세상에는 ‘달인’이라는 칭호에 걸맞게 자신의 분야에서 전문적인 지식이나 기술, 그리고 자신만의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매우 많습니다. 이들은 참으로 진기명기를 지닌 사람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우들은 무엇의 달인이십니까? 묵주기도? 성체조배? 이웃에 대한 봉사? 아니면 선교? 이에 대한 대답은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들의 머릿속에 담겨있습니다. 잘 찾아보시고 부디 달인이 되십시오.

그렇다면 우리의 예수님께서는 무엇의 달인이실 것 같습니까? 저는 예수님은 아마도 ‘설득의 달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당신의 제자들과 많은 군중 앞에 당당히 서시어 그들이 하느님께로 마음을 돌리고 참된 행복을 누리면서 살아가길 바라시며 설득하고 계시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그 설득은 강요나 협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와 은총이 가득 담긴 헌신적인 설득이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설득할 때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동원하기 마련입니다. 무력이나 협박을 사용하고 두려움을 조장하거나, 압박이나 조종, 위협 등을 동원해서 강제로 설득시키기도 합니다. 이럴 경우 설득이라기보다는 ‘설복’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립니다. 또한 어떤 혜택이나 보상을 지급하겠다는 명목으로 순종적인 설득을 하기도 하며, 상대방에게 강한 확신이나 믿음, 격려, 회유 등을 통해서 협력적인 설득을 해 나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끝으로 상대방을 존중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신뢰하면서 헌신적인 모습으로 설득을 하기도 하는데, 이것이 예수님의 방법입니다. 확신에 찬 어투와 반드시 상대방이 하느님께 돌아서게 될 것이라는 전폭적인 믿음, 그리고 그를 향한 애정이 헌신적인 설득을 만들어 내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설득을 통해 단기적이고 일시적인 결과를 얻으려 하기 보다는 장기적이고 영속적인 결과를 얻고자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설득은 ‘통제의 설복’ 이 아니라 ‘헌신의 설득’ 으로 향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가난을 택하셨고, 굶주리고 우는 사람들의 편이 되어 그들의 부족한 부분을 어루만져 주셨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도 그들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계셨던 분이었습니다. 그랬기에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참 행복에 대한 말씀이 더욱 설득력 있게 들려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피를 흘리며 생을 다하시면서까지도 우리 모두의 잘못과 죄를 용서해 주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만큼 우리 모두를 향한 설득은 헌신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고, 깊은 감동과 교훈을 주면서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헌신적인 설득에 귀를 기울여야겠습니다. 참된 행복의 길로 우리 모두를 이끌고자 애쓰시는 그분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면서 더 나은 모습으로 하느님 아버지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야겠습니다.

▶ 노성호(요한보스코) 신부
  | 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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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행복과 불행에 대한 선언은 종말론적 의미


오늘 제1 독서(예레 17,5-8)는 우리가 늘 그리워하는 축복과 행복은 진실한 믿음과 희망을 어디에 두는가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음을 지혜문학적으로 설명합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사람을 믿거나 사람에게 희망을 두는 것은 버려진 땅에 살려는 것이고 주님만을 믿고 희망을 가지는 것은 약속된 축복의 땅에서 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쉽게 보이는 것과 순간적인 것에만 믿음과 희망을 가지게 될 때에는 저주가 찾아올 것이고, 비록 보이지 않지만 영원하신 주님께만 믿음과 희망을 가지면서 성실하게 살아갈 때 축복이 주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제2 독서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죽은 이들의 부활에 관한 바오로 사도의 탁월한 가르침 가운데 한 부분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바로 우리들의 부활을 미리 보여주신 맏물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들의 부활이 없다고 한다면 그리스도의 부활도 없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지 않으셨다면 바오로 사도의 설교는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이고(탈출 20,16; 신명 19,18), 더 나아가서 우리의 믿음은 바탕도 목적도 없는 것이며, 우리의 희망은 환상적이고 마술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바로 우리들의 영원한 행복,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루카 6,17.2-26)은 하느님과의 만남을 말해주는 구약의 표현(산에서 내려가)과 함께 행복과 불행을 선언하는 종말론적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 제자들이 모아놓은 좋은 사람들, 그리고 사방에서 모여든 군중들(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이 나타납니다. 교회가 점점 확산되어 가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확산되어 가는 교회 안에서 교차되는 행복과 불행의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중요한 열쇠를 제공해줍니다.

행복과 저주에 관한 표현은 고대 근동지방의 문학양식에서 아주 흔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느냐에 따라 행복과 불행을 나누는 것은 구약성경에서도 자주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시편 1,1; 잠언 8,32-36; 집회 25,7-11). 예루살렘의 번영과 안녕을 그리워하고, 예루살렘 사람들이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을 행복의 척도로 말하고, 예루살렘을 저주하거나 파괴하는 이들에게 불행을 선언합니다(토빗 13,12-14).

오늘 복음의 행복과 불행에 대한 선언은 먼저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사명이 바로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 슬퍼하는 이들을 모두 위로하게 하셨다.”(이사 61,1-2; 29,18-19; 40,29-31 참조)는말씀을 전제하고 종말론적인 의미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부유한 사람들에 대한(6,20.24) 언급이 물질적으로 부족한 사람들과 물질적인 것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가난은 첫째로 하느님께만 전적으로 의존할 수 있는 마음을 말합니다. 부유함이란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단절을 가져다주는 것을 많이 가지고 있음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물질이든 비물질이든 그에 대한 집착으로 말미암아(참조 탈출 20,2-6 참조) 하느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만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하여 이제 막 시작된 하느님의 나라가 실현되면 모두 정의로운 세상에 살게 될 것이므로 지금 가난하게 사는 이들에게 위로가 될 것임을 선언하십니다.

부유한 사람들이 불행하다는 것은 부자이기 때문에 단죄를 받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늘 복음의 불행선언은 하느님이 아닌 것을 하느님처럼 경배하는 것과 가진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누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안타까움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굶주림과 배부름(6,21a.25a)에 대한 구원적 의미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배부름이란 하느님의 선물로 인한 풍요로움을 말하기도 하지만 이집트에서 배불리 먹던 빵에 대한 향수(탈출 16,3-8 참조)를 말합니다. 모두가 구원으로 초대받은 사람들이지만 정작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매우 적음을 말하며, 구원을 기다리는 이들은 한결같이 가난한 사람들뿐이었다는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이루어질 정의의 개념에 따르면 구원을 기다리는 이들에게는 행복이, 구원을 거부하는 이들에게는 불행이 주어질 것임을 말합니다.

우는 이들과 웃는 이들(6,21b.25b)은 바빌론 유배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서 눈물을 닦아주시는 분이시며(이사 25,8), 바빌론에서 예루살렘 때문에 애도하던 이들에게 위로의 품에 안아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모든 이들이 크게 기뻐하리라고 합니다(이사 66,10-11).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는 행복을,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이들에게는 불행을 선언하신 예수님은 당신 때문에 제자들이 겪을 박해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 박해가 고통스럽지만 오히려 하느님의 나라가 선포된다는 반증이기 때문에 오히려 기뻐할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결국 오늘 복음의 행복한 사람들과 불행한 사람들에 대한 말씀은 구약성경, 특히 이사야 예언자의 메시아사상과 탈출기에서 나타났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에 대한 경고와 위로의 말씀을 요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미 마리아의 노래를 통해서도 언급했던(루카 1,52-53) 예수님의 사명과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선포해야 하는 하느님 나라의 의미를 예수님께서는 행복과 불행이라는 두 가지 차원으로 요약해주시는 것입니다.

행복이라는 말 대신에 웰빙이라는 말이 유행어 정도가 아니라 생활에서 빠질 수 없는 말이 되었듯이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오늘 복음에 비추어서 반성해야 합니다.

오늘날 웰빙 음식이라는 것의 대부분은 우리 조상들이 물려주신 음식들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을 차버리고, 더 맛있게 만든다고, 더 보기 좋게 만든다고 많을 것들을 첨가하고, 섞어놓았기 때문에 알지 못하는 병에 걸리고, 예상치 못한 불행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보기 좋았고, 먹기 좋았던 음식들이 결국은 하나씩 둘씩 먹지 말아야 할 음식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얄팍한 상술에 의한 “더 좋게, 더 맛있게”라는 구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보이는 것에, 그리고 느껴지는 것에 매달리려고 합니까?

이런 현상은 단순히 먹거리에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날 순간적이고 현상적인 것에 집착하는 나머지 잘못된 구덩이를 파고 있는 사람들의 소식을 하루에도 여러 번씩 듣게 됩니다. 더 나아가서 인간이 모든 것에 대한 주권을 쥐고 있다고 생각한 나머지 하느님의 영역을 넘나들려고 하다가 불행을 끌어들이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지나친 욕심과 집착으로 말미암아 이웃이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자기 배만 채우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지 자주 듣고 있습니다.

오늘 화답송의 시편저자(시편 1; 118 참조)는 예레미야 예언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은 믿을 수 있고 희망을 가질 수 있다고 합니다. 특히 사람들 가운데 악인들의 삶은 바람에 흩어지는 겨와 같기 때문에 멸망에 이르고, 의인들의 삶은 영원히 시들지 않기 때문에 행복에 이르리라고 강조합니다. 악인들의 행복은 곧 불행이 될 것이고, 악인들에 의해 고통을 받는 이들의 불행은 곧 행복으로 바뀔 것임을 노래합니다.

새로운 예루살렘인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하여 오직 하느님만을 믿고, 하느님께 모든 희망을 걸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바로 우리가 추구하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의 표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히 믿고 바라는 것뿐만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는 가운데 영원한 생명을 얻기 원하는 의로운 사람들이기에 하느님께로부터 영원한 행복을 보장받았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잠언의 말씀이 오늘 복음을 요약하는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아들들아, 내 말을 들어라. 행복하여라, 내 길을 따르는 이들! 내 교훈을 들어 지혜로워지고 그것을 가볍게 여기지 마라.

행복하여라, 내 말을 듣는 사람! 날마다 내 집 문을 살피고 내 대문 기둥을 지키는 사람! 나를 얻는 이는 생명을 얻고 주님에게서 총애를 받는다. 그러나 나를 놓치는 자는 제 목숨을 해치고 나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죽음을 사랑한다.”(잠언 8,32-36)

▶ 방효익 신부
  | 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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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제 행복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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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대 고령이 되신 아버지는 가끔 세월의 허망함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밭에서 일 하다가 잠깐 나무 그늘에서 낮잠을 자고 일어난 것 같은데 벌써 여든여섯이야.”

“한낱 숨결 같고 지나가는 그림자 같은 인생”(시편 144,4)의 여정에서 우리는 어떤 행복을 좇아야 하는 걸까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선종하시기 전인 2005년,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말씀을 이렇게 남기셨습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세요.” 죽음의 순간에도 무엇이 그토록 그분을 행복하게 했을까요? “행복했었다.”도 아닌,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행복 고백은 죽음의 순간에도 현재형이었습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오늘 복음은 산에 올라 밤새 기도하신 뒤 제자들 중 열 두 사도를 뽑으신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셔서 많은 제자와 군중들에게 하신 말씀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어떤 사람이 참 행복한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 불행한 사람인지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행복한 사람들’이란 ‘가난한 사람들,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지금 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현실 안에서는 행복하다고 보기 어려운 사람들이 놀랍게도 예수님께는 행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대로 ‘불행한 사람들’은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부러움을 살만한, ‘부유하고, 지금 배부르고, 지금 웃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얼핏 볼 때 얼른 이해가 가지 않지만, 이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갖추어야 할 우선적인 마음의 자세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걸어가야 할 행복한 삶의 길은 세상의 가치와는 분명히 달라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의 현세적 행복이 달달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아침이슬 같아서 날이 밝으면 금방 사라질 것이니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마치 그것이 모든 것인 양, 영원한 것인 양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가난하고 굶주리며, 우는 사람들일지라도 예수님을 믿고 끝까지 신뢰하는 사람들은 하느님께로부터 차고 넘치도록 은혜와 보상을 받는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당장의 불편이 불행은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당장에는 불쌍해 보일지 몰라도 사라질 이슬을 쥐려는 사람들이 도저히 얻을 수 없는, 진짜 행복을 결국 얻어 누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행복과 불행의 차이는 사람과의 비교에 있지도 않고, 더 가지고 덜 가지고의 차이도 아닙니다. 의심을 품지 않고 하느님의 힘과 약속을 끝까지 신뢰하느냐, 잠시 세상이 주는 편리와 안락함에 온 마음을 두느냐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으로 행복한지요? 우리는 언제 행복한지요? 행복은 결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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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김창해 요한 세레자 신부 : 2019년 2월 17일
  | 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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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   [인천] 병원에서 생긴 일  [4]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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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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