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주일강론 (다해)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459 70%
[마산] 행복선언
조회수 | 1,528
작성일 | 07.02.09
누구든 조금씩 행복에 대해선 알고 있다. 행복이 무언지 전혀 모르는 사람은 없다. 표현은 안해도 이런 것이 행복이구나 하고 나름대로 느낌을 갖고 산다. 그렇지만 확신에는 망설인다. 행복해 보이건만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렇게 말하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두려움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행복하다고 말하면 진정 날라가 버리는 것일까. 행복은 은총이다. 주님께서 주시면 누구나 행복할 수 있다. 그러니 두려움보다 겸손으로 대하는 것이 올바른 행동이다. 신앙인은 행복하게 살아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행복의 본질은 주님의 선물이라 했다. 이 사실을 잊어버리면 행복은 불안으로 바뀐다. 그러니 참 행복은 이 세상 것이 아니며 이 세상 기준으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복음의 가르침이다.

그분은 말씀하신다.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며 굶주리며 박해받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세상에선 아무도 그런 사람을 행복하다고 하지 않는다. 본인들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가난과 굶주림과 박해의 원인이 하느님 때문이라면 다르다. 그런 삶을 산다면 반드시 함께 한다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 분께서 함께 하시면 누가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갈수록 사람들은 부자가 되기를 지향한다. 물질이 없으면 죽는 줄 안다. 국가 전체가 경제대국을 지향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복음 말씀은 더 깊은 묵상을 요구한다. 진정 필요한 말씀이지만 잘못 이해하면 가난의 행복을 외치는 궤변으로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행복은 하느님 때문에 가난해지는 데 있다고 했다. 이것이 행복의 열쇠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느님 때문에 가난해지는 것인가. 우선은 마음을 비우는 일이다. 비워야만 채워주신다. 가난에 대칭되는 표현은 부유함이다. 부유한 사람은 많은 재물을 소유한 사람이다. 그렇지만 소유는 언제나 또 다른 소유를 부른다. 부자가 자꾸만 부에 집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누구든 재물을 소유하면 더 많은 재물을 갖고 싶어한다. 이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그래서 나중엔 사람이 재물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재물이 사람을 소유해 버린다.

하느님 때문에 가난해지는 것은 이 끝없는 욕망 앞에서 절제하는 자세를 말한다. 소유의 욕망 앞에서 멈출 줄 아는 자세를 말한다. 이런 사람이 하느님 때문에 가난해지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될 때 물질 앞에서 자유로워진다. 그러니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구별을 물질의 소유로 판단해서는 안된다. 그런 것은 별개의 문제다. 진정한 부자는 소유 앞에서 자유로운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주님께서 언제든지 채워주시기 때문이다. 복음에서 말하는 하느님 때문에 가난한 사람이 바로 이런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분의 힘을 느낀다.

누구든 절제와 자유를 갖추면 행복해진다. 그런 자세로 삶을 살아간다면 어찌 세상이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겠는가. 어찌 세상이 그에게 아름다움을 주지 않겠는가. 삶이 어찌 그에게 무섭고 두렵겠는가. 그는 진정 부자요 행복한 사람인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란 말이 어울린다. 하느님의 힘이, 하느님의 세력이 그들의 것이 된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된 부자는 물질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을 소유한 사람임을 다시 한번 깨닫도록 하자.

▶ 신은근 신부
459 70%
천국은 억눌린 민초(民草)들의 것이다.

역사의 참 주역은 누구인가? 대통령이나 고관들? 소위 정책 결정자들이 역사의 주역인가?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루가6,20)이라고 선언하신다. 말없이 자기 자리를 지키며 끈질기게 삶을 가꾸어 가는 가난한 민초들이 역사 완성의 참 주인이며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들이다.

1. 누가 역사의 주역인가?

요즘 우리 국민들은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 정부 등 새 정부가 등장할 때마다 기대가 컸다. 그러나 새 정부의 출현과 함께 치솟았던 인기와 기대는 번번이 배신으로 돌아왔다. 이런 쓰라린 경험 때문에 정치에 대한 불신을 지워버리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역사를 이끌어가며 발전시키는 주역이 누구인가?"하는 질문을 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일반적으로 대통령, 장관, 국회의원 같은 힘과 권력을 가지고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들이 역사를 이끌어 가는 '역사의 주역'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정치가들이 아무리 법석을 떨더라도 역사는 일반 국민들 즉 민중들이 살아주는 만큼밖에 진전되지 못하는 법이다."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실질적으로 삶의 질(質)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은 바로 이 백성들, 민초(民草)들의 땀과 희생 위에서만 솟아나는 것이기에, 역사발전의 참 주역은 바로 말없이 땀흘리며 사는 이 땅의 민중들이라는 주장이다. 이것이 민중신학의 견해이다.

2. 어떤 사람이 참으로 행복한 사람인가?

예수님의 가장 큰 관심사는 '하늘나라'에 관한 것이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하고 선언하신다. 예수님은 하늘나라 완성에 참여하며 하늘 나라에서 가장 행복한 시민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을 열거하신다. 오늘 복음의 산상수훈의 말씀은 "이런 사람들이 참으로 행복한, 하늘나라의 시민이다."하시면서 하늘나라의 「시민자격 헌장」을 선포하시는 것이 아닌가? 가난하고, 굶주리고, 울고, 미움을 받는 사람들, 욕을 먹고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옳은 일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이야말로 하늘나라를 완성시키고 차지할 사람들이며, 구원될 사람들이라는 선언이다. 이들만이 참 행복에 참여할 사람들이다. 왜 이 사람들이 행복한 사람들이며 구원받을 사람들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시는가?

3. 구원역사 안에서 보는 「야훼의 가난한 자(anawim)」의 특권.

오늘 복음의 산상수훈의 말씀은 거슬러 올라가면 오랜 뿌리를 가지고 있다. 일찍이 이사야 이후에 등장한 스바니아 예언자는 선(善)과 악(惡)에 심판을 내릴 '징벌의 날'에 살아남을 사람들을 열거하면서 "나는 네 한가운데에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을 남기리니, 그들은 주님의 이름에 피신하리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불의를 저지르지 않고, 거짓을 말하지 않으며, 그들 입에서는 사기치는 혀를 보지 못하리라. 정녕 그들은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으며, 풀을 뜯고 몸을 누이리라."(스바3,12-13)하셨다. 이 얼마나 민초(民草)들에게 선포된 희망적인 복음인가?

「야훼의 가난한 자(anawim)」의 구원 소식은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미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신다."(루가1,52)고 하신 성모님의 마니피캇에서도 또 한번 선언된다. 오늘 복음의 말씀도 같은 맥락 안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로마의 식민 통치 하에서 가난에 시달리며 희망 없어 보이는 이스라엘 군중들에게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굶주리는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참으로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오늘 제1독서(예레17,5-8)에서는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 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고 말한다.

우리 사회는 "돈이면, 권력이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는 우상숭배에 빠져있다. 돈이 많으면서도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며 그분을 두려워 할 줄 알고, 그분의 법을 따라 살기는 쉽지 않다.

오늘 복음은 가난하고, 힘없고, 그래서 의지할 곳이라고는 하느님밖에 없는 백성, 항상 억압받고 이용당하지만 하느님을 믿기에 양심을 속일 줄 모르고, 법 없이도 살 겸손하고 어진 백성들, 그러면서도 자기 일을 성실히 수행하며 꿋꿋이 자기 자리를 지키며 사는 이런 백성들이 하늘나라를 차지할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선언인 것이다. 수 없이 짓밟혔으면서도 끈질기게 되살아나서 자기 몫을 말없이 해내는 어린양 같은 민초들이야말로 역사발전의 주역이며 참 행복을 누려야 할 하늘나라의 시민이다.

▶ 유영봉 몬시뇰
  | 02.09
459 70%
우리가 幸福한 이유

1.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제겐 성공회 친구 신부 한분이 계십니다. 언젠가 저의 본당 미사를 하면 신자가 얼마나 오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평일 미사는 열 몇 명쯤 오고, 주일미사는 백 명 가까이 온다고 했습니다. 부럽다고 합니다. 자기 교회에는 평일에 10명 채 오질 않고 주일에는 30명 정도 온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시골 공소 수준입니다. 하지만 그 친구의 사는 모습을 보면 더 행복해보입니다.

2.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저녁에 사람들을 자주 만납니다. 바쁜 그들이 낼 수 있는 시간은 저녁 밖에 없어섭니다.
만나면 회식을 합니다. 하지만 예전과는 달리 사람들은 음식을 앞에 두고도 살찐다고 먹질 않습니다. 그럴 때 전 그들에게 늘 하는 말이 있습니다. “맛있게 먹으면 안찝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사는 맛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3.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저의 웃는 얼굴에 거절하지 못한다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웃는 인상이 좋아서 그런가봅니다. 하지만 이 얼굴 안에 남이 알지 못한 많은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전 사제가 되고 난 뒤 밤늦게 남모르게 성당에서 많이 울었던 적이 많았습니다. 하느님께 죄송해서 울고, 고독해서 울고, 홀로서기 어려워 울고, 타인에게 상처주어 울고… 저 역시 제가 만나는 적지 않은 이들의 웃음이 멋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깊은 고뇌와 고독, 아픔의 십자가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세상 안에서 웃으며 살아가는 고독한 수도자(修道者)들의 웃음은 아름답습니다.

4.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자기 집은 가난하지 않으면서 가난한 교회를 주장하는 이들을 보았습니다. 공동체와 함께 하지 않으면서 자기를 내세우려는 이들을 보았습니다. 가진 것을 나누는 바자회를 하고 난 뒤 남은 물건들을 찾아가지 않는 나눔의 참 뜻을 모르는 이들을 보았습니다. 정결은 알되 순수함을 모르며, 순명은 알되 따르지 않으며, 가난을 알되 궁핍하기 싫어하는 수도자들과 성직자들을 보았습니다. 제가 본 이들은 행복할까요? 전 제가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만족하지 못합니다. 아마 세상에, 남에게, 나에게 죽기 싫어서겠죠.

▶ 이주형(예로니모) 신부
  | 02.09
459 70%
“여기 모인 모든 이에게 강복하소서.”

---------------------------------------------

“여기 모인 모든 이에게 강복하소서.” 미사의 마침 예식에서 사제는 회중에게 강복합니다. 회중은 복을 바라고(행복), 사제는 복을 빌어 줍니다(강복). 강복을 하면서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가 찾아야 될 복, 참된 행복일까?’ 여러 시대, 많은 이들은 건강, 재산, 명예, 장수, 평화로운 죽음 등을 ‘행복’으로 제시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이가 추구하는 것과 상반되는 ‘행복’을 말씀하십니다.

과연 가난하면서도, 굶주리면서도, 울면서도, 미움 받고 모욕당하고 중상당하면서도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의문 앞에서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행복하다.”(『행복론』Ⅱ) 헌데 하느님을 소유한다는 것, 곧 지복직관至福直觀은 현세에서 불가능합니다. 실망하려는 우리에게 성인은 희망을 줍니다. “진정 행복한 사람은 사랑하는 바를 소유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할 만한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다.”(『시편 상해』ⅩⅩⅥ) 그리스도인들은 현세에서 하느님을 소유할 수 없지만, 사랑 그 자체이신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 주님의 말씀에 귀를 열 수 있습니다. 지복직관을 바라는 이들은 현세에서 온전히 하느님과 함께하지 못하기 때문에 가난하고, 울 수밖에 없습니다. 세속의 가치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따르기에 미움, 쫓겨남, 모욕과 중상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행복합니다.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거는 것이 아니라 부활, 그리고 영원한 생명에 희망을 걸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 사제와 회중은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함께하시기를 청합니다. 사랑이신 주님을 찾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주님과 함께하는 참된 행복의 부스러기를 맛보게 됩니다. 하지만 또한 우리는 아직 완전하고 영원하게 주님과 하나 될 수 없기에 지금 가난하고, 굶주리고, 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마냥 슬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찾아 눈물 흘릴 때 여인 중에 복되신 주님의 어머니이며 우리의 어머니이신 그 분께서 당신이 받는 은총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며 치맛자락으로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어머니 품에 안겨 서로를 위로하며 이 지상 여정의 시련을 끝까지 견디어 내길 희망합니다.

-----------------------------------------

마산교구 이재혁 안드레아 아벨리니 신부 : 2019년 2월 17
  | 02.15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263   [의정부]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1] 1475
262   [전주]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부유한 사람들!”  232
261   [수원] 가난한 마음으로 주님께  [3] 1661
260   [춘천] 참행복  [1] 2416
  [마산] 행복선언  [3] 1528
258   (녹) 연중 제6주일 독서와 복음 [행복하여라, 불행하여라]  [3] 1435
257   [수도회] 참담한 심정  [1] 1474
256   [안동] 신앙인의 삶  569
255   [부산]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님의 말씀을 좇아 사는 길입니다.  [5] 2058
254   [의정부] 예수님을 향한 참사랑  [5] 1745
253   [대구] 그들의 선택  [2] 1400
252   [서울] 사람 낚는 그물과 황금돼지  [5] 2226
251   [수원] 부르심과 복음화 사명  [3] 2009
250   [마산] 인생의 그물질, 깊은 데는 어디인가?  [6] 2156
249   [군종] 예수님과 만나고 싶다면  [3] 2010
248   [인천] 돈을 낚기보다 사람을 낚아보자!  [5] 2021
247   [청주] 물이 깊어야 큰 배가 뜬다  [1] 251
246   [대전] 밑바닥 체험  [1] 1620
245   [춘천] ‘주님 일꾼’ 될 준비 됐나요?  [2] 224
244   [원주] 사람 낚는 어부  [3] 1988
243   [전주] 부르심과 수동(受動)의 영성  [2] 1794
242   [광주] 죄인과 소명  187
241   (녹) 연중 제5주일 독서와 복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5] 2295
240   [수도회] 피조물 안에 숨어계신 하느님 찾기  [1] 1657
239   [부산] 예수님은 약자로, 또 실패자로 죽어 가셨습니다.  [4] 2289
238   [서울] 마땅히 지켜야할 변치않는 권위  [6] 2100
237   [안동] 용기를 내어라  [2] 1749
236   [마산] 태양은 어느 집 앞마당만 비추지 않는다.  [3] 2054
235   [청주] 하느님의 힘이 함께  165
234   [인천] 보는 방법  [5] 2176
233   [대구]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2] 1608
232   [군종] 오드리 헵번과 2000년의 사랑  [2] 11714
231   [수원] 예언자의 사명과 그 증거  [4] 2443
230   [대전] 하느님 자비의 증거자가 됩시다.  191
229   [광주] 도전받는 예언자  [1] 154
228   [전주] 예수님 고향 방문  [2] 2090
227   [춘천] 내가 원하는 대로 남에게 해주자  [4] 2196
226   [원주] 환영 받지 못한 예수님  [1] 226
225   (녹) 연중 제4주일 독서와 복음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3] 1620
224   [인천] 병원에서 생긴 일  [4] 1920
 이전 [1]..[11][12][13] 14 [15][16][17][18][19][20]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20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