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주일강론 (다해)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459 70%
[춘천] 참행복
조회수 | 2,416
작성일 | 07.02.09
▶ 저주와 불행

오늘날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 가장 큰 불행이 무엇인지를 우리 시대보다 더 참혹한 시대를 살았던 구약의 예레미야 예언자와 신약의 바오로 사도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 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있다.”(예레 17, 5)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 19)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지 않고 세상 것이나 현세의 이익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찾는다면 그것이 저주의 삶이며 가장 큰 불행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광야에서 주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때때로 말 못할 고통으로 인하여 참된 신앙의 문턱에 다다르지 못하는 아픔이 있습니다. 고통은 진실로 믿음의 걸림돌입니다. 인생의 이 같은 슬픔을 알았기에 옛 시인은 이렇게 탄식하였던 것입니다.

“저희의 햇수는 칠십 년 근력이 좋으면 팔십 년. 그 가운데 자랑거리라 해도 고생과 고통이며 어느새 지나쳐 버리니, 저희는 나는 듯 사라집니다.”(시편 90, 10)

그래서 자주 우리는 “왜?… 하필이면 내가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합니까?”, “왜?… 우리 가정에 이 같은 끔찍한 고통을 주십니까?”, “왜?… 우리 아이이어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 아무 근심과 걱정거리가 없고 평화로울 때 보다는 여러 시련 가운데 있을 때, 그때에 비로소 주님께서 더 필요한 때이고, 그때에 더욱 주님께 의탁하며 기도해야할 때가 아니겠습니까?

진정 예레미야 예언자는 고통과 슬픔을 온 몸으로 살았던 인물이었습니다. 때문에 그의 이름 앞에는 ‘고난의 예언자’, ‘통곡의 예언자’, ‘가슴이 찢어진 예언자’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가슴이 미어지고 마음은 터질 것 같은 슬픈 목마름을 살았음에도 끊임없이 들려오는 주님의 말씀에 또다시 의지하며 살았던 희망의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저에게 날마다 치욕과 비웃음 거리만 되었습니다.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하겠습니다.”(예레 20, 8~9)

세상 것과 세상 사람이 아닌,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그 말씀을 간직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 행복하여라

일본인 작가 엔도 슈샤쿠는 ‘예수의 생애’라는 글의 서두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참된 예수님의 모습이나 얼굴은 그분과 더불어 산 자, 예수님과 그분의 인생을 가로지른 인간 이외에는 그 누구도 본 적이 없다. 예수님의 생애를 말하고 있는 성경마저도 그분의 외모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성경을 읽을 때, 우리들이 왠지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 볼 수 있는 것은 성경을 쓴 사람들, 곧 예수님을 알았던 사람들이 평생토록 그분을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평생 잊을 수 없고, 언제나 자신들의 가련하고 불안한 마음을 아시고 그 아픈 인생 여정에 동행하여 주셨던 예수님을 기억하고 글을 썼기에 우리들이 비록 예수님을 뵌 적은 없어도 성경을 읽을 때마다 예수님의 얼굴이 머리에 그려진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잊을 수 없는 얼굴이며, 끝내 그분께만 희망을 두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오늘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 20)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행복의 참된 조건을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불행한 요소들인 ‘가난’, ‘굶주림’, ‘울음’, ‘미움 받음’ 등을 내세우신 까닭은 인생 저 밑바닥에 떨어져 본 사람만이 마지막 붙잡을 수 있는 생명의 끈이 하느님 밖에 없으며, 하느님과 자신과의 끈을 놓지 않기 때문이라는 의미입니다.

반대로 부유하거나 배부른 사람들은 하느님이 아닌 세상의 여러 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언제든 하느님 아닌 다른 것에 의지하고, 다른 것을 찾아다니기 때문에 불행하다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선택은 분명해졌습니다. 불행과 저주는 사람과 제 자신에게 의지하는 것, 현세에만 희망을 두는 삶이며, 행복과 희망과 구원은 오로지 하느님께만 내 삶의 전부를 내어 맡기는 삶입니다.

전자는 죽음이며, 후자는 생명입니다. 그 선택은 분명 내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

춘천교구 배광하 신부
459 70%
“행복하여라. 너희 바보들“

---------------------------------------

누군가가 말합니다. “나는 가난해서 정말 행복해.” 그러면 다들 이렇게 반응할 것입니다. “바보 아냐?” 그런데 가난해서 행복하다고 말하는 그 누군가가 다름 아닌 예수님이시라면…, 그리고 그분의 말씀이 결코 농담이 아니라면…, 그러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들처럼 보지 않으시는 하느님’ (1사무 16,7)께서는 세상의 논리와 인간의 판단을 여지없이 뒤집어 놓으시는 분입니다. 예를 들어, 만왕의 왕이며 세상의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정반대로 가장 미약한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은 평화를 주셨고’ (요한14,27),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당신의 친구로 부르셨습니다’ (마태 9,13). ‘누가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라’ (마태 5,39)던 그분은 급기야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루카 6,35). 그러므로 이 모든 말씀을 세상의 기준에 따라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너희는 모두 바보가 되어라.”

오늘 복음은 이런 가르침의 연속선상에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굶주리는 사람들! 우는 사람들! 쫓겨나고 모욕당하는 사람들!”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 말씀은, 행복에 대한 우리의 통상적인 관념을 뒤집었을 때만 비로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현실의 그 무엇으로 충족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그분과 일치할 때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느님과 함께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완전한 행복에 대한 주님의 ‘바보 선언’ 을 묵상하면서, 우리 시대의 참된 바보, 김수환 추기경을 생각합니다. 어제로써 세상을 떠나신 지 만 10년이 되셨는데, 그래서 이제는 우리의 기억 속에서 조금씩 희미해질 만도 한데, 그런데 아직도 그분의 모습이 선명하고 그 따스한 미소가 몹시도 그리운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일생을 시대의 아픔과 고통에 정면으로 맞섰고, 소외되고 아픈 사람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들과 더 가까이 있지 못함에 괴로워했던 분, 그래서 마지막으로 자신의 눈마저 내어주고 가신 그분께서는 자신을 일컬어 ‘바보’ 라고 하셨습니다. 세상 누구도 그분을 바보라 여기지 않지만, 하느님 앞에서 스스로 바보라고 인식하신 것입니다. 또 다른 의미의 ‘바보 선언’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되돌아보면 그분은 정녕 진정한 바보였습니다. 인간적인 기준과 세상의 논리 안에서 그분은 정말 바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진정으로 행복했습니다.

모두 너나 할 것 없이 똑똑해지고 잘나 보이려 기를 쓰는 세태 속에서, 우리 시대의 위대하고 거룩한 영혼, 바보 추기경의 마지막 말씀을 상기합니다.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

-----------------------------------------

춘천교구 신호철 토마스 신부 : 2019년 2월 17일
  | 02.15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263   [의정부]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1] 1475
262   [전주]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부유한 사람들!”  232
261   [수원] 가난한 마음으로 주님께  [3] 1661
  [춘천] 참행복  [1] 2416
259   [마산] 행복선언  [3] 1529
258   (녹) 연중 제6주일 독서와 복음 [행복하여라, 불행하여라]  [3] 1435
257   [수도회] 참담한 심정  [1] 1474
256   [안동] 신앙인의 삶  569
255   [부산]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님의 말씀을 좇아 사는 길입니다.  [5] 2058
254   [의정부] 예수님을 향한 참사랑  [5] 1745
253   [대구] 그들의 선택  [2] 1400
252   [서울] 사람 낚는 그물과 황금돼지  [5] 2226
251   [수원] 부르심과 복음화 사명  [3] 2009
250   [마산] 인생의 그물질, 깊은 데는 어디인가?  [6] 2156
249   [군종] 예수님과 만나고 싶다면  [3] 2010
248   [인천] 돈을 낚기보다 사람을 낚아보자!  [5] 2021
247   [청주] 물이 깊어야 큰 배가 뜬다  [1] 251
246   [대전] 밑바닥 체험  [1] 1620
245   [춘천] ‘주님 일꾼’ 될 준비 됐나요?  [2] 224
244   [원주] 사람 낚는 어부  [3] 1988
243   [전주] 부르심과 수동(受動)의 영성  [2] 1794
242   [광주] 죄인과 소명  187
241   (녹) 연중 제5주일 독서와 복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5] 2295
240   [수도회] 피조물 안에 숨어계신 하느님 찾기  [1] 1657
239   [부산] 예수님은 약자로, 또 실패자로 죽어 가셨습니다.  [4] 2290
238   [서울] 마땅히 지켜야할 변치않는 권위  [6] 2101
237   [안동] 용기를 내어라  [2] 1749
236   [마산] 태양은 어느 집 앞마당만 비추지 않는다.  [3] 2054
235   [청주] 하느님의 힘이 함께  165
234   [인천] 보는 방법  [5] 2176
233   [대구]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2] 1608
232   [군종] 오드리 헵번과 2000년의 사랑  [2] 11714
231   [수원] 예언자의 사명과 그 증거  [4] 2443
230   [대전] 하느님 자비의 증거자가 됩시다.  192
229   [광주] 도전받는 예언자  [1] 155
228   [전주] 예수님 고향 방문  [2] 2090
227   [춘천] 내가 원하는 대로 남에게 해주자  [4] 2196
226   [원주] 환영 받지 못한 예수님  [1] 226
225   (녹) 연중 제4주일 독서와 복음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3] 1620
224   [인천] 병원에서 생긴 일  [4] 1920
 이전 [1]..[11][12][13] 14 [15][16][17][18][19][20]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20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