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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조회수 | 2,080
작성일 | 04.06.17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제자들은 답합니다. “세례자 요한, 혹은 엘리야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옛 예언자 중의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다시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베드로가 나서서 답합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여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고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분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함께 모이고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하신 말씀과 행적을 상기하고 상기한 바를 실천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일을 찾는 과정에 그들이 회상한 바를 기록으로 남긴 것이 복음서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 따라 그들 자신이 먼저 실천하였습니다. 그들이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그들의 실천도 묻어 들어왔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초기 신앙인들이 예수님을 어떤 분이라고 믿고 있었는지를 말합니다. 베드로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이 고대하던 메시아를 지칭하는 그 시대 표현입니다. 베드로가 신앙을 고백하자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믿음은 그리스도라는 말만으로는 부족하고,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함께 넣어서 그리스도를 이해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이 말씀은 초기 교회가 예수님에 대해 깨달은 바와 신앙인들이 실천하던 바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라는 단어는 예수님의 죽음이 있기 전에는 신앙과 관련지어 유대인들에게 통용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을 잃는다는 말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있기 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표현입니다. 초기 신앙인들이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생명이 십자가의 죽음을 넘어서도 살아 계시다고 믿으면서 나타난 표현입니다.

오늘 복음은 메시아에 대한 그 시대 유대인들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수정합니다. 그들이 고대하던 메시아는 강자였습니다. 막강한 힘으로 이스라엘 위에 왕으로 군림하는 메시아입니다. 그 메시아를 시편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그는 다른 나라들을 “질그릇 부수듯이 철퇴로 짓부순다”(2,9). “자칫하면 불붙는 그의 분노, 금시라도 터지면 살아남지 못하리라”(12). 수백 년 동안 강대국의 지배 하에 있었던 이스라엘은 그분이 오시면 강대국을 쳐부수고 이스라엘이 세상 만방을 통치하게 하신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의 꿈입니다.

이 세상에는 강자가 군림하고 강자의 편에 서는 사람이 살아남고 부귀와 영화도 누립니다. 인류역사가 꿈꾸고 기대한 하느님은 항상 강자였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염원은 강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강자가 항상 유리하고 옳은 세상입니다. 하느님이라는 강자에게 빌고 바쳐서 우리의 소원을 이루겠다는 것이 인류 역사에 나타난 민속신앙들입니다. 이스라엘이 고대하던 메시아도 이런 인간의 기대와 상상을 넘어서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고대하던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강대국으로 만들어 주고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는 존재였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비롯된 그리스도 신앙은 전혀 다른 하느님을 말합니다. 강자인 하느님이 아니라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입니다. 사랑은 강자가 되도록 하지 않습니다. 강자는 군림하고 다스립니다. 사랑하는 이는 약자가 됩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는 자녀 위에 군림하는 강자가 아닙니다. 부모는 사랑하는 자녀 앞에 약자가 되어 자녀를 지켜보고 자녀가 표현하는 바에 귀를 기울이고 그를 살립니다. 하느님은 군림하시지 않고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은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 안에 그분의 사랑이 살아 숨쉴 것을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 것을 기다리십니다. 사랑은 바라고 견딘다고 바울로 사도(1고린 13,7)는 말합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이 우리의 생명이고 숨결일 것을 바라십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신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의 생명과 숨결로 살겠다는 뜻을 담은 말씀입니다.

사랑은 자기 한 사람 잘 되는 길을 찾지 않고 스스로를 잃게 합니다.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이 살 것”이라는 오늘 복음의 말씀이 표현하는 바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에게 고통을 주면서 자기 자신은 기고만장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고통 받는 사람을 보면서 함께 괴로워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을 때 하느님도 함께 지셨습니다. 인간 세상이 만드는 비극에 예수님과 함께 약자가 되어 참여하셨습니다. 우리가 쉽게 상상하지 못하는 것은 하느님이 사랑하셔서 약자가 되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약자가 되어 함께 계십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십니다. 사랑에 있어서 전능하시다는 뜻입니다. 무엇이라도 되어 줄 수 있는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모세로부터 비롯된 신앙을 이 세상의 이야기로 비하시켰습니다. 하느님을 강자로 만들었습니다. 예언자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이 세상의 지배자와 같은 하느님을 만들었습니다. 하느님은 무서운 분이 되었습니다. 그분이 주는 법은 한 자도 틀리지 않게 지켜야 하고, 그분이 요구하는 제물은 철저히 바쳐야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불행은 그분의 뜻을 그슬린 죄에 대한 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가난과 병고는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는다고 믿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사랑으로 극복해야 하는 불행이었습니다. 그 사랑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되라는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그 사랑을 위해 십자가를 지고, 목숨을 잃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신앙인은 그분의 십자가 죽음을 시야에서 잃지 말라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에게 메시아는 새로운 세상 질서를 여는 분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 여는 새로운 질서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강자가 아니라 나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약자가 소중하게 보이는 질서, 많이 가진 자가 아니라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가난한 자가 돋보이는 질서입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기에 나타난 질서입니다. 자기 욕구를 충족시키는 사랑이 아닙니다. 스스로를 내어 주고 제 목숨을 잃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의 질서를 배워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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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병원에 온 지 얼마 안 되어서 근처 식당에 갔다. 우리 병원 간호사들을 만났다. 서로 알아보고 인사를 나눴지만, 그 중 어떤 이는 내가 ‘목사님’이냐고 동료에게 물었다. ‘내가 누구냐?’는 그들끼리의 물음에서 정답은 ‘신부’지만, ‘목사’라는 답도 그녀 자신에게는 별 차이가 없는 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일 더하기 일은 무엇인가?’라는 문제의 답은 무엇인가? 답은 여러 가지다. 일반적인 ‘2’라는 대답, ‘41’이라는 도식적인 변형의 대답, ‘중노동’이라는 사회적 대답도 있다. 이 문제의 정답은 ‘2’이지만, 나머지 다른 답도 맞다고 볼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먼저 이렇게 물으셨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사람들은 대개 이스라엘에서 계속 있어 왔던 예언자로 여긴다고 제자들은 대답한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으셨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우리의 호프 베드로가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선수를 쳤다. “당신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나 군중들을 향하여 여러 가지 질문을 하셨다. 그 중에서도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고 쉬운 것 같지만 매우 어렵다. 우리의 진정한 신앙이 뒷받침 되지 않고서는 그 대답에 힘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우리 자신에게 물으신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1 더하기 1은 뭐냐?’는 문제에 대한 답처럼 ‘2’라고 쉽게 답해 버릴 수도 있다. “당연하지 않느냐?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지 않느냐?”고 말이다. 하지만 ‘예수는 그리스도다.’라는 답은 신앙이 없는 사람들도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그런 답이다. 꼭 ‘2’라고 정확히 답을 할 수는 없다하더라도 ‘신부’와 ‘목사’를 혼동해서 대답하는 것과 비슷하게 답할 수 있다.

그러면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예수님의 물음에 신앙인은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가? 그 힌트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에 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예수님은 남을 위해 그것도 남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고 사는 삶의 모범을 보여 주셨다. 그분을 본받아 우리도 매일 허욕과 집착과 탐욕이라는 자기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져야 한다. 매일 자신을 반성하고 예수님의 희생과 봉사를 이웃에게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오늘 예수님의 물음에 대한 신앙인의 올바른 대답이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예수님의 물음에 대한 정확한 답은 말 속에 담기 어렵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말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행동으로 보여 줘야 한다. 십자가를 지는 행동을 실천할 때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힘차게 고백할 수 있다.

부산교구 김주현 도미니코 신부
  | 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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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하면서도 위대한 사람들

평범하면서도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십자가입니다. 평범한 우리를 예수님 영광의 몫을 같이 차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해서 참으로 고마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영광도 없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주님께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길은 어려운 길이며 ‘좁은 문’(마태 7, 13)을 통과해야 하는 길입니다. 그렇지만 그 길은 ‘생명으로 이끄는’(마태 7, 14) 영광의 길입니다. 또한 그것은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는 길입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 33)라고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고통과 시련, 슬픔과 외로움 이런 아픔들은 우리 인생에서 피하려고 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저절로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용기를 내고 그 시련과 고통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부딪쳐야 할 문제들입니다. 힘을 내어 극복해야 할 인생의 과제들입니다. 많은 장애물을 용기 있게 극복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사람은 마음먹기에 따라 역경을 훌륭하게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주님의 영광은 천국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지상에서의 모습에서도 영광은 빛나고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도 영광은 빛나고 있습니다. 박해와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십자가를 당당히 진 모습에는 비겁함이나 두려워하는 모습이 없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 살아가는 인간에게서 드러나는 영광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십자가를 지고서도 이처럼 사람들로부터 부러움과 박수를 받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바로 주님의 십자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자신 있게 당당하게 적극적으로 진 사람은 결코 세상에서 낙오자도 아니고 조롱거리도 아닙니다. 오히려 역경에 흔들리고 무서워하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승리자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우리의 구세주 그리스도라고 베드로 사도처럼 고백하십니까? 그렇다면 십자가를 지십시오. 두려워하지 말고 망설이지 말고 영광의 십자가를 지십시오. 씩씩하게 기쁘게 지십시오. 주님의 십자가를 지는 것은 우리에게는 무한한 영광이며 특권입니다. 행복해질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행복이 넘칠 것입니다. 주님 영광의 길에 이미 들어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강종석 베드로 신부
  | 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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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신 걸 보니 세간의 반응도 궁금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막상 “세례자 요한”이나 “엘리야”라고도 하고 “옛 예언자 한분이 다시 살아나셨다”라고도 한다는 반응에는 그저 무심합니다. 세간의 엉뚱한 생각을 글렀다고 말씀하지도 않고 군중들의 동떨어진 판단을 반박하지도 않으십니다. 다만 같은 질문을 제자들에게 던지심으로 정작 주님께서 알고 싶으신 것은 제자들의 마음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십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 마음을 점검하라는 명령으로 듣습니다. 과연 주님과 나의 관계를 제대로 인식하여 그분을 따르고 있는지 살피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그날 베드로가 고백한 사실을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때문에 주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어 오신다면 망설이지 않고 베드로처럼 정답을 말할 것입니다. 그렇게 척척 정답을 말할 수 있으니, 신앙 점수는 만점이리라 여깁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그날 정답을 맞혔던 베드로였지만 이후에 얼마나 많이 흔들리며 지냈는지 또 얼마나 큰 과오를 범했었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베드로처럼 주님께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할지라도 그 마음이 얼마나 진실한지 돌아보게 됩니다. 나아가 세례를 받아 가톨릭신자가 되어 그리스도의 형제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깊이 숙고하고 싶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세상 대부분의 종교는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공통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드려지는 종교적 제사는 모두 ‘복을 더 많이 받기 위한’ 인간의 욕구로 채워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가톨릭신앙은 독특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우선 인간이 아닌 하느님께서 먼저 당신의 사랑을 계시하셨다는 점에서 타 종교와 뚜렷이 차별화됩니다. 죽음의 골짜기를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처지를 가엾이 여기신 하느님께서 먼저 구원의 길을 제시하셨다는 점에서 너무도 판이합니다. 신이 스스로 인간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희생제물이 되고 죽임을 당하는 일은 세상의 어떤 종교에도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이시기에 가능한 하느님만의 생각이며 방법입니다. 그 진리를 인지하기에 우리는 살아계신 주님을 믿습니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예배는 감사와 찬미로 채워집니다. 기쁨과 환희가 솟아나는 천상의 잔치로 꾸며집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그 찬란한 천국잔치에 참여하는 우리의 속내를 캐물으십니다. 구원에만 귀가 솔깃하여 고난이라면 넌더리를 내기 일쑤이며 부활만 탐하고 죽음은 결사코 피하려드는 우리의 행위를 고치라 하십니다. 왜 꼭 고난이 필요하다는 건지, 왜 꼭 죽어야만 하는지 마땅찮아서 믿음의 뒷맛이 늘 떨떠름해져있는 우리에게 결단을 촉구하십니다.

주님의 사랑을 고작 소원을 빌어 내 꿈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우리, 믿음을 빌미로 ‘복’을 챙길 요량만 그득한 우리를 향하여 당신의 사랑을 먼저 기억할 것을 권고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주님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됩니다. “나는 주님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깊이 숙고해 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속 시원한 답을 들은 후에 가장 중요한 진리를 선포하십니다. 당신을 믿고 따르는 당신의 사람에게는 감수해야 할 고유의 사명이 있다는 사실을 밝히십니다. “주님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믿음인이라면 세상의 풍요가 아닌 험난하고 고된 고난의 길에 동행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십니다. 신앙고백은 “주님을 향한 믿음이란 정녕 목숨을 잃을” 각오를 결단하는 일입니다. 진정으로 당신의 뜻을 살기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잃겠다는 엄청난 맹세입니다.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이제 내 목숨은 주님의 것이라는 대단한 선언입니다. 삶과 죽음이 주님의 손 안에 있다는 진리에 내 생명을 거는 막중한 언약입니다.

우리는 그날 정답을 말했던 베드로가 어떻게 철저히 변화되었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살겠다고 주님을 부인한다면,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빤히 알면서 모른 척 외면하고 포기한다면 이미 죽은 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말로만’ 정답을 드리는 어린 신앙이 아니라 더 큰 믿음으로 성숙하여 주님께 든든한 제자가 되기 바랍니다.

부산교구 장재봉 신부
  | 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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