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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종말론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조회수 | 2,006
작성일 | 09.11.27
11월 위령성월도 다 지나갑니다. 때맞추어 찾아온 초겨울은 사람들로 하여금 지나온 자신들의 삶의 궤적을 뒤돌아보면서 삶의 의미를 생각토록 하는 성찰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위령성월의 근본 지향은 연옥 영혼들의 귀천을 위해 하느님께 간구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위령성월이 갖고 있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지향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옛 로마인들의 경구를 빌려 표현한다면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는 한 마디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코헬렛 12장 7절에 “먼지는 전에 있던 흙으로 되돌아가고 목숨은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로 되돌아간다”고 했습니다. 세상에 무한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시공(時空)안에 태어난 인간은 시공 속에 살면서 시공의 제한을 받다가 시공을 떠나게 마련입니다. 시공을 초월해서 시작도 끝도 없으신 영원하신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십니다.(묵시 1, 8) 어떠한 피조물도 자신의 유한성을 벗어날 수 없다면, 유한성을 무한성으로 바꾸어 줄 수 있는 분은 창조주이신 하느님 밖에 없습니다. 결자해지라고, 피조물을 지으신 창조주 말고는 어떤 무엇도 결자해지의 능력자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마치 환시를 보는 듯한 장면을 통해 종말론에 대한 강한 메시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 내용 첫 번째 순서에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와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간구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아버지의 뜻과 나라를 구하기보다는 물신사상으로 상징되어 세속의 가치를 우선 구하고자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세상의 모든 가치와 목적은 무한한 하느님의 나라가 아닌 유한한 가치에 불과한 세상 가치에서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는 바벨탑 얘기가 하나의 옛 설화가 아니라 현재도 진행중인 실제 상황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종말론적 신앙은 이와 같은 가치의 혼돈 속에서 정도의 길을 걸어 갈 수 있도록 하는 삶 자체입니다. 오늘날 만연되어 있는 물신 숭배 사상이 세상을 구원할 수 없을뿐더러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 14장 17절에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나리아 성령 안에서 누리를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라고 했습니다. 현세에 살면서도 궁극적인 행복의 가치를 현세에 두지 않고 하느님의 나라에 두면서 살아갈 때 그 안에 참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근본적으로 종말론적인 신앙의 삶이라고 합니다. 주 예수님 어서 오소서(마라나 타!, 1코린토 16, 23)

부산교구 오남주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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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문턱에서 우리는 대림(待臨)시기를 맞이합니다. 오늘은 그 첫 주일입니다. 교회 전례의 새 주기(週期)를 시작하는 날입니다. 낮의 길이도 많이 짧아졌고, 대자연도 푸른 생명의 빛을 잃어 가면서 죽음의 겨울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전례의 새 주년(週年)을 시작하면서 우리도 우리의 삶에 종말이 있다는 사실을 다시 기억하고 삶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오늘 복음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종말을 상상하며 발생시킨 이야기입니다. 해와 달과 별 등 천체가 흔들리고, 사람들은 불안과 공포에 떨며, 기절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은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라고도 말하였습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구약성서의 유대교 묵시문학의 표현들(하깨 2,6; 요엘 4,16; 집회 16,18; 다니 7,13-14 참조)을 빌려서 세상의 종말에 대해 상상하였습니다. 그들은 구약성서가 말한 종말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성취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친숙한 그 문서들을 이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표현하였습니다.

창조와 세상 종말에 대한 구약과 신약성서의 이야기들은 인류의 기원(起源)이나 역사의 종말에 대해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가 어떤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는지, 또 세상 종말에 어떤 현상이 일어날 것인지를 알려 주는 이야기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들은 그것을 기록한 공동체가 하느님, 혹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또 세상의 의미에 대해 그들이 믿고 있던 바를 구약성서의 언어를 빌려 표현하여 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런 이야기들 안에서 알아들어야 하는 것은 세상 종말과 삶에 대한 그들의 믿음입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우리가 알아들어야 하는 것은 우리 삶의 최종적 가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것이라고 말한 다음,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세상의 일에 얽매이지 말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삶 안에 영접하라는 말입니다. 그분이 우리 안에 살아계시면, 그분이 하신 자비와 사랑의 실천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이어서 복음은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고...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살라고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은 방탕하거나 만취하는 일이 없고, 일상의 근심에 얽매여 허송세월하지도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일들을 삶 안에서 만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한 사람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 안에 숨겨진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며 사셨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자유로운 인간의 모습이었습니다. 인간의 자유는 ‘먹고 마시는’ 일을 위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려면, 우리가 얻은 이 세상의 편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느님은 높으신 분, 우리가 그분의 법을 잘 지키고 그분에게 잘 바쳐서, 그분으로부터 축복을 받아 잘 먹고 잘 살며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는 우리의 편견입니다. 과거 세상에는 높은 사람들이 있었고, 사람들은 그들의 법을 지키고, 그들에게 바쳐서, 그들로부터 혜택을 받아 잘 살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하느님에게 연장 적용하여 하느님을 상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 세상의 관행에서 발생한 편견입니다.

초기 신앙인들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고백한 것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참으로 알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아버지라 부르신 하느님은 사람들에게 율법과 제물봉헌을 강요하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구약성서는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셨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은 사람이 자유롭게 살 것을 원하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유대교 기득권자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십자가에서 그 최후를 마친 것은 유대교 지도자들이 율법과 성전의례를 강요하면서 가르친 하느님을 거부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이 율법과 성전의례에 예속되어 비굴하게 살 것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자유롭게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여 그분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으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 안에 나타난 하느님의 생명을 알아보고, 그것을 영접하여 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 유대교 지도자들이 소외시킨 이들과 어울리셨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병자와 장애인은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았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고쳐주어, 하느님이 벌하시기 위해 그런 불행을 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불쌍히 여기시는 분입니다. 아버지는 연민으로 자녀들을 대하고 그들과 함께 있습니다. 아버지는 자녀를 버리거나 그들에게 보복하지 않습니다. 그 시대 유대교 지도자들이 믿던 하느님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하느님에 대해 자기들과 달리 믿고 있는 예수님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분을 제거하였습니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하는 세상입니다.

연민은 우리의 마음 안에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생소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우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합니다. 연민은 강자에게 어울리지 않고, 또 연민이 우리 안에서 발동하면 우리가 손해를 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이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살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이 목숨까지 바치며 실천하신 그 연민을 우리도 실천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한 해가 또 가고 있습니다. 열 두 장이었던 달력의 남은 한 장이 우리의 아쉬움을 대변합니다. 우리의 삶에 이웃을 향한 연민의 순간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계셨던 순간들이 많지 않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땅에 굴러다니는 낙엽을 밟으면서 생각합니다. ‘먹고 마시는 일과 쓸데없는 세상 걱정에 마음을 빼앗겨서’ 살다가 낙엽으로 지는 인생이 되지는 말아야 하겠습니다. 대림절은 하느님이 오셔서 우리 안에 자리 잡으시도록, 오늘 복음이 말하듯이,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고...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노력하는 계절입니다. 세월도 가고 우리도 갑니다. 하느님의 연민이 우리 마음 안에 자리 잡고, 그것이 우리의 몸짓으로 나타나도록 예수님을 바라보며 대림시기를 시작합시다.

서공석 신부
  |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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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전례주년

오늘 대림 제1주일과 함께 교회는 새로운 한해의 전례주년을 시작한다. 전례주년의 기본적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과 공생활, 그리고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한 하느님의 인류구원역사를 "오늘", 그리고 "여기"에 재현하고 기념하는데 있다. 가톨릭교회는 하느님의 인류에 대한 구원사건의 신비를 1년의 전례주년 안에서 시기별로 나누어 기념함으로써 구원사건의 신비를 재현하고 이에 신자들의 삶을 질서 지우고자 한다. 전례주년은 특히 시간(時間)과 장소(場所)의 성화(聖化)를 강조한다. 매년 반복되기에 지루한 감을 주기도 하지만, 전례주년은 하느님께서 전인류와 전역사에 베푸신 구원의 신비를 1년이라는 주기 속에서 바로 이 시간, 이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사건으로 체험함으로써, 신자들이 자신의 삶을 거룩하게 변화시켜 찬미와 기쁨으로 아버지 하느님 앞에 조금씩 나아갈 수 있는 계기를 지속적으로 마련해 주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들은 이러한 전례주년의 신비 속에서 매번 그 사건(구원사건+성인축일)의 의미를 충분히 묵상하여 전례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성화하여 이 세상과 인간의 구원을 위한 참다운 "성사(聖事)"로서의 사도직을 충실히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전례주년의 중심은 예수님의 성탄과 부활사건이다. 그래서 주님성탄대축일과 주님부활대축일이 전례주년의 두 기둥이 된다. 교회는 12월 25일 성탄대축일을 준비하기 위해 4주간의 대림시기를 지내며, 그 다음 주님세례축일까지 성탄시기를 보낸다. 주님세례축일 다음 월요일부터 연중시기를 지내는데, 이는 대략 연중 제5∼7주간으로 중단된다. 그 이유는 주님부활대축일을 준비하는 사순시기 때문이다. 부활대축일은 매년 "춘분(3월21일)이 지나 만월(음력 15일) 다음에 오는 첫 주일"로 정해진다. 당해의 부활대축일이 정해지면, 거꾸로 46일째 되는 날이 사순시기(총40일)의 시작인 "재의 수요일"이다. 이 기간 중 6번의 주일은 사순시기에서 제외된다. 주님부활대축일부터 부활시기가 시작되는데, 이는 주님승천대축일과 성령강림대축일까지 50일간 계속된다. 그 다음 월요일부터 사순시기로 말미암아 중단되었던 연중시기가 계속된다. 우리는 편리상 사순시기 이전의 연중시기를 연중시기(I), 부활시기 이후의 연중시기를 연중시기(2) 라고 한다. 연중시기(2)는 한해 전례주년의 마지막인 연중 제34주간으로 끝난다.

따라서 전례주년은 크게 대림시기-성탄시기-연중시기(1)-사순시기-성주간-부활시기-연중시기(2)로 구분되는 것이다. 전례주년의 모든 시기는 통상 그 날의 사건과 의미를 밝히는 특별전례와 함께 성체성사, 즉 미사로 기념된다. 미사는 "주일미사"와 "평일미사"로 구분되며, 그 미사의 중요성에 따라 "대축일미사", "축일미사", 또는 "기념미사"로 불리며, 모든 미사는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로 구성된다. 특히 말씀전례를 다양하고 풍요롭게 하기 위하여 교회는 주일을 3년 주기 [가해-나해-다해]로 정하였고, 평일을 2년 주기 [홀수해-짝수해]로 정하였다. 이는 말씀전례의 독서와 복음을 지정하기 위한 목적이다. 따라서 모든 주일미사에는 3년을 주기로 같은 독서와 복음이 봉독되며, 가해는 마태오복음을, 나해는 마르코복음을, 다해는 루가복음을, 부활시기에는 요한복음을 위주로 선택하였다. 평일미사의 독서는 홀수해와 짝수해의 원칙을 따라 신·구약성서에서, 복음은 매년 같은 복음으로 봉독된다.

그러므로 오늘 대림 제1주일을 시작으로 우리는 2004년 "다해"와 "짝수해"의 전례주년을 시작한 셈이다. 따라서 올해의 전례주년동안 우리는 부활시기와 특별한 대축일을 제외한 모든 주일미사에서 루가복음을 복음으로 묵상하게 되는 것이다. 새로운 전례주년은 매번 기다림과 준비로 특성화된 대림시기로 시작된다. 대림(待臨)은 말 그대로 "올 것에 대한 준비"를 말하며, 대림시기는 그 준비기간이다. 무엇이 온다는 것이며, 어떻게 준비하라는 것인가? 교회가 말하는 대림은 이중적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하느님의 이 땅에 "벌써 오심"과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성탄과 인자의 재림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후자에 관한 것으로써 "깨어 기도함"을 인자의 재림에 대한 준비과제로 제시한다.

"예수님의 성탄과 인자의 재림", 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내포하고 있는 대림시기는 우리에게 과거지사의 성탄과 미래사건의 재림을 한꺼번에 묵상하도록 가르친다. 과거의 일과 미래의 일을 한꺼번에 현재의 순간으로 포착할 수 있는 방법은 "하느님을 내 삶의 한가운데 현존시키는 것" 뿐이다. 매년 같은 일을 한다고 식상해서는 안 된다. 벌써 오셨던 하느님과 다시 오실 하느님은 한결같은 분이시나, 우리 자신이 달라졌음을 깨달아야 한다. 나는 분명 작년의 내가 아니며, 어제의 내가 아니다. 거울을 앞에 놓고 자신의 겉과 속을 비추어 보라. 분명히 나의 모습을 달라졌다. 우리는 성장했고, 변했다. 그래서 올해의 대림도 그만큼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이다. 부디 우리 모두에게 아주 특별한 대림시기가 되기를 기원한다

박상대 신부
  |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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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앞에 깨어있는 은혜로운 신앙의 한 해를

오늘은 전례력으로 한 해를 새롭게 시작하는 대림 첫 주일입니다. 한 해의 첫 시작에 우리는 종말과 끝에 관한 말씀과 함께, 주님 앞에 깨어있는 성실한 삶을 살기를 가르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준비하고 깨어있음’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메시지의 가장 기본적이고 특징적인 내용으로서, 이 ‘깨어있음’은 대림절 전례와 특별히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습니다. 대림절은 기다림의 시기인데, 이 기다림은 근본적으로 희망이 전제되는 것으로서 희망이 없는 기다림은 기다림이 아닙니다. 그래서 참된 기다림에는 설렘이 있고, 기대하는 마음이 있고, 빨리 왔으면 하는 재촉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주님의 오심을 이런 설렘과 기쁨으로 맞이하고 준비하기 위해서 매일 신앙 안에 깨어, 주님의 뜻 안에서 성실하게 살아가려는 ‘각성된 삶’의 자세가 요구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바로 이런 ‘각성된 삶’의 자세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님의 요구와 기대와는 달리 묵묵히 때를 기다리며 참고 인내하는 성실한 삶의 자세가 부족한, 우리 삶의 모습을 봅니다.

모든 희망은 참아내고 견뎌내고 기다리고 인내하는데 숨어 있습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진심과 사랑과 정의의 승리를 확신하며, 최선과 성실을 다할 때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건물을 지을 때 날림공사와 눈가림 공사는 당장에는 능률적이고 편한 공사 같지만 부실공사가 되고, 건물 완공을 점검받는 준공 검사 날이 보상과 완성의 기쁨을 체험하는 날이 아니라, 부실과 눈가림이 드러나는 불안한 날이 될 것입니다. 대신 건실한 공사는 공사 경비가 많이 들고, 공사 기간이 많이 늘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덥고 확실한 공사로서, 준공 검사 날이 모든 수고를 보상받고 완성의 기쁨을 체험하고 맛보는 날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삶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인생의 집을 지을 것이며, 인생의 종말과 마지막을 어떤 모습으로 맞이할 것인지 생각해봐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보이는 현상이 아니라 현상 너머에 있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며, 깨어있는 삶을 산 사람들에게는, 종말이 파국이 아니라 구원이 완성되고 희망이 성취되는 날임을 보여줍니다.

이 대림절에 우리도 마음을 새롭게 하고, 빛으로 오시는 주님 앞에 깨어있으려는 삶의 다짐과 함께, 믿음과 사랑으로 모든 삶의 어려움을 기쁘게 참아내고 이겨냄으로써, 기다림의 참된 의미를 체득하고 주님께 대한 우리의 희망을 더욱 키워가는 은혜로운 신앙의 한 해가 되도록 주님께 기도하고 은총을 구합시다. 아멘.

부산교구 이기정 안드레아 신부
  |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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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그리스도 곁에서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대림 시기의 첫 날을 여는 오늘 말씀의 전례에서는 대림 시기 전체의 의미와 내용을 꿰뚫고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주님께서“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에게 한 약속을 이루어 주겠다.”는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하신 말씀의 실현과 성취에 대해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힘 있게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말씀의 실현과 성취는 우리가 주님께 희망해야 할 이유를 찾게 해줍니다. 또한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생명과 구원의 성취가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해줍니다. 이 희망 안에서 우리는 더욱더 주님의 자녀로서 주님 오심을 준비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자세로,

제2독서 테살로니카 1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우리가 다시 오실 주님 앞에“흠 없이 거룩한 사람으로”거듭나기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를 위해 우리 삶의 태도가 어떠해야 함을 가르쳐 주십니다. 곧“어떻게 해야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있는지”를 깊이 성찰하면서 우리의 삶을 주님께로 향해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도 주님께서는 회개와 속죄의 삶을 사는 길을 제시해 주십니다.“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그리고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면서 다시 오실“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우리의 삶이 주님께 희망을 두면서 인내하고 수덕(修德)에 힘쓰며, 우리의 삶에 늘 현존하고 계신 하느님께 의탁하고 깨어 기도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는 본기도의 내용에서 다시금 확인하게 됩니다.“저희가 이 세상에서 옳은 일을 하며,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를 맞이하게 하시고, 마침내 하늘나라에 들어가 그리스도 곁에서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희망합니다. 그리스도 곁에서 영광을 누릴 그날을 희망합니다. 그리고 이를 온전히 실현할 날을 고대합니다. 희망 안에서의 기다림은 우리에게 용기를 줍니다. 그리고 어떤 시련과 고통에도 이겨낼 힘을 얻게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깨어 있다는 것, 그리고 이 깨어 있음이 삶으로 이어져 실천되어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느님께 겸손하게 기도하면서 그리스도 곁에 영광을 누릴 그날을, 희망 안에서 깨어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 부산교구 곽용승 요셉 신부 - 2015년 11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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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시기는 예수님의 탄생과 재림을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이 시기의 독서와 복음 말씀은 주로 기다림과 준비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그런데 ‘기다림’이라는 말을 들으면 종종 현재와 미래를 서로 가른 뒤, 미래라는 장소에는 영원한 생명, 새 하늘과 새 땅, 하느님 나라 등 이상적인 단어를 모조리 집어넣고, 현재라는 장소에는 어려움, 갈등, 부족함, 죽음과 같은 부정적인 것을 죄다 넣어 버립니다. 그리고는 현재의 어려움과 고난, 십자가를 잘 이겨내면, 미래에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현재를 영원한 것과 아무런 상관없는 것처럼 여기게 만듭니다. 하지만 종말은 예수님께서 두 번째 오시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곧, 지금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2000년 전 처음 이 땅에 육을 취하여 내려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마련해 주신, 그래서 이미 당신을 믿는 이들이 누리는 구원의 삶을 완성해 주시러 오실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지, 현재의 상황을 전복시켜 줄 새로운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을 통해 이미 가까이 와 있는 하느님 나라가 온전히 이 땅 위에 내리는 것입니다. 곧, 우리는 세례를 통해 이미 누리게 된 영원한 생명을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누리게 될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음으로써 이미 그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생명을 온전히 누리는 것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종말에 가서야 비로소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여전히 죄악이 판을 치고 있고, 우리 역시 그 죄스러움을 온전히 벗어버리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다시 오심, 곧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항상 깨어 기도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우리가 그 영원한 생명을 전혀 누리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이 죄로 가득 차 있다하더라도, 우리에게 죄스러운 성향이 남아 있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지금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미리 맛보고 있지 못하다면, 그래서 그런 것들은 미래에 가서나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생각하고 기대하는 것은 결코 영원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영원한 것이라면 과거에도, 오늘도, 미래에도 항상 있어야 하는 것, 항상 간직하고 있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세례를 통하여,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 이들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이미 살고 있는 이들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과연 자신이 영원한 생명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아니면 여전히 세상의 고통과 어려움에 짓눌려 자신이 누리고 있는, 하느님께 받은 그 영원한 생명을 잊고 사십니까? 물론 세상 속에 찌들어 살다 보니, 영원에 대한 관심을 놓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이런저런 죄로 인해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린 상태에 놓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우리의 삶이 영원을 살 수 없는 삶이라고 말하며, 영원은 단지 미래라는 그릇에만 담겨 있다고 말해 버린다면, 우리가 기다리는 영원한 생명은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공허한 낱말에 불과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며, 주님의 재림을 깨어 기다리는 대림시기를 시작하는 오늘, 영원한 생명을 깨어 기다린다는 것이란 바로 지금 이 순간 그 영원한 생명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것임을 되새기도록 합시다. 그러면서 영원한 생명을 지니신 분께서 우리와 똑같은 몸을 취하여 우리 가운데 머무시게 된 사건, 곧 주님 탄생 사건을 기억하는 성탄절을 깨어서 잘 준비하도록 합시다.

▥ 부산교구 염철호 신부 - 2015년 11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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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희망은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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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산교구에서는 지난 한 해를 믿음의 해로 선포하여 교구민들의 믿음을 공고히 하도록 도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새해를 희망의 해로 정하여 모든 교구민께서 희망을 살아가도록 독려하려 합니다. 건강한 믿음에 희망이 더하여질 때, 주님 보시기에 참으로 아리따운 사랑의 믿음인으로 성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분 은총에 의탁하는 단단한 믿음으로 탄탄한 희망을 살아갈 때에 마침내 튼튼한 사랑의 용사로 거듭날 수 있는 까닭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 시기를 맞는 마음이 무척 설렙니다. 주님의 말씀에 조준하여 스스로의 삶을 점검하며 지낼 것을 다짐하게 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마음이 오늘 독서의 바오로 사도처럼 거룩한 소원으로 채워져서 “더욱더 그렇게” 희망을 잃지 않으시길 기도하게 됩니다.

희망이라는 화두가 마음을 맴돌던 어느 날,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문득 우리가 주님을 향하는 믿음과 희망보다 훨씬 더 많이,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들이 변화될 것을 끝까지 믿으며 희망하고 계신다는 사실이 크게 다가왔습니다. 순간 온 세상이 환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아무리 실망스러운 세상일지라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믿으시니, 다시 한번 제대로 살아볼 여지가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뛰었습니다. 이 진리는 매일매일 우주를 운영하시는 주님의 손길에서 드러나며, 이날 이때까지 이 한심한 세상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이 확실히 증거하고 있으니까요. 하느님께서 태초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영원 무궁히 인간을 향한 희망을 버리지 않으실 테니, 얼마나 벅찬 은혜인지요.

하느님께서는 우리 마음이 온전히 당신만을 향해 집중할 수 있도록, 성탄을 선물해주셨습니다. 해마다 당신의 아들을 완전히 무장 해제시키시어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로 세상에 선물해 주십니다. 때문에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며 살아가지 못하는 우리의 문제점이 도드라져 보입니다.

그중에서도 제일 심각한 일은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수학공식처럼 배우려 드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많은 분들이 기도를 마치 ‘몇 번’을 바쳤는지 수를 헤는 것으로 만족하고 ‘며칠’을 봉헌했으니 할 만큼 한 것으로 생각하기까지 하니 말입니다.

기도는 한마디로 주님께서 우리와 친해지고 싶어서 열어 놓으신 천국의 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기도는 내 삶에서 주님을 제일 첫 자리에 모시겠다는 결단입니다. 내 모든 것을 그분께 맡긴다는 위임장입니다. 그러기에 기도는 하면 할수록 내용이 변화됩니다. 기도의 방법에 연연하지 않게 됩니다. 믿음의 본질이신 주님의 성심에 집중하게 됩니다. 우리는 올바른 기도를 통해서 마침내 좋으신 당신께 온전히 의탁하는 은총을 얻게 됩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완벽한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 삶의 현장인 세상은 말 많고 탈도 많아 주님의 뜻에 미치지 못한 일들이 수두룩합니다. 언제나 죄가 만연하여 매일 죄에 넘어지고 쓰러지기도 합니다. 단적으로 표현해서 세상은 사탄의 자식들과도 어울려서 살아가야 하는 팍팍한 곳입니다.

사탄은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을 우리 안에 쑤셔 넣는 일에 능란하기에 그렇습니다. 평화를 거부하도록 유인하며 마음에 분을 채워 비판하도록 이끌어가기에 그렇습니다. 마침내 핏대를 세우도록 부추겨서 손에 돌멩이를 쥐여주기까지 하니 그렇습니다. 사소한 일에서 ‘약자’를 무시하게 만들고 그들을 괴롭히는 것이 정의인 듯 포장하여 우리를 속이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바른길을 버리고 그릇된 길로” 쫓아가도록, “몸을 씻고 나서 다시 진창에” 빠져드는 어리석은 삶을 반복하도록 유혹하기에 그렇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믿음에 ‘부도’를 내도록 재촉하고 있으니, 그렇습니다.

(2베드 2장 참조)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결코 사탄의 농간에서 빠져나오는 일은 수월치가 않습니다. 사탄은 우리보다 훨씬 영리하며 교활합니다. 꼭 법을 위반하는 범죄가 아닐지라도 세상의 이 꼴 저 꼴 아닌 꼴들에 마음이 성가시고 뒤숭숭해지는 일마저 바짝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상대의 허물에 분노하고 비방하며 치가 떨린다면 하느님과 상관없이 지낸 증거임을 깨닫고 단호히 돌아서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참회로 죄의 추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에 이를 역겨워하는 존재입니다. 죄의 악취를 못 견디는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거듭 같은 죄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 애를 씁니다. 설사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을 당할 때에도 더 좋은 주님의 뜻이 있을 것이라 믿고 희망하기에 절망하지 않습니다.

이 혼란한 세상에 다시 예수님이 오십니다. 우리는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더 사랑해드리기 위해서 마음을 모으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날 그때에 모두 “사람의 아들 앞에 설” 것이라는 그분의 약속을 기억하여 늘 깨어 살아가는 삶에 기준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독서가 전하는 예언의 말씀을 두렵게 받아들여야겠습니다.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질 당신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은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진리입니다. 무시무시하게 읽힌다고 성경의 예언을 묵살하지 않도록 합시다. 삶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행복한 구절에만 집중하여 밑줄을 긋고 암송하며 삶 안에서 그 말씀만 적용되기를 바라지 않도록 합시다. 내 입맛에 맞고 달고 단 성경 구절만 주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합시다. 만약에 이런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인다면 참으로 주님을 내 욕구를 채우는 도구로 이용하려는 나쁜 심보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회개의 사람을 “흠 없고 거룩한 사람”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회개는 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심입니다. 회개는 결코 그분께 내 죄를 나열하며 신세를 한탄하는 일이 아니며 내 죄악을 끝까지 기억하고 붙들고 괴로워하는 자학이 아닙니다. 회개는 그분께 시선을 고정하여 그분의 순수를 만나는 삶이며 그분 사랑의 방식을 영혼에 새겨 고정시키는 일이기에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은총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회개하여 변화된 새 사람에게는 결코 그날이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선물해주셨습니다. 교회의 간절한 꿈을 이루시기 위하여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일상의 근심으로”부터 탈출하도록 다독여 주시고 그분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는 힘”까지 주고 계시니, 든든합니다!

당신께서는 태초부터 이제까지 사람을 향한 희망을 저버린 적이 없으십니다. 주님께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은 당신의 뜻을 이루어 줄 희망의 주인공입니다. 이 자부심으로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더 사랑해드리도록 합시다. 세상을 사랑하시어 당신의 외아들을 내어주신 그분의 뜻을 높이 기리는 대림 시기, 마음과 마음들이 그분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 매일매일 거룩한 삶을 꾸려 가시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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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교구 장재봉 신부 : 2018년 12월 2일
  |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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