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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사탄은 반드시 있습니다.
조회수 | 1,824
작성일 | 09.11.28
성경에는 여러 곳에서 악의 실체를 말하며 사탄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사탄·마귀·악은 이 세상에서 고통과 시련과 두려움을 만들어 냅니다. 이 세상에 사탄이 없는 곳은 없습니다. 따라서 세상에 고통과 슬픔과 걱정과 두려움이 없는 곳도 없고, 질병과 아픔과 죽음이 없는 곳도 없습니다.

교회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들도 사탄의 존재를 이야기하지만, 눈으로 본 사람이 없기에 사탄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분명히 사탄은 있으며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세 가지 유혹을 받으셨을 때 “사탄아, 물러가라.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마태 4,10)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사탄을 대비한 준비를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꾸만 사탄의 존재를 거부하려고 합니다.

사탄은 반드시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시련에 빠뜨리고 고통을 안겨주고 질병을 가져다줍니다. 내가 건강하다고 이 세상에 암이 없다고 하거나, 내가 치매에 걸리지 않았다고 치매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까? 사업이 날로 번창한다고 해서 사업 실패가 없습니까? 사탄은 우리를 도망갈 수 없는 구렁으로 몰아넣고 삼키려 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표징’(루카 21, 25)에 대해 주목할 것을 가르칩니다. 사탄이 날뛰면 이 세상은 참혹한 세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말세에는 사탄의 영들이 마지막으로 발악을 하는 때입니다. 여기서 예외인 사람은 없습니다. 부유함이 결코 우리를 이 참혹함에서 건져주지 못하고, 지위가 우리를 면하게 하지 못하며, 사랑하는 가족도 나를 지켜주지 못합니다. 사탄은 누구한테나 무차별적으로 고통과 슬픔과 실패를 가져와 두려움 속으로 몰아넣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이 시련을 겪도록 내버려 두실까요? 하느님을 믿는 우리에게 고통과 슬픔과 아픔이 다가오도록 허락하실까요?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의 아버지 얼 우즈 씨가 3년 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때 타이거 우즈는 아버지 때문에 오늘의 골프선수가 될 수 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얼 우즈 씨는 아들을 성공시키기 위해 색다른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어린 아들이 골프 연습을 할 때 고함을 지르거나 다른 공을 던져 빗나가게 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집중력을 일부러 방해했습니다.

어린 타이거는 아버지가 코스에 나타나기만 하면 집중해서 한 샷, 한 샷 치면서 초점을 맞추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런 강도 높은 훈련을 통해 세계를 제패하는 골프 황제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역경을 허락하신 것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영적 성숙을 발전시키고 우리를 돕기 위해 역경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도전을 거치면서 싸우고 있을 때, 우리는 그만큼 성숙해집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쉽게 만들어 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시험 목적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함이고, 이런 고통을 통해서 우리를 강하게 만드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고난이 닥치면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 28)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아무리 무거운 고통이 찾아와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 딜레마가 우리를 깊이 좌절시켜도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해낼 수 있고 견딜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 곁에 계시기에 우리는 해낼 수 있습니다. 사탄이 지금 우리를 괴롭힌다 해도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하거나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생의 상황이라는 수렁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당면한 문제와 괴로움만 바라보는 그 순간 하느님께서는 전체를 보고 계십니다. 그분은 현재만 보는 것이 아니라 미래도 보고 계시기에 우리 자신보다 더 우리를 들어 높이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계획에 비추어 모든 것을 보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머리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어디를 바라보고 살았습니까? 하늘을 바라보고 살았습니까, 아니면 땅을 바라보고 살았습니까? 우리 대부분은 땅을 보며 살았음을 솔직하게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니 정말 우리는 땅의 것에만 충실했습니다. 더불어 하늘을 향해서도 충실해야 했음에도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땅을 향해 숙였던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땅의 양식을 뒤로하고 하늘에서 오는 양식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늘 것에 충실할 때, 필요한 모든 것도 곁들여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땅의 것만 보며 땅의 것에만 충실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수렁에 빠지지 말고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어 하느님께 눈을 고정시켜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전체 그림을 보시고 무엇이 우리에게 최선인가를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이 어렵고 힘들더라도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 하느님을 신뢰할 수 있도록 은혜를 청해야겠습니다.  

정애경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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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 / 루카 21,25-28.34-36

순도 높은 기다림

또 다시 기다림의 때, 대림시기가 다가왔습니다. 대림절을 맞이하면서 한번 묵상해봤습니다.

가장 절박하게 누군가를, 또는 무엇인가를 기다렸던 때는 언제였던가?

아무래도 군대 이야기를 먼저 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얼마나 힘겨웠던지, 얼마나 길었던지, 또 얼마나 지루했던지 눈만 뜨면 ‘이제 얼마 남았지?’ 하고 꼬박꼬박 날짜를 지워나가며 제대 날짜를 기다렸습니다.

잠깐 동안 유학생활을 할 때의 기억도 끔찍합니다. 외국어, 그까이꺼, 일단 나가면 적당히 되겠지, 했었는데, 생각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어학연수 시절, 하늘 위로 날아가는 비행기만 봐도, 저게 KAL기인가, 저거 타고 그만 돌아가 버릴까, 하는 생각이 하루에도 열 두 번이었습니다. 하루하루의 삶이 얼마나 팍팍하던지, 빨리 논문 끝내고 돌아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꽤 오래전, 갑작스런 발병으로 한밤중에 응급실 신세를 진 적이 있었습니다. 시시각각으로 조여 오는 죽음의 공포에 떨며 혼미한 가운데서도 뭔가 신속한 조치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런 제 간절한 기대와는 달리 전혀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듯한 새파란 ‘왕초보’ 의사들만 번갈아가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돌아가는 분위기가 제대로 된 진료를 받기 위해서는 아침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저는 점점 증폭되는 불안감에 시달리며 속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발 빨리 아침이 와라. 제대로 진료할 수 있는 의사 선생님, 제발 빨리 출근 좀 하세요!”

또 다시 도래한 이 은총의 대림시기, 우리가 지닌 ‘기다림’의 질은 어떻습니까? 강도나 수준은 어떻습니까?

이 대림시기, 보다 간절한 마음으로, 보다 열렬히, 보다 순도 높게 주님을 기다릴 일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그저 하릴없이 시간만 죽이는 일이 절대 아니겠지요. 기다린다는 것, 무료하게 시간을 때우는 것이 결코 아닐 것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간절히 기도한다는 것, 최선을 다해 주님의 뜻을 찾는다는 것,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운다는 것이리라 믿습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나 자신 안에 있는 깊은 내면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 중지되었던 주님과의 영적 여정을 다시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하겠습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자기중심적 삶을 탈피한다는 것, 내 지난 삶에 대한 대대적인 성찰과 쇄신작업을 시작한다는 것을 뜻하겠지요.

이 대림시기, 우리도 주님을 간절히 기다리지만 주님께서는 더 간절히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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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낙원(復樂園:새 예루살렘)의 비전

-늘 깨어 기도하여라-

오늘은 전례력으로 끝과 시작이 만나는 의미심장한 날입니다. 저녁기도부터는 대림의 기쁨이 시작됩니다. 창세기 1-3장까지의 실낙원(失樂園)에서 시작된 파란만장한 역사가 오늘 묵시록 22장에 이르러 복낙원(復樂園)의 해피엔드로 끝납니다. 창세기의 에덴 낙원보다 놀랍게 업그레이드 된 복낙원의 모습이요, 매일 우리는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생명나무의 열매인 주님의 말씀과 성체를 모시며 어렴풋이나마 복낙원을 체험합니다. 사랑의 신비가 요한에게 선사된 새 예루살렘의 비전이 참 은혜롭습니다. 이런 비전을 지녔기에 절해고도(絶海孤島) 파토모스 섬의 고독과 외로움 중에도 무너지지 않고 독야청청했던 요한임이 분명합니다.

“주님의 천사가 수정처럼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나 요한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 강은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에서 나와, 도성의 거리 한 가운데를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대로 미사 은총을, 성령의 은총을 상징합니다. 이어 전개되는 내용도 은혜롭습니다. 강 양쪽에 열두 번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들이 있는 곳, 더 이상 하느님의 저주를 받는 일이 없는 곳, 하느님과 어린양의 옥좌가 있어 그분의 종들이 그분을 섬기며 그분의 얼굴을 뵙는 곳, 그리고 그들의 이마에는 하느님의 이름이 적혀져 있는 곳, 밤이 없고 등불도 햇빛도 필요 없는 곳, 주 하느님께서 그들의 빛이 되어 주시는 곳, 정말 완벽하게 회복된 생명과 빛이 충만한 복낙원입니다.

이런 생생한 비전이 최고의 보물입니다. 이런 영적 비전을 지닌 이들이 진정 부자요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도 요한처럼 하느님께 대한 열렬하고 항구한 사랑 있어 선사되는 복낙원의 비전입니다. 하여 토요일 끝기도 때의 신명기 독서(신명6,4-7)에 대한 답이 일요일 끝기도 때의 묵시록 독서(묵시22,4-5)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주 하느님은 한 분뿐이시다.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의 주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이렇게 하느님을 온 마음으로 사랑할 때 선사되는 다음 묵시록의 다음 복낙원의 비전입니다.

“성도들은 하느님의 얼굴을 뵈올 것입니다. 이제 그 도성에는 밤이 없어서 등불이나 햇빛이 필요 없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빛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새삼 이런 복낙원의 비전이 효소처럼 우리 삶을 발효시켜 나태와 탐욕, 허영과 교만에서 벗어나 수행생활에 정진케 합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대로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우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며 늘 깨어 기도하게 합니다. 이래야 이런저런 시련에 무너지지 않고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닙니다. 내적으로 약하여, 내공이 부족하여 안에서부터 무너질 때는 아무도 도와 줄 수 없습니다.

주님을 항구히 사랑할 때 영적비전이 선사되고 이런 영적비전이 효소처럼 우리 삶을 발효시킴으로 늘 깨어 기도하게 되고 내적 힘도 강해져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힘도 지닙니다. 또 늘 깨어 기도할 때 생생히 보존되는 복낙원의 영적비전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의 복락원의 영적비전을 새롭게 하시고 은총의 대림시기 늘 깨어 기도하며 당신을 기다리게 하십니다.

“마라나타! 오소서, 주 예수님!”(묵시22,20ㄷ). 아멘.

베네딕토회 이수철 신부
  |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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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제 영혼이 깨어 주님을 기다릴 수 있게 해주소서.

▸ 세밀한 독서 (Lectio)

교회 전례력으로 우리는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교회의 새해는 기다릴 대(待)와 임할 림(臨)을 사용하여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향해 오는 때나 사람을 기다린다.’는 의미가 내포된 대림 시기로 시작됩니다. 이처럼 교회는 예수님께서 우리한테 오시는 중요한 ‘때’(하느님의 시간)를 기다리는 시간(연대기적 시간)으로 새해를 열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림 제1주일의 복음은 왜 이 세상의 종말에 관한 말씀으로 시작할까요? 성탄은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시작된 세상의 구원과 심판을 알리는 사건입니다.(루카 2,34 참조)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성탄을 기릴 뿐 아니라 재림으로 완전한 구원이 하루빨리 성취되기를 기도하는 한편, 우리의 삶에도 시작과 끝이 있다는 것을 상기하고자 하는 까닭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는 전前 문맥(루카 21,20-24)과 예수님의 예루살렘에서의 활약을 후後 문맥(37-38절)으로 하며, 모든 백성과 제자들한테 종말의 전조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말씀을 전합니다. 마르코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종말 직전의 전조로 보는(마르 13,24-25) 반면, 루카는 단순히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종말에 의한 전조들은 “하늘과 땅”이란 우주적 파국으로서 하늘에서는 “해와 달과 별들의 표징”과 땅에서는 “바다의 파도소리와 풍랑”으로 인한 이변이 일어날 것을 예고합니다.(루카 21,25) 이것은 국지적인 차원의 한 지역, 한 나라에 국한된 이변이 아니라 “민족들과 사람들”한테 대두되는 우주적 파국으로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리는 공포와 두려움에 휩싸이게 할 것입니다.(26절)

세상 종말은 누구한테나 똑같이 공포와 두려움을 불러오겠지만 준비된 사람과 준비되지 않은 채 맞이하는 사람과는 결과가 전혀 다릅니다. 종말의 “그때는” 준비되지 않은 사람한테는 두려움과 심판의 날로써 끝을 의미하지만, 준비된 사람한테는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게 되는”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27절) 그러므로 준비된 이들한테 종말은 사람의 아들이 오시어 온전히 구원하실 속량의 날, 곧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게 되는” 구원의 날이 됩니다.(28절) 속량이란 어떤 이의 죗값이나 몸값을 대신 지불해 억압된 상태에서 해방시키는 행위를 뜻합니다.(1,68; 2,38; 24,21 참조) 따라서 종말은 우리가 구원될 “새 하늘 새 땅”(묵시 21,1)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새 하늘 새 땅’이 시작된다 해도 준비되지 않은 사람한테는 ‘심판의 날, 곧 죽음의 날’일 수밖에 없습니다. 더욱이 “그날”은 덫처럼 갑자기 덮치게 될 것입니다.(루카 21,34ㄴ)

그러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하고 권고하십니다.(36절; 참조: 마태 24,43; 마르 13,13; 루카 12,37) ‘깨어 있다’는 것은 삶의 모든 가치와 생활방식이 그리스도를 향해 방향 지워져 있는 삶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가치를 둔 삶은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할 뿐 아니라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도록” 생활하는 것입니다.(루카 21,34ㄱ; 시편 1장 참조) 세상 것에 휘둘리고, 자기 자신의 고집과 편견 그리고 욕심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을 키울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영혼은 비어 있는 만큼 더 채울 수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은 제2독서가 알려주듯이 “서로 지니고 있는 사랑과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1테살 3,12-13) 그리고 “깨어 기도하는 것”(루카 21,36)에서 얻어지기 때문입니다.

종말의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35절)이지만, 마음에 사랑을 지니고 깨어 기도하는 사람한테 ‘그날’은 기다림의 날이요, 새 신랑을 맞이하는 날이 될 것입니다.(마태 25,10; 묵시 21,2 참조)

▸ 묵상 (Meditatio)

제 일상에 있는 크고 작은 모든 것을 줄줄이 세워놓고, 그것이 저한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가려봅니다. 제가 사랑을 생활화하는 데 이것은 꼭 필요한 것일까? 이것은 기도하는 데 어떻게 유용한 것이며, 주님을 만나는 데 어떤 도움을 주는 것일까? 일상은 세상에 우리를 묶어놓으려 하지만, 그리움을 안은 기다림으로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하겠습니다.(36절) 그래서 수도생활을 시작했던 그 첫날의 기도처럼, 너를 처음 만났을 때의 친절과 사랑 그리고 다시 시작하는 기쁨과 감사로서 아기 예수님을 뵈올 수 있도록 걸어가려 합니다.

▸ 기도 (Oratio)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묵시 21,3)

▥ 반명순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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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늘 깨어 기도하여라. 그런데 기도하고 있다고 해서 꼭 깨어 있다고 볼 수 없다(깨어 기도하지 않는 기도가 무슨 기도냐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기도하면서 딴 생각, 딴 짓을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나부터 그렇다. 혼자 기도할 때는 금방 딴 생각으로 빠져들기 일쑤이고, 여럿이 함께 기도할 때에도 딴 생각을 하게 되거나 아예 딴 짓을 할 때도 있다. 특히 입을 모아 외우는 기도를 할 때 그렇다.

기도하고 있다고 해서 꼭 깨어 있는 건 아니지만, 깨어 있으면 곧 마음을 모아 온 정성으로 할 때 무엇을 하든 기도가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밥 먹기 전 기도뿐만 아니라 밥 먹는 일 자체가 기도가 된다. 스님들은 공양할 때, 곧 밥 먹을 때 침묵하며 밥 먹는 데 집중한다. 아주 정성껏 하나도 남김없이 먹는다. 밥 먹는 일이 수행이고 기도이기 때문이다. 또 회의 시작 전 기도뿐만 아니라 회의 자체도 기도가 될 수 있다.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기 위해 마음과 귀를 기울이듯, 상대 이야기를 마음으로 들으려고 애쓴다면 대화와 회의가 기도일 수 있다.

일상에서 물러나 산에 가거나 피정을 하면, 깨어 있는 기분으로(실제 깨어 있는 게 아닌데 괜히 깨어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질 때도 많다) 기도할 수 있다. 웬지 그런 곳에 가면 기도가 더 잘 되고 명상도 더 깊어지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런 기분과 자세가 대개 일상의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3박 4일 피정을 하면 그때의 마음과 결심이 3박 4일 이상 가기 어렵다는 게 정설(?)이다. 그만큼 먹고, 싸고, 자고, 일하고, 쉬는 일상 안에서 무엇이든 기도하는 마음으로 정성껏 하기란 정말 어렵다.

나는 기도를 많이 한다는 분들보다(예수님이 남 앞에서 티내며 기도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자랑삼아 긴 시간 동안 기도문만 입으로 되뇌는 사람도 많다) 일상의 모든 일에 온 정성을 다하려고 애쓰는 분들을 더욱 존경한다. 고맙게도 내 곁에는 그런 스승이 몇 분 계시다. 그런데 정말 기도하듯 살려면, 기도를 많이 해야 한다고 한다. 기도를 밥 먹듯, 숨 쉬듯 해야 기도하는 것처럼 일상의 삶을 온 마음으로 살 수 있다. 삶 자체가 기도요 노래였던 분들은 어김없이 기도를 자주 또 길게 하셨다고 한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 그랬고, 도로시 데이가 그랬다고 들었다. 이분들은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여행하면서도 날마다 몇 시간씩 기도에 푹 잠겼다고 한다. 아마 내 곁의 스승들도 내 눈에 띄지 않지만 그렇게 기도하실 거다.

지난봄에 닷새 동안 단식을 했다. 전에도 이러저러한 이유로 며칠씩 굶은 적이 있었지만 내 스스로 작정하고 한 단식은 처음이었다. 그때는 단식을 끝내고 바로 먹어댔으니 회복식 개념은 아예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정식으로(?) 단식을 해보니 아예 안 먹는 단식 기간보다 먹으면서 조절해야 하는 회복식 기간이 더욱 힘들게 느껴졌다. 단식을 하다가 오히려 몸을 망치는 경우의 대부분이 회복식을 철저하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식으로 망친 몸은 단식으로 바로잡을 수밖에 없어서 다시 단식하는 경우도 보았다. 회복식을 하면서 앞으로는 음식을 정성껏 먹겠다고 결심했는데, 그 결심이 언제 어디로 사라졌는지 다시 아무 생각 없이 먹고 마신다. 예수살이공동체 제자교육을 마치며 날마다 아침기도를 하겠노라 결심했지만, 아침기도를 한 날이 손가락에 꼽을 정도이다.

나 같은 엉터리를 위해 예수는 깨어 있을 수 있는 방법도 알려주신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하지만 이것도 어디 쉬운 일인가.

▥ 박영대(베네딕토) | 우리신학연구소 소장
  |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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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저마다의 생명에는 저마다의 여정이 있습니다. 생명을 다르게 부르는 이름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고사랑을 다르게 부르는 이름이 있다면 그것은 기다림일 것입니다.

이제 기다림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한 해가 우리 가운데서 밝았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기다림이 시작되었습니다. 기다리면서 우리는 참으로 소중한 것이 무언지를 알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먼저우리에게 오시며 당신을 알려주십니다.

기다림으로 모르는 하느님이 아니라 점점 알게 되는 하느님이 됩니다. 기다림 없이는 살아갈 수없는 우리들의 시간입니다. 시작하기 위해서는 떠나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도 떠나서 우리들에게 오십니다.

우리에게 사랑이 없는 것은 하느님을 기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곁에 누우려 하시는 하느님께 자리를 내어드리기 위해 겸손과 기도를 배우는 대림시기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잊고 살았던 하느님의 탄생은 지금부터입니다. 대림은 하느님의 부재사랑의 부재를 깨닫는 시간입니다. 사랑을 잃은 우리들에게 사랑을 주러 하느님께서 친히 직접 우리들에게 오십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하느님을 알아볼 것입니다. 하느님의 기다림이 시작되었습니다. 가장 큰 사랑은 기다림이기 때문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2015년 11월 29일
  |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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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든 극복하십시오.
오물을 뒤집어써도 즐거워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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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세기 세상 사람들의 뇌리에 강하게 각인된 수많은 인물들 가운데, 참으로 특별한 분이 계십니다.

그야말로 인생의 산전수전, 우여곡절 다 겪으신 분, 그러나 그 수많은 고초와 시련을 초긍정 마인드로 극복하신 분, 그 끔찍한 죽음의 수용소 트라우마와도 당당히 맞서 이겨내신 분, 바로 빅터 프랭클 박사님입니다.

빅터 프랭클은 워낙 극한 체험을 다 하셔서 그런지, 인생의 양 극단을 다 섭렵하셨습니다. 극단적 합리주의에서 예민한 감정주의에 이르는 폭넓은 기질을 지니고 그렇게 살아가셨습니다.

빅터 프랭클은 ‘책에 쓰지 않은 이야기’를 통해 자신이 죽음의 수용소 생활을 끝까지 견뎌내고, 그 죽음과도 같은 트라우마에서 완전 벗어나서, 충만하게 자신을 실현시키며 행복하게 산 비결을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제게는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그 원칙은 바로 아주 작은 일도 가장 큰 일을 할 때 처럼 철저하게 하고, 가장 큰 일은 아주 작은 일을 할 때 처럼 편안하게 하는 것입니다.”

빅터 프랭클이 나중에 유명인사가 되어, 전 세계를 다니면서 강연을 하실 때였습니다. 한 두마디 짧은 논평을 할 때면 조목조목 세밀하게 따져본 뒤에 메모를 하는 등, 심혈을 기울이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수 천 명이 모인 자리에서 강연을 할 때면, 물론 원고를 꼼꼼하게 준비를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강연이 시작되면 마치 열 두 명 앞에서 발언을 할 때 처럼 편안하게 했습니다.

빅터 프랭클이 그 고통스런 환경 속에서도 극도의 낙천주의자로 살 수 있었던 비결이 있었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좋은 행동을 하면 잊지 않지만, 나쁜 행동을 하면 절대로 담아두지 않습니다.”

빅터 프랭클이 그토록 관대하고 넓은 인생의 지평을 소유하게 된 배경에는 죽음의 수용소 안에서 겪었던 그 끔찍한 환경, 그 미칠 것만 같았던 분위기 속에서도 끝까지 삶의 의미를 추구했고, 고통에 담긴 의미를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제한된 조건 속에서도 일상의 작은 소소한 기쁨꺼리를 끝없이 찾아나갔습니다. 그는 수용소 벽에 붙어있던 감명 깊은 글들을 보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긍정화시키는 작업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무슨 일이든 극복하십시오. 오물을 뒤집어써도 즐거워하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해 ‘예!’라고 대답하십시오!”

또 다시 맞이한 대림 시기입니다. 올해도 예년처럼 다양한 고통과 삶의 결핍들이 끝도 없이 다가올 것입니다. 고통이 크면 클수록 더 많은 기쁨꺼리들을 찾아 나서야겠습니다. 결핍이 크면 클수록 더욱 삶에 대해 ‘예!’라고 대답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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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2018년 12월 2일
  | 12.02
456 11.6%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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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으로 한 해를 시작합니다. 기다림이 오고 계십니다. 기다림이 우리를 설레게 합니다. 기다림이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길은 언제나 기다림의 길입니다. 기다림 자체가 아름다운 길이 됩니다.

기다림은 기도이며 기다림은 늘 함께하려는 사랑입니다. 기다림과 기다림의 만남이 탄생으로 드러납니다.

간절한 사랑이 기다림이고, 이제 기다림으로 감추어져 있던 하느님이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기다림이 간절할수록 우리의 속량 또한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기다림의 근원은 우리 인생전체를 정화시켜 나가십니다. 기다림의 맛이 믿음의 맛임을 압니다. 믿음으로 한 해를 기쁘게 시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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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속주회 한상우 신부 : 2018년 12월 2일
  |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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