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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하느님의 사람
조회수 | 1,801
작성일 | 10.04.23
평소 저를 잘 따르는 아이가 하루는 "신부님, 신부님 아이는 몇 살이에요?"하고 묻는 것이었어요. 가만히 보니 저한테 자기 또래의 아이가 있을 것 같고 그 아이와 친구를 하고 싶은 눈치였습니다.

"신부님은 아이가 없는데…."

그랬더니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아니, 왜 아이가 없으세요?"

"신부님은 하느님과 결혼을 했기 때문에 아이가 없단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아이는 알아듣는 기색이 아니었습니다. 성직자ㆍ수도자에 대한 이해 부족 현상은 일부 아이들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어른들도 비슷합니다. 본당 사목을 하다보면 밖에서 식사할 일이 자주 생깁니다.

그런데 밖에서 식사하는 자체에 놀라는 신자들도 있고, 거기다가 담배나 술을 하는 모습을 보고는 "아니, 우리 신부님이 술을 하시다니…. 담배를 피우시다니…"하고 더욱 당황해 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술과 담배는 사제에게 있어서 자유로운 선택 사항이지요.

신자들에게는 이렇게 신부의 살아가는 모습이 생소할 뿐만 아니라 어떻게 신부가 되는지 모르는 사람들도 참 많습니다. 신부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성소주일을 맞아 우리나라에서 신부는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탄생되고 살아가는지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사제가 되려면 우선 기본적인 과정으로 반드시 '가톨릭 신학대학'에 입학해야 합니다. 이것은 전 세계적으로 똑같은데 우리나라는 7년 과정이고, 외국은 8년 과정인 경우가 많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가면 4년간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는데 이 과정 동안 모든 신학생은 기숙사 생활을 해야 하고 새벽 6시에 일어나 밤 11시까지 기도와 학업에 정진합니다. 이렇게 4년을 마친 후 군대 생활을 하고 군 제대 후에는 다시 대학원 과정을 3년간 공부합니다. 그 후에 성직의 길로 들어서는데 신학교에 입학해 여기까지 약 10년의 세월이 걸립니다. 10년의 과정을 다 밟아야 사제로 수품되는 것이지요.

서울대교구의 경우에 사제품을 받으면 병원 의사들의 인턴이나 레지던트 과정처럼 수습 시간을 갖는데 이런 역할의 보좌신부 기간이 평균 10년 가까이 걸립니다. 본당 주임신부로서의 역할을 하기까지에는 20년 이상의 세월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이렇게 사제로 서품되는 과정은 전 세계적으로 거의 비슷합니다. 사람을 뽑고 키우고 관리하는 시스템이 우리 천주교회 만큼 잘 되어 있는 데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철저하게 교육을 시키는데도 아쉬움은 있습니다.

그래서 신부가 된 뒤에도 계속해서 5년 미만, 10년 미만, 25년 미만 이렇게 재교육 과정이 주어집니다. 신부들은 본당의 사목자로 일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공부하고 기도하며 자기 계발을 위해 노력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시대는 신부들이 살기에 너무나 많은 어려움들이 있습니다. 유혹도 많고 힘든 일도 많지요.

신자들은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완전하기를 바랍니다. 성격도 좋고 고고하기를 바라지요. 또 청빈하고 잘 나누기를 바랍니다. 아프지도 말고 누구하고나 잘 어울리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막상 잘 어울리면 어울린다고 말이 많고 또 어울리지 못하면 어울리지 못한다고 흉을 보지요. 게다가 요즘은 신부의 외모도 한 몫을 합니다. 너나없이 잘 생긴 신부를 바라지요. 참 바라는 것도 많고 요구도 많습니다.

신자들은 신심도 깊고, 기도도 잘하고, 강론도 잘하며, 웃기기도 잘 하는 사제를 기대합니다만 이러한 요구 그대로 완벽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하느님 말고 누가 완벽할 수 있겠습니까? 성직자와 수도자도 똑같은 사람에서 출발합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신자들의 기도를 통해서 점점 하느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이지요.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하느님의 은총과 신자들의 기도에 힘입어 살아갑니다. 신자들의 믿음과 존경이 없다면 힘을 잃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하느님과 신자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며 살아가는 성직자와 수도자를 믿고 공경하며 기도와 재정 후원을 통해 도움을 줘야 합니다.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헌신적 삶을 살고 신자들이 이들을 믿고 따를 때 복음적인 공동체가 만들어지는 것이고, 이러한 모습을 통해 비신자들은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과 신자들을 위해 일생 헌신하는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세상에 물들지 않고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아 갈 수 있도록 기도하고 후원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기양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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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사랑, 목자 사랑

저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되지도 않는 말들 때문에 혼자 웃을 때가 가끔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으뜸은 ‘사랑’이란 말의 사용입니다. 예를 들면, 리포터가 오리농장을 다녀왔다며 주인의 오리 사랑이 각별하다고 있는 대로 칭찬을 합니다. 공을 들여 오리를 키우는 모습들과 어떤 때는 시중의 값이 너무 떨어져서 할 수 없이 폐사를 시킨다고 울상인 주인의 얼굴이 화면에 비쳐지기도 합니다. 그리곤 의례히 오리고기 요리를 먹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맛이 있다고 입맛을 다셔가며 주인과 함께 먹고는 청취자들에게도 오리를 많이 사랑해 달라고 합니다. 오리 대신에 돼지도 양식 송어도 등장합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동물을 어떻게 잡아먹고 팔아서 돈을 버는 사업을 할 수 있답니까? 또 어떻게 폐사를 시킬 수가 있단 말입니까? 이건 사랑이 아니지요. 사랑이라는 단어가 오용되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 때에는 양 목축이 생계인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양을 정성들여 키우고 그 젖을 짜먹으며 고기를 먹고 털과 가죽으로 입을 것을 장만했습니다. 때로는 양 떼를 습격하는 이리들에 맞서 위험한 싸움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양 사랑이 각별하다 할까요? 예수님께서도 당신 자신을 목자로, 우리를 양 떼로 비유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길러서 젖을 짜드시고 잡아서 양식으로 삼으시고 팔아서 돈을 버시려고 하는 분이실까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토록 살게 하시려는 분이십니다. 이를 보증하시려고 하느님 아버지를 내세우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요한 10,29).

여기서 예수님의 부활이 왜 꼭 필요했던가 하는 이유 중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정말 사랑하셨고, 악과 악마가 우리를 공격하는 것에 맞서 싸우시다가 당신의 생명까지 잃으셨습니다. 그 다음은 우리가 죽을 차례입니다. 목자를 죽인 이리 떼는 마음놓고 양 떼를 잡아 잔치를 벌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게 되려면 목자가 다시 살아나 다시는 죽지 않게 되셔야만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을 부활시키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불멸의 목자가 지키시는 양 떼에 속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착한 목자의 양 사랑이 이렇듯 크시니 우리의 목자 사랑도 그만큼 커야 하지 않을까요? 목소리만 듣고도 수많은 우리들 하나하나를 구분하시고 살펴 주시는 사랑 많으신 목자이시니 우리도 그분의 목소리만 듣고도 그분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사랑해야 하겠죠. 그야말로 양 사랑과 목자 사랑이 서로 만나야 합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요한 10,27). 주님, 주님께서 저희를 사랑하시듯이 저희도 주님을 사랑하도록 도와 주소서!

백남용 바오로 신부
  | 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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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심 = 우리 존재 이유

이 세상의 만물은 하느님의 부름을 받아 존재하게 됩니다. “빛이 생겨라!” 하고 하느님께서 부르시자 빛이 생겼습니다.

부르심을 받아 존재하게 된 이 세상의 만물은 아무런 목적 없이 생겨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빛은 세상의 어둠을 밝힐 사명을 지녔습니다. 빛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세상을 밝혀주기 위해서입니다.

사명을 지닌 이 세상의 만물은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수행하면서 자기만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빛을 내는

태양은 ‘참 빛’이신 하느님을 자신의 빛으로 세상에 드러냅니다.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을 수행하며 존재하는 이세상의 만물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그 빛이 좋았다”(창세 1,4).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요한 10,27). 세상의 만물과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도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또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의 양이 되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은 예수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주님이신 하느님을 세상에 드러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소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존재 이유’를 확인해봅니다. 나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나게 하신 목적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잘’ 따라가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을까요?

일단, 마음속 깊이 부르시는 예수님의 목소리에 귀를 막지 말아야겠죠. 우리 각자에게, 또 우리 각자의 처지에 맞게 부르시는 예수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이유는 많을 겁니다.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따로 하고 싶은 일이 많다고…, 능력이 안된다고…. 하지만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를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능력을 우리보다 더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에게 믿음이 없을 뿐입니다.

“오늘” 지금 이 순간에 우리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목소리가 들리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오늘” 무엇을 하라고 하시나요? 세상 걱정을 ‘잠시’ 접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도록 ‘잠시’ 예수님께 시간을 내드립시오. 이 ‘잠시’는 ‘영원’과 연결된 순간이 될 것입니다.

오늘 - 구상 시인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이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
오늘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

신희준 신부
  | 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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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주님 목소리

주교관에서 천수를 누리다가 떠난 개가 있었습니다. 밤에 인기척에 짖다가도 제 목소리를 금방 알아듣고 꼬리 치며 좋아했지요. 그 개가 기특하고 신기했습니다. 여러분도 집에 개나 고양이를 기르시는 분들이 많으시지요? 개나 고양이가 주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것도 그렇고, 사람끼리도 음색이 가지각색인데 친한 사람끼리는 금방 목소리를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참 신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요한 10,27) 아하! 주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주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 능력을 잘 쓰지 못하는 것일까요? 때로는 그런 능력이 우리에게 있는지조차 모르기도 하고요. 그분 목소리에 친숙하지 못한 이유가 혹시 다른 소리가 너무 커서는 아닐까요? 사실 우리는 수많은 ‘소리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가령 길이나 전철에서 스마트폰에 이어폰을 꽂고 계신 분들을 흔히 봅니다. 집에 들어가면 습관적으로 틀어놓은 TV나 라디오 소리가 잠시도 끊이질 않고요. 조용한 시간과 자리를 찾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 입니다. 그런데 이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내 안에서 잠시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나를 유혹하고 충동하는 ‘소리 없는 소리’도 있습니다. 교만과 인색, 분노와 음욕, 질투와 탐욕 그리고 나태함으로 나를 유혹하는 소리가 내면을 시끄럽게 만들곤 합니다.

사실 주님 목소리도 ‘소리 없는 소리’이긴 합니다만, 우리 영혼을 어지럽게 하는 그런 ‘욕망의 소리’와는 도저히 함께할 수 없는 정반대의 소리이지요. 그러니 그분 목소리를 들으려면 다른 두 가지의 방해되는 소리를 전부 꺼 버려야만 한답니다. 사람들이 소음을 피해 피정을 떠나는 이유도 다 그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매일 피정의 집에서 살 수만은 없지 않겠습니까? 일부러 멀리 피정을 떠나지 않더라도 매일의 일상에서 그런 침묵의 때와 자리를 마 련하려는 노력이 꼭 필요합니다. 또한 우리 내면의 번잡스런 소음을 끄는 방법으로 ‘기도’와 ‘영적 독서’를 꾸준히 하는 것도 좋습니다. 영적으로 깨어있을 수 있기 때문이 지요. 그렇게 하면 우리 안에서 잠자던 주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능력이 활성화됩니다. 그러니 우리도 목자이신 주님과 함께 있고 싶다면 적어도 다른 소리는 일부러 꺼버리고, 주님의 음성만 듣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젊은이들이 사제와 수도자로 부르시는 주님께 기꺼이 응답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성소주일’입니다. 한국천주교회는 그 점에서 주님의 축복을 많이 받았지만, 앞날을 위해서는 지속적인 기도가 필요합니다. 한편 우리 모두도 영원한 생명에로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죽는 날까지 이 부르심에 충실하여, 그분을 잘 따를 수 있는 은혜를 청합시다. 아멘.

▦ 서울대교구 보좌주교 유경촌 티모테오 주교 : 2016년 4월 17일
  | 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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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1. 제 손에서 아무것도 빼앗아 가지 못합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욕심이 아주 많았습니다. 동생들은 제가 손에 쥐고 있는 것을 가져갈 엄두도 못 냈습니다. 잠을 잘 때도 주먹을 꼭 쥐고 잤으니까요. 지금 내 손에는 무엇이 쥐어져 있는지 새삼스럽게 살펴봅니다. 오늘도 무엇 하나라도 제 손에 쥐면 안 놓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으려고 애를 써봅니다. 그러나 하잘 것 없는 것이라도 제 손에 들어오면 그것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그런 제 모습을 보면 혼자 부끄러워서 크게 낭패감을 맛보며 씁쓸해 합니다.

2. 하느님은 더 하시군요

하느님께서는 더 하신 것 같습니다. 아니, 훨씬 더 하십니다. 하느님은 보잘것없고 위선적이고 죄인인 저를 손에 집어넣으시고는 절대로 놓지 않으시니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아드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이런 절규를 못들은 체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 아드님이 끝내 무력하고 비참하게 숨을 거두셨을 때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 손에서 아드님을 포기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저승에서 붙잡고 일으키셔서 부활시키셨군요. 더구나 아드님은 아담과 하와, 곧 모든 인간의 손을 잡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 덕분에 하느님 손에 제가 붙잡혀 있는 것을 알아보게 됩니다. 저도 부활의 생명을 누리면서 말입니다.

3. 아드님도 마찬가지군요

그래서 하느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목숨을 바치면서 완전히 두 손에 아무것도 쥐지 않으시고 돌아가시기까지 하셨나 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손에 무엇을 쥐고 계실 수 있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두 손으로 저를 꼭 붙잡고 계시는군요.

예수님께서는 저를 붙들기 위해 천지 창조 전부터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 계시다가 세상에 파견을 받아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끊임없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을 이미 십자가에서 겪으셨습니다. 이렇게 하시면서 저를 붙드시고 계십니다. 그러니 이제 무엇이 예수님의 손에서 저를 빼앗아 가겠습니까?

죄의 결과인 죽음을 겪기까지 하시면서 저를 붙드셨으니, 제가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주님께서는 저를 절대로 빼앗기지 않으실 것입니다. 제가 그렇게 두려워하는 죽음을 겪어도 주님께서는 결코 저를 빼앗기지 않으실 줄을 알게 되었습니다. 불분명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나 어떠한 불안도 주님의 손에서 저를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과거에 대한 어떤 부끄럽고 고통스러운 기억도 저를 주님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4. 제가 할 일은?

성부와 성자께서 하나가 되시어 그렇게 저를 붙잡고 계시는군요. 그러니 제가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요? 온갖 소리가 난무하는 현대 기술 문명 세계에서 잘 식별하여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면서 살겠습니다. 주님께서 사랑으로써 저를 아시니, 저도 주님을 알아야 하겠군요. 그렇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아드님께서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셔서 십자가 죽음까지 이르셨기에 부활의 영광을 누리셨습니다. 그렇듯이 저도 예수님처럼 주님 자녀로서 하느님 아버지께 효성을 다하고 순종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부활하신 새 인간 예수님을 뒤따라 살겠습니다. 그러나 저의 능력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성령을 보내 주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새로운 삶, 그 사랑의 삶을 살아가겠습니다.

▦ 서울대교구 주수욱 신부 : 2016년 4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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