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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청주/원주] 새 계명
조회수 | 2,158
작성일 | 10.05.02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4)

새 계명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 날 저녁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실 때 제자들에게 유언으로 남기신 말씀입니다. 이 새 계명은 예수님께서 천국에서 성삼위가 사시던 삶을 이 세상에 오셔서 그대로 실현하고자 하셨던 가장 큰 꿈이자 이상입니다. 그리고 새 계명은 예수님께서 12제자들과 함께 3년 동안 계속 실천하시고 몸소 모범으로 남겨 주신 계명으로 복음의 진주요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서로간의 사랑의 본보기로“나처럼”, “내가 한 것처럼”이란 척도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처럼’,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바치신 것처럼’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웃을 위해 목숨을 내어 놓는다든지, 이웃의 발을 씻어주는 일은 너무나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작은 사랑은 매일 할 수가 있습니다. 저는 본당 신부로서 신자들에게 되도록 따뜻하게 대해주고 편안하게 해주려고 노력합니다. 특별히 고해성사 줄 때나 미사 강론할 때 편안하게 해주려고 합니다.

아오스딩 성인은 사랑에 대해 아주 좋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모두가 십자 성호를 그을 줄 알고‘아멘’이라 답하며 알렐루야를 노래한다 할지라도, 모두가 세례를 받고 교회 안으로 들어간다 할지라도, 또한 대성전을 세운다 할지라도, 하느님의 자녀들을 구별해 주는 것은 단지 애덕뿐임을 유념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할 때에는 가난한 사람도 부자가 되며,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때에는 부자도 가난한 자가 된다.”

대부분 사랑을 하면 사랑을 되받게 됩니다. 그래서 서로간의 사랑이 태어나게 되고, 서로간의 사랑은 매우 아름답고 놀라운 열매를 맺게 됩니다. 무엇보다 먼저, 새로운 평화, 새로운 기쁨, 그리고 모든 이를 향한 관대한 마음과 너그러운 시야, 넓은 아량 등 영적으로 한 단계 뛰어오른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 이유는 서로 사랑하는 곳에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서로간의 사랑은 그리스도를 증거 할 수 있게 됩니다. 서로간의 사랑은 가정이나 직장이나 학교나 어느 곳에서든지 가장 좋은 증거가 됩니다. 또한 서로간의 사랑은 그들 사이에‘예수님의 현존’을 모시게 됩니다. 그러므로 서로간의 사랑이 있는 곳에서는 하나의 작은 천국을 체험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밖에도 서로간의 사랑은 서로의 고통과 기쁨을 함께 나누게 되며, 물적인 것이나 영적인 것을 함께 공유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간절히 기도하신 예수님의 유언을 실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대전교구 이종대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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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새로운 계명, ‘사랑’

2010년 주교님께서는‘말씀 실천으로 복음화 토대를 놓는 해’를 선포하셨습니다. 복음화라고 하면 흔히 가두선교나, 그 외 어떤 거창한 일을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복음화를 하기 위해 특별한 능력과 행동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아니 사실,특별한 능력이 필요하긴 합니다. 그것은 사랑할 줄 아는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말씀하신 새로운 계명, 새로운 복음의 핵심은‘사랑’이기에 복음화를 시킨다는 것은 나의 삶의 자리를 사랑으로 채워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정한 복음화가 무엇인지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해답을 전해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사실이 사랑의 실천이 말처럼 쉽지만은 않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게 됩니다. 성당에 나와서 내가 미워하는 그 사람을 위해 고해성사도 보고, 기도도 열심히 해봅니다. 어느 정도 사랑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생각되어 삶의 자리로 돌아가 보지만 그 사람의 얼굴을 보는 순간 또 미움이 올라옵니다. 대부분 우리가 겪게 되는 고민과 갈등일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서로에 대한 기대치를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으로 지어진 존재이기는 하지만 완벽한 존재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항상 서로에 대한 특별한 기대치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피를 나눈 가족인데 이 정도는 이해를 해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도 우리는 같은 신앙을 가진 성당 신자인데 저러면 되나’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러한 나의 기대치에 그 사람이 부응하지 못했을 때 우리는 실망하게 되고 화를 내게 되고 미워하게 됩니다. 이러한 기대치를 과감히 포기해야 합니다. 서로의 한계를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모범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너무 사랑하셔서 스스로 인간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너무 사랑하셔서 스스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너무 사랑하셔서 스스로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내어놓으셨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희생과 헌신을 필요로 합니다. 꼿꼿이 자신을 주장하고 자신을 내세우는 사람은 절대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없습니다. 사랑하면 손해를 봅니다. 그러나그 손해는 하느님께서 하늘나라라는 선물로 다시 채워주실 것이며, 영원한 생명이라는 보너스도 따라올 것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사람들 앞에서 당당히‘나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청주교구 견혁 미카엘 신부
  |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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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서로 사랑하여라

오늘 복음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채우기 위하여, 자유로이 자기 생명을 바치신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결론적으로 그분의 죽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표지 그 자체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 제자들은, 이러한 스승의 모범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

나아가 스승이신 그분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시는 그 만큼, 또한 제자들이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야 말로, 앞으로 진정 그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것을 보여주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의 사실이나 말씀이 아니라, 바로 최후의 만찬과 연결되어 하신 말씀이고 보면, 바로 오늘 우리에게도 미사성제를 통해 그리스도와의 일치 뿐 아니라, 우리 서로 서로가 사랑하고 일치해야 하는 것이다.

믿는 이들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이, 성체성사에 그 기반이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 -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 처럼, 서로 사랑하게 되면 모든 것이 새로워진다. 아직도 우리가 사는 세상에 눈물이 있고 울부짖음이 있고 슬픔이 있다면, 아직 새 세상이 된 것이 아니다.

지금보다 더 나아지기 위해서는 사랑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만큼 서로 사랑하는 것 - 밖에 없을 것이다.

포기와 실망은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만든다. 무조건 부정적인 마음은 모든 것을 망쳐버린다.

믿는 신자들이 서로 사랑할 때,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알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서로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고린토 전서 13장의 "사랑의 찬가" 에서 열거하는 내용을 보면 더욱 실감할 수 있고, 또 실생활에서도 시시각각으로 체험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 현존 안에서 기도를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떠나시면서, 당신 자녀인 우리에게 사랑의 새 계명을 주셨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다.

끝으로 요한 1서의 말씀을 묵상하도록 하겠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이여, 우리는 말로나 혀끝으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합시다."

원주교구 유영구 신부
  |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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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새 계명’을 칼처럼 물처럼 사신 두 신부님

우리 대전교구에는 선종일이11월 2일 ‘위령의 날’인 신부님이 두 분 계시다. 1982년 수품8개월 만에 대흥동본당 보좌로 계시다 교통사고로 선종하신 신양수 바오로 신부님과 수품47년째가 되던 2004년에 노환으로 선종하신 백남익 디오니시오 몬시뇰이다.

두 신부님은 정반대의 성품을 지니셨던 분들이다. 신신부님에 대한 고별식 때 김영교 베드로 신부님은 “그가 언제나 옷맵시를 정갈하게 차려 예모를 간직했던 것처럼 영혼도 늘 때 묻을세라 털어내고 손질하고 있었겠지!”라고 추도하셨다. 과연 그랬다. 신 신부님은 젊은 외모만큼이나 성품도 정갈하다 못해 칼칼했다. 부러지면 부러졌지 휘지 않는 분이셨다. 그래서 사제직도 굵고 짧게 마치신 것 같다. 반면 백 몬시뇰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시편 88[89],2[1])라는 사제품성구에서 보듯, 청하면 거절하지 못하고 다 들어주시려다 약속시간을 잘 지키지 못해 사람들한테 타박을 듣던 분이셨다. 대흥동본당주임으로 계실 때 회갑을 맞으셨는데, 당시 수원교구장 김남수 안젤로 주교님께서 “백번이면 백 번 모두 남에게 이로움을 주시려 한 분이 ‘백남익’ 신부님입니다.”라는 축사로 성당을 웃음으로 채우셨다.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베드로에게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마태 25,52)고 하셨지만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칼이 없는 이는 겉옷을 팔아서 칼을 사라.”(마태 10,34; 루카 22,36)고도 가르치셨다. 그렇다. 칼은 ‘남을 것과 사라질 것’을 가르는 무기이거나 도구이다. 신양수 신부님께서는 신학생 때부터 하느님이 아닌 것이나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는 ‘새 계명’을, 곧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에 못지않게 이웃을 사랑하라는 골자계명을 빼고는 모두 칼처럼 끊어내던 분이셨다.

백 몬시뇰께서는 요한복음의 “물독에 물을 채워라.”(2,7), “누구든지 물과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3,5),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4,14)라는 말씀을 사신 분이다. 그래서 백 몬시뇰께서는 피정이나 특강 때 어떤 주제를 받더라도 한결같이 ‘사랑의 새 개명’을 선포하셨다. 몬시뇰께서 외치며 실천하신 ‘사랑의새 계명’은 상선약수(上善若水)나 수오훈(水五訓)처럼 하느님을 향해 멈추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이웃을 신명나게 하시고, 자신을 위해서는 최소한을, 주님과 이웃을 위해서는 최대한을 선택하시며, 세상의 평판이 어떻든 겸손하게 변함없이 하느님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었다. 이렇게 예수님의 ‘새 계명’은 두 신부님들처럼 ‘칼 같은 순교신앙’과 ‘물 같은 하느님의 자비’로 실천해야 할 사랑의 계명이다.

▦ 대전교구 윤인균 라우렌시오 신부 : 2016년 4월 24일
  | 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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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새 계명

우리 그리스도교를 흔히 사랑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그 것은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사랑이신 분’(1요한 4,16)이시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사랑 때문에 오셔서 오직 사람 을 사랑하시되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하시고 그 사랑으로 부활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랑하는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신 예수님께서 유언으로 남기신 말씀도 ‘서로 사랑하라’ (요한 13,34)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 줄은 일찍이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는 계명을 통해 유대인들 대부분은 알고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제자들 역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잘 알고 있었던 계명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유언의 첫 말씀으로 새 계명을 준다고 하시며 또다시 사랑 계명을 말씀하십니다. 무엇이 새 계명이었을까요? 그것은 이제껏 사람 기준과 뜻으로 사랑 해 온 방식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 랑하라’(요한 13, 35)는 예수님 방식, 즉 십자가에 죽을 정도로 사랑하신 그 정도로 사랑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새로운 계명이었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단 한 번도 들어 본적이 없는 완전히 새로운 사랑 계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제자들인 신약 새 백성들은 이 새 계명 앞에 누구도 예외일 수 없고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이 계명을 살아 갈 수 없다면 우리는 세례 받은 그리스도교 신자인지는 몰라도 결코 예수님 제자는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예수님 제자임’(요한 13, 35)을 알게 될 것이라고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느님을 믿고, 내가 천주교를 선택하고, 내가 계명을 지킨다는 자기중심적 믿음생활을 하는 구약 방식에 젖은 사람은 이 새 계명 앞에 ‘인간이 어찌 예수님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하고 막막한 심정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 실천에 부담감을 갖고 위축되는 이유는, 아직도 예수님 사랑이 아닌 내 사랑으로 사랑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 것입니다. 우리는 깨닫고 체험한 주님 사랑에 감사하며 그분께 받은 그 사랑을 형제들과 나눌 따름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교에 속한 종교인으로 살 것인지 아니면 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한 신앙인으로 부활을 살아 갈 것 인지는 이 새 계명에 달렸습니다. 사랑만이 관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1요한 4,16). 아멘.

▦ 청주교구 오동영 모세 신부 : 2016년 4월 24일
  | 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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