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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살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
조회수 | 1,837
작성일 | 10.06.19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교의 핵심진리를 간결한 한 마디 진술로 요약하고 계십니다. 더 간단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살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

예수님 안에서 영적인 삶이 성숙할수록 깨닫게 되는 진리가 한 가지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결코 녹록치 않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분을 따르는데서 오는 기쁨, 보람, 행복, 위로는 큰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단맛들은 ‘이것’을 넘어서고 나서야 찾아오는데, ‘이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일상 안에서의 작은 죽음, 매일의 순교, 순간순간 나를 버림, 이해하지 못할 현실에 대한 긍정적 수용...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한 마디로 기도하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 기도는 어떤 기도이겠습니까?  

십자가를 기쁘게 수용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진실한 사랑을 실천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충실히 내게 맡겨진 몫을 다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인간과 세상의 변화와 쇄신을 위해 전적으로 투신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우리 자신이 영적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차릴 수가 있겠습니까?  

영성적 성숙의 결과는 겸손입니다. 데레사 성녀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영적 완성의 시작은 하느님 없이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며, 그분 없이 우리는 아무 것도 못한다는 것을 인정함입니다.”

한 저명한 성서학 교수님께서 신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피정강론에서 이런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덕은 어떤 덕이겠습니까?”
“신앙? 희망? 사랑? 정의?...?”
“아닙니다. 다 부차적인 덕들입니다.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덕은 겸손입니다.”

영적으로 성장한 사람들의 특징 중 첫 번째는 겸손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크심 앞에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겸손으로 무장한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곳이 아니라 하느님이 원하는 곳으로 가게 됩니다. 높은 곳이 아니라 낮은 곳으로,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에게로, 건강한 사람에게가 아니라 병든 사람들에게로...

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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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연연해서가 아니야!

보통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즉 자신의 평판이 어떤지 궁금해 합니다. 궁금해 하는 정도를 넘어 연연해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 경험을 놓고 볼 때 다른 사람의 평판에 연연하는 것은 불행의 지름길입니다. 연연하게 될 때 다른 사람이 나를 좋게 봐주면 다행이지만 나를 안 좋게 보면 분노하고 좌절하고 자신감을 잃고 한 마디로 다른 사람의 평가에 존재가 흔들리고 별 의미 없이 그냥 던진 한 마디에 뿌리째 흔들리기도 합니다. 인간이 스스로 행복하지 않다면 다른 사람에 의해 행복하다 해도 의존적인 것이기에 진정 행복하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정 반대의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이가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든 아랑곳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다른 이의 평판에 자유로우니 일단은 행복한 것 같은데 심각한 자기 착각과 고립을 살게 되기에 이 또한 진정 행복하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떠하셨을까?
성 프란치스코는 어떠하셨을까?

물론 다른 사람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으셨고 다른 사람의 생각은 아랑곳하지 않으시는 분도 아니셨겠지요. 연연하지는 않으시지만 염려하고 배려하시는 관심은 있으셨겠지요. 그러니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그리고 제자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물으심은 일종의 가르치심이고 당신의 정체를 확고히 심어주심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께서 혼자 기도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늘 기도하셨겠지만 복음에서는 중요한 때에 주님께서 기도하심을 전합니다. 12 제자의 선택을 앞두고 혼자 기도하셨고, 수난을 앞두고 혼자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을 놓고 볼 때 당신의 정체를 알려주시는 이 때도 매우 중요한 순간입니다. 매우 고심을 하신 다음 당신의 정체를 알려주신 것입니다.

자기들의 스승이 비참하게 죽게 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한 제자들이 갑자기 스승이 죽으면 엄청 혼란을 겪을 것이니 이제 당신이 죽게 된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어야 하고, 그렇게 죽는 당신이 누구신지 제자들이 확실히 깨닫게 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수난에 대한 첫 번째 예고에 앞서 당신이 누구신지를 물으신 것은 당신은 사람의 아들로서 수난을 받아 죽게 되지만 하느님의 그리스도임을 확실히 각인시키기 위하여 물으신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 물으신 것이 아니라 당신이 누구신지를 물으신 것입니다.

작은 형제회 김찬선 신부
  | 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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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요즘 저는 복음서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에 대한 강좌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한 강좌 때 마다 한 인물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돌아보니 꽤 많은 인물들을 소개했습니다. 성모님, 양부 요셉, 세례자 요한, 바오로 사도, 막달라 여자 마리아, 베타니아의 마리아, 세리 마태오, 세관장 자캐오...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은 바로 베드로 사도였습니다. 참으로 흥미로운 분이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분이었습니다. 알다가도 모를 분이었습니다. 계속 파고들어보니 정말 존경스런 분이었습니다. 너무나 사랑스런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가장 존경하는 성서 상 인물이 되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으로부터 수제자 직분을 부여받으셨습니다. 제자공동체의 으뜸이 되셨고, 사도교회의 수장이 되셨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이 되신 것입니다.

이런 베드로 사도와 관련해서 복음사가들이 보여준 모습은 꽤 충격적이었습니다. 제자중의 제자였던 베드로 사도, 교회의 최고 지도자였던 베드로 사도의 실수나 나약함, 인간적 부족함을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와 관련한 기사들 살펴보니 수치스런 기록들이 꽤 많았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는 등 예수님께 신랄하게 혼나는 장면, 책임지지 못할 말들을 내쏟다가 주어 담지 못해 당황하는 모습, 최종적으로 스승을 세 번이나 배반하는 모습 등등.

복음사가들은 왜 그런 부분을 좀 감싸주지 않고 신랄하게 보고하고 있는 것일까요?

제 개인적으로 이 부분은 참으로 의미 있는 묵상주제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제자란 어떤 사람입니까?
수도자란 누구입니까?
사제는 무엇 하는 사람입니까?

그 신분이 단 한 번에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베드로 사도는 온 몸으로 말해주고 계십니다. 자신의 신원을 매일 새롭게 선택해야하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이요, 제자요, 수도자요, 사제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한 때 ‘반석’, ‘바위’라고 부르시기도 했지만, 다른 때 ‘사탄’ ‘일생에 도움이 안 되는 존재’라고 부르시기도 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가장 믿을만한 반석에서 배신자, 사탄로 넘어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순식간이었습니다. 단 한순간이었습니다.

결국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오늘 우리의 모습이 그럴 듯 해보입니다. 거룩해 보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존경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 역시 순식간에 사탄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배신자로 떨어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자세는 지속적인 겸손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주님을 떠나지 않으려는 노력입니다. 우리 본래의 나약하고 비참한 모습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주님의 자비에 힘입지 않고서는 잠시도 홀로 설수 없는 부족한 우리의 근원을 자각하는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배신과 타락으로 인해 거의 죽음과 멸망에 도달한 베드로 사도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셨습니다. 죽음을 앞둔 마지막 순간에 다시 한 번 당신 자비의 눈길을 베드로 사도에게 던지셨습니다.

그 따뜻한 눈길, 다시 일어서라는 격려의 눈길에 베드로 사도는 바닥에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 번 새 출발 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하셨던 똑같은 방법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죄와 방황과 타락의 길을 거듭하는 우리를 인정사정없이 내치지 않으시고 오늘 우리에게도 마지막 기회를 부여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베드로에게 베푸셨던 은총의 역사는 오늘 우리의 삶 안에서 되풀이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배반했다고 해서, 타락했다고 해서 베드로에게 한번 부여한 수제자 직분을 빼앗지 않으셨습니다. 죄와 나약함으로 인해 삶의 벼랑 끝까지 내몰린 베드로 사도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를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죄에 물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배반을 거듭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베드로를 신뢰하십니다. 밀어주십니다. 감싸안아주십니다. 수제자에 걸 맞는 대우를 해주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사랑 앞에 베드로는 비로소 진정한 수제자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제 베드로는 주님을 위해 목숨까지 바쳐도 아깝지 않는 사도 중의 사도로 거듭나게 됩니다.

오늘 중한 죄를 지었다하더라도, 오늘 신자로서 본분을 망각했다 할지라도, 오늘 부르심 받은 사람으로 어울리지 않는 부끄러운 하루를 보냈다할지라도 있는 우리의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주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 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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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십자가가 은총이요 축복으로 변화되는 체험>

가끔씩 ‘기가 막힌’ 이웃들을 만납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꼬인 인생이 다 있는지? 이런 상태로 어떻게 살아가는지? 아무리 둘러봐도 사방이 높은 벽으로 가로 막힌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분들 앞에 뭐라 위로의 말을 드리기도 쉽지 않습니다.

기도 열심히 하면, 주님께 매달리면서 신앙생활 열심히 하면 뭔가 상황이 달라질 줄 알았는데, 아무리 발버둥 쳐 봐도 삶은 여전히 거기서 거긴 분들 앞에 그저 송구스럽기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잘 되기만을 바라시는 분이요 우리를 축복하는 하느님이라 믿었는데, 삶 자체가 고통의 연속이요, 십자가 투성이인 우리네 삶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제게는 하나의 큰 숙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답을 가르쳐주시더군요. 우리 그리스도교는 근본적으로 만사형통, 승승장구, 지속적인 현세 축복을 외치는 종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당신의 지상에서의 삶 전체를 통해 잘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의 신앙과 추종의 대상인 예수님부터 고난의 인간, 배척당하는 인간, 십자가 죽음을 넘어서야 하는 인간으로서의 운명을 타고 나셨음을 스스로 밝히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그렇다면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신 우리 그리스도교인들의 운명 역시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분처럼 이 세상에서 고난을 겪고, 때로 배척을 받고, 때로 죽음과도 같은 현실을 감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부활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교는 고통과 십자가 없는 부활을 절대로 외쳐서는 안 됩니다. 희생과 시련은 거부하고 달콤함과 안락함만을 보장하는 교회여서도 안 됩니다. 우리에게 매일 다가오는 고통과 십자가를 소중히 여기며 고통과 십자가에 담긴 가치와 의미를 지속적으로 찾아나가는 것이 정말 중요한 과제입니다.

자신은 고난과 십자가의 메시아임을 명명백백하게 밝히신 예수님께서는 마무리 말씀으로 한 마디를 덧붙이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머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보다 적극적인 예수님 추종을 위해, 그리고 하느님 나라를 얻기 위해 우리가 과감하게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기꺼이 내 등에 져야할 십자가는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우선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세상의 논리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절대로 버리고 싶지 않은 것들이 사실은 우리가 버려야 할 것들입니다. 과도한 소유욕, 독점욕, 자리나 사람에 대한 지나친 욕심...

반대로 기꺼이 져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세상의 논리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절대로 지고 싶지 않은 것들이 사실은 우리가 지고 갈 십자가입니다.

희생, 용서, 화해, 오해, 고독, 이웃의 짐, 남들이 싫어하는 굳은 일들...

이왕이면 져야할 십자가라면 기꺼이, 관대하게 지고 갈 때 생기는 한 가지 특별한 현상이 있습니다. 십자가가 가볍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 십자가가 십자가가 아니라 기쁨이요 은총이요 축복으로 변화되는 느낌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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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聖人)의 길

-기도, 사랑, 추종-

오늘 연중 제12주일, ‘성인의 길’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입니다. 성인이 되라 불림 받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고귀한 인간입니다. 방금 온 힘을 다해 부른 화답 송 후렴이 그대로 하느님 찾는 우리의 내적 갈망을 표현합니다.

“하느님, 내 하느님, 내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 하나이다.”

하느님이 목말라, 하느님 생명으로 영혼의 목을 축이려 하느님을 찾아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입니다. 이어 생각나는 아빠스 축복식 때 화답송 후렴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

가사에 곡까지 더하면 더욱 감동입니다. 아침성무일도 첫 후렴도 새삼스런 기쁨이었습니다.

“주님께 감사하라.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 알렐루야.”

비상한 성인이 아니라 평범한 성인입니다. 성덕의 잣대는 사랑입니다. 완덕에 본질적인 것은 사랑뿐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할 때 성인입니다. 어제 읽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 관한 일화가 생각납니다. 도미니코 수도회의 도미니코 카세르타 수사의 증언입니다.

그는 토마스가 아침기도 전 수도원 성 니콜라오라 경당에 자주 가는 것을 목격하고 호기심이 생겨 그 경당에 미리 가서 숨어 토마스가 기도하는 모습을 훔쳐봅니다. 그 순간 그는 경당 벽에 걸려있던 십자가의 예수님과 토마스가 하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이 말합니다.

“토마스, 네가 나에 관해 쓴 글들은 아주 훌륭하다. 내가 그 보답으로 무엇을 해 주면 좋을까?”

다음 토마스의 대답입니다.

“주님, 저는 다른 아무것도 원치 않습니다. 당신을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이렇게 주님 사랑만으로 행복할 때 성인입니다. 이런 주님 사랑에 저절로 따라오는 이웃사랑입니다. 성인의 시성절차에서 모든 이들의 한결같은 증언은 그가 인내와 부드러움과 겸손의 표본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성인의 길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성인의 길에 대해 세 측면에 걸쳐 묵상을 나눕니다.

첫째,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영성생활의 시발점은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물론 성인들의 삶, 믿는 이들의 삶에서 기도를 빼놓고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우리 분도회의 수도가훈도 ‘기도하고 일하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자칫하면 놓쳐버리기 쉬운 것이 서두의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도 함께 있었는데,…’ 바로 예수님의 삶 한 복판에 자리한 기도임을 봅니다.

기도해야 삽니다. 말 그대로 영혼이 살기위해 기도입니다. 하느님과 만남이, 대화가, 소통이 기도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게 하는 기도입니다. 하느님 주신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게 하는 기도입니다. 하느님과 대화의 기도를 통한 내 신원의 확인입니다. 아마 다음 예수님 자신의 운명에 대한 고백도 기도 중에 깨달으셨음이 분명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느님과 소통의 기도가 단절되면 하느님도 잃고 나도 잃습니다. 저절로 영혼도 시들어 죽습니다. 혼자의 기도와 더불어 공동기도가 필수입니다. 사람은 약하기 때문에 공동기도에 합류하여 공동체로부터 힘을 받아야 삽니다. 주님 역시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셨기에 공동기도보다 든든한 보장은 없습니다. 기도 중의 기도가 이 거룩한 성체성사입니다. 하느님과의 소통, 공동체 형제간의 소통과 일치에 성체성사의 기도보다 좋은 것은 없습니다. 끊임없는 기도도 ‘기도의 샘’인 미사에 뿌리를 둘 때 가능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 역시 임종 전 지극한 정성으로 얼굴 가득 눈물을 흘리며 미사를 봉헌했다고 많은 이들이 증언합니다.

둘째, 늘 사랑하십시오.

기도할 때 사랑하고 사랑할 때 기도합니다. 20세기 예수회 영성가 윌리엄 존스턴은 ‘신비신학’을 ‘사랑학’이라 정의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원하는 것을 행하라.’ 라고 말합니다.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은, 배워야 할 것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아랫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 하는데 하느님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은 하느님 사랑을 깨닫고 배우는 시간입니다. 하느님의 내리사랑과 우리의 치사랑이 만나는 시간입니다. 교회의 7성사가 바로 하느님 사랑의 결정체입니다. 주님은 당신 성사(聖事)를 통해 당신 사랑으로 우리를 충만케 하십니다. 아무도 하느님 사랑을 막을 수 없고 이렇게 하느님 사랑으로 여기까지 살아 온 우리들입니다. 그 옛날 즈카르야 예언자를 통한 하느님의 말씀은 사랑의 세례성사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날에 다윗 집안과 예루살렘 주민들의 죄와 부정을 씻어 줄 샘이 터질 것이다.”
우리 모두의 죄와 부정을 씻어 준 세례성사의 샘이며, 이어 평생성사인 고백성사와 성체성사가 세례성사를 완성해 줍니다. 하여 늘 깨끗한 사랑, 항구한 사랑으로 살 수 있게 된 우리들입니다. 이어 바오로가 세례성사를 통해 이루어진 하나의 사랑공동체를 아름답게 묘사합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세례성사뿐 아니라 이 거룩한 사랑의 성체성사를 통해 새롭게 확인하는 현실입니다. 하여 미사경문에 ‘자매’란 말은 없고 ‘형제’란 말만 나옵니다. 주님 안에 이성(異性)을 넘어 한 형제임을 확인하는 우리들입니다. 끊임없이 미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형제애로 새롭게 옷 입는 우리들입니다. 똑같이 그리스도를 입은 ‘한 형제들’이요 똑같이 그리스도의 성체를 모시는 ‘한 식구들’인 우리들입니다. 이런 하느님 사랑의 깨달음에서 저절로 샘솟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응답입니다.

셋째, 항구히 주님을 따르십시오.

기도할 때 사랑이요 사랑할 때 추종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의 다음 말씀이 우리 삶의 모두를 담고 있습니다. 제자들만이 아닌 모든 사람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제외될 자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바로 이게 누구나에게 부여된 성인의 길, 사람의 길, 생명의 길, 구원의 길입니다. 이 길 말고 다른 길은 없습니다. 자기를 버림으로 자기를 얻는 길입니다. 우리의 모든 수행을 요약합니다. 억지로가 아닌 주님 사랑 때문에 자발적으로 기쁘게 자신을 버리고, 믿음으로 제 십자가를 지고, 희망이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같은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도 다 다른 자기에, 다 다른 십자가입니다. 세상에 똑같은 자기, 똑같은 십자가는 있을 수 없고 고유한 자기에, 고유한 제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희망의 주님만을 따른다는 데는 일치합니다. 다 달라도 모두가 희망의 주님께 눈길을 두는 도반들이기에 비로소 가능한 공동체의 일치입니다.

‘날마다’라는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십자가의 길에는 첩경의 지름길이 없습니다. 날마다, 하루하루 다시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길뿐입니다. 버리고 버려도 늘 살아나는 자신이기에, 늘 지고 가야 할 제 십자가의 짐이기에, 때로는 모두 놔버리고 싶은 유혹도 들기 마련입니다. 바로 이게 진짜 유혹입니다. 이래서 주님의 기도 중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해달라는 청원이 참 절실합니다. 얼마 전 나눴던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라는 시 중 마지막 연을 다시 나눕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살았습니다.
저희에겐 하루하루가 영원(永遠)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연중 제12주일,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성인의 길’에 대해 알려주셨습니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늘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십시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넘치는 사랑을 부어주시어 항구히 기도하고 사랑하며 당신을 따르게 하십니다. 아멘.

분도회 이수철 신부
  | 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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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녹) 연중 제12주일 독서와 복음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  [1] 1535
116   [수도회] 상처 입은 영혼들이여, 힘을 내십시오!  [3] 2245
115   [광주/전주/청주] 내가 살아가는 이유?  [4] 2487
114   [마산] 용서의 강물이 흐르게 하자.  [2] 1886
113   [의정부] 오직 사랑만이  [3] 2312
112   [군종] 용서의 삶  [4] 2292
111   [대구] 용서와 사랑  [3] 2191
110   [춘천/원주] 간절한 통회의 마음  [4] 2461
109   [인천] 작은 사랑  [7] 2402
108   [안동] 예수님 따라 용서하게 하소서  [3] 2330
107   [부산] 이런 저런 생각  [4] 2129
106   [서울] 어제는 죄인 오늘은 성인  [8] 2543
105   [대전] 참회  [4] 2368
104   [수원] 용서받은 이의 시선은…  [5] 2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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