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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기타] 사랑의 콩깍지
조회수 | 2,079
작성일 | 10.06.19
저는 신학교에 늦게 들어왔습니다. 신학교에 들어오기 전에 좋아하던 사람도 있었는데 한 때는 그 사람 없으면 못 살듯이 예뻐 보였는데 그 감정이 사라진 지금 보면 여는 보통 사람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눈에 무엇이 씌었다가 떨어져나간 느낌이었습니다.

어떤 연구 기관에서 사랑에 빠진 남녀를 대상으로 실험을 하였습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에게 멋지고 잘생긴 연예인들의 사진 속에 연인과 닮은 사람의 사진들을 끼워 넣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장 한 장 사진을 보여 준 결과 누가 봐도 잘 생기고 멋진 사진 속 사람보다 자신의 연인과 닮은꼴의 사람 사진에 더 큰 반응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이는 분명히 사랑하면 눈에 콩깍지가 쓰인다는 말을 증명해줍니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의 모든 것이 사랑스러워 보이고 미워하면 좋은 행동까지 위선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결혼해서까지 눈에 사랑의 콩깍지가 남아있는 부부들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많은 부부들이 결혼하고도 계속 상대가 예뻐 보이기도 하겠지만 또 많은 경우는 눈에 콩깍지가 떨어져 실제를 보고는 실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처음엔 함께 살기 힘들었다가도 떨어진 콩깍지를 다시 찾아 씌워서 신혼 초처럼 다시 사랑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예뻐 보이고 안 예뻐 보이는 것은 그 상대방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상대방을 바라보는 내 눈의 문제인 것입니다.

만약 꽃을 본다고 합시다. 꽃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모든 동물이 꽃을 아름답게 볼까요?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만이 꽃을 아름답다고 합니다. 다른 동물들은 그저 다른 풀들과 다를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만이 꽃을 아름답게 보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사람 안에 ‘아름다움’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사람 안에 아름다움을 넣어 놓아서 그 아름다움으로 다른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동물들은 그 안에 아름다움이란 것이 없어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모르고, 진리란 것이 없어서 진리가 무엇이며, 또 선이란 것이 없어서 무엇이 선인지도 구분하지 못합니다. 결론적으로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무엇으로 바깥세상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즉, 내가 어떤 사람이 특별히 아름답게 느껴졌다면 그 사람 안에 이미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고 어떤 사람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면 그 마음 안에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있는 콩깍지를 통해서 상대를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 눈엔 부처만 보이고 돼지 눈엔 돼지만 보인다고 하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신부님이 고해성사 때 이런 고해를 들으셨다 합니다.

“저는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싫은데 특히 몇몇은 더 싫어요.”

이 사람이 다른 사람을 그렇게 싫게 보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정말 안 좋은 사람들이어서가 아니라 그 사람들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 안에 사랑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위해서까지 기도하셨고 유다까지도 사랑하셔서 제자로 뽑아주셨습니다. 사람이 사랑스럽게 보이지 않는 이유는 단순히 내 안에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보아도 무관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어떤 이들은 예언자라 하고 어떤 이들은 또 다른 사람이라고 하며 각자의 의견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만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봅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로 알아보면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누구이냐에 따라 상대를 알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이미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로 알아보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받을 상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일이 있은 직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당신의 권위를 상징하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로 알아 볼 수 있는 눈은 베드로가 스스로 지니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베드로가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베드로에게 그것을 일러주셨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마치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없었는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넣어 주셔서 아름다운 것들을 구별할 수 있게 해 주셨듯이, 베드로에게도 ‘사랑’을 넣어주셔서 참 사랑이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알아보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 사랑을 우리는 ‘성령님’이라 부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신이 하느님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황의 무류권의 근거로서 가장 중요한 대목입니다. 하느님은 베드로가 잘나서가 아니라 교회를 이끌어갈 최고의 권위자로서 오류가 없도록 선택하여 성령님을 충만히 부어주신 것입니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쁘다고 합니다. 자신의 자식을 예쁘게 보이게 하신 것은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입니다. 객관적으로는 다른 아이들보다 잘난 것이 없지만 자신의 자녀는 특별히 더 예뻐 보입니다. 하느님께서 부모에게 콩깍지를 씌우신 것입니다. 만약 자녀가 예쁘지 않으면 부모는 책임감만으로 자녀를 키워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사랑스럽게 보이면 살아가는데 덜 힘이 듭니다. 저도 예전에는 미워하는 사람과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그와 비슷한 사람들까지도 미워 보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미운 짓을 하는 사람이 주위에서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내 자신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려고 노력해온 결과입니다. 내가 변해야 세상이 변합니다.

미워하는 사람이 많으면 그만큼 삶이 힘듭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아버지께서 베드로에게 성령님을 보내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분이 씌워주시는 사랑의 콩깍지를 씌워 주십사고 청해야겠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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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루카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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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말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느님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말한다는 것이 믿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말은 생각에서 나온다.
즉 말한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뜻이다.
결국, 생각한다는 것이 믿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예수님께 제자들에게 던지신 질문,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나를 뭐라고 말하느냐?”도 아니며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도 아니다.
그것은 “나를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믿느냐?”는 질문이었다.

예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나타나셔서 똑 같은 질문을 던지신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믿느냐?”

생각한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은 분명 다르다.
생각은 머리에서 나오고, 믿음은 가슴에서 나온다.
믿음은 생각을 넘어서는 세계이다.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데 70년이 걸렸다는 고 김수환 추기경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우리의 그분에 대한 고백이 생각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마음의 고백이어야 한다.
“당신은 나의 주님이시며,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것이 믿음이다.

하늘호수 / 마리아
  | 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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