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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신앙의 해’와 늘 깨어 있는 신앙
조회수 | 1,402
작성일 | 12.11.30
‘신앙의 해’가 개막된 지 두 달이 다되어 갑니다. 교황님께서 자의교서 『믿음의 문』에서 말씀하신 “그리스도와 만나는 기쁨과 새로운 열정을 더욱 북돋우기 위하여 신앙의 여정을 재발견할 필요가 있습니다.”(2항)라는 이 대전제가 ‘신앙의 해’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입니다. 이 대전제에서 시작하여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것이 ‘신앙의 해’의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구 주교님께서는 ‘신앙의 해 사목교서’에서 ‘신앙의 재발견과 교회의 쇄신’이라는 두 가지 주제에 특별히 집중하면서 ‘신앙의 해’를 보내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교황님께서 강조하신 ‘신앙의 기쁨과 열정을 회복하고 신앙의 여정을 재발견’하자는 지향을 우리 교구의 상황에 맞게 고민하고 그 결과를 펼쳐내신 것이라고 봅니다.

대림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대림시기는 가깝게는 다가오는 성탄을 기쁘게 준비하고 멀게는 이 세상이 완성되어 영광의 승리자로 오실 그리스도를 기쁘게 맞이할 수 있기 위해 다시 한 번 각자의 마음을 다잡는 기간입니다. 이 기간 중에 우리가 가장 많이 듣는 말씀은 오늘 복음의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입니다. 다시 말해 ‘나는 늘 깨어 있는 신앙인인가?’를 성찰하면서 주님의 대전에서 그분을 대면할 때 기쁘게 만날 수 있도록 자신을 성찰하고 회개하도록 애쓰는 기간이라고 봅니다.

‘신앙의 해’를 보내면서 맞이하게 되는 대림시기는 뭔가 다르게 다가옵니다. ‘늘 깨어 있는 신앙인’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은 ‘기쁘고 떳떳한 신앙인’, ‘그리스도를 날마다 만나고 기쁨과 열정이 식지 않는 신앙인’, ‘신앙인의 정체성과 자존심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신앙인’이 아닐까요? 이는 곧 ‘신앙의 해’가 근본적으로 요구하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구 주교님께서도 사목교서에서 ‘‘기쁨 넘치는 하느님 나라’에서 ‘기쁘고 떳떳하게’ 주님의 자녀로 살아가는’(사목교서 9항) 우리들의 모습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지난 11월 사제모임 때, 주교님께서는 강론 중에 필리피서의 말씀인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2, 5)를 인용하시면서 교구 신부님들을 격려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 교구 출신이신 정양모 신부님께서 자주 하셨던 ‘예수에 대한 신앙이 아니라 예수의 신앙을 살아야 한다.’라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도 중요하지만, 사실은 예수님의 신앙, 하느님에 대해 지니셨던 예수님의 그 마음을 우리가 간직하도록 애써야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주교님께서도 ‘신앙의 해 사목교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가지셨던 하느님께 대한 무한한 신뢰와 인간에 대한 한없는 사랑이 우리 신앙의 척도가 됩니다. 결국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충실히 살려고 노력할 때, 예수님처럼 살고 그분을 닮으려고 노력할 때 우리의 믿음은 더 커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갈라 5,6)이 인간의 삶 전체를 바꾸어 놓는 사유와 행동의 새로운 기준이 된다고 교황님께서 말씀하신 이유도 이러한 신앙의 위대함을 강조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믿음의 문」 6항 참조)”(신앙의 해 사목교서 5항)

형제자매 여러분, ‘늘 깨어 있는 신앙인’으로 초대하는 은총의 대림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가 지니도록 애쓰면서, 신앙의 기쁨과 열정을 회복하고 각자의 신앙을 재발견하여 기쁘고 떳떳하게 살아가는 신앙인, 신앙인의 정체성과 자존심을 지켜가는 신앙인으로 초대하는 ‘신앙의 해’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 두 시기가 기막히게 맞물려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 교구 사명선언문이 지향하는 ‘기쁨 넘치는 하느님 나라’가 우리 교구에서 이루어지기를 희망해 봅니다.  

오늘 2독서에서 들었던 사도 바오로의 격려말씀을 다시 한 번 함께 회상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힘을 북돋아 주시어, 우리 주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재림하실 때, 여러분이 하느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흠 없이 거룩한 사람으로 나설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 아멘.’(1데살 3,13)

안동교구 황재모 안셀모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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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교구장 사목교서 - “하느님 아버지처럼 자비로이”

- 자비의 해 -

1.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우리는 너무나 자주 하느님의 자비를 잊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의 문화는 자비의 하느님에 대립되는 듯, 자비라는 이념 자체를 생활에서 배제하고 인간 마음에서 제거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마치 ‘자비’라는 말과 개념을 매우 거북하게 여기는 것 같기도 합니다. 과학과 기술의 엄청난 발달로 땅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인간이 땅에 대한 지배를 너무 일방적이고 피상적으로 알아들음으로써 자기 안에 자비의 여지를 남겨 두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자비의 얼굴」 11항 참조) 이러한 분위기와 이유 때문에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지금이 바로 교회가 하느님의 자비를 고백하고 선포하는 본연의 임무를 다해야 하는 절실한 시기라고 강조하시며 ‘자비의 특별 희년’을 선포하셨습니다. 이 특별 희년에 우리 모두가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에페 2,4)의 은총과 구원을 보다 충만히 얻어 누리도록 배려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안동교구도 자비의 희년 여정에 맞춰 교회의 모든 사목활동 방향을 집중시킬 것입니다. 특별히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 주변 곳곳에서 드러나도록 할 것입니다. 성령의 이끄심 안에서 우리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서로에게 자비를 베풀며 살 것입니다.(루카 6,36 참조) 이것이 이번 성년 표어 “하느님 아버지처럼 자비로이”(Misericordes sicut Pater)에 담긴 의미입니다.

하느님의 자비

2. 하느님의 자비는 나약함의 표시가 아니라 오히려 전능하신 하느님의 특성입니다.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완전히 낮춰 사람이 되신 육화의 신비, 강생의 신비는 그분께서 오로지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자비는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실재입니다. 이는 부모가 자기 자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정녕 애끊는 사랑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 사랑은 온유한 배려와 너그러운 용서가 넘치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자연스럽게 솟구치는 사랑입니다.”(「자비의 얼굴」 6항) 복음에 나오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가 이런 하느님의 자비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3.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자비의 희년을 구체적으로 안내하는 「자비의 얼굴」 칙서에서 자비의 성사인 고해성사의 중요성을 강조하십니다. 고해성사는 하느님의 자비를 가장 깊이 체험할 수 있는 은총의 기회입니다. 여기에는 신자들이 보다 더 많이 보다 더 쉽게 자비의 성사인 고해성사에 접근할 수 있도록 초대하시겠다는 교회 최고 목자의 결연한 의지가 함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교황께서는 고해 사제를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에 비유합니다. 고해 사제가 바로 하느님 아버지 자비의 참된 표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고해 사제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와 같이 신자들을 맞이하여야 합니다…… 고해 사제는 집으로 돌아오는 참회하는 아들을 끌어안고 그를 되찾은 기쁨을 드러내야 합니다. 고해 사제는 기뻐하지 못하고 밖에 서 있는 다른 아들에게도 다가가 하느님 아버지의 끝없는 자비 앞에서 그의 완고한 생각은 바르지 못하고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끊임없이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고해 사제들은 도움을 청하고 용서를 비는 고해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한 마디로, 고해 사제들은 언제나 어디서나 어떠한 상황에서나 그 무엇보다 앞서 자비의 으뜸가는 표지가 되어야 합니다.”(「자비의 얼굴」 17항 참조)

4.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왜 이렇게 구체적으로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우리 삶 안으로 깊이 끌어들여 설명하고자 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느님의 자비를 믿고 사는 우리가 보다 더 풍성하게 하느님의 자비를 누리며 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자비의 희년을 맞이하여 ‘아버지처럼 자비로워지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 사랑을 느끼며 체험하려 합니다. 하느님 자비의 손길 안에서 그분의 자비를 느끼며 우리도 나날이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로워질 수 있다는 믿음을 함께 키워나가려 합니다.

자비의 실천

5.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하느님의 자비를 “복음의 뛰는 심장”(「자비의 얼굴」 12항)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교회가 하느님의 자비를 전하지 않는다면, 교회가 스스로 자비를 살지 않는다면 그 교회는 살아있는 교회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새로운 열정과 사목활동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거듭 알리고 드러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교회는 말과 행동으로 자비를 전하여 사람들의 마음속에 파고 들어가 그들이 다시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길을 찾아 나서도록 해야 합니다.”(「자비의 얼굴」 12항)

6. 「자비의 얼굴」 칙서를 통해 교황께서는 자비의 성년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실천해야 할 자비의 구체적 실천 활동으로,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에 따라 자비의 육체적 활동과 자비의 영적 활동으로 구분하여 전하고 있습니다.(「자비의 얼굴」 15항 참조)

자비의 육체적 활동에는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이들에게 마실 것을 주고, 헐벗은 이들에게 입을 것을 주고, 나그네들을 따뜻이 맞아주며, 병든 이들을 돌보아 주고, 감옥에 있는 이들을 찾아가 주며, 죽은 이들 묻어 주는 것이 있습니다. 자비의 영적 활동에는 의심하는 이들에게 조언하고, 모르는 이들에게 가르쳐 주며, 죄인들을 꾸짖고, 상처받은 이들을 위로하며, 우리를 모욕한 자들을 용서해 주고, 우리를 괴롭히는 자들을 인내로이 견디며, 산 이와 죽은 이들을 위하여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이 있습니다. 곧 자비의 육체적 활동 일곱 가지, 자비의 영적 활동 일곱 가지입니다. 교회 전통에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이나 ‘전체’를 의미합니다. 즉 자비의 육체적 활동과 영적 활동이 각각 일곱 가지인 것은 여기에 시대적,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차원을 뛰어넘는 자비의 모든 활동이 포함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자비의 구체적 활동의 핵심은 성서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 시대의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마태 25,40.45)이 누구인지 잘 살펴볼 필요가 있고, 그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품을 떠난 작은 아들 찾기

7. 우리 안동교구는 지난 2년 동안 교구의 사목방향을 ‘선교’에 집중하면서 특히 믿지 않는 사람들과 신앙의 기쁨을 나누는 행복을 함께 체험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리저리 다니느라 어렵고 힘든 적도 있었지만 신앙의 기쁨은 나눌수록 커진다는 값진 체험을 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새로 입교한 형제자매들과 신앙 안에서 맺은 교우적인 관계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참으로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하느님을 믿는 모든 가족들을 위해 선포된 자비의 특별희년에 우리 교구가 특별히 함께 해야 할 일에는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세례를 받고 이미 하느님의 자녀가 된 교회의 구성원들이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교회를 떠나 마치 이산가족처럼 살아가는 형제자매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백성 공동체 전체를 하나의 가족으로 생각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거의 절반에 가까운 가족 구성원들이 집을 떠나 살고 있으니 가정 파탄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듯이,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집 나간 작은 아들이 언제나 돌아올까 매일매일 집 문간 대청마루에서 깨어 기다리시는 아버지와 같은 분이십니다. 집 나간 작은 아들이 돌아오는 모습이 보이기라도 하면, 집안에서 그냥 기다리지 못하고 집밖으로 달려 나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며 극진히 맞이하는 아버지 같은 분이십니다.(루카 15,20 참조) 저는 이 자비의 희년에 우리 교구가 특별히 함께 해야 일로 ‘아버지 품을 떠난 작은 아들 찾기 운동’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교회의 전통적인 표현으로 말하자면 냉담자 회두를 위해 우리 모두 함께 사목적 역량을 모으자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도 희년을 맞는 교회에 같은 부탁을 하고 계십니다. “교회는 항상 활짝 열려 있는 아버지의 집이 되어야 하고”(「복음의 기쁨」 47항 참조), “말과 행동으로 자비를 전하여 사람들의 마음속에 파고 들어가 그들이 다시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길을 찾아 나서도록 하여야 합니다.”(「자비의 얼굴」 12항)

8. 아버지 품을 떠난 작은 아들을 찾기 위해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함께 기울일 수 있겠습니까? 어떤 이유에서든 아버지의 품을 떠난 우리 형제자매들이 다시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의 품을 떠난 그들이 다시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 먼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느님의 자비를 배우고 익히는 일입니다. 그 다음에 자비가 그들 마음속을 파고들도록 해서 아버지의 품을 그리워하는 내적인 충동을 일으키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그제야 제정신이 든”(루카 15,17) 작은 아들처럼 아버지 품으로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 5,7) 하느님의 자비를 전하기 위해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하느님 자비의 축복을 풍성하게 얻어 누리기 위해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그 자비를 스스로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없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난 작은 아들 찾기 운동이 성공하려면, 작은 아들에게 자비를 전하는 그 사람이 먼저 자비를 베풀 줄 아는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이치를 함께 마음에 새겨 봅시다.

9. 자비로운 사람들이 누리는 행복에 초대된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들은 이미 하느님의 자비를 입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로 구원된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에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의 얼굴이십니다.”(「자비의 얼굴」 10항) 예수님을 뵌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입니다.(요한 14,9 참조)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의 계시자이십니다.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된 원형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라 살면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자비로운 사람이 되면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하느님의 자비를 입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입게 되면 그 자비로 ‘아버지 품을 떠난 작은 아들’을 다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게 할 수 있습니다.

주님, 아버지 품을 떠난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 2015년 11월 29일 대림 제 1주일
▥ 천주교 안동교구 교구장 권혁주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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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묵시 21, 5)

▬ 교구쇄신 ▬


1.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교구설정 50주년이 되는 2019년은 우리 교구민들에게 있어서 특별한 의미가 있는 은총의 해, 곧 희년입니다.(루카 4,16-19 ; 레위 25,8-22 참조) 이제 우리는 교구의 희년을 지내면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희년의 기쁨을 함께 나누며 함께 누리려 합니다. 희년의 기쁨은 지금 여기에서 “기쁨 넘치는 하느님 나라를 일군다.”(안동교구사명선언문)는 하느님 나라의 축복을 앞당겨 사는 데에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이러한 축복을 기원합니다.

기쁘고 떳떳하게

2. 하느님 나라의 축복은 무엇보다도 복음 말씀대로 살면서 누리는 행복인데, 이 행복을 가장 집약적으로 표현한 내용은 여덟 가지 참 행복, 곧 진복팔단(마태 5,3-10)에 들어 있습니다. 이 진복팔단의 말씀대로 살자는 다짐은 우리 안동교구 초대 교구장이셨던 두봉 주교님께서 취임사를 통해 전 교구민들에게 부탁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진복팔단의 정신대로 살면 분명히 참된 행복을 누리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안동교구의 사목표어이며 교구사명선언문의 제목인 “기쁘고 떳떳하게”라는 표현 안에, 우리 교구는 초대 교구장님의 이러한 믿음과 확신을 담아 두었습니다. 따라서 “기쁘고 떳떳하게”라는 표현을 풀이한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신앙생활의 궁극 목적은 참된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복음 정신대로 살아가야 한다.>

3. 일반적으로 사명선언문은 공동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삶의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한 개인이나 공동체가 제자리를 찾고 성장하는 데 꼭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교구는 신앙생활의 궁극 목적인 참된 행복을 위해 복음 정신에 따른 교구사명선언문을 지난 2003년 교구 사제단과 평신도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만들었습니다. 우리 교구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교구의 사목방향을 명확히 하고 있는 교구사명선언문은 우리 교구가 50년 동안 살아온 공동체 형성과정의 결실이며, 지금도 살고 있고, 앞으로도 살아가야할 삶을 응축한 것입니다. 따라서 멋지게 만든 우리 교구의 사명선언문은 입으로 외치는 소리가 아니라 몸으로 실천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교구의 행복 비전

4. 지금 우리는 “기억, 감사 그리고 다짐”이라는 슬로건으로 교구설정 50주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농촌교구, 작은 교구, 가난한 교구로 정의되기도 하는 우리 교구는 타 교구에 비해 열악한 조건이지만 초창기부터 이러한 조건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긍정적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열악한 조건들을 축복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는 분명 기억해야 할 일이고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우리 교구의 행복과 비전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가난의 영성>, <열린 교회 사목>, <공동체 사목>입니다. 농촌교구이자 가난한 교구이기 때문에 ‘가난의 영성’을 살 수 있었고, 작은 교구이기 때문에 지역 주민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열린 교회 사목’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언제든지 마음만 있으면 이웃의 어려운 사정을 보다 더 쉽게 헤아릴 수 있어서, 우리는 나누고 섬기며 함께 사는 기쁨을 보다 구체적으로 익혀 왔습니다. 서로 나누고 섬기는 이러한 ‘공동체 사목’은 교구의 사목 전통 속에서 우리 몸에 배어 있습니다. 이 세 가지 모습은 우리 교구의 특징이자 특별한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5. 그리고 우리 교구는 농촌 교구로서 설립 초기부터 특별히 농민들의 고통에 동참하면서 농민들의 살 권리를 알리고 되찾아 주는 데 노력해왔습니다. 이러한 농민들에 대한 특별한 사목적 배려는 인권운동과 대사회 참여운동으로 자연스럽게 확장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둡고 혼란하던 70년대와 80년대를 지나면서 시대의 아픔에 동참하며 세상에 희망을 주는 교회가 되고자 노력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주어진 여건을 회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함께 하는 가운데 참으로 교회의 존재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바로 여기서 교구가 ‘시대의 아픔에 동참하는 열린 교회’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교구의 쇄신

6. 안동교구는 지난 2002년 ‘새 교구장을 맞이하여 드리는 기도’에서 안동교구가 지향하는 바람직한 교회의 모습 네 가지를 기도문에 담았습니다. 이 내용은 교구사명선언문에 담긴 정신적 가치와 공유되는 부분도 있고, 교구 설정 40주년을 지내면서 연차별(2007-2010)로 교구 사목방향으로 설정해 사목교서에서 언급한 내용이기에 지금은 자연스럽게 교구사명선언문이 추구하고 지향하는 교회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시대의 아픔에 동참하는 열린 교회>, <성숙한 신앙인으로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교회>, <작은 것과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교회>, <서로 나누고 섬기며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교회>의 모습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교회의 모습은 그동안 우리 교구가 살아왔던 모습이기도 하면서 또한 우리 교구가 앞으로 시대에 맞게 새롭게 적응하고 구현해나가야 할 교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네 가지 교회의 모습은 우리가 ‘교구의 쇄신’을 얘기할 때에 반드시 함께 생각해야 할 ‘교회의 쇄신’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교구의 쇄신’이 이루어지면 이러한 바람직한 교회의 모습이 신앙 공동체 안에서 되살아나게 될 것이고, 또 이러한 교회의 모습이 신앙 공동체 안에서 재발견되고 되살아난다면 ‘교구의 쇄신’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7. 교구사명선언문의 어떤 내용이 바람직한 교회의 네 가지 모습과 연결되는지 한 번 살펴봅시다. “열린 마음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명선언문의 정신이 “시대의 아픔에 동참하는 교회”로 거듭나게 할 것입니다. “소박하게 살고”라는 사명선언문의 정신이 “성숙한 신앙인으로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교회”가 되도록 이끌어줄 것입니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사는 교구사명선언문의 정신이 “작은 것과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교회”로 살게 이끌어줄 것입니다. “서로 나누고 섬김으로써” 함께 사는 교구사명선언문의 정신은 “서로 나누고 섬기며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교회”로 살도록 이끌어줄 것입니다. 교구사명선언문이 지향하는 이러한 교회의 모습은 교구의 쇄신뿐만 아니라 교회의 쇄신도 함께 이루어낼 것입니다.

기쁨 넘치는 하느님 나라를 일군다.

8. 안동교구 사명선언문
“우리는 이 터에서
열린 마음으로
소박하게 살고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서로 나누고 섬김으로써
기쁨 넘치는 하느님 나라를 일군다.
안동교구 사명선언문의 내용입니다. “기쁘고 떳떳하게” 사는 교구민 각자의 신앙생활의 궁극 목적인 참된 행복이 교구 사명선언문의 내용 하나 하나에 구체적인 삶의 양식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드러나는 구체적인 삶이 “기쁨 넘치는 하느님 나라를 일군다.”는 하느님 나라의 축복을 앞당겨 사는 현장이 되는 것입니다.

9. 우리 교구는 교구설정 50주년을 맞으며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묵시 21, 5)는 말씀아래 쇄신 운동을 펼쳐 새롭게 출발하고자 합니다. 새로운 출발을 위해서는 새로운 다짐이 필요합니다. 이 새로운 다짐을 교구 사명선언문을 바탕으로 각 계층별로 자기 사명선언문을 만들었으면 합니다. 이는 돌에 새겨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마음에 새겨지는 구체적인 실천사항이 될 것입니다. 안동교구 사제, 수도자, 평신도 혹은 성인, 청소년, 어린이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교구 사명선언문은 우리의 삶에 적용되는 자기 사명선언문이 될 것입니다.

10. 2000년 대희년을 맞이하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인께서는 과거 교회의 잘못에 대한 고백을 하며 용서를 구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교구 역시 교구설정 50주년을 맞이하면서 사제는 사제로서, 수도자는 수도자로서, 평신도는 평신도로서 제대로 살아왔는지를 살펴보고 잘한 것이 있다면 함께 격려하며 박수를 쳐주고, 잘못한 것이 있다면 함께 가슴을 칠 줄 알아야 합니다. 50주년을 맞이하여 새롭게 도약하기 위해 그 모든 일은 지금 여기 있는 우리 각자가 함께 해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청하며 함께 노력하여 다시 한 번 더 세상 사람들에게 ‘안동교구답다.’라는 모습을 보여주도록 합시다. 이는 곧 지금 여기에서 “기쁨 넘치는 하느님 나라를 일군다.”는 교구사명선언문의 정신을 구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주 하느님 안에서 우리 교구의 희년과 교구의 쇄신을 통하여 누리는 축복과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 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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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2일 대림 제1주일
천주교 안동교구장 권혁주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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