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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대림초에 불을 붙이며
조회수 | 2,692
작성일 | 06.11.29
대림 첫 주일 교회력으로 한 해의 처음이 기다림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오늘 성당에 들어오시면서 제대 앞이나 옆에 놓인 대림환을 보셨을 겁니다. 네 개의 초가 있고 그중 제일 진한 보라색 초에 촛불이 켜져 있지요. 새벽이나 평일 저녁에는 아침의 고요와 저녁의 평온함 속에 촛불 홀로 타고 있습니다. 그 빛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지금 성당의 주인은 신자도 건물도 아닌 저 촛불인 것 같습니다. 이 빛이 주는 고요와 평온함 속에서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탄생하시는 예수님, 만왕의 왕으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립니다.

오늘 제1독서는 유다 왕궁의 경비대 울안에 갇혀 있는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내린 하느님 말씀을 전합니다. 유다 왕국의 멸망이 눈앞에 닥쳐온 시기, 나라는 이제 곧 망하고 예루살렘 성벽도 다 무너지고 예레미야를 가두었던 치드키야 임금은 두 눈이 뽑혀 청동 사슬에 묶여서 바빌론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이런 비극적인 상황을 목전에 두고 있는 백성들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에게 한 약속을 이루어주겠다.”(예레 33,14) 오늘 독서 앞부분에는 “기쁜 소리와 즐거운 소리, 신랑 신부의 소리와 ‘만군의 주님을 찬송하여라. 그분의 자애는 영원하시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릴 것이다.”(예레 33,11)라는 신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에서 가장 이상적인 구원의 모습을 말씀하시다니! 독서의 말씀들은 다윗 임금 때에도 있을 것 같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들으면서 현세적인 메시아를 기다렸던 것도 정말 이해가 갑니다.

유다 백성들은 한 치의 희망도 보이지 않는 처지로 내몰리는데 그런 상황에서도 그들을 포기하지도, 그들에게 절망하지도 않으시는 하느님. 더욱이 가져본 적도 없었던 꿈같은 행복까지 약속하시다니! 이런 불행을 초래한 장본인이 바로 그들인데도 말입니다.

오늘 복음도 그런 점에서는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 파괴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시고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큰 영광을 떨치며 올 것이다”(루카 21,27 참조) 하고 말씀하시지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재난은 가깝게는 기원후 70년의 로마제국에 의한 이스라엘의 멸망, 멀리는 마지막 종말의 때이기도 하겠지요.

예레미야서와 루카 복음의 정황들, 그리고 그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간절히 기다렸던 그 무엇을 생각하면서 오늘 제2독서를 묵상하면 이런 약속들이 실제로 이루어진 실체를 보는 듯합니다. 바오로 사도와 초대 교회 신자들은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사실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굳게 믿었지요. 그런 확신과 흔들림 없는 신앙 속에서 그들은 하루하루를 ‘그 날이 바로 오늘’인 것처럼 살았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우리가 여러분 덕분에 우리의 하느님 앞에서 누리는 이 기쁨을 두고 하느님께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하겠습니까?”(1테살 3,9)라고 감동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이 서간의 집필 연대가 기원후 50-55년경 쯤이니 그래도 거의 2000년 전이네요. 그때의 신앙과 굳은 확신이 마치 금강석처럼 빛이 납니다. 우리가 이런 확신을 가져본 적이 있었던가요.

사도 바오로를 통하여 성령께서 하시는 생명력이 넘치는 말씀을 들으면서 지금 제대 앞에 놓인 대림환의 초들을 봅니다. 이 초에 하나하나 불을 붙이면 제일 처음 것은 예레미야 예언자가 갇혀있던 유다 왕궁의 경비대 안으로 또 다음 것은 루카복음의 예수님께로 그리고 세 번째는 아테네에서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사도 바오로의 책상으로 우리를 데려갈 것 같습니다. 남아 있은 초 하나는 바로 ‘지금 여기’에로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그래서 2006년 12월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들이 마지막 촛불의 무대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기서 무엇을 기다리십니까? 어떤 믿음과 확신으로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날을 기다리면서 살아가고 계십니까? 예레미야서처럼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습니까?

오늘 복음은 주님의 재림 못지않게 우리 개개인의 죽음도 준비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때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에게는 시간이 넉넉하다”는 생각입니다. 우리 모두 내일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이며 내일은 은총이요, 자비의 시간이고 하느님의 영역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을 망각할 정도로 찰나적인 세상사에 몰두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재림과 죽음의 시간은 무섭고 두려운 시간이 되겠지요.

조용히 타고 있는 대림환 촛불에서 극적인 기다림의 순간들이 일렁이며 지나갑니다. 이 시간이 지나고 때가 차면(갈라 4,4 참조) 기다리던 분이 오시겠지요.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불림을 받을 때가 언제인지는 몰라도 또 우리가 이렇게 모자라고 부족하게 살고 있어도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서 살아가는 우리의 기다림을 주님께서는 작게 평가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인생은 기다림 속에서 저물어간다고 누군가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기다림은 막연하고 모호한 것이 아니라 기쁨과 희망 속에서 그분의 오심을 준비하는 구체적이고 희망찬 기다림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어쩌면 일년 중에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때인지도 모를, 대림시기입니다. 그러나 이 기다림은 희생과 긴 인내를 요구한다는 점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구상 시인은 고백합니다. 그리고 권고합니다. “삶은 인내로구나. 삶은 긴 인내로구나. 삶은 길고 긴 인내로구나!

서울대교구 이기락 타대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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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이 성탄이다

"Everyday is Christmas!"(매일이 성탄이다!)

지난해 예수님 탄생지 베들레헴 성을 방문했을 때 벽에 써 있던 문구입니다. 이 말대로 예수님 탄생지 베들레헴은 매일이 성탄이었습니다. 방문하는 사람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예수님 탄생지가 표시된 곳에서 절을 하고 입을 맞추며 감격스러워 했고, 성지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대부분 순례객들은 마치 그 날에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신 것처럼 벅찬 감동으로 크리스마스 성가를 부르면서 성탄을 축하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마치 내 가슴에, 우리들 사이에 함께 현존하는 듯한 체험과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성탄절이 아니라면 12월25일은 극히 평범한 날일 수 있듯이 어떠한 마음으로 사느냐에 따라 우리는 매일을 예수님 현존을 체험하며 사는 성탄일로 만들 수 있습니다. 특히 대림 시기는 예수님 탄생을 과거의 사건이 아닌 현재의 사건으로 체험하기 위한 은총의 시기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은총의 이 대림 시기를 어떻게 준비하며 살아야 할까요? 지난 주일과 달라진 전례와 제의 색상, 대림환의 의미를 되새기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성당에는 대림초 4개를 담고 있는 대림환이 제대 앞에 놓였고, 제의 색상이 자색으로 바뀌었으며, 대영광송이 생략되었습니다. 각기 의미가 있지요. 대림초 4개는 예수님의 성탄을 맞기 위한 네 주일의 준비 기간을 의미합니다. 또한 제의색이 보라색으로 바뀌고, 대영광송이 생략되는 것은 사순 시기와 마찬가지로 회개와 정화의 때를 상징합니다. 대림 시기는 세상 사람들이 지내는 대로 흥청망청 먹고 마시며 송년회다, 망년회다 들떠서 휩쓸려 놀러 다니는 그런 시기가 아니라 나 자신을 정화하는 시기입니다.

오늘 복음 역시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4-36)고 말씀합니다. 대림 시기가 은총의 시기인 것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는, 깨어 기도하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당 홈페이지에 올랐던 글을 소개합니다.

어느 날, 한 부인이 가정생활을 비관하며 간절히 빌었습니다. "하느님! 빨리 천국에 가고 싶어요. 정말 힘들어요."

그때 갑자기 하느님이 나타나서 말씀하셨습니다. "살기 힘들지? 네 마음을 이해한다. 이제 소원을 들어줄 텐데 그 전에 몇가지 내 말대로 해보겠니?"

그 부인이 "예!"하자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집안이 지저분한 것 같은데 네가 죽은 후 마지막 정리를 잘 하고 갔다는 말을 듣도록 집 안 청소 좀 할래?"

그 후 며칠 동안 그녀는 열심히 집안 청소를 했습니다. 3일 후, 하느님이 다시 와서 말씀하셨지요. "얘야! 애들이 맘에 걸리지? 네가 죽은 후 애들이 엄마가 우리를 정말 사랑했다고 느끼게 3일 동안 최대한 사랑을 주어볼래?"

그 후 3일 동안 그녀는 애들을 사랑으로 품어주고 정성스럽게 요리를 만들어주었습니다. 다시 3일 후,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갈 때가 됐다. 마지막 부탁 하나 하자! 네 남편 때문에 상처 많이 받고 미웠지? 그래도 장례식 때 '참 좋은 아내였는데'라는 말이 나오게 3일 동안 남편에게 최대한 친절하게 대해줘 봐라."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천국에 빨리 가고 싶어 그녀는 3일 동안 최대한 남편에게 친절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다시 3일 후,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천국으로 가자! 그런데 그 전에 네 집을 한번 돌아보려무나!"

그래서 집을 돌아보니까 깨끗한 집에서 오랜만에 애들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고, 남편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까 천국으로 떠나고 싶지 않았고, 결혼 후 오랜만에 '내 집이 천국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인이 말했습니다. "하느님! 갑자기 이 행복이 어디서 왔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지난 9일 동안 네가 만든 거야!"

"정말이요? 그러면 이제부터 여기서 천국을 만들어가며 살아볼래요!"

그렇습니다. 지옥을 천국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 회개입니다. 나의 욕망과 이기심이 빚어낸 지옥 같은 상황을 하느님 말씀으로 정화하고 천국으로 변화시켜 가는 것, 이것이 회개이지요. 이렇게 회개의 삶을 살 때 우리는 성탄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고, 매일을 성탄절로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탄생을 준비하는 대림 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깨어 있는 대림절이 되도록 더욱 기도하고 노력합시다.

▶ 이기양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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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과 충만함

어느덧 대림절이 돌아왔습니다. 교회는 이 기간 동안 주님의 오심을 기다립니다. 기다림의 기간인 대림절은 오시는 주님을 잘 영접하기 위하여 자신을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모든 것이 충만하고 완성된 미래에 대한 기대로 말미암아 현재의 자신을 의미 있게 꾸미고자 하는 때인 것입니다. 앞날에 대한 희망은 이미 우리 현실을 뜻깊게 가꾸어가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다림보다는 조급함 속에서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같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누구나가 바쁘게 살아가는 분주한 상황 속에서는 기다림이란 매우 낯설고 불편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기다리는 것은 마치도 무의미하다고 생각되어질 수도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기다린다는 것이 비생산적으로 시간을 허비하는 것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바쁜 내가 남을 기다리게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내가 남을 기다리는 것은 참을 수 없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만큼 조급해졌고, 그만큼 정신적인 여유 없이 각박하게 살고 있습니다.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졌다고는 하나 급속히 변화해가는 세상에 빨리 적응하고자 하니 자신에 대한 반성과 숙고가 점점 더 부족해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가운데 어디론가 가야 하는 강박관념 속에서 살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세상은 매우 역동적으로 보이나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무의미한 삶의 반복인 듯 보입니다. 분주한 가운데 기다림을 허락하지 않는 우리는 마치도 화려한 겉모습 이면에 자리하고 있는 공허함 속에서 살고 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기다림 없이 바쁘고 급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기다림은 우리를 멈추게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하고, 현재의 위치를 파악하게 하며 나아가서 앞으로 나아갈 방향과 길을 살피게 합니다.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도록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충만하게 해주는 분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바로 이 분이 우리에게 오시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가득히 채워주려고 말입니다.

교회 전례주년의 첫 시기는 대림절입니다. 새해 서두에 그 해의 더 나은 삶을 위하여 새로운 각오를 하듯이 대림절에 신자들은 기다림의 각오를 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기다리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오시면 우리의 삶은 무의미에서 의미에로, 어두움에서 밝음에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변화됩니다. 그분의 오심은 우리의 삶을 과거 지향적으로 머물게 하지도, 현세적 집착에 머물게 하지도 않습니다. 그분의 오심은 우리로 하여금 좀 더 나은 미래를 희망하게 합니다. 희망을 가진 자는 자신을 잘 준비하고 가꿉니다. 그래서 기다리는 가운데 우리는 설레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 설렘은 현재의 우리에게 살아가는 힘을 선사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냥 오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그 어떠한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선물을 갖고 오십니다. 그것은 사랑으로 충만한 구원의 선물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빈곤을 풍요로움으로 채워주시고자 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난함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부유함으로 변화됩니다. 우리의 결함은 완전함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과거와 현재는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말미암아 더욱 풍요롭고 충만해집니다.

▶ 이규성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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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오신다면?

교회는 대림 제1주일과 함께 새로운 한 해의 전례주년을 시작합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예고하면서 오늘 복음은 대림절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주님의 성탄과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느 마을에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맨 처음 예수님을 본 어떤 자매님은 당황하여 사제관으로 달려갔습니다.
“신부님, 큰일 났어요. 예수님이 오셨어요! 저기 보세요. 지금 막 성당마당에 들어서시잖아요.”
본당 신부님은 깜짝 놀라 주교님에게 얼른 전화를 했습니다.
“주교님, 어떡하죠? 예수님이 우리 본당에 오셨는데….”
그러자 주교님께서는 “잠깐 기다리세요.” 하고는 교황청에 전화했습니다.
교황청에서 이렇게 대답을 했답니다. “바쁜 척 하시오!”

예수님의 오심을 우리가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하는지 또 어떻게 예수님을 맞아들여야 하는지 아직 준비되지 않은 교회와 우리들의 모습을 꼬집는 하나의 우스갯소리 입니다. 그런데 정말 예수님께서 오신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방금 이야기처럼 바쁜 척 그냥 모르는 척 지나가 버릴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사람의 아들이 다시 오실 날을 예고하시면서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고 선언하십니다. ‘속량’이란 몸값을 지급하고 노예나 포로에게 자유를 주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신앙의 관점에서 ‘속량’은 온갖 형태로 하느님 백성을 구속하거나 억압하는 것에서 우리 인간을 해방시켜 주는 하느님의 구원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다시 오시는 날은 ‘속량의 날’인 동시에 ‘심판의 날’임을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를 위해 준비하고 기다리는 모습을 오늘 복음에서 다음의 두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활하면서 근심 걱정이 전혀 없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근심 때문에 방탕해지고, 자포자기의 모습으로 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항상 희망으로 자리하시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늘 깨어 기도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앙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기도하는 삶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신앙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기도하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기도함으로써 주님과 함께할 수 있고 그분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기도하는 사람에게 주님께서는 우리의 근심 걱정을 위로해주고 일상의 어려움을 극복해 나갈 힘을 주십니다.

대림 시기는 우리가 구세주의 탄생과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이 대림 기간에 님께서 말씀하신 기다리는 삶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그 말씀을 실천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이 오신다면

서울대교구 고준석 토마스아퀴나스 신부
  |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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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영원을 향한 기도

혜화동 신학교 교정을 걷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신장투석을 마치고 휠체어에 앉아 신학교 언덕을 오르는 노사제(老司祭)를 뵈었습니다. 달려가 인사를 드리고 휠체어를 밀어드렸습니다. 그때까지 신부님을 돕던 직원에게 신부님은 “신부 휠체어는 신부가 미는 게 맞다.”고 하셨습니다. 원로 사목자들의 숙소인 지혜관으로 향하는 길은 나무가 무성했습니다. “역시 나무는 느티나무야!” 하시고는 젊은 날 학교에 나무 심던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한창 푸른느티 나무를 보며 사제이자 교육자로 사셨던 당신의 좋았던 시절을 그리셨을까요. 저는 담장 곁에 조금 쓸쓸히 서있는 작은 향나무가 신부님을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혜화동 성당의 삼종 소리를 들으며 신부님을 지혜관 식당에 모셔 드렸습니다. 헤어질 무렵 신부님은 이전 공동체에서몇 년을 함께 살던 제게 이름을 물으셨습니다.

위령성월의 끝자락에서 새로운 시작의 때, 대림 시기의 첫날을 맞은 오늘, 노사제를 생각합니다. 우리 인간의 존재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혼신의 힘을 다해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모든 분들께 시메온과 한나를 위로하셨던 하느님의 은총이 허락되기를 빕니다.(루카 2,25-39 참조)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는 ‘나에게는 시간이 넉넉하다’는 생각에 현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내일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미래는 하느님의 영역이며 덤으로 거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내일’은 은총이자 우리의 회개와 구원을 위한 하느님 자비의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이 바로 그날’이라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야 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루카 21,34)

인간적인 연약함을 매 순간 온몸으로 봉헌하며 하느님께 나아가는 노사제의 모습 속에서 조심스레 미래의 제 모습을 그려봅니다. 그리고는 우리 모두 함께 맞이할 ‘그날’을 위해 바오로 사도의 권고에 기대어 기도합니다. “우리의 모든 사랑을 주님께서 더욱 자라게 하시고 충만하게 하시며, 우리 마음에 힘을 북돋아 주시어, 우리 주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든 거룩한 백성과 함께 다시 오실 때, 우리 모두 하느님 우리 아버지 앞에 흠 없이 거룩한 사람으로 나설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1테살 3,12-13 참조)

주님의 성탄과 재림 사이를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의 삶이란 기다림이요, 완덕으로 나아가는 과정이자, 영원을 향한 기도입니다. 다시 대림 시기를 시작하며 꾸준한 기도와 선행으로 하느님을 향한 우리 사랑이 날로 자라고 더욱 충만해질 수 있도록 하느님의 은총을 청합니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

▥ 서울대교구 유환민 신부 - 2015년 11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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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기다리기는 하는 겁니까?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정규직에 취직하기를 기다립니까? 사업하느라고 진 빚에서 해방되기를 기다립니까? 암에서 치유되기를 원합니까? 가족이 오순도순 화목한 분위기에서 사는 날을 손꼽아 기다립니까? 남북이 하루빨리 평화 통일이 되기를 기다립니까?

오늘 복음에 나오는 표현을 보면 무섭습니다.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루카 21,25).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목숨을 걸고 지중해를 건너는 그 난민들을 봅니다. 그 해안가에 떠내려온 어린아이의 시체는 그 하나만이 아닙니다.

대기업에는 현금이 쌓여 있어서 골목 상권까지 밀고 들어오니 거기서 쫓겨나는 영세 상인들은 앞으로 어떻게 먹고살 수 있을까? 가족들과 함께 그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어린이들은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부터 사교육을 받기 시작합니다. 젊은이들이 엄청난 경쟁 속에서 학교를 어렵사리 졸업했지만 제대로 된 직장을 갖는 것이 하늘에 있는 별을 따기만큼 어렵습니다. 그래서 취직 시험을 계속해서 치면서 절망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부모의 도움이 없으면 결혼할 엄두도 못 냅니다.

컴퓨터와 공장 기계의 자동화와 유통 산업의 발달로 말미암아 온 세계 사람들이 무한 경쟁 속에 살아갑니다. 모두들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살아가거나 실의에 빠져있습니다.

40대에 명퇴 얘기도 나온 지 오랩니다. 이제는 100세 시대라고 하는데, 이런 여건에서 오래 사는 것은 저주받은 인생입니다. 모두들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심각하기 짝이 없는 중국 스모그에 한국에서는 모두들 닥쳐오는 겨울을 걱정하지만, 한국 사회 자체에서 만들어내는 환경 문제도 매우 심각합니다. 환경 문제 해결이 시급하다고 한쪽에서 열심히 외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장 먹고사는 일에만 열중하느라 앞날이 더욱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지구 온난화 문제는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해안가에 대도시가 몰려 있는데 얼마 안 가면 모두 물에 잠기고 많은 사람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생존의 위협을 심각하게 받습니다.

북한의 정치 체제는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된 지 오래된 일이지만, 한국의 민주화는 역행하고 있다는 의심이 강하게 들면서 앞날이 많이 걱정됩니다. 일본도 경제적으로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발전하지 못하고 있고, 동북아시아의 평화에 기여하지 못하는 실망스러운 상태입니다. 중국의 정치가 그들의 앞날을 가로막을 것이라는 의심을 많은 사람들이 합니다. 정치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더불어 잘 살 수 있어야 하는데, 정치가 사람들을 기만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한국 사회가 매우 가난했던 시절에 자살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우울증이라는 말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유행 독감처럼 많은 사람이 우울증으로 몹시 고통스러워합니다. 한국에 그토록 많은 자살하는 사람들 사이에 우리는 둘러싸여서 살고 있습니다.

2000년 전에 기록된 복음서에 나오는, 하늘과 땅과 바다에서 일어나는 그 무시무시한 장면은 오늘 생생하게 우리에게 현실로 다가와 있습니다. 지난 11월 13일 프랑스 파리 테러로 온 세상이 경악을 금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무관심 속에, 사실은 지난 4년 동안 시리아에서 25만 명이 죽었습니다.

21세기를 시작하면서 온 세계 사람들이 희망을 안고 있었지만, 15년이 지난 지금 모두들 희망이 아니라 절망하고 있습니다. 참 희망은 가능한 것일까요? 불가능하다면 자포자기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오히려 먼저 잘 판단하고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도대체 희망은 어떻게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는 것일까요? 우리 인간은 스스로 희망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 누군가가 인간에게 복을 갖다 주러 와야 합니다. 우주를 향해서 도전하는 우수한 인간, 자연 세계에서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인간은 구원을 갈망하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 서울대교구 주수욱 신부 - 2015년 11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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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바로 마지막 날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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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6학년이던 1962년, 담임 선생님께서는 수업 중에 늘 일간 신문의 중요 내용을 읽어 주셨습니다. 그해 10월 소련이 미국 본토를 겨냥해 쿠바에 핵미사일 기지 설치를 비밀리에 추진했고, 이를 포착한 미국과 소련 사이에 일촉즉발의 위기가 고조되던 때였습니다.

“지금 핵미사일을 실은 소련의 군함들이 쿠바로 향해 가고 있는데 해상 봉쇄령을 내린 미국 해군과 맞부딪혀서 오늘 밤에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지 모른단다.”

선생님의 말씀에 깜짝 놀라 방과 후에 십리 길이나 되는 집으로 한달음에 뛰어갔습니다.

“엄마, 큰일 났어요! 오늘 밤에 핵전쟁이 일어나서 지구가 멸망할지 모른대요.”

선생님께 들은 얘기를 전하자 집안 분위기는 심각해졌고 결국 식구들은 저녁기도를 바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때 어머님의 혼잣말이 들렸습니다.

“아니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고? 그래, 요비 말이 맞네! 오늘이 바로 마지막 날이야!”

다음날 새벽, 눈을 뜨자마자 밖으로 뛰어 나갔습니다. 밤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짙은 안개와 침묵이 흐르는 고향 마을 길을 홀로 걸으며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경이로움을 느꼈습니다.

인류 공멸의 위기 앞에서 미국과 소련이 극적으로 타협했다는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안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어머님의 ‘오늘이 바로 마지막 날이네!’라는 말은 성경에서 계시되는 하느님의 시간(Kairos)을 관통하고 있음을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더 절감하게 됩니다. 카이로스는 본래 ‘결정적인 것’, ‘본질적인 시점’을 뜻하는데 종말론적으로 마지막 때인 하느님에게 온전히 속한 ‘하느님의 시간’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시간’의 신앙적인 의미를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임의 날은 나날이 아닌 다만 ‘오늘!’, 그 오늘은 내일로 옮지도 아니하고, 어제 뒤에 이어지지도 않은 날이다. 임의 오늘은 곧 ‘영원!’”이라고 갈파하였습니다.(「고백록」 11권, 13장)

그런 면에서 교회의 전례력, 전례의 시간은 이 덧없는 인간의 세월 안에 길들여지기 쉬운 우리네 인생에 하느님의 영원한 시간이 개입해 계심을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대림 제1주일인 오늘은 전례력으로 새해를 시작하는 날입니다. 오늘이라는 시간을 허락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그리스도의 뜻에 더욱 맞갖은 삶을 살도록 다짐하는 기다림의 시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재림하실 때, 여러분이 하느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흠 없이 거룩한 사람으로 나설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1테살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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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대교구 구요비 주교 : 2018년 12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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