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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우리의 삶은 "대림"의 삶
조회수 | 2,441
작성일 | 06.11.29
오늘부터 대림시기가 시작된다. 대림이란 인류가 고통스러운 체험을 통하여 구원에 대한 열망으로 그리스도께서 정의와 평화를 주시는 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실 것을 준비하고 바라고 희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기다림은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셨던”(요한 1,14) 그 역사적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적으로 그분에 대한 새로운 체험을 통하여 그분이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된다. 그분은 이제 매순간 우리에게 오시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이 “대림”을 살아야 하고 그분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제1독서: 예레 33,14-16: 내가 다윗의 정통 왕손을 일으켜 주리라

제1독서의 주님의 선언은 다윗의 정통 후손에 대한 약속에 집중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당신 백성의 운명에 더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유다가 살 길이 열려 예루살렘에서 모두들 마음놓고 살게 되면”(16절) 그것이 바로 메시아의 공로일 것이다. 인류가 기다리는 메시아는 “다윗의 정통 왕손(싹)”(15절)으로 메마른 땅에서 생존의 희망인 생명의 “싹”이시다. 오직 하느님만이 이 메시아를 일으켜 주실 수 있고, 그분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며, 바로 이분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역사적으로 오신 분이시다. 그러나 그분의 사명, ‘정의와 평화’를 이룰 사명, 민족과 민족을, 국가와 국가를 하나로 일치시켜야 할 사명, 정신적 육체적 모든 악을 치유해야할 사명은 우리가 느끼듯이 성취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대림이란 신앙인의 본질적 차원인 동시에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이 세상을 구원하실 수 있는 메시아 그리스도는 현대를 살아가면서 제기되는 물질적인 문제로부터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수 있고, 모든 사람들에 대해 사랑과 헌신의 최고의 표현이신 분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 루가 21,25-28.34-36: 너희가 구원받을 때가 가까이 왔다

복음도 ‘기다림’의 자세를 알려주고자 한다. 이 ‘기다림’은 성탄을 넘어 마지막 때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께 대한 것이다. 오늘의 말씀은 공관복음에 나타나는 ‘종말론적 담화’의 내용이다. 복음에서는 여러 가지 징조들을 들어 신앙인들의 준비된 삶을 살도록 초대하고 있다(25-26절).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구름을 타고 권능을 떨치며 올 때”(27절), 세상은 새로워져, 낡은 세상은 가고, 악과 죽음의 세력은 더 이상 그 영광을 위협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세상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28절).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세상은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시지만, 인간의 거룩한 삶과 깨어 기다림으로 준비하고 기다려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협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일과 쓸데없는 세상 걱정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 날이 갑자기 닥쳐올지도 모른다. 조심하여라. 그날이 온 땅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덫처럼 들이닥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앞으로 닥쳐올 이 모든 일을 피하여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34-36절)라고 말씀하신다. 세상걱정에 휩싸인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반대되는 나의 인간적인 것에 매여 하느님께로 가기보다 죽음의 길로 가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그 날은 어느 때 올지는 알 수 없으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그 때는 진정으로 주님을 만나는 아름다운 순간이 될 것이다. 즉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만났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영광스러운 만남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깨어있는 삶을 언제나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하라고 하신다(36절). 그러므로 항상 “깨어있는 삶”이나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삶 전체가 계속적으로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의 삶’이 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 자체가 바로 대림의 삶인 것이다.

제2독서: 1데살 3,12-4,2: 하느님 앞에 거룩하고 흠없는 사람으로 살라

그러므로 주님을 잘 맞이하기 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바오로 사도는 2독서에서 말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사랑을 통하여 계속 우리에게 오시고 계시는 분이시며, 이제 우리의 매일의 삶을 통하여 잘 준비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그 준비는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쓸데없는 마지막 날에 대한 생각과 두려움 때문에 이 순간을 잃는다면 우리가 원하는 가장 중요한 것까지 앓을 수도 있다. 주님께서 오심을 잘 맞이하기 위해서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현재 이 순간에 의미를 부여하며, 그 안에서 그분을 만날 수 있는, 체험할 수 있는 삶이 계속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삶을 우리가 노력한다면 우리가 시간 안에 살면서도 시간을 초월하며 사는 것이다. 나의 이 순간의 삶은 바로 하느님 앞에 영원한 가치를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다리는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며, 이 세상을 새로운 하늘과 새 땅으로 만드시는 분이시다. 즉 참된 구원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러나 그분의 이러한 선물도 인간의 협력이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분을 기다리는 우리의 삶 역시 하느님 앞에 부끄럼 없이 설 수 있는 생활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의 이 삶은 구원을 체험하는 장이 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 지금 이 순간의 삶에서 사랑의 삶을 노력하여야 한다. 이 사랑의 삶이 곧 깨어있는 삶이며, 깨어있을 때 정의와 사랑을 실천할 수 있고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줄 수 있는 삶이 될 것이며, 이러한 삶이 사랑의 완성인 하느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해 줄 것이다. 오늘 대림 첫 주일에 진정으로 하느님과 나 그리고 이웃 앞에 새로운 다짐을 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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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세주 빨리 오사 어두움을 없이 하며 동정 마리아에서 탄생하옵소서

매년 대림 시기가 되면 부르는 성가 ‘구세주 빨리 오사’의 첫 부분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성가를 부르는 것처럼, 교회는 대림 시기를 통해 우리들이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맞을 준비를 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대림 시기는 가깝게는 예수님의 성탄을, 그리고 실제로는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때까지 깨어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다림은 4주가 지나면 끝이 납니다. 12월 25일이 되면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며 성탄 시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전례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지만, 세상이 축하하는 ‘크리스마스’라는 분위기에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동화되어 버린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구원 사업을 마치신 다음 하느님 아버지 곁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기셨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이 약속을 기억했기 때문에 항상 그분을 기다려왔습니다. 지금의 교회도 옛날 사도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주님께서 약속하신 그날을 끊임없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전례력은 날짜에 따라 시기가 바뀝니다. 그래서 대림 시기가 지나면 성탄 시기가 되고, 연중이 되고 사순이 되고 부활이 됩니다. 그러나 실제 우리들의 마음은 언제, 어느 때가 되어도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 시기’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세상의 여러 유혹 안에서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너희는 항상 깨어 기도하여라’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맞으려고 깨어있던 종들을 칭찬하셨습니다. 복음서의 말씀들이 자꾸 ‘회개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치는 이유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깨어 기다림’과 ‘회개’야말로 우리가 그분을 만나는데 가장 필요한 열쇠가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2천 년 전, 이스라엘 사람들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그분을 알아본 사람들은 아주 적었습니다. 지금의 우리들도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날이 왔을 때, 우리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분을 알아뵐 수 있을지 생각해봅시다.

▶ 김지훈(니콜라오) 신부
  |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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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 참 기쁨의 문턱

사랑하는 누군가를 기다려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기다림’은 한편으로는 간절히 사랑하는 사람을 아직 만나지 못했기에 느껴지는 안타까움과 애절함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제 곧 그토록 기다리던 이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로 인해 기쁨과 희망이 되기도 합니다. 기다리는 안타까움의 깊이가 깊을수록 만남의 기쁨은 커집니다. 이처럼 기다림에 따르는 상반된 두 감정의 상관관계는 메시아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하나의 깨달음을 줍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예레 33, 14).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약속의 날이 이제 곧 다가옵니다. 시련과 고통 속에서 약속의 날을 고대하던 이들에게, 그토록 기다리던 세상의 공정 과정의를 이룰 정의의 싹이 돋아날 그날이 온다는 하느님의 약속은 분명 기쁨이자 희망입니다. 그러나 그 만남의 기쁨이 더욱 커지기 위해서는 만남을 준비하는 기다림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자세와 마음가짐으로 그날을 준비해야 할까요?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루카 21, 28).

죄악에 억눌린이들은 고개를 들지 못합니다.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벌과 죄책감으로 허리를 펴지 못한 채 몸을 웅크리고 자신을 숨기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만남’이란 기쁨과 희망이 아닌또 하나의 불편함일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약속의 희망을 주시며 만남이 기쁨이 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를 깨어 있으라’고 초대해 주십니다. 이 초대는 바로 오늘 제2 독서의 바오로 사도의 말씀 이전하듯 주님이신 그분께서 우리에게 힘을 북돋아 주시어 우리 사랑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자라나 고충만하게 만들어, 이제 곧 오실 메시아 예수님 앞에서 흠없이 거룩한 사람으로 나설 수 있도록 합니다. 다시 말해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 오시는 그분을 바로 보며 만남의 기쁨을 온전히 누리도록 해주시는 것이 그분의 사랑입니다.

구세주의 탄생을 준비하는 대림 시기를 시작하는 오늘, 여러분 모두가 오늘 말씀이 전하는 진리를 따라 기다림의 합당한 준비를 통해 만남의 기쁨을 온전히 누릴 수 있게 되시기를 기도 하겠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온갖 죄악에 짓눌린 인류가 머리를 들어올리고, 희망으로 가득차 영광스럽게 다시오실 주님을 평화로 이 기다리게 하소서.”

수원교구 이상훈 신부
  |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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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영국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드가 쓴 시 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시가 있습니다.

황량하고 거친 산속에 살고 있는 새 한마리가 어느 날 들에 나갔다가 폭풍을 만났습니다. 그 새는 자기의 둥지를 떠나지 않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해서 그 산을 향해 날아가려고 발버둥 쳤습니다. 자기가 태어나 살고 있는 산을 떠나면 죽을 만 같아서 안간힘을 썼으나 그것은 허사였습니다. 폭풍을 이기고 날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그 새는 폭풍이 부는 대로 자기의 몸을 맡기고 그 방향으로 날기 시작했습니다. 강한 폭풍을 따라 한참 날아갔습니다. 드디어 폭풍도 약해졌습니다. 그런데 그 새의 눈앞에는 푸른 초장과 멋진 수풀의 아름다운 산이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과거에 자기가 살던 거친 수풀의 산과는 비교가 안 되는 훌륭한 수풀과 산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대림 제1주일 전례력으로 한 해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읽어보면 세상의 종말에 관한 내용입니다. 세상 종말이 어떻게 한 해의 시작과 어울릴 수 있는 복음이 될까요?

사실 하느님은 우리를 새로운 땅으로 초대하실 때, ‘고난의 역풍’을 이용하십니다. 왜냐하면 이전 것에 질리고 싫증나지 않으면 새로운 것을 좀처럼 찾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윌리엄 워즈워드의 시에서의 그 새도 이겨내기 힘든 역풍이 아니었다면 그 황량한 땅이 가장 좋은 것인 줄 알고 결코 거기를 떠나지 않으려 했을 것입니다. 그 역풍에 몸을 맡기면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1959년에 세상을 떠난 우장춘 박사는 우리나라의 국보일 뿐 아니라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학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렸을 때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는 고아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일본 사람들이 사는 일본 동경의 고아원에서 자라나야 했습니다. 일본 아이들은 이 불쌍하고 나이 어린 우장춘 소년을 마구 못살게 굴었습니다.

그러나 이 소년은 자기책상 앞에 밟히면서라도 「피어나는 민들레같이」라고 써 붙이어 마치 자기를 일본인들이 자꾸 짓밟아주는 민들레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민들레가 반드시 피어오르듯 자기도 꼭 성공할 날이 있을 것이라 믿고 노력하였습니다. 이런 큰 뜻을 가지고 자라난 우장춘 소년은 세계적인 농학박사가 되고야 말았습니다.

어쩌면 내가 세상에 짓밟히고 있다고 느낄 때, 그 때가 국경을 넘어야 할 때이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 때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 싫증이 나야 더 나은 세상으로 발걸음을 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세상에 속해있을 때는 사제가 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사실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저를 부르시고 계셨음을 지금은 알지만, 살아오면서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결혼하고 돈 벌고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를 세상 밖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던 것이 ‘하느님이시오,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란 그리스도의 생애를 담은 10권짜리 책입니다. 그것을 5년 동안 읽고 났더니 복학해서 다시 공부를 시작했는데, 더 이상 강의를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저를 역겹게 만들었습니다. 경영학을 했는데 이전과는 다르게 더 이상 돈 때문에 좌지우지 되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 때서야 땅에서 눈을 떼고 하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저를 부르시고 계신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들으려 하지 않았던 바로 그 부르심이었습니다.

오늘 저희 성당에서는 개신교 목사님, 광주지역 노회장까지 하시다가 천주교로 개종하신 김재중 요셉 형제님의 대림피정 강의가 있습니다. 그 분이 젊으셨을 때 최연소 노회장(천주교로 치면 주교님과 비슷한 위치라고 합니다)을 하시며 박정희 대통령보다 연봉이 높아서 당시 1억 원을 넘게 받았다고 합니다.

그분이 성모님을 그렇게 싫어하다가 성모님에게 오히려 한 방 맞으셔서 그 성모님을 미워하게 만들었던 개신교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역풍은 대단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고 개신교에서는 개종을 하자 모든 돈을 다 끊어버려서 몇 년 동안 거지처럼 사셔야 했고 굶는 날도 허다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마리아론을 전공한 저까지도 배울 것이 많을 정도로 성모님에 대한 박사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천주교 신학교에서도 마리아론이 사라져가는 이때에 여러 지역을 다니시며 많은 좋은 강의로 성모님에 대한 신심을 고취시키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태어날 때 그 기쁜 소식을 천사들이 알렸습니다. 천사들이 하늘에서 우렁찬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 노래를 들은 사람들은 고작 목동들 몇 명뿐이었습니다. 왜 베들레헴에 있었던 수많은 사람들은 그 찬미의 노래를 듣지 못했을까요? 그들은 세상에 심취해 있어서 눈을 하늘로 들어 올릴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마냥 세상이 재미있었던 것입니다. 학생이 창문 밖을 보며 딴 생각을 하면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혹은 마치 구걸하는 장님이 동전 바구니를 들고 지하철 안을 돌아다니는데 모두가 스마트폰에 집중해 머리를 숙이고 그 사람에겐 관심을 주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또 세상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하느님은 하늘에 별을 뜨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 별을 본 사람들은 동방박사들 세 명밖에는 없었습니다. 왜 수많은 사람들이 그 밝고 새로운 별을 보지 못했을까요? 하늘을 향해 머리를 들 여유도 없고 또 관심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이 세상에 싫증을 느끼고 새로운 무언가를 찾으려 했던 그 세 명만이 하늘을 바라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행복했던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아기 예수님을 경배했던 이들이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있을까요? 그것은 김재중 요셉 형제님에게 물어보아도 똑같을 것입니다. 그런 역경을 통해 새로운 세상으로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은 절대 자신이 전에 살던 곳을 그리워하지 않습니다. 아마 요셉 형제님도 굶어죽으면 죽었지 다시 이전으로는 돌아가기를 원치 않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이 행복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도 신학교 들어온 이후로 다시 세상을 바라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국경을 넘는 고통은 정말 쉽지는 않았습니다.

어느 대학 교수가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남편은 알코올 중독자로 가구를 내다 팔아 술을 마시고, 술 마실 돈이 없으면 아내를 두들겨 팬다. 거기다가 그 아내는 폐결핵에 걸려 콜록거린다. 그들은 셋방살이 형편이다. 그런데 아내가 임신을 했다. 여러분에게 묻겠는데, 이 임신된 태아를 어떻게 해야 할까?”
학생 하나가 재빠르게 손을 들고 일어서서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낙태시켜야 합니다.”
대학 교수가 말했습니다.
“자네는 방금 베토벤을 죽였네!”
베토벤을 낳은 어머니는 베토벤이 어렸을 때 지병인 폐결핵으로 죽었습니다. 그는 11살 때부터 극장을 돌며 구걸 예술을 해야만 했습니다. 거기다가 그는 서른 살 때 음악가의 생명인 귀를 잃었습니다. 이런 역경 덕분에 그의 음악은 강한 주제를 지니고 있으며 대부분 끝부분에 가서는 환희를 노래합니다. 고통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고백대로 “괴로움을 뚫고 나가서 기쁨을 발견”한 것입니다.

베토벤의 전기를 읽어보면 그는 나이가 들고 성공할수록 깊은 신앙의 세계에 빠졌다고 합니다. 신앙이 그를 모든 파괴적이고 체념적인 불행의 조건에서 구출하여 높은 경지로 인도한 것이다. 고난은 불행과 동의어가 아닙니다. 오히려 고난은 신앙과 만날 때 가치와 행복의 어머니가 됩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역경을 통해 (이전과 같으면서도) 또 다른 새로운 형태의 육체를 지니고 부활하셨습니다. 그 순결한 몸으로 아버지께 가실 수 있으셨습니다. 십자가가 바로 또 다른 세상으로 넘어가는 국경선과 같은 것이었던 것입니다.

베토벤이 자신의 장엄미사곡의 악보에 남긴 메모는 그가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기도’라는 이름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희망을 잃지 않았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우리 또한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허리를 펴고 항상 머리를 하늘로 향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봅시다.

“마음으로부터 나와서 마음으로 전달되어야 한다. 신은 모든 것을 지배한다. 신은 결코 나를 버리지 않았다. 내적인 평화와 외적인 평화를 위하여 기도를 드려야 한다. 기도! 기도! 기도를 드려야만 한다.”

수원교구 전삼용 신부
  |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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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대림절을 시작하며

아직 해도 저물지 않은 것 같은데 새로운 해가 떠오릅니다. 지난 일도 미처 마무리하지 못했는데 새로운 일을 시작하라 하십니다. 마음 한구석이 여전히 부산스러운데 마음을 새로이 다잡으라 하십니다. 그냥 하던 일 놓고서 따라야 할는지 하던 일 마치고 따라야 할는지 엉거주춤 어색하게 달력을 바라봅니다.

‘대림 제1주일’

“이런! 이런! 어느새 성탄인가?” 연말이 다가오고 있음을 선명하게 알려주는 눈에 띄는 표지들이하나둘 등장합니다. 발 빠른 이들은 벌써 성탄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습니다. 얼어붙은 경기에 마음만이라도 훈훈하기를 희망하는 소박한 사람들이 조심스레 지갑을 열고 소중한 지인들과 나눌 작은 선물을 준비합니다. 평화로운 연말이 되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작은 선물 꾸러미 안으로 살며시 들어와 우리 가운데 오실 준비를 하십니다.

대림초 하나가 불을 밝혔습니다. 신부님들은 자색제의로 갈아입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잘 맞이하기 위해서 깨어 기도해야 한다고 힘주어 강조하십니다. 성가도, 제대도, 강론도 그저 낯설게만 느껴집니다. ‘뭐지? 벌써 대림절이야?’ ‘아~, 또 판공성사야?’ 아직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들이닥친 손님 때문에 당황한 듯이 짜증이 확 밀려옵니다. 부끄럽기도 하고, 죄송하기도 하고, 막막하기도 하고…….

경건하게 대림 노래를 부르며 주님의 성탄을 잘 준비하는 사람들을 보면 존경스럽습니다. 나는 뭐지? 성당에서는 벌써 대림환을 만들어서 사가라고 손짓합니다. 사야하나? 하지만 작년에 사놓은 대림환이 여전히 건재하게 집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라 황망히 그 앞을 지나갑니다. 다시 촛불을 밝히자니 쑥스럽기도 하고, 그렇다고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성탄을 맞이하자니 그건 아닌 것 같고…. 갈등입니다.

그런데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 그렇습니다. 다들 화들짝 놀란 가슴으로 불현듯 찾아온 대림절을 어색하게 맞이합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대림절이 4주간이나 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은 시작이라 어색하고 당황스럽지만 다음 주가 되면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대림환의 두 번째 초가 밝혀지는 것을 바라볼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새 나의 마음도 주님의 성탄을 맞이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하겠다는 다짐으로 기울어져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대림절을 어수선하게 촛불 하나 밝혀 들고 시작합니다.

▥ 수원교구 이근덕 헨리코 신부 - 2015년 11월 29일
  |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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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의 오심이 곧 나의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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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는 기사에 관한 영웅소설을 하도 많은 읽어서 자신이 돈키호테라는 이름을 지닌 기사라고 믿어버린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은 시골 주막 처녀를 공주로 여기고 그녀를 위해 악의 무리를 무찌르겠다고 풍차와 싸웁니다. 그리고 자신을 자랑스러워합니다.

그런데 그에게 진실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바로 거울의 기사입니다.거울은 자신을 보게 만드는 도구입니다. 기사라는 것은 없고 그런 제도도 3백 년 전에나 있었던 것이라는 진실을 아는 것은 돈키호테에게 죽음과 같은 고통입니다.

그래서 거울의 기사와 싸웁니다. 하지만 결국 그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자 돈키호테는 정말 침대에서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됩니다. 빛이 오면 어둠은 종말을 맞고, 진실이 오면 거짓은 죽습니다.

오늘은 전례력으로 한 해의 시작인 대림 1주일입니다.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한 시기이지만 복음말씀은 세상 종말에 대해 설명합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세상은 그 닥쳐오는 예감 때문에 두려움에 까무러칠 것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을 피하기 위해 방탕과 만취와 세상 근심으로 무뎌지지 않게 하라고 충고합니다. 깨어 있으며 그분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세상 종말을 맞는 이들만이 아닌 우리 모두에게 해당합니다. 우리 각자도 종말의 두려움을 넘어서지 못하면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습니다. 내가 믿고 있었던 모든 것이 허물어질 때 비로소 진리를 만나게 됩니다.

지금까지 우리 모두가 믿고 있었던 것들은 거짓이었습니다. 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진리가 오시는데 이미 세상에 진리가 있었다면 그분은 굳이 오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그분은 진리로 오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믿고 있었던 모든 것은 거짓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고 있었던 것이 거짓으로 드러난다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일까요? 그리고 그 고통을 감수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진리를 만나지 못하게 됩니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성(城)’은 진리를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계속 만나야 할 분을 만나지 못하고 헤매는 한 주인공을 소개합니다.

K는 측량기사입니다. 그리고 한 성주인 백작으로부터 초청을 받고 성으로 향합니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K는 밤늦은 시각에 도착했다. 마을은 깊이 눈 속에 파묻혀 있었다. 성이 있는 산은 안개와 어둠에 둘러싸여 있어서 전혀 보이지 않았고, 커다란 성이 있음을 알려주는 아주 희미한 불빛조차도 눈에 띄지 않았다. K는 국도에서 마을로 통하는 나무다리 위에 서서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허공 속을 한참 쳐다보았다.”

그가 숙소를 찾아 여관으로 들어가는데 성의 집사 아들이라는 사람에게 이상한 얘기를 듣습니다.

“이 마을은 성의 영지입니다. 여기서 살거나 묵는 사람은 말하자면 성안에서 살거나 숙박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말은 측량기사로서의 자존심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입니다.

‘성을 찾아 헤매고 있는데 이미 성 안에 들어와 있다니.’

분명 이들이 착각하는 것이라 여깁니다. 사실 측량기사 K는 안개와 어둠 때문에 자신이 성문을 통과한 것을 모를 뿐이지 실제로 성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다음날 K는 백작을 만나기 위해 성을 찾아 떠납니다.

“그는 다시 앞으로 걸어갔지만, 길은 길게 뻗어 있었다. 도로, 즉 마을의 큰길은 성이 잇는 산으로 나 있지 않았다. 성이 있는 산에 가까이 다가가는 듯하다가, 마치 일부러 그런 듯 구부러져버렸다. 성에서 멀어지는 것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가까워지는 것도 아니었다.K는 이 길이 결국에는 성으로 접어들 거라는 기대를 계속 버리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 기대나 예상이 무너지는 것을 참아내지 못합니다. 지금까지의 자신의 믿음과 선택이 틀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을 자괴감으로 빠뜨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그 교만함이 참으로 자신을 자괴감으로 빠뜨리는 것입니다. K는 결국 그 성에 정착하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죽게 되었을 때 성에 머물 수 있는 허락이 떨어집니다.

진리 앞에서 우리도 죽어야합니다. 내가 믿던 것이 아니라 내가 믿던 것과 반대임을 받아들이는 것이 죽음입니다. 그 죽음을 거부한다면 진리이신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어떤 모르는 분과 우연히 대화를 조금 나누게 되었습니다. 제가 사제라고 하니까, 천주교는 마리아를 믿는 종교가 아니냐고 조심스레 말합니다. 이전에 개신교 신자였던 것입니다. 저는 아니라고 해 주었습니다.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설명해주었습니다. 그것은 받아들이는 눈치였습니다.

이어 마음이 조금 열렸는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그래도 자신의 아내는 외도를 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친구와 오랜 시간 외도를 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둘은 태연하게 자신을 대하고 있었고 이에 분노가 타올라 살인까지 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이혼하여 살며 자녀가 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쉽지 않겠지만 그것은 실수이고 하실 수 있으면 자녀를 위해서라도 용서를 하려고 노력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말을 하고 싶었고 하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분이 먼저 누군가가 그런 말을 했었다고 하며 그런 말을 한 사람을 미친 사람 취급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려던 말을 접고 고개를 끄덕여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아이는 홀어머니 밑에서 커야하고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온전한 모습으로 성장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어쩌면 그 아이도 결혼해서 이런 과정을 또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혼하여 사는 것이 당연하고 그 분노를 삭이게 만드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원수까지도 용서해야 한다는 말은 그 사람에게 해 줄 수 없었습니다.

진리는 자신이 믿는 것이 진리가 아닐 수 있다는 겸손함이 스며들 때 만날 수 있습니다.이것이 자신의 종말입니다. 주님은 나에게 종말을 주시기 위해 오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심판관으로 오실 때도 그러하겠지만 우리가 개인적으로 주님을 만날 때도 이런 자기 허물어짐의 경험을 꼭 겪게 됩니다.

배추는 다섯 번을 죽어야(밭에서 뽑힐 때, 칼로 쪼갤 때, 소금에 절일 때, 고추와 젓갈로 버무릴 때, 장독에서 발효될 때) 맛난 김치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도 어쩌면 배추가 받아들이길 원치 않는 진리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리를 만나면 자신은 죽지만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게 됩니다.

내가 믿고 있는 것이 행복인지 알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고통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참 진리는 나를 죽이게 만듭니다.내가 믿는 돈, 쾌락, 교만을 죽이게 만듭니다. 그것들에 믿음을 계속 둘 때 아기 예수님으로 태어나셔서 가난하고, 겸손하고, 정결하게 구유 위에 양식이 되기 위해 놓이신 예수님을 만나기는 불가능합니다.

내가 믿고 쌓던 행복의 성을 모두 허물어야합니다. 그래야 자신이 하느님의 성 안에 이미 있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분은 나를 죽이러 오십니다. 내가 믿는 행복을 죽이러 오시는 것입니다.

나를 죽여주시는 것이 그분이 주실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나라는 거짓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오시는 날이 나의 종말입니다. 내가 종말을 맞지 않았으면 아직 그분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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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교구 전삼용 신부 : 2018년 12월 2일
  | 12.02
456 11.6%
언제나 그분을 맞을 준비를 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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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대림시기가 시작된다. 대림이란 인류가 고통스러운 체험을 통하여 구원에 대한 열망으로 그리스도께서 정의와 평화를 주시는 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실 것을 준비하고 바라고 희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기다림은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셨던”(요한 1,14) 그 역사적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적으로 그분에 대한 새로운 체험을 통하여 그분이 영광중에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된다. 그분은 이제 매순간 우리에게 오시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이 “대림”을 살아야 하고 그분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제1독서: 예레 33,14-16: 내가 다윗의 정통 왕손을 일으켜 주리라

주님의 선언은 다윗의 정통 후손에 대한 약속에 집중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당신 백성의 운명에 더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유다가 구원을 받고 예루살렘이 안전하게 살게”(16절) 되면 그것이 바로 메시아의 공로일 것이다.

인류가 기다리는 메시아는 “다윗의 정통 왕손(싹)”(15절)으로 메마른 땅에서 생존의 희망인 생명의 “싹”이시다. 오직 하느님만이 이 메시아를 일으켜 주실 수 있고, 그분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며, 바로 이분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역사적으로 오신 분이시다. 그러나 그분의 사명, ‘정의와 평화’를 이룰 사명, 민족과 민족을, 국가와 국가를 하나로 일치시켜야 할 사명, 정신적 육체적 모든 악을 치유해야할 사명은 우리가 느끼듯이 성취되어야 한다. 그래서 대림이란 신앙인의 본질적 차원인 동시에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이 세상을 구원하실 수 있는 메시아 그리스도는 현대를 살아가면서 제기되는 물질적인 문제로부터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수 있고, 모든 사람들에 대해 사랑과 헌신의 최고의 표현이신 분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 루카 21,25-28.34-36: 너희가 구원받을 때가 가까이 왔다

복음도 ‘기다림’의 자세를 알려주고자 한다. 이 ‘기다림’은 성탄을 넘어 마지막 때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께 대한 것이다. 오늘의 말씀은 공관복음에 나타나는 ‘종말론적 담화’의 내용이다. 복음에서는 여러 가지 징조들을 들어 신앙인들의 준비된 삶을 살도록 초대하고 있다(25-26절).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27절) 이 때 세상은 새로워져, 낡은 세상은 가고, 악과 죽음의 세력은 더 이상 그 영광을 위협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세상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28절).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세상은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시지만, 인간의 거룩한 삶과 깨어 기다림으로 준비하고 기다려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협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34-36절)라고 말씀하신다. 세상걱정에 휩싸인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반대되는 나의 인간적인 것에 매여 하느님께로 가기보다 죽음의 길로 가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그 날은 어느 때 올지는 알 수 없으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그 때는 진정으로 주님을 만나는 아름다운 순간이 될 것이다. 즉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만났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영광스러운 만남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깨어있는 삶을 언제나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하라고 하신다(36절). 그러므로 항상 “깨어있는 삶”이나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삶 전체가 계속적으로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의 삶’이 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 자체가 바로 대림의 삶인 것이다.

제2독서: 1데살 3,12-4,2: 하느님 앞에 거룩하고 흠없는 사람으로 살라

그러므로 주님을 잘 맞이하기 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바오로 사도는 2독서에서 말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사랑을 통하여 계속 우리에게 오시고 계시는 분이시며, 이제 우리의 매일의 삶을 통하여 잘 준비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그 준비는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쓸데없는 마지막 날에 대한 생각과 두려움 때문에 이 순간을 잃는다면 우리가 원하는 가장 중요한 것까지 앓을 수도 있다.

주님께서 오심을 잘 맞이하기 위해서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현재 이 순간에 의미를 부여하며, 그 안에서 그분을 만날 수 있는, 체험할 수 있는 삶이 계속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삶을 우리가 노력한다면 우리가 시간 안에 살면서도 시간을 초월하며 사는 것이다. 나의 이 순간의 삶은 바로 하느님 앞에 영원한 가치를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다리는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며, 이 세상을 새로운 하늘과 새 땅으로 만드시는 분이시다. 즉 참된 구원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러나 그분의 이러한 선물도 인간의 협력이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분을 기다리는 우리의 삶 역시 하느님 앞에 부끄럼 없이 설 수 있는 생활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의 이 삶은 구원을 체험하는 장이 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 지금 이 순간의 삶에서 사랑의 삶을 노력하여야 한다. 이 사랑의 삶이 곧 깨어있는 삶이며, 깨어있을 때 정의와 사랑을 실천할 수 있고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줄 수 있는 삶이 될 것이며, 이러한 삶이 사랑의 완성인 하느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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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 2018년 12월 2일
  |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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